모래 호수

2014.08.25 06:22

최문항 조회 수:745 추천:14

단편소설


모래 호수



최 문 항
“애리조나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선인장! 그랜드 캐년!”
“또”
“애리조나 카우보이...”
칼스바드 동굴에 수백만 마리의 박쥐를 보러 가는 관광버스 안에서 안내원이 금 비누를 상품으로 걸고 낸 퀴즈다. 달리는 버스에서 지루함을 달래주려고 관광안내자가 우스갯소리를 끝없이 늘어놓는다. 애리조나 투산을 출발한 버스는 10번 프리웨이를 타고 동쪽으로 내달았다. 사방이 지평선인 광활한 평야를 지나 어느덧 뉴멕시코 주 경계를 넘어온지도 오래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한진 컨테이너를 싣고 가는 긴 화물열차와 나란히 몇 시간을 함께 달렸다. 25번 프리웨이를 바꿔 타고 언덕을 넘어서니 라스크루시스라는 작은 마을이 나왔다. 화장실도 다녀오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 우리 일행은 길을 재촉하여 70번 국도로 들어섰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가 속력을 줄이고 어느 검문소 앞에 멈추어 섰다. 검은 안경을 쓴 M.P가 올라와서 거수경례를 하는 것을 보면서 옛날 전방에서 꼬불거리는 산길을 돌아내려 와 춘천 어귀에 도달하면 헌병이 버스에 올라와서 절도있게 거수경례를 하면서‘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하고는 눈을 번뜩이면서 휘젓고 다니던 것이 생각났다. 이곳이 그 유명한 화이트 샌드 미사일 시험장이라고 했다. 허연 수염을 품위 있게 기른 정 선생이 옛날에 군에 있을 때 이 근처에 와서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면서 말문을 열었다. 바로 뒷좌석에 앉은 미스터 박이‘그러시면 공군에 계셨습니까?’하면서 말을 거들고 나섰다.
“아니 육군 방공사령부 소속이었는데 그저 6개월 정도 여기 와서 기웃거리고 갔지 뭘”한다.
“저는 강원도 산골 DMZ에서 근무했습니다.” 나도 그들 대화 속에 끼어들었다.
“강원도라……. 그러면 3군단이었겠군, 몇 사단이었나?”
“00사단 백두산 호랑이라고 구호를‘백호’라고 했었죠.”
“아니 그게 몇 년도였었나? 내가 1968년도에 00연대장을 지냈는데.” 내가 달리는 차 안에서 벌떡 일어나 큰 소리를 지르면서 거수경례를 했다.
“백호”
반은 졸고 또 한가롭게 창밖을 내다보며 옆 사람과 소곤소곤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우리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00연대면 제가 근무했던 부대였는데요.”
“그랬으면 고생 많이 했겠군그래, 내가 철책선 작업 준비를 다해 놓고 종합전투사령부 참모장으로 옮겨 갔거든. 그때 군단 참모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철책선을 순찰 돌겠다고 해서 그 155마일이 넘는 산골짜기에다가 경부고속도로 건설할 때보다 더 많은 인원을 투입했었으니 말이야.”
“제가 바로 그곳에서 소대장 겸 작업반장 노릇을 했습니다.”
“초급장교로 거칠고 힘든 일을 잘 감당해 냈으면 사회 나와서도 큰 도움이 됐겠군그래, 지금은 무슨 일을 하고 있나?”
“전역하고 일찌감치 미국으로 들어왔습니다. 이것저것 다해 봤는데 그래도 지금은 전공을 살려서 건축설계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버스는 검문소를 통과하고도 한참을 더 달려 흰 모래 언덕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두 시간 정도 머물겠습니다. 사진도 찍고 모래찜질도 해 보십시오. 한 가지 주의할 일은 너무 멀리 가시면 길을 잃어버릴 수가 있으니 언제나 지도와 물은 꼭 가지고 다녀야 합니다. 괜히 뙤약볕에 오래 서 계시다가 일사병에 걸리면 정말 고생하십니다.”
