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대장 (")
2010.03.10 05:17
단편소설
골목대장
최 문 항
4월 중순인데 빅베어 높은 산에 눈이 내렸다. 지구 온난화 현상은 이제 코앞에 닥쳐온 것 같다. 그래도 변덕스러운 날씨를 살짝 피해서 작년에 할망구가 심어 논 제라니움이 앞마당을 빨갛게 장식해 놓았다. 할망구가 있었으면 오늘 같은 날씨에는 근처 공원에라도 슬슬 나가 보는 건데 이제는 다 틀려버렸다. 운전도 못 하는 나만 덩그렇게 이 큰집에 남겨놓고 훌쩍 가버렸으니 나는 어쩌란 말인가? 남들은 집 팔아버리고 노인 아파트로 옮기라고 하지만 어떻게 이 집을 떠날 수가 있느냐 말이다. 한국 떠나서 제일 오fot동안 산 곳이 여기고 또 집이야 볼품없지만 할망구 손톱이 빠지게 밀고 닦아놓은 집안 살림하며 사철 열매를 따먹던 과일나무들과 앞 뒷마당에 심어놓은 가지각색의 꽃들, 선인장은 아직도 할망구 냄새가 그대로 나는데 어떻게 여길 떠난단 말인가?
30년 전에 이 동네로 이사 올 때 만해도 나지막한 동산 안쪽으로 폭 싸인 언덕 아래 자리 잡은 우리 집은 꼭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남산 밑의 조용한 동네 같았었는데 뒷산 쪽으로 큰길이 뚫리고 고래 등 같은 집들이 차곡차곡 들어서면서 북적거리더니 주변의 아는 사람들이 하나 둘 이사가 버리고 어느새 이 동네는 완전히 멕시칸들이 점령해 버렸다.
아직 서너 집 한국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다행이다. 우리 집은 오래되고 많이 낡았어도 막힌 골목 안에 있어서 조용한 편이다. 옆집 김 씨네가 뒷방을 세놓는다고 하더니 젊은 여자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리고 이사를 왔다. 김 씨네는 가게를 아침 일찍 열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세든 사람들은 옆문으로 드나들었는데 그들이 이사 온 날부터 골목 안이 시끄러워 졌다.
이 골목에 새 식구가 된 꼬마 녀석이 따라락 따라락 소리를 내면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골목길을 누비고 다녔다. 내가 안 내다보는 사이에 넓고 조금 경사진 내 집 차고 앞까지 쳐들어와서는 잠시도 쉬지 않고 오르락내리락했다. 저러다 지치면 그만 두겠지 하고 내버려 뒀는데 나중에는 잔디밭을 막아놓은 나지막한 벽돌 위로 폴짝 뛰어올라서 졸졸졸 내려가다가 끝에 쯤 오면 깡충 뛰어내리곤 했다. 처음에는 그놈 재주가 놀랍고 귀여워서 유리창 너머로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는데 몇 번을 잘 타고 내리던 녀석이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졌다. 애가 워낙에 조그마해서 그런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톡톡 털고 일어나서 또 뛰어오르고 미끄러지기를 쉬지 않고 했다. 이사 온 첫날에는 아무 말 않고 내 버려뒀었는데 녀석은 학교 갔다 돌아오면 스케이트보드 타는 것 말고는 하는 일이 없었다. 저러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집 보험으로 해결해 줘야 할 텐데 꼬마 녀석은 꼭 우리 집 앞에만 와서 놀았다.
- 저놈이 우리 마당에서 넘어져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이 시간에 골목 안에는 저 녀석하고 나밖에 없는데! 나가서 야단을 칠까? 아니지 차고 앞을 막아버리면 되겠군!―
나는 뒷마당에 있는 종이상자들을 차고 앞에 한 줄로 나란히 내다놓았다. 녀석이 안쪽을 힐끔 들여다보는 것 같더니 종이상자를 슬쩍 밀어버리고 그사이를 요리조리 꼬불꼬불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돌아다녔다. 마치 좁은 어항 안에 금붕어가 이쪽으로 왔다가 금방 방향을 바꿔서 저쪽으로 가는 것처럼 상자 사이를 쉬지 않고 돌아다녔다. 녀석이 목이 마른 지 잠시 자기 집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손가락 굵기의 밧줄을 찾아서 왼쪽 팜 추리 밑동에 매고 반대쪽 단풍나무가지까지 끌고 가서 단단히 매버렸다.
-요놈 이제는 우리 앞마당에 못 들어오겠지! 이렇게 해놨는데도 들어오면 야단을 쳐서 내 쫓아 버려야지.―
녀석은 스케이트보드를 그냥 밖에 버려둔 채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안 나타났다.
-혹시 내가 줄까지 쳐놓아서 안 나오는 걸까?― 은근히 녀석이 궁금해졌다. 나는 이 층으로 올라가서 옆집 뒷마당을 내려다봤다. 녀석은 거기 없었다. 밖으로 나가서 옆집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봤다. 녀석은 땀을 빨빨 흘리면서 큰 김치 병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안에는 도마뱀이 여러 마리 있었고 무슨 먹이를 주었는지 뒤엉켜있는 도마뱀을 관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녀석이 어디 가지 않고 다른 짓을 하는 것을 보니 안심이 됐다.
나도 뒷마당에 득실대는 도마뱀이나 잡아볼까 해서 김치병을 찾아놓고 도마뱀을 쫓아다녀 봐도 나에게 잡혀줄 멍청한 놈은 없었다. 공연히 덥고 목이 말랐다. 안으로 들어와서 라디오를 켰다. 한국에서 어느 재벌총수가 아들 역성든다고 폭력배를 끌고 다녔다고 야단들이었다.
갑자기 밖에서 따라락 따라락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뭔가 기다리던 소식을 받은 것 같은 반가운 마음이 들면서 얼른 창가로 달려갔다. 녀석이 상자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더니 이번에는 몸을 낮추고 밧줄 밑을 지나갔다. 저쪽 끝으로 달려가더니 단풍나무에 맨 밧줄을 느슨하게 풀러 놓았다. 다시 힘차게 발을 굴러 위쪽으로 올라오더니 이번에는 스케이트보드를 밧줄 밑으로 슬쩍 밀어놓고 녀석은 밧줄 위로 깡충 뛰어올라 다시 스케이트보드 위로 올라서려고 했다. 보드 끝에 발이 걸리는 것 같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이코 저놈 다쳤겠다.”
나도 모르게 밖으로 뛰어나가려는데 녀석은 아무러치도 않은 듯이 일어나서 다시 위쪽으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열 번인지 스무 번인지 셀 수도 없이 넘어지면 일어나곤 하면서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매일 할 일이 없어서 라디오나 끼고 살던 나는 꼬마가 이 골목에 나타난 다음부터는 녀석이 학교를 끝내고 집에 돌아오기 전까지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을 대강 끝내놓고 창가에 끌어다 놓은 의자에 가 앉아서 녀석을 기다리곤 했다. 거리를 둥근 솔 같은 바퀴로 쓸고 지나가는 청소차를 보니 녀석이 이사 온 지도 벌써 한 주가 지나갔다. 그날 이삿짐 실은 차가 차도에서 짐을 내리다가 티켓을 받을 뻔했던 기억이 났다.
김 씨네 부부는 늘 밤늦은 시간이 되어야 마켓 문을 닫고 들어왔다. 녀석 엄마도 아침에 학교 갈 때나 잠깐 볼 수 있을 뿐 그 집에는 저 녀석 혼자만 있었다. 나는 어린애를 저렇게 혼자 있게 하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는 공연한 걱정까지 하게 되었다. 그래도 외톨이 같지 않게 혼자 잘 놀고 있는 것을 보면 아주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아주 능숙하게 밧줄 밑을 지나서 다시 스케이트보드에 올라서는 재주를 부리는 녀석을 보면서 나 혼자 박수를 치곤 했다. 녀석이 줄 위로 사뿐히 날아오르는 것 같더니 줄에 발이 걸렸는지 저쪽으로 나동그라졌다. 나는 녀석이 일어나주길 바라면서 무심히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녀석은 얼굴을 찡그리고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다. 자세히 보니 눈에는 굵은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나는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얘야! 너 어디 다쳤니?”
내가 허리를 꾸부리고 녀석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녀석은 뒤통수가 톡 튀어나오고 이마가 반듯한 것이 영리해 보였다. 눈망울이 크고 흰자위는 푸른색이 감돌고 발그스래 한 볼이 귀여웠다. 녀석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도 아니라는 듯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내가 손을 잡아 일으켜 주려는데 손가락으로 자기 왼쪽 팔목을 가리켰다. 새까맣게 햇볕에 그을린 가는 손목이 애처로워 보였다. 손목을 살짝 잡아보았다. 그때서야‘아야!’소리를 내면서 건드리지 못 하게 다른 손으로 막았다.
내가 걱정하던 일이 드디어 일어나고 만 것이다. 분명히 많이 다친 것 같은데 911을 부를 수도 없고 나는 운전을 못 하는데, 주변엔 도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또 사고를 경찰이 알게 되면 녀석 엄마는 모르긴 몰라도 아동 방치 죄목으로 곤경에 처할 수도 있겠고 또 녀석도 다른 보호자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것이 뻔했다. 우선 꼬마 녀석을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시원한 콜라한잔을 먹이고 나니 좀 안정이 되는지 아무 말도 없이 눈만 끔벅이고 앉아 있었다.
“너 이름이 뭐냐? 나는 송 할아버지란다. 그냥 할아버지라고 불러도 돼!”
“조나단…….”
“엄마 전화번호 알고 있지? 몇 번이냐?”
녀석은 엄마한테 교육을 잘 받았는지 번호를 말 안 했다.
“조나단 엄마한테 빨리 오라고 말해야 되는 거야, 이 할아버지는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어요! 내가 엄마하고 이야기를 해야 너를 병원에 데리고 가든지 어떻게 하지, 엄마전화번호 몇 번이지?”
“......”
