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조화 (( " )
2010.03.16 03:56
빛의 조화(調和)
최 문 항
아름다움을 찾아 나서는 일은 복잡한 일상에서의 탈출이다. 어릴 때 소풍가기 전날 밤에 잠을 설치던 그런 설레 임이 아직도 남아 있다.
벌써 화사한 봄꽃들이 만발하고 거무스레 물이 오른 나무들은 새잎들을 한 치씩이나 내밀었을 테니 나의 게으름을 탓해야 할까 보다.
이른 봄에는 하얀 꽃잎을 펼친 난(蘭)을 만날 행운을 기대하면서 집 근처 식물원 구석의 온실부터 뒤적인다, 그리고 과일나무에 꽃눈들이 움트기 시작하면 여장을 꾸려 주말의 짧은 출사 여행을 떠난다. 대개는 그림을 그리는 아내가 동행해 준다.
북가주 농장의 과일나무들이 줄을 맞춰서 화사한 꽃 잔치를 펼쳐 놓을 즈음이면 나파 밸리의 묵은 포도나무에 털이 보송보송한 새잎들이 돋아나고 포도주 시음장 입구에 있는 등나무에 연보라 꽃들이 뻗어 올라간 줄기마다 주렁주렁 달린다. 조금 외각으로 벗어나면 흰색 노란색 파란색의 들꽃들이 한들거리며 우리를 반겨 준다.
더위가 시작되면 해변을 서성거린다. 라호야 해변에 줄지어 일광욕을 즐기는 물개들과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를 찍는다, 베니스 비치의 인파 속에서 비키니 차림의 아리따운 처녀들의 몸매도 훔쳐보고, 퍼시픽 하이웨이를 따라 북상하면서 등대 주변의 절벽을 오르내리며 끝없이 펼쳐지는 수평선도 렌즈에 담아 본다.
찬바람이 살랑이는 가을에는 꽃보다 더 고운 단풍을 찾아 나선다. 비숍을 지나 마운틴 위트니 안쪽 샤브리나 호수의 노란 단풍도 찍고 어니언 밸리를 돌아내려 오면서 검붉은 단풍을 화인더에 가득 싣고 돌아 내려오너라면 알프스의 절경이 이보다 더 나으랴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6000피트 이상 되는 산정에 눈이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또다시 마음이 싱숭생숭 해지고 끝내 참아 내지 못하고 길을 떠난다, 팜스프링스 서쪽에 있는 싼하신토 산정 호숫가에 차를 세우고 맑은 물속에 거꾸로 비친 설경을 찍다 보면 이곳이 그 옛날 첫 사랑을 만났던 강원도 산골의 작은 호숫가로 착각을 일으키고 만다.
캘리포니아의 우기(雨期)인 늦은 겨울과 봄은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소재로 바빠진다. 다름 아닌 안개와 구름이다.
아주사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에 올라서서 저 산 밑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안개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아름드리 소나무 사이사이를 휘감아 오르는 안개는 마치 인적이 끈긴 태고의 신비를 느끼게 한다. 조금 지체하면 물안개는 어느새 산마루를 타고 넘어 하늘에 닿고 붉은색 노을은 황홀하기만 하다.
뿌연 하늘 저쪽부터 새털구름이 피어오르고 아직 하늘이 밝아 오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지만 광각도를 800까지 올려놓고 겨우 붉은 기운이 산꼭대기를 감아 돌기 시작 할 때부터 셔터를 눌러 대기 시작한다. 다시 400으로 내려서 떠오를 태양을 기다리며 찍는다, 그리고 200, 100으로 내려가며 산과 산이 겹쳐진 사이로 찬란히 솟아오르는 태양에 초점을 맞춘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밝은 빛 속에서 갈릴레오의 외침이 들린다, 태양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고 내가 타고 앉은 지구가 위잉하는 소리를 내면서 굉장한 속도로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사실 우리가 감격하면서 바라보는 일출과 일몰 때의 찬란한 붉은색은 태양빛이 대기권을 통과할 때 파장이 제일 긴 주황색과 붉은색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고 상대적으로 파장이 짧은 보라색 남색은 구름이 없는 가을 하늘에서 깊이를 모를 파란색으로 보이는 것이다.
흑백 사진의 예술성을 고집하던 나는 조잡스러운 칼라 사진이 싫어서 작품 활동을 중단하고 십수 년을 허송했는데 근자에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과 함께 다시 활동을 시작하고 동호인들과 어울려 시절을 따라 좋은 곳을 찾아 나서고 있다.
별로 컴퓨터를 잘 다루지도 못하면서 사진을 수만 장 저장할 수 있는 용량의 하드디스크를 장만하고 포토샵7.0 프로그램까지 준비하여 저장과 수정까지 스스로 해결한다.
필름을 사용할 때의 답답함이나 주저함에서 벗어난 대신 디지털 카메라의 단점은 너무 헤프게 셔터를 눌러 대는 경솔함이 있다. 찍은 자리에서 카메라에 담긴 영상을 다시 보면서 앵글이나 구도의 뒤틀림을 찾아내고는 지우고 다시 찍기를 수도 없이 반복한다.
게티 뮤지움의 붉은 색감이 도는 대리석 건물들, 데스밸리의 모래 언덕, 쟈슈와트리 공원의 선인장, 바위에 걸린 반달, 밤에 찍은 101번 프리웨이 -내게로 다가오는 밝은 빛은 천국행이고 반대쪽으로 흘러가는 붉은빛은 지옥을 향해 질주하는 것 같은 차량 행렬- , 다나 포인트 항구에 정박한 고색창연한 범선, 포인트 리에 등대, 러시안 리버 위를 가로지르는 녹슨 철교, 꽃, 단풍, 열매, 잔설이 분분한 떡갈나무숲, 퍠숀 아일랜드의 연말 장식들, 등, 등.
컴프터에 저장된 사진들을 장소별, 종류별로 구분해 놓고 슬라이드 쇼를 돌려보면 마치 묵은 사진첩을 들춰보는 것처럼 그때 그 장소로 다시 돌아가곤 한다.
이번주말에는 데스간소 식물원에 튤립을 찍으러 나서야 겠다. (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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