안내자가 길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오랜 시간 버스 안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하얀 눈을 제설차가 길가로 치워 놓는 것처럼 주차장 근처에는 흰 모래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여기저기 햇볕을 피할 수 있게 바퀴 빠진 역마차 모양을 한 벤치들이 띄엄띄엄 서 있고 마치 여인의 나신이 누워있는 것 같은 능선을 따라 모래들이 미세한 동남풍에 사르르 쓸려갔다. 까마득히 싼 안드레 산맥이 흰 모래가 반사된 것 같은 구름을 머리에 이고 서 있었다. 사방이 흰색이어서 그런지 벌써 눈앞이 현란해지는 것이 신비의 세계로 곧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우리는 대여섯 명씩 그룹 지어 사방으로 흩어져서 언덕을 오르내리며 사진도 찍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서 맑은 공기를 실컷 들여 마셨다.
“연대장님은 어느 쪽으로 가보시겠습니까?”
나는 마치 옛날 상사를 대하듯 흰 수염을 휘날리고 있는 정 영감을 연대장이라고 불러줬다.
“아니 연대장은 뭐….”
정 영감은 싫지 않은지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를 따라왔다.
“내가 떠난 연대에서 소대장을 지냈다누만. 이번 여행은 이 젊은이만 쫓아다니면 되겠어!”
정 영감은 우쭐거리면서 부인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내와 정 영감 부인도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앞사람들을 따라 흰 모래 언덕을 오르내리며 한참을 걸었다. 저쪽 언덕 위에서 두 청년이 큰 배낭을 지고 내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모래사막에서 숙영하고 돌아가는 듯했다. 나는 가까이 다가온 그들에게 루세로 호수까지는 얼마나 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한참 올라가야 하는데 아무런 준비 없이는 좀 힘들 텐데요.”
얼굴에 온통 노란 수염이 돋아난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이 말했다.
“어차피 야영하지 않을 것이면 물이나 충분히 가지고 이 길만 죽 따라 올라가 보세요, 평지나 다름없어서 별로 힘들지 않을 겁니다.”
옆에 있던 젊은 친구는 입구까지만 갔다 오려면 얼마 안 걸린다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젊은이와 나이 든 사람이 서로 다른 대답을 했다. 지도에 표시된 호수는 좀 먼듯했으나 여기까지 왔으니 꼭 가보고 싶었다.
“연대장님 저희는 호수까지 올라가 보고 오겠습니다.”
이쯤에서 노부부를 떼어놓고 우리 둘만 빠른 걸음으로 호수까지 갔다 올 생각으로 말했다. 정 영감이 잠시 부인과 의논을 하더니 우리 쪽으로 뛰어왔다.
“여편네는 내려보냈어! 여기까지 왔는데 나도 쫓아가야지!”
“우리는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가서 사진 한두 장 찍고 내려올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글쎄 내 걱정은 말래도 그러네. 이래 봬도 왕년에 유격훈련까지 받은 사람이야!”
정 영감은 무슨 대단한 결심이나 한 듯이 우리를 바짝 쫓아왔다. 벌써 기온은 화씨 110도를 넘나들고 바람 한 점 없는 사막인데 70을 한참 넘긴 노인이 호수까지 가기에는 좀 무리인 것 같았다. 흰 석회 모래 위를 미끄러지면서 걷는 것도 힘들었고 사방이 온통 하얀색뿐이어서 방향을 찾기도 어려웠다. 먼저 지나간 사람들이 남기고 간 발자국만 따라서 길을 재촉했다. 한두 발씩 뒤로 쳐지던 정 영감이 유카나무(Soap tree Yucca)둥지그늘 밑에 주저앉았다. 가늘고 긴 줄기 끝에 꽃을 피우고 있는 억새풀 같은 것이 어떻게 메마른 모래에 뿌리를 내렸을까? 얼마나 깊은 데까지 뿌리를 내렸는지는 몰라도 거센 바람에도 넘어지지 않고 풀잎을 밀어 올려서 마치 정글 속을 헤치고 다니는 아프리카 토인 머리 모양을 한 풀 무더기가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나는 되돌아서서 정 영감이 앉아있는 그늘로 돌아왔다.
“영감님 인제 그만 내려가시지요, 날씨가 보통 더운 게 아닌 데요!”
“겨우 30분 정도 쫓아왔는데 이렇게 힘이 드는구먼!”
정 영감은 무엇에 홀린 듯한 눈길로 앞에 펼쳐진 모래 언덕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모래밭을 걷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네요!”