녀석은 대답을 안했다. 그때 현관문의 벨 소리가 울렸다. 문을 열어보니 매주 한 번씩 나의 당 조절을 위해 홈헬스캐어센터에서 보낸 홍 간호사가 서 있었다.
“아이고 어서 오세요, 마침 잘 오셨어요. 나보다도 저 녀석이 넘어져서 팔을 다쳤는데 어떻게 해 줘야 되는지 몰라서 이러고 있는데 참 잘 오셨어요!”
“얜 누군데요? 할아버진 친척이 없다고 했잖아요……. 그놈 아주 잘 생겼네, 어디가 아프니?”
할망구 있을 때부터 우리 집을 찾아주던 홍 간호사는 녀석이 내 손자라도 되는 줄 알고 조나단에게로 다가섰다.
“옆집에 이사 온 아인데 지금 아무도 없어서 내가 돌봐주고 있어요, 팔을 다친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될지 원~”
“부모허락 없이는 치료해 줄 방법이 없는데……”
내가 아는 대로 대강 설명을 해주고 홍 간호사에게 어떻게든 치료해 달라고 부탁했다.
“글쎄 이 녀석이 엄마하고 단단히 약속을 했는지 엄마 번호를 안 알려 주지 뭡니까? 사정이 딱한 것은 알겠는데 이 어린것을 늘 혼자 놀게 하곤 밤늦게야 들어오니……”
홍 간호사가 조나단을 잘 달래서 손목을 만져봤다. 다행히 골절은 아니었고 근육이 잘못된 것이라서 병원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차에 가지고 다니는 구급약 상자를 들고 들어와서 왼쪽 팔목에 무슨 연고를 잔뜩 바르고 수축 붕대를 두툼하게 감아주었다.
조나단과 함께 스파게티를 만들어서 맛있게 먹었다. 밤 열 시가 되어서야 조나단 엄마가 돌아왔다. T.V를 보고 있던 녀석은 밖에서 나는 차 소리를 듣고 자기 엄마가 돌아온 것을 알아차리고는 고맙단 인사도 없이 문을 열고 쏜살같이 자기 집으로 가버렸다.
다음날 아침 조나단 엄마가 나를 찾아왔다. 자그마한 키에 화장기 없는 얼굴이 깨끗해 보였다. 머리를 절하듯이 깊숙이 숙여 인사를 하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고맙다는 말을 했다. 조나단 엄마를 보는 순간 나는 그녀의 처지가 어떠하든 관계없이
- 왜 아이만 팽개쳐두고 다니느냐? 아동 학대죄를 아느냐? 뭐 해먹고 사느냐? 애 점심, 저녁은 먹이고 있느냐? 언제까지 이렇게 늦게 들어올 것이냐? 등-
많은 질문을 한꺼번에 눈으로 묻고 있었다. 얼떨결에 문을 열어 잡고 인사만 받고 서 있는 나에게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내가 아무 말도 않고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다시 머리를 숙여서 인사를 하고는 돌아가 버렸다.
학교에서 돌아온 조나단은 팔에 붕대를 감은 채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천천히 골목길 어귀까지 갔다가 돌아오고 또 골목길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녀석이 이제는 우리 집 앞마당에는 안 오기로 작정한 것일까? 어제 사고 이후 애가 갑자기 기가 팍 꺾인 것 같았다. 나는 앞마당에 설치했던 장애물들을 다 치워 버렸다. 이쪽으로 오고 있던 조나단이 서너 발치 떨어진 곳에서 멈춰서더니 다시 스케이트보드 뒤꿈치를 살짝 누르고 빙그르르 방향을 돌려서 길 저쪽으로 가버렸다. 나는 차고 문을 열어놓고 잡동사니들을 끄집어냈다. 별로 쓸데없는 물건들이지만 차마 버릴 수도 없어서 쌓아놓은 것들인데 바닥에 있는 것을 선반 위로 올려놓고 물청소를 시작했다. 언제 돌아왔는지 조나단이 스케이트보드를 옆구리에 끼고 내 뒤에 서서 차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이! 조나단 점심은 먹었냐?”
“……”
녀석은 말없이 머리를 흔들고 서있었다.
“물청소 좀 도와주면 내가 맛있는 샌드위치 만들어주지, 어때 물 좀 뿌려 줄 테냐?”
조나단이 스케이트보드를 잔디 위에 휙 집어던지더니 차고 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대강 안쪽을 정리하고 물 호스를 조나단에게 건네주면서 차고 바깥 시멘트에 물을 뿌리도록 시켰다. 물청소를 끝내고 방으로 들어왔다.
“조나단 학교는 재미있어? 전에는 어디 살았어? 여기 오기 전에 말이야.”
내가 샌드위치를 만들면서 말을 시켜봤다. 녀석은 역시 대답이 없다. 콜라와 샌드위치를 내밀자 잠시 머뭇거리더니 받아들었다. 눈을 감고 오른손으로 성호를 긋고 나서야 식사를 시작했다.
“조나단은 스케이트보드를 아주 잘 타던데 어디서 배웠어?”
샌드위치를 입안에 잔뜩 물고 오물거리다가 목이 메는지 콜라를 한 모금 삼켰다.
“시카고에서, 아빠가…….”
나는 옳다구나 하고 조나단의 말꼬리를 붙잡았다.
“아빠는 시카고 있어?”
녀석은 잠시 망설이더니
“아니 한국 갔어.”했다.
공연히 어린애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걱정이 됐다.
“조나단, 학교 갔다 집에 오면 할아버지한테 건너 와서 놀아, 이 할아버지도 혼자 있으니까 심심하거든.”
우리는 뒷마당으로 나갔다. 조나단은 어느새 도마뱀 한 마리를 잡아서 손위에 올려놓고 놀고 있었다.
“조나단은 한국말을 아주 잘해서 할아버지는 정말 좋단다.”
녀석 마음이 좀 풀렸는지 웃기도 하고 대답도 잘했다.
“할아버지 영어 잘해? 나 숙제해야 하는데”
“그럼, 할아버지는 미국에 오래 살아서 웬만한 영어는 다 잘하지! 얼른 숙제할 거 가지고와!"
조나단은 신이 나서 자기 집으로 달려가더니 책가방을 들고 다시 건너왔다.
“할아버지, 우리 학교에 앤디라는 한국 애가 있는데 걔는 오렌지 스케이트보드 시합 나간 데, 근데 걔는 점프도 잘못해, 나도 시합 나가면 좋겠는데!”
“그래? 언제 하는데 어디서 하는지 알아?"
녀석이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얼굴을 조금 왼쪽으로 돌리고 한쪽 눈을 옆으로 뜨면서 생각하는척했다.
“잘 몰라.”
“내일 학교 가면 앤디한데 물어봐, 음, 그러지 말고 앤디네 전화번호 꼭 적어 와야 한다. 할아버지가 앤디아빠한테 물어보면 되니까, 알았지!”
이제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으레 우리 집으로 와서 숙제도 하고 점심도 나와 같이 먹었다.
“조나단 옛날이야기 해줄까?”
“네, 무서운 거 말고 재미있는 얘기해주세요.”
“할아버지가 조나단만 할 때는 스케이트보드라는 것이 없었거든…….”
나는 한국말을 잘 알아듣는 조나단을 만난 것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녀석과 이야기할 때마다 동화를 읽어 주듯이 나의 어린 시절을 말해 주곤 했다. 우리 동네에는 높은 언덕위에 일본사람들이 신사를 지어놓았던 넓은 공터가 있었다. 까만색 얇은 돌들이 널려 있어서 그것으로 단을 쌓고 놀기도 하고 동네 형들은 넓은 공터에서 볼을 차고 놀기도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제일 좋은 놀이 감은 신사까지 올라가는 백 개가 넘는 돌계단이었다.
동네 꼬마들은 나무판자를 하나씩 들고 계단꼭대기까지 올라가서 그것을 타고 삽시간에 저 아래까지 미끄러져 내려오면서 넘어지기도 하고 부딪쳐서 머리통에 밤알만 한 혹이 생기면서도 또 백 개가 넘는 계단을 걸어 올라가서는 나무판을 타고 내려오기를 마치 조나단이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놀듯이 온종일 해댔다.
여름 방학 때 곤충채집 하던 얘기, 눈 오면 동네 꼬마들이 스케이트 대신 가느다란 대나무 껍질 하나를 신발에 묶고는 산을 뱅뱅 돌면서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던 얘기, 팽이 돌리기, 딱지치기 같은 얘기를 해주면 무슨 놀이인지도 모르면서 큰 눈을 끔벅거리면서 끝까지 들어주었다. 조나단은 내가 하는 말이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나를 즐겁게 해 주려고 그냥 앞에 앉아있는 것이 분명했다.
“할아버지 컴퓨터 없어? 그런 거 보다 더 재밌는 게임 많은데!”
“컴퓨터는 없고 T.V에 만화영화 나오나 찾아볼까?”
조나단은 만화영화 보는 것도 지루해지면 다시 밖으로 나가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놀았다.
“할아버지 이거 한번 타볼래? 진짜 재밌어! 요렇게 두발 다 올려놓으면 저절로 굴러간다고, 할아버지도 한번 타봐!”
조나단은 마치 강아지가 내 다리 근처를 맴돌듯이 요리 왔다 조리 갔다 쉬지 않고 조잘대면서 내 주위를 맴돌았다. 하루 종일 피곤했는지 저녁을 먹고 T.V 앞에 앉아있던 조나단이 소파에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밤늦은 시간이 돼서야 조나단 엄마가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두드렸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매일 늦게까지 얘를 돌봐 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애가 잠이 들었군요. 잠시 들어오세요.”
조나단 엄마는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섰다.
“좀 앉으세요, 조 녀석이 어찌나 귀엽게 노는지 요즈음은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니까요!”
그녀는 소파 끝에 살짝 걸터앉았다.
“뭐 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네?”
조나단 엄마는 좀 긴장하는 눈으로 나를 건너다봤다.
“시카고에서 이리로 이사 오셨지요? 애 아빠는 한국가시고.”
“네-에, 조나단이 다 말씀드렸군요!”
좀처럼 입을 열 것 같지 않던 조나단 엄마가 조용히 시카고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손잡이가 달린 스케이트보드를 처음 만들어서 굉장한 인기를 얻어 사업을 확장해 나가던 조나단 아빠가 재미동포 친구의 권유로 조나단이 다섯 살 되던 해에 세 식구가 시카고로 투자형식으로 이주해왔다. 박 사장이라는 친구 명의로 새로운 회사를 꾸려서 사업을 시작했다. 박 사장은 육 개월도 채 안 되는 사이에 조나단 아빠의 모든 사업 비밀을 가로채가지고 중국으로 잠적해버렸다. 영주권 문제가 걸려있는 회사를 붙들고 있던 조나단 아빠는 박 사장의 개인 부채까지 떠맡게 되었고 채권자들의 눈을 피해서 조나단 엄마 친구가 산다는 캘리포니아로 피신해 왔으나 믿었던 그 친구마저도 삼 개월전에 한국으로 들어가 버린 다음이었다. 지금도 조나단 아빠는 그 배신자를 잡기 위해 중국 땅을 헤매고 있다고 했다.
“쟤 아빠가 대학 시절에 아이스 하키선수였어요, 그래서 손잡이 달린 스케이트보드를 만들어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고요. 조나단이 겨우 걸음을 시작 할 때부터 스케이트를 배워줬는데 나중에는 스케이트보드를 더 좋아하더라고요.”
“고생이 많았군요. 조나단 엄마는 무슨 일을 하고 있어요? 요즈음에는……”
그녀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더니 얼굴을 쳐들고 눈을 한참 동안 깜박여서 눈물을 지웠다.
“제가 할 줄 아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한인 타운에 있는 일본 식당에서 점심때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하다 보니 이렇게 늦어서야 돌아오곤 합니다. 아직도 조나단 아빠한테서도 아무런 연락도 없고요!”
그녀는 슬며시 일어서면서 옷깃을 당겨서 눈물을 닦았다. 조나단을 흔들어 깨웠다.
“그런 딱한 사정도 모르고 나는 애만 팽개쳐 두고 늦게 들어온다고 마음속으로 조나단 엄말 얼마나 나무라곤 했는지 몰라요! 사정 얘길 다 들었으니 이젠 좀 늦어도 걱정 말아요, 애는 여기서 자고 가도 괜찮으니까!”
잠이 덜 깬 조나단 녀석은 눈을 감은 채 엄마 등에 업혀서 건너갔다.
학교에서 돌아온 조나단이 책가방을 열고 앤디네 집 번호를 적은 종이쪽지를 꺼내 내밀었다. 조나단은 아직 팔이 불편한지 그렇게 좋아하는 점프는 안 하고 골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만 했다. 조나단이 좋아하는 스파게티로 저녁식사를 끝내고 앤디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서 스케이트보드 콘테스트에 대해 물어봤다. 오월 두 번째 토요일에 시티드라이브 20 번지에 있는 반스 스케이트팍에서 열리는데 나이별로 구분해서 경기를 진행한다고 했다.
“조나단 내일 학교 끝난 다음에 스케이트팍에 가보자, 출전 신청서도 타오고 경기방법도 자세히 알아봐야 하니까…….”
“할아버지! 운전도 못하는데 어떻게 가?”
“버스 타고 가면 되지.”
다음날 오후 조나단과 나는 버스를 세 번씩이나 갈아타고 스케이트팍을 찾아갔다. 유명한 운동화 제조업체인 반스(Vans) 회사에서 직영하는 스케이트보드 전용 경기장에는 조나단 또래 어린아이들부터 수염이 덥수룩한 어른까지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눈이 휘둥글 해 진 조나단은 어느새 이 층 베란다에 올라가서 다른 애들이 보드를 타고 재주부리는 모습을 부러운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나단 너도 한번 타보고 싶지!”
내가 천천히 조나단 뒤로 다가가서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녀석이 마치 자기 속마음을 어떻게 알았느냐는 듯이 어깨를 위쪽으로 약간 올리면서 양손을 벌려 보였다. 우리는 아래층 입구에 있는 매표소로 갔다. 10불을 지불하고 스케이트보드부터 헬멧, 엘보우, 니팻까지 모두 빌릴 수 있었다.
조나단은 너무 흥분해서 말을 잊었다. 내가 화장실 갔다 와야지 하면 말없이 쪼르륵 달려갔다가 뛰어오고 물 한 모금 마시고 시작 하는 게 좋겠다고 하면 먹기 싶지 않은 것 같은데도 얼른 물을 마시고 달려 왔다. 마치 맛있는 먹이를 손에 들고 하나씩 던져주면 얼른 받아먹고 꼬리를 흔들면서 재롱부리는 강아지 같아 보여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처음 온 곳이고 다른 사람들이 너무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어서 걱정이 되었는데 헬멧으로 머리를 감싸주고 무릎과 팔꿈치에 보호대를 감아서 완전 무장을 시켜놓고 나니 안심이 되었다.
조나단은 조금 우물쭈물하는 것 같더니 어느새 자기 또래들 사이에 끼어서 이리 밀리고 저리 몰려다니면서 스피드를 즐기고 있었다. 이쪽 언덕 출발점에서 보드 끝 부분만 남기고 두 바퀴 모두를 공중에 띄어놓고 허공을 짚는 것 같이 하더니 어느새 언덕을 내려와 전속력으로 다음 장애물을 뛰어넘고 조금 더 나가더니 레일 위로 폴짝 올라서서 끝까지 밀고 나갔다. 위층 내 옆에 서서 꼬마들의 재롱을 내려다보고 있던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면서 큰 박수를 쳐 줬다. 내가 보기에도 제일 어린 조나단이 저런 재주를 부릴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나는 얼굴 가득히 웃음을 지으면서 그들에게 답례했다. 다음은 마치 물을 다 빼버린 수영장 같은 곳으로 내려간 조나단이 다른 아이들을 따라서 이쪽 끝으로 쪼르륵 올라왔다가 내려가고 다시 반대쪽 위로 올라와서 오똑 섰다가 쪼르륵 내려 가곤 했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시원한 마운틴듀를 한 병 꺼냈다. 조나단을 불러내서 잠시 쉬게 했다. 스케이트팍 매니저가 내게 다가오더니 조나단을 칭찬해 주면서 일 년 회원권을 선물로 주었다. 오월 두 번째 토요일에 있을 콘테스트에 열 살 아래 부문에 꼭 출전시키라고 했다. 조나단은 잠시를 못 참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아이들과 몰려다니면서 스케이트보드를 즐기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조나단의 실력을 내 눈으로 확인했는데 이제 나는 이 녀석의 후원자 역할을 확실히 해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우선 스케이트보드부터 훑어봤다. 좋은 것은 300 여 불부터 최소한 백 불은 주어야 살 수 있었다. 헬멧이 40불, 무릎과 팔꿈치 보호대가 20불 정도였다. 노란색 티 샤스와 파란색 통 넓은 반바지를 골라놓았다.
조나단을 불러냈다. 땀을 빨빨 흘리면서도 아직 아쉬움이 남았는지 그동안에 사귄 친구들과 주먹을 마주 대면서“Bye! Bye! See you next time!”하면서 아쉬워했다.
“조나단 너 콘테스트 나가면 Win 할 자신 있어?”
내가 대답이 뻔 한 질문을 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조나단이 마운틴듀 병을 입에 대고 머리를 까딱까딱 해 보였다.
“그러면 할아버지가 스케이트보드, 헬멧, 엘보우, 니팻, 다 사줄까?”
조나단이 선뜻 대답을 안 했다.
“왜? 싫어서 그래?”
녀석이 나를 빤히 올려다보면서 머리를 옆으로 흔들었다.
“사 줄까? 말까?”
그때 조나단이 힘없이 한마디 했다.
“할아버지! 꼭 Win 해야 해?”
나는 아차 실수했구나 하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조건 이겨야 한다, 지면 네가 책임져야 된다는 식으로 아이들을 윽박지르면서 억압해 왔고 그래야만 있는 힘을 다해 남을 밀어내고 승리자가 된다고 아이들에게 강요해 왔지 않는가? 언제 조나단이 나에게 콘테스트에 나가서 우승할 테니 뭐, 뭐를 사달라고 한마디라도 요구했단 말인가? 갑자기 대답할 말을 잊어버렸다.
“아 ~ 아니 할아버지는 네가 잘하라고 한마디 해 본거란다. 네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되는 거야! Do your best!”
갑자기 조나단이 큰아이같이 느껴졌다. 여덟 살짜리 코흘리개 어리광쟁이가 아닌 당당한 인격체로 내 앞에 떡 버티고 선 녀석이 정말 대견스러워졌다.
“자~ 할아버지가 조나단 좋아하는 거로 사 줄 테니까 네가 골라봐!”
알록달록한 색깔이 들어간 헬멧이 걸려있는 진열대 앞으로 갔다.
“빨간색이 예쁘지 않니?”
“싫어! 파란색이 더 좋아!”
내가 점원에게 조나단 머리에 맞는 파란색 헬멧을 골라달라고 했다. 또 엘보우와 니패드도 함께 샀다.
“조나단, 스케이트보드도 사줄까?”
각종 무늬로 장식된 보드들이 한 벽을 온통 차지하고 있었다. 조나단이 뛰어가서 보드 한 개를 집어 들더니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보드를 뒤집어놓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바퀴를 돌려봤다. 짜르르르 짜르르르 베어링 굴러가는 소리가 조용하게 들렸다. 얼른 옆에 내려놓고는 다른 것을 가져다 엎어놓고 또 바퀴를 굴려보더니 마음에 무슨 결심을 한 듯이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저 녀석이 혹시 비싼 것을 골라잡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됐다. 조금 전에도 꽤 난처한 질문에 당황 했었는데 다 사준다고 백기를 펄럭여놓고 또 다른 변명을 늘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할아버지!”
“응 그걸로 사줄까?”
“아니, 이거 말고… 저… 바퀴만 바꿔주면 안 돼? 보드는 내 꺼가 더 좋아!”