“내가 왜 자네를 따라나섰는지 아나? 혹시 그 호숫가에 가면 옛날 강원도 산골 내 작전지역 안에 있던 청석 동굴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따라나섰던 걸세! 아침에 들렸던 안내소에서 보여준 필름에 분명히 청석 동굴이 있었으니까!”
“청석 동굴이요?”
“청석 동굴만 찾을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젊음을 불사르던 옛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고 청석골에 들어서는 순간 내 젊음이 돌아올 것 같아서 말이야!”
정 영감은 옛 생각에 젖어서 가늘게 실눈을 뜨고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대장님 오늘은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습니다. 청석 동굴은 다음 기회에 단단히 준비를 갖추어서 다시 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정 영감이 원망하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힘없이 말을 이었다.
“괜히 내가 망상에 사로잡혔었나? 미안허이. 이젠 늙어서 별생각을 다 해 본 거야! 여기서 조금 쉬었다가 온 길 따라 내려갈 테니 내 염려 말고 자네나 어서 가 보게, 부인이 기다리겠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통통하게 살이 오른 흰색 도마뱀 한 마리가 정 영감 쪽으로 다가왔다. 삼각형 머리 위에 또 하나의 번뜩이는 눈을 가진 세눈박이“투아타라”새끼다, 놈이 정 영감 발밑 모래를 헤집고 땅속으로 사라졌다. 정 영감이 허리를 꾸부리고 앞으로 나서더니 모래를 헤치면서“투아타라”를 찾고 있었다.
“정말 버스까지 찾아 내려가실 수 있겠어요? 지금 올라온 길로만 내려가셔야지 혹시 지름길로 간다고 길을 벗어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제가 마시던 물이지만 혹시 필요할지 모르니 갖고 내려가세요.”
정 영감은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사라져버린 도마뱀을 찾느라고 무릎을 꿇고 양손으로 허겁지겁 모래를 헤집고 있었다. 반쯤 빈 물병을 정 영감 목에 걸어주고 빠른 걸음으로 발자국을 따라 앞으로 달려갔다. 보드라운 흰 모래는 미끄러워서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앞서 가고 있는 아내는 어찌나 빨리 걷는지 벌써 언덕 저쪽으로 사라져버렸다.
언덕을 넘어서니 끝이 안 보일 만큼 망망한 모래밭이 펼쳐져 있었다. 능선을 따라 하얀 햇살이 눈 부셨다. 그 너머로는 엷은 회색이 감도는 능선이 나타나고 다시 흰색의 모래밭이 펼쳐져 있고 그 뒤로 선명한 그림자를 드리운 굴곡들이 끝없이 이어져갔다. 그러면 내 아내는 어느 쪽으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그 영감 걱정하다가 내가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지도를 펴놓고 보니 내가 너무 오른쪽으로 치우친 것 같았다. 아내가 구부러진 길을 돌아서 내려온다면 나는 곧장 앞으로만 전진하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잔잔한 모래 결 사이에 비베나 분홍 꽃 한 무더기가 모래를 그러모아 조그만 언덕을 만들어 놓았다. 인적이 완전히 끊어져 버린 주변은 교교하고 마음만 조급해졌다. 혹시 길이 엇갈리면 이 망망한 사막에서 어떻게 서로를 찾아낸단 말인가? 길 잃고 헤맬 아내를 생각하니 가슴이 조여들어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빠른 걸음으로 서너 개의 능선을 넘어갔으나 나중에는 잡풀이 우거진 계곡 안을 힘없이 터덜거리면서 걸었다. 다시 미끄러지면서 언덕을 기어올라서니 조금 전에 지나온 것과 똑같은 능선들이 끝이 안 보게 계속되었다. 태양열은 걷고 있는 발아래서 열기를 뿜어 올리고 있었다. 이제는 지칠 대로 지쳐서 하늘이 노랗게 물들어 코앞까지 내려왔다가는 저 멀리로 물러가곤 했다. 목이 타고 현기증이 일어났다. 귀에서 윙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주변이 시끄러워지더니 우렁찬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자세히 앞을 바라보니 하얀 모래톱 등성이 위로 검은색 깃발이 팔랑팔랑 흔들리면서 흘러가고 있었다. 잠시 후 모래톱 끝에 둔버기(모래 위를 달리는 네 바퀴 오토바이) 두 대가 나타났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큰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내 소리를 못 들었는지 그냥 지나쳐 가버렸다. 나는 모래 위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회색 하늘이 내 얼굴까지 내려와 덮었다. 너무 오랫동안 흰색만 봐서 그런지 마치 고산 눈밭에서처럼 설맹이 된 듯 갑자기 앞이 캄캄해졌다. 목이 타들어왔다. 기진맥진해서 하늘만 올려다보며 누워있는데 저쪽 밑에서 다시 탱크 굴러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벌떡 일어나서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지나쳐 가버렸던 둔버기 한대가 나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아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 입에서는 탄성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노란색 칠을 한 둔버기에는 흰옷을 입고 붉은색이 감도는 넓은 방풍 안경에 헬멧을 쓴 젊은 여자가 타고 있었다. 그녀는 내 앞에 와서 차를 멈추었다. 헬멧을 벗고 금발의 긴 머리를 한번 뒤로 휙 제치더니 또렷한 한국말로 ‘길을 잘못 들어오셨군요.’ 라고 했다.