“바퀴만 바꿔 줘? 어떻게? 저기 아저씨한테 물어보자.”
카운터 안쪽에 있는 젊은이에게 물어봤다. 녀석이 뭐라고 떠듬떠듬 집에 있는 자기 스케이트보드를 설명하니까 점원이 다음에 올 때 보드를 가져오면 십분 이내에 바퀴를 달아 줄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 온 길을 버스를 세 번씩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래간만에 너무 멀리 나들이를 해서 그런지 머리가 띵하고 몸에 열이 있는 것 같았다. 홍 간호사가 오려면 삼일은 더 기다려야 했다. 다음날 아침에는 온몸이 나른하고 움직이기가 싫었다. 오후에 조나단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학교 잘 갔다 왔냐?”
내가 의자에 앉은 채로 녀석에게 말했다. 좀 이상한지 내 의자 근처를 맴돌면서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얘야 오늘은 할아버지가 좀 피곤해서 그러는데 식탁 위에 있는 쿠키하고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 꺼내먹고 나가서 놀아라.”
“네!”
조나단은 오늘 보드 밑바닥에 달린 바퀴를 바꾸러 스케이트팍에 갈 것으로 생각하고 부지런히 집으로 왔을 텐데 내가 나설 수가 없게 되었으니 어찌한단 말인가? 우선 홈 헬스 캐어 사무실 홍 간호사에게 연락했다. 두 번 세 번 전화를 해도 연락이 안 됐다. 집안을 맴돌던 조나단은 밖에 나가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앤디 아빠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여보세요, 앤디네 집이죠, 네, 여기 조나단 할아버진데요, 앤디아빠 언제쯤 퇴근합니까? 네? 출장이요? 이번 주말에요? 네~ 아니 별일 아니고요, 또 전화드릴께요, 네, 네!”
-저 녀석이 속으로 안달이 났을 텐데, 누굴 보내서 바퀴를 바꿔주나?― 공연히 내 마음까지 답답해지고 머리가 무거워졌다. 그때 홍 간호사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이고 미안해요 바쁜 사람한테 전화해서, 눈이 잘 안 보이고 열이 좀 나는 것 같아, 팔다리에 힘도 없고, 응, 약은 다 차례대로 먹었지! 어제 밖으로 한 바퀴 돌고 왔더니 그래, 집에 다 왔는데 갑자기 현기증이 나더라고, 시티드라이브에 있는 스케이트 팍, 버스 타고 갔지… 온다고, 언제? 이따가? 미안해서 그래, 고마워!”
밖에서 따르르르 따르르르 스케이트보드 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소파에 기댄 채로 잠깐 동안 잠이 들었었나보다. 현관 벨 소리에 깨어나서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언제 왔는지 홍 간호사가 서 있었다.
“할아버지 그런데 가시려면 나한테 먼저 알려주시기로 했잖아요! 혈압하고 당이 지금보다 조금만 더 올라가도 병원에 들어가셔야 된다고요~ 제발 조심하세요. 그리고 어디 가시고 싶으시면 제가 OCTA(오렌지 교통국)에 연락해서 버스 보내 드릴게요. 저한테 꼭 연락해야 돼요 아셨죠.”
홍 간호사가 팔뚝에 수액을 꽂아주고 튜브에 필요한 약들을 골고루 넣어 주었다. 사르르 잠이 오는 것 같았다. 홍 간호사가 조나단을 부르는 소리가 저만치에서 가물가물 들리는 것 같았다.
토요일에 미니버스가 우리를 스케이트팍까지 태워다주었다. 조나단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자기 스케이트보드를 들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내가 스케이트센타 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조나단 스케이트에 달렸던 오래된 바퀴는 벌써 떼어내고 새것을 고르고 있었다.
“할아버지 이거 한국 베어링이래, 제일 좋은 거래, 한 개에 15불씩이래, 나 이걸로 바꿔줘!”
“그러렴. 네가 좋으면 그걸로 바꿔 줘야지!”
점원이야기로는 조나단이 갖고 있는 보드는 페나릭 화이버그래스로 만든 프로급들이 사용하는 최고급 보드라고 했다. 그리고 꼬마 녀석이 제일 비싼 바퀴로 바꿔달라고 해서 영감님 허락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조나단은 새 바퀴를 바꿔달고는 신이 나서 친구들과 점프도하고 레일도 타면서 토요일 오후를 마음껏 즐겼다. 우리는 미니버스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조나단, 누가 그런 고급 스케이트보드를 사줬니?”
“아빠가, 시카고에서.”
이제 콘테스트가 삼일 앞으로 다가왔다. 조나단은 학교가 끝나고 나면 쏜살같이 뛰어와서는 반스 스케이트장으로 가자고 졸라댔다. 홍간호사가 준 버스표도 오늘 쓰면 마지막이었다.
-그래 시합하는 날은 택시를 불러 타고 가기로 하자 -
조나단과 나는 반스 스케이트센타로 가는 미니버스에 올랐다. 한 주 동안에 세 번씩이나 외출을 한 셈이니 홍 간호사가 알면 또 잔소리를 해 댈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조나단의 성화를 이겨낼 재간은 없었다. 앤디는 엄마와 함께 왔다. 앤디 엄마는 나를 조나단의 친할아버지로 알고 있었다. 앤디는 내가보기에도 조나단의 상대가 되지못했지만 열심히 조나단 뒤를 따라다녔다.
“조나단 할아버지는 참 좋으시겠어요! 열 살 미만 구릅에서는 조나단이 우승할 거라고 다들 이야기하던데요, 우리 앤디는 운동신경이 무뎌서 등수에도 못 들것 같아요. 그래도 제가 좋아하니까 끝까지 시켜는 봐야죠, 뭐.”
젊은 여자인데도 펑퍼짐한 몸매에 말 수가 많은 것이 앤디가 제 엄마를 많이 닮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앤디 엄마 시합하는 날 말인 데요, 우리 조나단 좀 부탁하면 안 될까요? 내가 운전을 못해서 그래요, 출전하는 선수들은 좀 일찍 오라던데, 앤디 올 때 같이 좀 태워 주실 수 없을까요?”
“네 그렇게 하세요, 어차피 오는 길인데요 뭐, 아 참! 오늘 집에 가실 때 내차타고 가세요, 집도 알아 둘 겸해서요.”
앤디 엄마는 귀찮은 부탁을 하는데도 아주 시원스럽게 대답해 주었다. 땀을 빨빨 흘리는 조나단과 나는 앤디 엄마 차 뒷자리에 올라탔다. 버스를 탈 때는 자리가 넓고 공기가 잘 통해서 견딜 만 했는데 조그만 일제차 뒷자리가 몹시 불편했다. 아직도 프리웨이를 탈 줄 모른다고 하면서 일반도로를 이용해서 집까지 왔다. 차가 신호등 앞에 정지할 때마다 어찌나 출렁거리는지 멀미가 났다. 구토증이 일어나는 것을 가까스로 참고 집 근처까지 왔는데 갑자기 식은땀이 나면서 정신이 혼미해졌다.
“조나단 어디가 너희 집이니?”
앤디 엄마가 어두운 골목길로 들어서면서 물었다. 조나단은 자기 집을 지나서 내 집 앞에 차를 세워달라고 했다. 겨우 차에서 내려서서 현관 문고리에 키를 꽂고 있는데 앤디 엄마는 차를 한 바퀴 돌리고 “Bye! Good Night!”하면서 골목 저쪽으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방에 들어서자 마음이 놓여서 그랬는지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면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갑자기 목구멍 밑으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오고 가슴이 조여들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어디 아파? 홍 아줌마 불러올까?”
조나단이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조나단 난 괜찮으니 너무 서둘지 말고 내 말 대로해라! 전화로 911 다이얼을 돌려줘 지금!”
조나단이 쪼르륵 전화기 앞으로 가더니 수화기를 들고 911을 돌렸다.
“조나단 거기 그린 색 단추를 눌러라, 스피커로 돌려놔~”
조나단이 그린 단추를 누르니 상대편에서 여자 음성이 들렸다.
“I need Doctor!”
내가 겨우 한마디 했다. 저쪽에서 여러 가지를 물어도 별 신통한 대답이 없자‘전화기를 그대로 열어놓고 기다리라’고 했다. 조금 기다리고 있는데 벌써 구급차 오는 소리가 멀리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는 것 같이 답답한 것이 숨이 막혀왔다. 그러나 머리는 투명해지는 것 같이 맑아졌다. 조나단은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고 화장실로 뛰어가서 수건을 들고 왔다. 겁을 잔뜩 먹은 동글한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할아버지!”
수건에 어름을 싸가지고 머리 위에 올려놔 주었다.
“조나단 저기 현관문을 활짝 열어 놓고 밖에 불도 켜 놔라”
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나단이 현관문을 열어놓고 돌아서는데 벌써 빨간 불자동차가 집 앞에 도착했다. 너 댓 명의 소방서원들이 방안으로 몰려들어오더니 나를 반듯이 눕혀놓고 산소마스크를 씌우고 주사를 놔주었다. 심장 조여드는 것이 조금 풀리면서 사르르 잠이 왔다.
아침에 조나단 엄마가 병실로 찾아왔다.
“할아버지 좀 어떠세요? 그동안 조나단 때문에 너무 과로하셨어요. 의사 선생님 말로는 이삼일 더 병원에 계셔야 된다고 했어요.”
“오늘이 조나단 콘테스트가 열리는 날이지! 어떻게 가기로 했나 모르겠네? 내가 앤디 엄마한테 부탁은 해 놨는데……”
“할아버지 염려 안 하셔도 돼요! 제가 데리고 가야죠, 집에 가서 조나단 준비시켜가지고 시합 잘하고 올게요. 몸조리 잘하고 계세요.”
종종걸음으로 병실을 빠져나가는 조나단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서 함께 가서 응원 못해주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 힘내라 조나단! 이 할아버지가 여기서라도 응원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
(文)
골목대장
최 문 항
4월 중순인데 빅베어 높은 산에 눈이 내렸다. 지구 온난화 현상은 이제 코앞에 닥쳐온 것 같다. 그래도 변덕스러운 날씨를 살짝 피해서 작년에 할망구가 심어 논 제라니움이 앞마당을 빨갛게 장식해 놓았다. 할망구가 있었으면 오늘 같은 날씨에는 근처 공원에라도 슬슬 나가 보는 건데 이제는 다 틀려버렸다. 운전도 못 하는 나만 덩그렇게 이 큰집에 남겨놓고 훌쩍 가버렸으니 나는 어쩌란 말인가? 남들은 집 팔아버리고 노인 아파트로 옮기라고 하지만 어떻게 이 집을 떠날 수가 있느냐 말이다. 한국 떠나서 제일 오fot동안 산 곳이 여기고 또 집이야 볼품없지만 할망구 손톱이 빠지게 밀고 닦아놓은 집안 살림하며 사철 열매를 따먹던 과일나무들과 앞 뒷마당에 심어놓은 가지각색의 꽃들, 선인장은 아직도 할망구 냄새가 그대로 나는데 어떻게 여길 떠난단 말인가?
30년 전에 이 동네로 이사 올 때 만해도 나지막한 동산 안쪽으로 폭 싸인 언덕 아래 자리 잡은 우리 집은 꼭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남산 밑의 조용한 동네 같았었는데 뒷산 쪽으로 큰길이 뚫리고 고래 등 같은 집들이 차곡차곡 들어서면서 북적거리더니 주변의 아는 사람들이 하나 둘 이사가 버리고 어느새 이 동네는 완전히 멕시칸들이 점령해 버렸다.
아직 서너 집 한국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다행이다. 우리 집은 오래되고 많이 낡았어도 막힌 골목 안에 있어서 조용한 편이다. 옆집 김 씨네가 뒷방을 세놓는다고 하더니 젊은 여자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리고 이사를 왔다. 김 씨네는 가게를 아침 일찍 열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세든 사람들은 옆문으로 드나들었는데 그들이 이사 온 날부터 골목 안이 시끄러워 졌다.
이 골목에 새 식구가 된 꼬마 녀석이 따라락 따라락 소리를 내면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골목길을 누비고 다녔다. 내가 안 내다보는 사이에 넓고 조금 경사진 내 집 차고 앞까지 쳐들어와서는 잠시도 쉬지 않고 오르락내리락했다. 저러다 지치면 그만 두겠지 하고 내버려 뒀는데 나중에는 잔디밭을 막아놓은 나지막한 벽돌 위로 폴짝 뛰어올라서 졸졸졸 내려가다가 끝에 쯤 오면 깡충 뛰어내리곤 했다. 처음에는 그놈 재주가 놀랍고 귀여워서 유리창 너머로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는데 몇 번을 잘 타고 내리던 녀석이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졌다. 애가 워낙에 조그마해서 그런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톡톡 털고 일어나서 또 뛰어오르고 미끄러지기를 쉬지 않고 했다. 이사 온 첫날에는 아무 말 않고 내 버려뒀었는데 녀석은 학교 갔다 돌아오면 스케이트보드 타는 것 말고는 하는 일이 없었다. 저러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집 보험으로 해결해 줘야 할 텐데 꼬마 녀석은 꼭 우리 집 앞에만 와서 놀았다.
- 저놈이 우리 마당에서 넘어져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이 시간에 골목 안에는 저 녀석하고 나밖에 없는데! 나가서 야단을 칠까? 아니지 차고 앞을 막아버리면 되겠군!―
나는 뒷마당에 있는 종이상자들을 차고 앞에 한 줄로 나란히 내다놓았다. 녀석이 안쪽을 힐끔 들여다보는 것 같더니 종이상자를 슬쩍 밀어버리고 그사이를 요리조리 꼬불꼬불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돌아다녔다. 마치 좁은 어항 안에 금붕어가 이쪽으로 왔다가 금방 방향을 바꿔서 저쪽으로 가는 것처럼 상자 사이를 쉬지 않고 돌아다녔다. 녀석이 목이 마른 지 잠시 자기 집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손가락 굵기의 밧줄을 찾아서 왼쪽 팜 추리 밑동에 매고 반대쪽 단풍나무가지까지 끌고 가서 단단히 매버렸다.
-요놈 이제는 우리 앞마당에 못 들어오겠지! 이렇게 해놨는데도 들어오면 야단을 쳐서 내 쫓아 버려야지.―
녀석은 스케이트보드를 그냥 밖에 버려둔 채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안 나타났다.
-혹시 내가 줄까지 쳐놓아서 안 나오는 걸까?― 은근히 녀석이 궁금해졌다. 나는 이 층으로 올라가서 옆집 뒷마당을 내려다봤다. 녀석은 거기 없었다. 밖으로 나가서 옆집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봤다. 녀석은 땀을 빨빨 흘리면서 큰 김치 병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안에는 도마뱀이 여러 마리 있었고 무슨 먹이를 주었는지 뒤엉켜있는 도마뱀을 관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녀석이 어디 가지 않고 다른 짓을 하는 것을 보니 안심이 됐다.
나도 뒷마당에 득실대는 도마뱀이나 잡아볼까 해서 김치병을 찾아놓고 도마뱀을 쫓아다녀 봐도 나에게 잡혀줄 멍청한 놈은 없었다. 공연히 덥고 목이 말랐다. 안으로 들어와서 라디오를 켰다. 한국에서 어느 재벌총수가 아들 역성든다고 폭력배를 끌고 다녔다고 야단들이었다.
갑자기 밖에서 따라락 따라락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뭔가 기다리던 소식을 받은 것 같은 반가운 마음이 들면서 얼른 창가로 달려갔다. 녀석이 상자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더니 이번에는 몸을 낮추고 밧줄 밑을 지나갔다. 저쪽 끝으로 달려가더니 단풍나무에 맨 밧줄을 느슨하게 풀러 놓았다. 다시 힘차게 발을 굴러 위쪽으로 올라오더니 이번에는 스케이트보드를 밧줄 밑으로 슬쩍 밀어놓고 녀석은 밧줄 위로 깡충 뛰어올라 다시 스케이트보드 위로 올라서려고 했다. 보드 끝에 발이 걸리는 것 같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이코 저놈 다쳤겠다.”
나도 모르게 밖으로 뛰어나가려는데 녀석은 아무러치도 않은 듯이 일어나서 다시 위쪽으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열 번인지 스무 번인지 셀 수도 없이 넘어지면 일어나곤 하면서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매일 할 일이 없어서 라디오나 끼고 살던 나는 꼬마가 이 골목에 나타난 다음부터는 녀석이 학교를 끝내고 집에 돌아오기 전까지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을 대강 끝내놓고 창가에 끌어다 놓은 의자에 가 앉아서 녀석을 기다리곤 했다. 거리를 둥근 솔 같은 바퀴로 쓸고 지나가는 청소차를 보니 녀석이 이사 온 지도 벌써 한 주가 지나갔다. 그날 이삿짐 실은 차가 차도에서 짐을 내리다가 티켓을 받을 뻔했던 기억이 났다.
김 씨네 부부는 늘 밤늦은 시간이 되어야 마켓 문을 닫고 들어왔다. 녀석 엄마도 아침에 학교 갈 때나 잠깐 볼 수 있을 뿐 그 집에는 저 녀석 혼자만 있었다. 나는 어린애를 저렇게 혼자 있게 하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는 공연한 걱정까지 하게 되었다. 그래도 외톨이 같지 않게 혼자 잘 놀고 있는 것을 보면 아주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아주 능숙하게 밧줄 밑을 지나서 다시 스케이트보드에 올라서는 재주를 부리는 녀석을 보면서 나 혼자 박수를 치곤 했다. 녀석이 줄 위로 사뿐히 날아오르는 것 같더니 줄에 발이 걸렸는지 저쪽으로 나동그라졌다. 나는 녀석이 일어나주길 바라면서 무심히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녀석은 얼굴을 찡그리고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다. 자세히 보니 눈에는 굵은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나는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얘야! 너 어디 다쳤니?”
내가 허리를 꾸부리고 녀석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녀석은 뒤통수가 톡 튀어나오고 이마가 반듯한 것이 영리해 보였다. 눈망울이 크고 흰자위는 푸른색이 감돌고 발그스래 한 볼이 귀여웠다. 녀석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도 아니라는 듯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내가 손을 잡아 일으켜 주려는데 손가락으로 자기 왼쪽 팔목을 가리켰다. 새까맣게 햇볕에 그을린 가는 손목이 애처로워 보였다. 손목을 살짝 잡아보았다. 그때서야‘아야!’소리를 내면서 건드리지 못 하게 다른 손으로 막았다.
내가 걱정하던 일이 드디어 일어나고 만 것이다. 분명히 많이 다친 것 같은데 911을 부를 수도 없고 나는 운전을 못 하는데, 주변엔 도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또 사고를 경찰이 알게 되면 녀석 엄마는 모르긴 몰라도 아동 방치 죄목으로 곤경에 처할 수도 있겠고 또 녀석도 다른 보호자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것이 뻔했다. 우선 꼬마 녀석을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시원한 콜라한잔을 먹이고 나니 좀 안정이 되는지 아무 말도 없이 눈만 끔벅이고 앉아 있었다.
“너 이름이 뭐냐? 나는 송 할아버지란다. 그냥 할아버지라고 불러도 돼!”
“조나단…….”
“엄마 전화번호 알고 있지? 몇 번이냐?”
녀석은 엄마한테 교육을 잘 받았는지 번호를 말 안 했다.
“조나단 엄마한테 빨리 오라고 말해야 되는 거야, 이 할아버지는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어요! 내가 엄마하고 이야기를 해야 너를 병원에 데리고 가든지 어떻게 하지, 엄마전화번호 몇 번이지?”
“......”
녀석은 대답을 안했다. 그때 현관문의 벨 소리가 울렸다. 문을 열어보니 매주 한 번씩 나의 당 조절을 위해 홈헬스캐어센터에서 보낸 홍 간호사가 서 있었다.