“아, 예! 제 아내가 호수 쪽으로 갔는데 서로 길이 엇갈려서 그만….”
“그럼 호수 쪽으로 갈까요? 아니면 올라오신 휴게소 쪽으로 갈까요?”
그녀는 마치 인조인간이 내는듯한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내를 찾아야지요! 이 더위에 혼자서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매우 귀찮은 듯이 두 곳 중 한 곳을 정하든지 아니면 그냥 나를 버려두고 돌아 가 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호수 쪽으로….”
그녀가 뒤쪽을 가리키면서 빨리 올라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뒷자리에 올라앉아서 그녀의 잘록한 허리에 손을 살짝 갖다 댔다. 그와 동시에 둔버기는 호수 쪽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얼마쯤을 달려온 그녀가 속도를 줄이더니 손을 들어 보이면서 호수 귀퉁이를 가리 켰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국말을 그렇게 잘하십니까?”
“저는 린다 오스틴입니다. 샌프란시스코 근처에 있는 한국어 학교에서 2년 동안 훈련받았습니다. 조금 전에 선생님께서 소리 지르는 것을 듣고 한국분인 것을 알았지요, 호수까지는 걸어서 올라가십시오, 저는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그녀는 흰 모래 구름을 일으키면서 올라왔던 언덕을 쏜살같이 달려 내려가 버렸다. 조그만 언덕 위로 올라서니 눈앞에 호수가 나타났다. 흰 모래로 둘러싸인 호숫물은 가장자리가 노란색으로 보였다. 그리고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깊이에 따라 엷은 녹색, 가운데는 무엇이든 빨아 드릴 것 같은 짙은 감청색 물결이 반짝반짝 햇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마치 아내가 그려놓은 수채화 한 폭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카메라 캡을 열고 눈앞에 펼쳐져 있는 황홀한 풍경을 찍기 시작하였다. 모래 언덕이 높은 것 같았는데 스르르 미끄러져 어느새 호숫가에 내려와 섰다. 수정 같은 결정체가 주변에 널려 있었다. 천국에 있다는 수정 바다가 여기 펼쳐져 있는 것일까? 흰 모래밭에 찰랑거리는 맑은 물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온몸이 투명한 새우들이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물기를 함빡 머금은 모래가 살짝 무너져 내리면서 발이 시원한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양손으로 맑은 물을 떠서 한 모금 마셨다. 향긋하고 짭짤한 물이 짜르르 목젖을 타고 내려갔다. 눈이 아린 것 같더니 발끝까지 짜릿했다. 몸이 새털같이 가벼워져서 공중에 뜨는 것 같더니 날아오를 것 같이 무게감이 없어졌다.
호숫가에는 오른쪽과 왼쪽에 똑같은 크기의 동굴이 세 개씩 뚫려 있었다. 천만 년 전에 지각 변동이 일어나면서 만들어진 동굴일 것이다. 혹시 정 영감이 찾던 청석 동굴이 여기쯤 있지 않을까? 황홀한 주위 분위기에 도취되어 아내를 잠시 잊고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데 건너편 호숫가에 아내와 비슷한 색깔의 재킷을 입은 여인이 허리를 굽혀 손에 물을 묻히는 듯하더니 왼편 동굴 속으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자세히는 못 봤어도 아내가 분명했다.
호숫가 얕은 물을 따라 건너기 시작했다. 뜨거운 태양열을 식히려고 허리를 꾸부리고 물을 머리 위에 뿌렸다. 어느 동굴 안으로 들어가야 아내를 만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두 번째 동굴로 들어섰다. 호숫물이 푸른색 벽에 반사되어 저쪽 안까지 환하게 보였다. 푸르스름한 색이 번져 나오는 동굴 벽은 출렁거리는 물결을 따라 얼룩얼룩 무늬를 만들었다. 한참 안쪽으로 들어가니 아래쪽으로 가파른 계단이 나왔다. 몇 발 안 움직였는데 몸이 벌써 동굴 바닥에 내려와 섰다. 신비를 간직한 거대한 원형 경기장 모양을 한 공간 안에는 수천만 년 동안 한 방울씩 녹아내리며 조각해놓은 작품들이 희뿌연 연기 속에 가려진 듯 아련한 형체가 하나둘씩 눈앞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고대 신전의 원기둥부터 동물의 모양을 조각해 놓은 듯한 모습이 즐비하고 저쪽 끝에는 잔잔한 호수까지 있어서 엄청난 힘을 가진 이름 모를 어떤 신의 뜰 안에 들어서 있는 것 같았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긴장한 탓인지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둘러볼 여유도 없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까마득한 절벽 끝에 겨우 한 뼘쯤 돼 보이는 희미한 빛이 아래로 흩어지고 있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천정과 바위틈에서 오글거리는 박쥐 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쪽 기다란 통로 위에 지쳐서 꿈틀거리며 지나가는 군상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긴 그림자를 힘겹게 질질 끌며 무거워 보이는 보따리를 하나씩 등에 지고 앞사람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나도 피할 수 없는 어떤 마력에 이끌려 행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조금 머뭇거리며 안쪽으로 들어서니 마치 거대한 종을 엎어 놓은 것 같은 종유석 돌기둥이 서 있고 그 아래쪽으로 좁은 길이 나타났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된 것 같고 나는 왜 혼돈된 이 길에 들어와 있는지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앞에 가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발길을 멈추었다. 삼각형 머리 위에 또 하나의 번뜩이는 눈을 가진 세눈박이“투아타라”가 휘청거리며 통로를 벗어나 걷고 있던 사람에게 달려들어 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순식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핥아 먹어버렸다. 놀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이리 뛰고 저리 도망가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어디로 도망가야 한단 말인가? 옆길로 접어든 내 앞에 좁다란 바위틈이 있어 그 사이를 겨우 비집고 들어갔다. 비스트미 아래로 뚫린 가늘고 긴 동굴 저 밑에서 인기척이 났다. 자세히 그곳을 들여다보니 온몸에 누런 털이 돋은 구척장신의 사나이가 가죽으로 된 앞치마를 허리에 두르고 벌건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돌기둥에 묶여있는 사람의 배를 움켜잡고는 배꼽을 열어 창자를 줄줄 끄집어내 옆에 있는 나무통에 채워 넣으면서 무어라고 꿍얼거렸다. 나도 모르게 툭 불거져 나온 나의 배를 움켜쥐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저것은 자기 뱃속에 끝없이 꾸겨 넣기만 했던 욕심을 반납하고 있는 듯했다. 나도 저놈에게 붙잡히는 날에는 꼼짝없이 배꼽이 열릴 것이 분명한데 내 발걸음은 자꾸만 악마의 목구멍 같은 가늘고 긴 통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허겁지겁 발뒤꿈치로 잔돌을 밀어내며 뒷걸음쳐서 왼쪽 골목으로 도망쳤다. 이곳 역시 빠져나갈 여지가 없는 꽉 막힌 골목이고 조금 전에 오른쪽 동굴 바닥에 있던 누런 털이 돋은 장신의 사내가 바위 뒤에서 불쑥 튀어나오더니 바로 내 앞에서 허둥대던 사람을 잡아끌어 갈라진 바위틈에 머리를 끼워놓고 입을 찢어지게 벌려 혓바닥을 끄집어내더니 삐걱삐걱 소리 나는 녹이 벌겋게 슨 무쇠로 된 물레에다 둘둘 감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내 혀도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남 욕하고 과장하고 없는 말도 지어내고 진실도 조금 뒤틀어서 그럴싸하게 꾸며내 편리한 쪽으로 만들어 지껄이던 말 말 말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다시 엉금엉금 기어 그곳을 빠져나왔다. 저쪽 밑바닥에는 펄펄 끓는 가마솥이 하나 있는데 역시 등짝에 누런 털이 듬성듬성 난 사내가 어디서 잡아왔는지 깡마른 사내를 사정없이 거꾸로 집어던져 넣어버렸다.