“아이고 어서 오세요, 마침 잘 오셨어요. 나보다도 저 녀석이 넘어져서 팔을 다쳤는데 어떻게 해 줘야 되는지 몰라서 이러고 있는데 참 잘 오셨어요!”
“얜 누군데요? 할아버진 친척이 없다고 했잖아요……. 그놈 아주 잘 생겼네, 어디가 아프니?”
할망구 있을 때부터 우리 집을 찾아주던 홍 간호사는 녀석이 내 손자라도 되는 줄 알고 조나단에게로 다가섰다.
“옆집에 이사 온 아인데 지금 아무도 없어서 내가 돌봐주고 있어요, 팔을 다친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될지 원~”
“부모허락 없이는 치료해 줄 방법이 없는데……”
내가 아는 대로 대강 설명을 해주고 홍 간호사에게 어떻게든 치료해 달라고 부탁했다.
“글쎄 이 녀석이 엄마하고 단단히 약속을 했는지 엄마 번호를 안 알려 주지 뭡니까? 사정이 딱한 것은 알겠는데 이 어린것을 늘 혼자 놀게 하곤 밤늦게야 들어오니……”
홍 간호사가 조나단을 잘 달래서 손목을 만져봤다. 다행히 골절은 아니었고 근육이 잘못된 것이라서 병원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차에 가지고 다니는 구급약 상자를 들고 들어와서 왼쪽 팔목에 무슨 연고를 잔뜩 바르고 수축 붕대를 두툼하게 감아주었다.
조나단과 함께 스파게티를 만들어서 맛있게 먹었다. 밤 열 시가 되어서야 조나단 엄마가 돌아왔다. T.V를 보고 있던 녀석은 밖에서 나는 차 소리를 듣고 자기 엄마가 돌아온 것을 알아차리고는 고맙단 인사도 없이 문을 열고 쏜살같이 자기 집으로 가버렸다.
다음날 아침 조나단 엄마가 나를 찾아왔다. 자그마한 키에 화장기 없는 얼굴이 깨끗해 보였다. 머리를 절하듯이 깊숙이 숙여 인사를 하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고맙다는 말을 했다. 조나단 엄마를 보는 순간 나는 그녀의 처지가 어떠하든 관계없이
- 왜 아이만 팽개쳐두고 다니느냐? 아동 학대죄를 아느냐? 뭐 해먹고 사느냐? 애 점심, 저녁은 먹이고 있느냐? 언제까지 이렇게 늦게 들어올 것이냐? 등-
많은 질문을 한꺼번에 눈으로 묻고 있었다. 얼떨결에 문을 열어 잡고 인사만 받고 서 있는 나에게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내가 아무 말도 않고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다시 머리를 숙여서 인사를 하고는 돌아가 버렸다.
학교에서 돌아온 조나단은 팔에 붕대를 감은 채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천천히 골목길 어귀까지 갔다가 돌아오고 또 골목길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녀석이 이제는 우리 집 앞마당에는 안 오기로 작정한 것일까? 어제 사고 이후 애가 갑자기 기가 팍 꺾인 것 같았다. 나는 앞마당에 설치했던 장애물들을 다 치워 버렸다. 이쪽으로 오고 있던 조나단이 서너 발치 떨어진 곳에서 멈춰서더니 다시 스케이트보드 뒤꿈치를 살짝 누르고 빙그르르 방향을 돌려서 길 저쪽으로 가버렸다. 나는 차고 문을 열어놓고 잡동사니들을 끄집어냈다. 별로 쓸데없는 물건들이지만 차마 버릴 수도 없어서 쌓아놓은 것들인데 바닥에 있는 것을 선반 위로 올려놓고 물청소를 시작했다. 언제 돌아왔는지 조나단이 스케이트보드를 옆구리에 끼고 내 뒤에 서서 차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이! 조나단 점심은 먹었냐?”
“……”
녀석은 말없이 머리를 흔들고 서있었다.
“물청소 좀 도와주면 내가 맛있는 샌드위치 만들어주지, 어때 물 좀 뿌려 줄 테냐?”
조나단이 스케이트보드를 잔디 위에 휙 집어던지더니 차고 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대강 안쪽을 정리하고 물 호스를 조나단에게 건네주면서 차고 바깥 시멘트에 물을 뿌리도록 시켰다. 물청소를 끝내고 방으로 들어왔다.
“조나단 학교는 재미있어? 전에는 어디 살았어? 여기 오기 전에 말이야.”
내가 샌드위치를 만들면서 말을 시켜봤다. 녀석은 역시 대답이 없다. 콜라와 샌드위치를 내밀자 잠시 머뭇거리더니 받아들었다. 눈을 감고 오른손으로 성호를 긋고 나서야 식사를 시작했다.
“조나단은 스케이트보드를 아주 잘 타던데 어디서 배웠어?”
샌드위치를 입안에 잔뜩 물고 오물거리다가 목이 메는지 콜라를 한 모금 삼켰다.
“시카고에서, 아빠가…….”
나는 옳다구나 하고 조나단의 말꼬리를 붙잡았다.
“아빠는 시카고 있어?”
녀석은 잠시 망설이더니
“아니 한국 갔어.”했다.
공연히 어린애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걱정이 됐다.
“조나단, 학교 갔다 집에 오면 할아버지한테 건너 와서 놀아, 이 할아버지도 혼자 있으니까 심심하거든.”
우리는 뒷마당으로 나갔다. 조나단은 어느새 도마뱀 한 마리를 잡아서 손위에 올려놓고 놀고 있었다.
“조나단은 한국말을 아주 잘해서 할아버지는 정말 좋단다.”
녀석 마음이 좀 풀렸는지 웃기도 하고 대답도 잘했다.
“할아버지 영어 잘해? 나 숙제해야 하는데”
“그럼, 할아버지는 미국에 오래 살아서 웬만한 영어는 다 잘하지! 얼른 숙제할 거 가지고와!"
조나단은 신이 나서 자기 집으로 달려가더니 책가방을 들고 다시 건너왔다.
“할아버지, 우리 학교에 앤디라는 한국 애가 있는데 걔는 오렌지 스케이트보드 시합 나간 데, 근데 걔는 점프도 잘못해, 나도 시합 나가면 좋겠는데!”
“그래? 언제 하는데 어디서 하는지 알아?"
녀석이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얼굴을 조금 왼쪽으로 돌리고 한쪽 눈을 옆으로 뜨면서 생각하는척했다.
“잘 몰라.”
“내일 학교 가면 앤디한데 물어봐, 음, 그러지 말고 앤디네 전화번호 꼭 적어 와야 한다. 할아버지가 앤디아빠한테 물어보면 되니까, 알았지!”
이제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으레 우리 집으로 와서 숙제도 하고 점심도 나와 같이 먹었다.
“조나단 옛날이야기 해줄까?”
“네, 무서운 거 말고 재미있는 얘기해주세요.”
“할아버지가 조나단만 할 때는 스케이트보드라는 것이 없었거든…….”
나는 한국말을 잘 알아듣는 조나단을 만난 것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녀석과 이야기할 때마다 동화를 읽어 주듯이 나의 어린 시절을 말해 주곤 했다. 우리 동네에는 높은 언덕위에 일본사람들이 신사를 지어놓았던 넓은 공터가 있었다. 까만색 얇은 돌들이 널려 있어서 그것으로 단을 쌓고 놀기도 하고 동네 형들은 넓은 공터에서 볼을 차고 놀기도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제일 좋은 놀이 감은 신사까지 올라가는 백 개가 넘는 돌계단이었다.
동네 꼬마들은 나무판자를 하나씩 들고 계단꼭대기까지 올라가서 그것을 타고 삽시간에 저 아래까지 미끄러져 내려오면서 넘어지기도 하고 부딪쳐서 머리통에 밤알만 한 혹이 생기면서도 또 백 개가 넘는 계단을 걸어 올라가서는 나무판을 타고 내려오기를 마치 조나단이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놀듯이 온종일 해댔다.
여름 방학 때 곤충채집 하던 얘기, 눈 오면 동네 꼬마들이 스케이트 대신 가느다란 대나무 껍질 하나를 신발에 묶고는 산을 뱅뱅 돌면서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던 얘기, 팽이 돌리기, 딱지치기 같은 얘기를 해주면 무슨 놀이인지도 모르면서 큰 눈을 끔벅거리면서 끝까지 들어주었다. 조나단은 내가 하는 말이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나를 즐겁게 해 주려고 그냥 앞에 앉아있는 것이 분명했다.
“할아버지 컴퓨터 없어? 그런 거 보다 더 재밌는 게임 많은데!”
“컴퓨터는 없고 T.V에 만화영화 나오나 찾아볼까?”
조나단은 만화영화 보는 것도 지루해지면 다시 밖으로 나가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놀았다.
“할아버지 이거 한번 타볼래? 진짜 재밌어! 요렇게 두발 다 올려놓으면 저절로 굴러간다고, 할아버지도 한번 타봐!”
조나단은 마치 강아지가 내 다리 근처를 맴돌듯이 요리 왔다 조리 갔다 쉬지 않고 조잘대면서 내 주위를 맴돌았다. 하루 종일 피곤했는지 저녁을 먹고 T.V 앞에 앉아있던 조나단이 소파에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밤늦은 시간이 돼서야 조나단 엄마가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두드렸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매일 늦게까지 얘를 돌봐 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애가 잠이 들었군요. 잠시 들어오세요.”
조나단 엄마는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섰다.
“좀 앉으세요, 조 녀석이 어찌나 귀엽게 노는지 요즈음은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니까요!”
그녀는 소파 끝에 살짝 걸터앉았다.
“뭐 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네?”
조나단 엄마는 좀 긴장하는 눈으로 나를 건너다봤다.
“시카고에서 이리로 이사 오셨지요? 애 아빠는 한국가시고.”
“네-에, 조나단이 다 말씀드렸군요!”