나는 동서남북 구분할 겨를도 없이 저쪽 끝에 흘러내리는 뿌연 빛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이 암담한 동굴을 빠져나가야 한다. 그런데 깎아지른 듯한 이 절벽을 어떻게 기어오른단 말인가? 이 절벽을 올라가야만 악귀가 득실대는 동굴을 벗어날 것이고 그래야 처음 들어온 입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려설 때는 그렇게 쉽게 흘러들었었는데 바위틈에 손톱을 박아 넣고 한 뼘씩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헐떡거리면서 한참을 기어 올라가다보니 그런대로 발 짚을만한 균열이 나타나고 빙빙 돌아가며 끝까지 바윗길이 열려 있었다. 절벽 끝까지 올라와서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 쉬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 험악하게만 보이던 절벽은 자연이 만들어놓은 훌륭한 조각품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사이 사이에 악귀들이 마치 박쥐 떼처럼 바글거리고 있으니 천만 년 녹아내리며 만들어 놓은 작품들이 오히려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등에 솟아난 땀을 식히며 천천히 큰 바위 하나를 지나 왼쪽으로 돌아가니 내 앞에 쳐다보기만 해도 아찔한 현수교가 절벽과 절벽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었다.
‘이 다리만 건너가면 다시 루세로 호수 어느 귀퉁이에 다다를 것이고 하얀 모래사막을 건너가면 내 아내가 기다려 줄 것이다. 내가 들어섰던 동굴은 정 영감이 말하던 청석 동굴이 아니고 호수 밑을 가로지르는 악귀들의 놀이터 였었나보다.’
오랜 세월 햇볕에 시달려 바싹 말라 푸석푸석한 밧줄을 의지하고 한 발짝 내디뎌보았다. 그런대로 걸을 만했다. 중간쯤 왔을 때 저 밑으로부터 스산한 바람이 불어 올라오고 다리가 조금씩 움직이더니 갑자기 그네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짐승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뒤돌아보았는데 거기에는 조금 전에 동굴 속에서 괴팍을 부리던 그 누런 털이 돋은 구척장신의 사내가 다리 끝을 붙잡고 마구 흔들어대고 있었다.
‘저놈이 여기까지 쫓아 올라온 것을 보니 아직도 완전히 악마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이제는 피해 갈 수 없는 내 차례인 모양이다.’
그놈은 다리를 지탱해 주고 있는 굵은 밧줄을 마구 흔들어 대고 있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때였다. 다리의 세 가닥 중에 오른쪽 줄이 툭 끊어지면서 다리가 뒤집혔다. 끊어져 흘러내린 밧줄을 간신히 붙잡아 한쪽 다리에 휘감고 매달려 있는데 이번에는 왼쪽 줄마저 힘없이 풀려나가면서 발밑의 굵은 외줄만 남았다. 이제 남은 한 줄만 더 끊어지면 나는 천 길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치고 말 것이다. 그 험악한 골짜기를 간신히 빠져나와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다시 저 밑으로 곤두박질친다면 저놈이 금세 달려들어 내 배꼽을 열어젖히고 내 혀를 뽑아내고야 말 것 아닌가!
그놈의 맹렬한 힘이 외줄 끝에 와 닿으면서 큰 물결처럼 출렁이더니 마지막 남은 줄도 힘없이 풀려나갔다. 공기의 저항 때문인지 나는 구름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호흡을 잠시 멈춘 순간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지면서 내 몸은 마치 빨랫줄에 걸려있는 마른 옷감처럼 공중위로 붕 떠올랐다가 휘청하며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서 내려진 것인지 아주 긴 가죽 채찍 같은 것이 나의 허리를 휘감아 끌어 올리더니 건너편 언덕 위로 내동댕이쳐 버렸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재잘거리는 새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펴보니 뽀죽뽀죽한 바위들이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섰는데 서너 발짝 떨어진 나무그늘에 정 영감이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앉아 있었다. 그의 허였던 수염은 사라지고 짧게 자른 검은 머리에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고 있었고 그 옆에 쇠사슬로 잘 묶은 개만큼 큰 흰색 투아타라가 엎드려 있었다.
“여기까지 용케 올라왔군, 마지막 고비를 투아타라가 도와줘서 잘 넘겼으니 이제부터는 우리 셋이 힘을 합하여 청석골까지 쳐들어가자고!”
정 영감은 마치 동굴 바닥을 나와 함께 훑어 지나온 것 같은 어투로 말했다. 그런데 끌고 다니는 투아타라는 무엇일까? 그 모래밭에서 찾던 흰색 도마뱀일까?”
“네? 투아타라가 나를 도와주었다고요?”
“나도 깜짝 놀랐다고, 혓바닥만 길게 나오는 줄 알았는데 저 굵은 꼬리가 갑자기 가죽끈처럼 길게 늘어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자네를 끌어 올리지 않았겠나?”
그런데 정 영감이 붙들고 있는 투아타라의 눈에서는 무슨 광채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동굴 속에서 사람을 잡아먹을 때처럼 조금만 움직여도 금세 달려들어 긴 혓바닥으로 내 얼굴을 핥아 버릴 것만 같아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특히 삼각형 머리끝에 달린 제 삼의 눈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감시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내가 말하던 청석동굴의 초입에 불과하고 이제부터 정말 치열한 싸움이 벌어 질 걸세! 그래서 이놈 세눈박이를 여기까지 끌고 들어온 거야!”
“그럼 아직 저 털복숭이 거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단 말입니까?”
“이제 청석동굴 앞에까지 왔으니 어떤 장애물이든지 간에 다 쳐부수고 들어가서 젊음을 되찾고야 말테니까! 이것보게 흙에 덮혀 있는 것 같지만 바위도 돌멩이도 온통 청자색이지 않는가 말이야, 청석골에 들어서기만 하면 내 젊음이 꼭 돌아올 거야! 물론 자네도 그 패기 만만하던 청년장교로 바뀔테고 말이야!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그 순간 갑자기 쿵하는 소리와 함께 누런털난 거인이 내 앞을 가로 막고 서서 마치 이제는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양 팔을 넓게 벌리고 달려들었다.
“저놈에게 잡히는 날에는 젊음이고 뭐고 다 끝장이 나고 말것이다.”
나는 절벽 끝의 좁고 꼬불거리는 길을 정신없이 내달았다. 마치 mute 스위치를 눌러 놓은 듯 내 귓속에서는 찌~잉 하는 이명만 들릴 뿐 그저 악동들이 휘둘러놓은 크레용 그림 속을 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왼쪽 옆으로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깊은 골짜기에서는 서늘한 바람과 함께 푸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바위 절벽은 사라지고 다시 어두운 터널 속을 걷고 있었다. 언제 쫓아왔는지 정 영감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내 옆으로 다가서면서 중얼거렸다.
“자네가 그렇게 도망치지 않고 힘을 모았더라면 그놈을 밀쳐내고 청석골로 쳐들어 갈 수 있었을텐데 자네가 달아나는 바람에 투아타라만 죽였지 뭔가, 다행히 털복숭이 녀석도 목이 물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으니 나 혼자라도 청석골을 찾아들어가야 겠네! 자넨 아내를 찾아야겠지, 갈 길이 바쁘니 어서 나가보게.”
동굴 입구로 올라가는 계단 앞까지 왔을 때 정 영감은 씩씩하고 활기찬 모습으로 손을 머리 높이 흔들면서 안쪽으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가파른 계단을 단숨에 뛰어올라 동굴 밖으로 나와 섰다. 얼굴에 화끈거리는 모래 열기를 느끼게 되니 비로소 아내 생각이 났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나를 찾아 헤매다가 휴게소 쪽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호숫물을 헤치고 급하게 건너왔다. 언덕을 넘어서 끝이 안 보이는 흰 모래밭을 무작정 아래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언덕을 넘고 계곡을 건너 정신없이 모래벌판을 가로지르며 내달았다. 다시 머리 위에 태양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더니 새파란 하늘이 머리 가까이 내려와 붙었다가는 저 멀리로 물러가곤 했다. 헛구역질이 났다. 이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다. 모래 위에 주저앉아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저쪽에서 둔버기 굴러 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린다 대위와 아내가 내 옆까지 다가와서 두런두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이제야 정신이 좀 드세요?”