좀처럼 입을 열 것 같지 않던 조나단 엄마가 조용히 시카고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손잡이가 달린 스케이트보드를 처음 만들어서 굉장한 인기를 얻어 사업을 확장해 나가던 조나단 아빠가 재미동포 친구의 권유로 조나단이 다섯 살 되던 해에 세 식구가 시카고로 투자형식으로 이주해왔다. 박 사장이라는 친구 명의로 새로운 회사를 꾸려서 사업을 시작했다. 박 사장은 육 개월도 채 안 되는 사이에 조나단 아빠의 모든 사업 비밀을 가로채가지고 중국으로 잠적해버렸다. 영주권 문제가 걸려있는 회사를 붙들고 있던 조나단 아빠는 박 사장의 개인 부채까지 떠맡게 되었고 채권자들의 눈을 피해서 조나단 엄마 친구가 산다는 캘리포니아로 피신해 왔으나 믿었던 그 친구마저도 삼 개월전에 한국으로 들어가 버린 다음이었다. 지금도 조나단 아빠는 그 배신자를 잡기 위해 중국 땅을 헤매고 있다고 했다.
“쟤 아빠가 대학 시절에 아이스 하키선수였어요, 그래서 손잡이 달린 스케이트보드를 만들어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고요. 조나단이 겨우 걸음을 시작 할 때부터 스케이트를 배워줬는데 나중에는 스케이트보드를 더 좋아하더라고요.”
“고생이 많았군요. 조나단 엄마는 무슨 일을 하고 있어요? 요즈음에는……”
그녀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더니 얼굴을 쳐들고 눈을 한참 동안 깜박여서 눈물을 지웠다.
“제가 할 줄 아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한인 타운에 있는 일본 식당에서 점심때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하다 보니 이렇게 늦어서야 돌아오곤 합니다. 아직도 조나단 아빠한테서도 아무런 연락도 없고요!”
그녀는 슬며시 일어서면서 옷깃을 당겨서 눈물을 닦았다. 조나단을 흔들어 깨웠다.
“그런 딱한 사정도 모르고 나는 애만 팽개쳐 두고 늦게 들어온다고 마음속으로 조나단 엄말 얼마나 나무라곤 했는지 몰라요! 사정 얘길 다 들었으니 이젠 좀 늦어도 걱정 말아요, 애는 여기서 자고 가도 괜찮으니까!”
잠이 덜 깬 조나단 녀석은 눈을 감은 채 엄마 등에 업혀서 건너갔다.
학교에서 돌아온 조나단이 책가방을 열고 앤디네 집 번호를 적은 종이쪽지를 꺼내 내밀었다. 조나단은 아직 팔이 불편한지 그렇게 좋아하는 점프는 안 하고 골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만 했다. 조나단이 좋아하는 스파게티로 저녁식사를 끝내고 앤디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서 스케이트보드 콘테스트에 대해 물어봤다. 오월 두 번째 토요일에 시티드라이브 20 번지에 있는 반스 스케이트팍에서 열리는데 나이별로 구분해서 경기를 진행한다고 했다.
“조나단 내일 학교 끝난 다음에 스케이트팍에 가보자, 출전 신청서도 타오고 경기방법도 자세히 알아봐야 하니까…….”
“할아버지! 운전도 못하는데 어떻게 가?”
“버스 타고 가면 되지.”
다음날 오후 조나단과 나는 버스를 세 번씩이나 갈아타고 스케이트팍을 찾아갔다. 유명한 운동화 제조업체인 반스(Vans) 회사에서 직영하는 스케이트보드 전용 경기장에는 조나단 또래 어린아이들부터 수염이 덥수룩한 어른까지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눈이 휘둥글 해 진 조나단은 어느새 이 층 베란다에 올라가서 다른 애들이 보드를 타고 재주부리는 모습을 부러운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나단 너도 한번 타보고 싶지!”
내가 천천히 조나단 뒤로 다가가서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녀석이 마치 자기 속마음을 어떻게 알았느냐는 듯이 어깨를 위쪽으로 약간 올리면서 양손을 벌려 보였다. 우리는 아래층 입구에 있는 매표소로 갔다. 10불을 지불하고 스케이트보드부터 헬멧, 엘보우, 니팻까지 모두 빌릴 수 있었다.
조나단은 너무 흥분해서 말을 잊었다. 내가 화장실 갔다 와야지 하면 말없이 쪼르륵 달려갔다가 뛰어오고 물 한 모금 마시고 시작 하는 게 좋겠다고 하면 먹기 싶지 않은 것 같은데도 얼른 물을 마시고 달려 왔다. 마치 맛있는 먹이를 손에 들고 하나씩 던져주면 얼른 받아먹고 꼬리를 흔들면서 재롱부리는 강아지 같아 보여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처음 온 곳이고 다른 사람들이 너무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어서 걱정이 되었는데 헬멧으로 머리를 감싸주고 무릎과 팔꿈치에 보호대를 감아서 완전 무장을 시켜놓고 나니 안심이 되었다.
조나단은 조금 우물쭈물하는 것 같더니 어느새 자기 또래들 사이에 끼어서 이리 밀리고 저리 몰려다니면서 스피드를 즐기고 있었다. 이쪽 언덕 출발점에서 보드 끝 부분만 남기고 두 바퀴 모두를 공중에 띄어놓고 허공을 짚는 것 같이 하더니 어느새 언덕을 내려와 전속력으로 다음 장애물을 뛰어넘고 조금 더 나가더니 레일 위로 폴짝 올라서서 끝까지 밀고 나갔다. 위층 내 옆에 서서 꼬마들의 재롱을 내려다보고 있던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면서 큰 박수를 쳐 줬다. 내가 보기에도 제일 어린 조나단이 저런 재주를 부릴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나는 얼굴 가득히 웃음을 지으면서 그들에게 답례했다. 다음은 마치 물을 다 빼버린 수영장 같은 곳으로 내려간 조나단이 다른 아이들을 따라서 이쪽 끝으로 쪼르륵 올라왔다가 내려가고 다시 반대쪽 위로 올라와서 오똑 섰다가 쪼르륵 내려 가곤 했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시원한 마운틴듀를 한 병 꺼냈다. 조나단을 불러내서 잠시 쉬게 했다. 스케이트팍 매니저가 내게 다가오더니 조나단을 칭찬해 주면서 일 년 회원권을 선물로 주었다. 오월 두 번째 토요일에 있을 콘테스트에 열 살 아래 부문에 꼭 출전시키라고 했다. 조나단은 잠시를 못 참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아이들과 몰려다니면서 스케이트보드를 즐기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조나단의 실력을 내 눈으로 확인했는데 이제 나는 이 녀석의 후원자 역할을 확실히 해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우선 스케이트보드부터 훑어봤다. 좋은 것은 300 여 불부터 최소한 백 불은 주어야 살 수 있었다. 헬멧이 40불, 무릎과 팔꿈치 보호대가 20불 정도였다. 노란색 티 샤스와 파란색 통 넓은 반바지를 골라놓았다.
조나단을 불러냈다. 땀을 빨빨 흘리면서도 아직 아쉬움이 남았는지 그동안에 사귄 친구들과 주먹을 마주 대면서“Bye! Bye! See you next time!”하면서 아쉬워했다.
“조나단 너 콘테스트 나가면 Win 할 자신 있어?”
내가 대답이 뻔 한 질문을 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조나단이 마운틴듀 병을 입에 대고 머리를 까딱까딱 해 보였다.
“그러면 할아버지가 스케이트보드, 헬멧, 엘보우, 니팻, 다 사줄까?”
조나단이 선뜻 대답을 안 했다.
“왜? 싫어서 그래?”
녀석이 나를 빤히 올려다보면서 머리를 옆으로 흔들었다.
“사 줄까? 말까?”
그때 조나단이 힘없이 한마디 했다.
“할아버지! 꼭 Win 해야 해?”
나는 아차 실수했구나 하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조건 이겨야 한다, 지면 네가 책임져야 된다는 식으로 아이들을 윽박지르면서 억압해 왔고 그래야만 있는 힘을 다해 남을 밀어내고 승리자가 된다고 아이들에게 강요해 왔지 않는가? 언제 조나단이 나에게 콘테스트에 나가서 우승할 테니 뭐, 뭐를 사달라고 한마디라도 요구했단 말인가? 갑자기 대답할 말을 잊어버렸다.
“아 ~ 아니 할아버지는 네가 잘하라고 한마디 해 본거란다. 네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되는 거야! Do your best!”
갑자기 조나단이 큰아이같이 느껴졌다. 여덟 살짜리 코흘리개 어리광쟁이가 아닌 당당한 인격체로 내 앞에 떡 버티고 선 녀석이 정말 대견스러워졌다.
“자~ 할아버지가 조나단 좋아하는 거로 사 줄 테니까 네가 골라봐!”
알록달록한 색깔이 들어간 헬멧이 걸려있는 진열대 앞으로 갔다.
“빨간색이 예쁘지 않니?”
“싫어! 파란색이 더 좋아!”
내가 점원에게 조나단 머리에 맞는 파란색 헬멧을 골라달라고 했다. 또 엘보우와 니패드도 함께 샀다.
“조나단, 스케이트보드도 사줄까?”
각종 무늬로 장식된 보드들이 한 벽을 온통 차지하고 있었다. 조나단이 뛰어가서 보드 한 개를 집어 들더니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보드를 뒤집어놓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바퀴를 돌려봤다. 짜르르르 짜르르르 베어링 굴러가는 소리가 조용하게 들렸다. 얼른 옆에 내려놓고는 다른 것을 가져다 엎어놓고 또 바퀴를 굴려보더니 마음에 무슨 결심을 한 듯이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저 녀석이 혹시 비싼 것을 골라잡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됐다. 조금 전에도 꽤 난처한 질문에 당황 했었는데 다 사준다고 백기를 펄럭여놓고 또 다른 변명을 늘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할아버지!”
“응 그걸로 사줄까?”
“아니, 이거 말고… 저… 바퀴만 바꿔주면 안 돼? 보드는 내 꺼가 더 좋아!”
“바퀴만 바꿔 줘? 어떻게? 저기 아저씨한테 물어보자.”
카운터 안쪽에 있는 젊은이에게 물어봤다. 녀석이 뭐라고 떠듬떠듬 집에 있는 자기 스케이트보드를 설명하니까 점원이 다음에 올 때 보드를 가져오면 십분 이내에 바퀴를 달아 줄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 온 길을 버스를 세 번씩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래간만에 너무 멀리 나들이를 해서 그런지 머리가 띵하고 몸에 열이 있는 것 같았다. 홍 간호사가 오려면 삼일은 더 기다려야 했다. 다음날 아침에는 온몸이 나른하고 움직이기가 싫었다. 오후에 조나단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학교 잘 갔다 왔냐?”
내가 의자에 앉은 채로 녀석에게 말했다. 좀 이상한지 내 의자 근처를 맴돌면서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얘야 오늘은 할아버지가 좀 피곤해서 그러는데 식탁 위에 있는 쿠키하고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 꺼내먹고 나가서 놀아라.”
“네!”
조나단은 오늘 보드 밑바닥에 달린 바퀴를 바꾸러 스케이트팍에 갈 것으로 생각하고 부지런히 집으로 왔을 텐데 내가 나설 수가 없게 되었으니 어찌한단 말인가? 우선 홈 헬스 캐어 사무실 홍 간호사에게 연락했다. 두 번 세 번 전화를 해도 연락이 안 됐다. 집안을 맴돌던 조나단은 밖에 나가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앤디 아빠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여보세요, 앤디네 집이죠, 네, 여기 조나단 할아버진데요, 앤디아빠 언제쯤 퇴근합니까? 네? 출장이요? 이번 주말에요? 네~ 아니 별일 아니고요, 또 전화드릴께요, 네, 네!”
-저 녀석이 속으로 안달이 났을 텐데, 누굴 보내서 바퀴를 바꿔주나?― 공연히 내 마음까지 답답해지고 머리가 무거워졌다. 그때 홍 간호사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이고 미안해요 바쁜 사람한테 전화해서, 눈이 잘 안 보이고 열이 좀 나는 것 같아, 팔다리에 힘도 없고, 응, 약은 다 차례대로 먹었지! 어제 밖으로 한 바퀴 돌고 왔더니 그래, 집에 다 왔는데 갑자기 현기증이 나더라고, 시티드라이브에 있는 스케이트 팍, 버스 타고 갔지… 온다고, 언제? 이따가? 미안해서 그래, 고마워!”
밖에서 따르르르 따르르르 스케이트보드 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소파에 기댄 채로 잠깐 동안 잠이 들었었나보다. 현관 벨 소리에 깨어나서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언제 왔는지 홍 간호사가 서 있었다.
“할아버지 그런데 가시려면 나한테 먼저 알려주시기로 했잖아요! 혈압하고 당이 지금보다 조금만 더 올라가도 병원에 들어가셔야 된다고요~ 제발 조심하세요. 그리고 어디 가시고 싶으시면 제가 OCTA(오렌지 교통국)에 연락해서 버스 보내 드릴게요. 저한테 꼭 연락해야 돼요 아셨죠.”
홍 간호사가 팔뚝에 수액을 꽂아주고 튜브에 필요한 약들을 골고루 넣어 주었다. 사르르 잠이 오는 것 같았다. 홍 간호사가 조나단을 부르는 소리가 저만치에서 가물가물 들리는 것 같았다.
토요일에 미니버스가 우리를 스케이트팍까지 태워다주었다. 조나단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자기 스케이트보드를 들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내가 스케이트센타 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조나단 스케이트에 달렸던 오래된 바퀴는 벌써 떼어내고 새것을 고르고 있었다.
“할아버지 이거 한국 베어링이래, 제일 좋은 거래, 한 개에 15불씩이래, 나 이걸로 바꿔줘!”
“그러렴. 네가 좋으면 그걸로 바꿔 줘야지!”
점원이야기로는 조나단이 갖고 있는 보드는 페나릭 화이버그래스로 만든 프로급들이 사용하는 최고급 보드라고 했다. 그리고 꼬마 녀석이 제일 비싼 바퀴로 바꿔달라고 해서 영감님 허락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조나단은 새 바퀴를 바꿔달고는 신이 나서 친구들과 점프도하고 레일도 타면서 토요일 오후를 마음껏 즐겼다. 우리는 미니버스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조나단, 누가 그런 고급 스케이트보드를 사줬니?”
“아빠가, 시카고에서.”
이제 콘테스트가 삼일 앞으로 다가왔다. 조나단은 학교가 끝나고 나면 쏜살같이 뛰어와서는 반스 스케이트장으로 가자고 졸라댔다. 홍간호사가 준 버스표도 오늘 쓰면 마지막이었다.
-그래 시합하는 날은 택시를 불러 타고 가기로 하자 -
조나단과 나는 반스 스케이트센타로 가는 미니버스에 올랐다. 한 주 동안에 세 번씩이나 외출을 한 셈이니 홍 간호사가 알면 또 잔소리를 해 댈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조나단의 성화를 이겨낼 재간은 없었다. 앤디는 엄마와 함께 왔다. 앤디 엄마는 나를 조나단의 친할아버지로 알고 있었다. 앤디는 내가보기에도 조나단의 상대가 되지못했지만 열심히 조나단 뒤를 따라다녔다.
“조나단 할아버지는 참 좋으시겠어요! 열 살 미만 구릅에서는 조나단이 우승할 거라고 다들 이야기하던데요, 우리 앤디는 운동신경이 무뎌서 등수에도 못 들것 같아요. 그래도 제가 좋아하니까 끝까지 시켜는 봐야죠, 뭐.”
젊은 여자인데도 펑퍼짐한 몸매에 말 수가 많은 것이 앤디가 제 엄마를 많이 닮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앤디 엄마 시합하는 날 말인 데요, 우리 조나단 좀 부탁하면 안 될까요? 내가 운전을 못해서 그래요, 출전하는 선수들은 좀 일찍 오라던데, 앤디 올 때 같이 좀 태워 주실 수 없을까요?”
“네 그렇게 하세요, 어차피 오는 길인데요 뭐, 아 참! 오늘 집에 가실 때 내차타고 가세요, 집도 알아 둘 겸해서요.”
앤디 엄마는 귀찮은 부탁을 하는데도 아주 시원스럽게 대답해 주었다. 땀을 빨빨 흘리는 조나단과 나는 앤디 엄마 차 뒷자리에 올라탔다. 버스를 탈 때는 자리가 넓고 공기가 잘 통해서 견딜 만 했는데 조그만 일제차 뒷자리가 몹시 불편했다. 아직도 프리웨이를 탈 줄 모른다고 하면서 일반도로를 이용해서 집까지 왔다. 차가 신호등 앞에 정지할 때마다 어찌나 출렁거리는지 멀미가 났다. 구토증이 일어나는 것을 가까스로 참고 집 근처까지 왔는데 갑자기 식은땀이 나면서 정신이 혼미해졌다.
“조나단 어디가 너희 집이니?”
앤디 엄마가 어두운 골목길로 들어서면서 물었다. 조나단은 자기 집을 지나서 내 집 앞에 차를 세워달라고 했다. 겨우 차에서 내려서서 현관 문고리에 키를 꽂고 있는데 앤디 엄마는 차를 한 바퀴 돌리고 “Bye! Good Night!”하면서 골목 저쪽으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방에 들어서자 마음이 놓여서 그랬는지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면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갑자기 목구멍 밑으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오고 가슴이 조여들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어디 아파? 홍 아줌마 불러올까?”
조나단이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조나단 난 괜찮으니 너무 서둘지 말고 내 말 대로해라! 전화로 911 다이얼을 돌려줘 지금!”
조나단이 쪼르륵 전화기 앞으로 가더니 수화기를 들고 911을 돌렸다.
“조나단 거기 그린 색 단추를 눌러라, 스피커로 돌려놔~”
조나단이 그린 단추를 누르니 상대편에서 여자 음성이 들렸다.
“I need Doctor!”
내가 겨우 한마디 했다. 저쪽에서 여러 가지를 물어도 별 신통한 대답이 없자‘전화기를 그대로 열어놓고 기다리라’고 했다. 조금 기다리고 있는데 벌써 구급차 오는 소리가 멀리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는 것 같이 답답한 것이 숨이 막혀왔다. 그러나 머리는 투명해지는 것 같이 맑아졌다. 조나단은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고 화장실로 뛰어가서 수건을 들고 왔다. 겁을 잔뜩 먹은 동글한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할아버지!”
수건에 어름을 싸가지고 머리 위에 올려놔 주었다.
“조나단 저기 현관문을 활짝 열어 놓고 밖에 불도 켜 놔라”
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나단이 현관문을 열어놓고 돌아서는데 벌써 빨간 불자동차가 집 앞에 도착했다. 너 댓 명의 소방서원들이 방안으로 몰려들어오더니 나를 반듯이 눕혀놓고 산소마스크를 씌우고 주사를 놔주었다. 심장 조여드는 것이 조금 풀리면서 사르르 잠이 왔다.
아침에 조나단 엄마가 병실로 찾아왔다.
“할아버지 좀 어떠세요? 그동안 조나단 때문에 너무 과로하셨어요. 의사 선생님 말로는 이삼일 더 병원에 계셔야 된다고 했어요.”
“오늘이 조나단 콘테스트가 열리는 날이지! 어떻게 가기로 했나 모르겠네? 내가 앤디 엄마한테 부탁은 해 놨는데……”
“할아버지 염려 안 하셔도 돼요! 제가 데리고 가야죠, 집에 가서 조나단 준비시켜가지고 시합 잘하고 올게요. 몸조리 잘하고 계세요.”
종종걸음으로 병실을 빠져나가는 조나단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서 함께 가서 응원 못해주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 힘내라 조나단! 이 할아버지가 여기서라도 응원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
(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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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읽었을 때도 아주 흥미로웠는데 두번째 읽어봐도 새롭고 재미있습니다.
좋은 소설 읽게해주셔서 기쁘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