아내가 내 손을 잡으면서 얼굴을 쓰다듬어주었다. 머리가 뻐개지는 것같이 아팠다. 내 손등에는 수액 튜브가 꽂혀 있고 가슴과 머리에는 여러 가닥의 가는 줄이 전자 모니터에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왜 여기 누워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가 어디야? 그리고 정 영감은 어떻게 됐어?”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는 HOLLOMAN 공군기지 병원 응급실이에요,”
흑인 간호사가 내가 깨어난 것을 보고 의사를 부르는 것 같았다. 조금 있으니 하얀 가운 주머니에 청진기를 찔러 넣고 내 차트를 들여다보면서 금발 미인이 내 앞에 나타났다.
“이제야 깨어났군요. 머리가 좀 아플 텐데 괜찮으세요?”
그녀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영어로 말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캡틴 린다?”하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옆에 서 있던 아내와 린다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린다가 간호사에게 진통제를 줘도 좋다는 지시를 하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어떻게 린다 이름을 알고 있었어요?”
아내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왜 나는 여기 누워 있고?”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예요? 그런데 린다는 어떻게 알고 있어요?”
아내와 나는 지금까지의 일을 어디서부터 누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를 몰랐다. 아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한참 걷다 보니 당신하고 영감님이 안 따라오는 거예요! 그래서 모래 언덕 유카나무 그늘 밑에서 쉬고 있다가 갑자기 겁이 덜컥 나더라고요, 그래서 오던 길을 되돌아서서 정신없이 뛰어 내려오며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두 사람 다 행적이 묘연했어요, 버스가 서 있는 곳까지 내려와서 기다리기로 했죠.”
아내는 그때 기다리면서 애태우던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출발 예정시간을 한 시간이나 지체하던 일행은 아내와 미세스 정을 Visitor Center에 내려놓고 칼스바드 동굴을 향해 출발했다. 우리가 늦게라도 돌아오면 다른 교통편을 이용해서 오늘 묵을 호텔로 찾아가기로 했다. 몇 시간을 휴게소에서 기다려도 정 영감과 내가 안 돌아오자 아내가 서둘러서 공원 레인저에게 실종 신고를 하고 네 시간이 지나서야 호숫가 근처 모래밭에 얼굴을 파묻고 쓰러져 있는 나를 발견했단다. 그러나 정 영감은 호수와는 정 반대쪽에서 두 시간이 더 지나서야 찾았는데 110도가 넘는 무더위 속에 너무 오랜 시간 탈진상태로 모래 위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아직 까지도 의식을 못 찾고 있다고 했다.
공원 구조팀은 모래 위를 자유자재로 달릴 수 있는 둔버기로 우리 두 사람을 찾아다녔다고 했다. 나는 그들이 나를 둔버기에 태우고 병원으로 옮길 때까지 혼수상태에 빠져 있으면서도 어느 정도 감지기능은 살아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면 내가 만났던 누런 털 난 사내와 린다
그리고 그 수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내 소지품들은 어디 있지? 카메라를 찾으면 무슨 답이 나올 텐데!”
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아내에게 물었다.
“개인 소지품은 나중에 퇴원할 때 준다고 했어요, 아무 걱정하지 말고 간호사 지시대로 하라고요!”
“내 기억 속의 린다는 한국말을 무척 잘했었는데!”
“린다는 엄마가 한국분이래요. 얼마나 예쁘고 착한지 한국말을 우리 애들보다 훨씬 더 잘하고 한국 음식도 척척 만들어 먹는데요, 린다에게 비하면 우리 애들은 정말 잘못 키운 것 같아요.”
아내는 내가 미안해할까 봐서 그런지 말을 많이 했다. 나는 일어나서 화장실을 다녀왔다. 정 영감님이 빨리 깨어나야 할 텐데…. 마음이 무겁다. 그 동굴 안에서 내 손을 잡고 작별하던 그분의 표정이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文)


Tuatara: 큰 도마뱀, 눈이 세 개 있으며 수명은 100년, 몸은 70 ~ 80센티미터까지 자란다. 동남아, 호주 등지에 서식하는 파충류과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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