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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의 강둑

2008.07.07 20:05

박영호 조회 수:732 추천:45



  연작시 ‘ 서민의 강둑’ 에서

  한  강

   아득한 세월의 먼 골짜기로부터
   할머니들의 흰 치마폭에 어린
   물때 같은 빛으로
   늘 하늘을 닮아 조용히 흘러온 강  

   남정네를 다스리는
   여인들의 젖가슴 같은
   둥근 산과 산을 휘돌아서
   늘 배고파 잉잉대던
   아기들의 목을 추겨주던 젖줄 같은  
   희고도 푸른
   그런 미음 빛 같은 빛깔로
   대지를 적시며 흘러온 강

   오늘도 강가에 다가가 눈을 감으면
   이른 새벽 강변 안개 속에서
   토기를 들고 서성대는 선민(先民)들이
   눈 앞에 어른거리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이 땅 위의 태평성대는
   언제나 잠시뿐
   왜병들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고
   강변을 따라 움직이는
   피난민의 긴 행렬이 보이고
   갈대 숲을 휘젓는 마파람 소리와
   가뭄으로 마른 강바닥에
   천둥이 울고 나면
   함께 내린 장대비에 넘친 강물
   가축이 떠내려가고
   마을이 떠내려가고  

   내 어린 시절에도
   강물은 늘 그렇게 끊임없이
   가난과 슬픈 사연으로 흘러가고  
   가뭄에 마른 강바닥에
   천둥과 포성이 들리고
   범람한 강물
   피눈물이 흘러가고
   주검들이 흘러가고
   이별과 슬픔만이 우리의 가슴속에
   강변 모래 섬을 이루고
   하얗게 남아 있다

   오늘도 강물은
   하늘 따라 흐르고
   낮이면 도시의 소음을
   강바람이 실어 나르고
   밤이면 도시의 불빛을 강물에 헹구듯
   강물에 찰랑이고 있다.
  
   강변을 찾아온 이국 동포들
   회귀어 처럼 망향의 회포를 풀고
   삶에 지쳐 찾아온 사람
   힘든 세상을 탓하고
   패배의 빈 소주병도 띄워 보내지만
   꿈에 들뜬 젊은 부부들은
   사랑의 웃음도 흘려 보내고
   사진 속에 강물도 담아 가지만
      
   강바람에 배불리던
   허한 세월을 두고 온 실향민의
   주름진 눈 그늘에는
   오늘도 산과 들을 헤매고 있을
   북녘 아이들의 샛노란 얼굴들이
   강물에 노을 되어 어른거리고
   강물 속에 앙금처럼 잠겨 사는
   옛 슬픈 혼령들은
   오늘도 강바닥에서 슬피 울면서
   화합을 울리는 함성이
   하루 속히 하늘에 울려 퍼지고
   화합을 알리는 북행열차가
   긴 기적을 울려
   그들이 강물위로 솟구쳐 오를 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그리하여 출렁이는 강물 위에서
   춤을 추며
   피맺힌 민족의 한을
   씻어내고 우려내어
   강물은 하늘같이 맑은 빛으로
   푸르디 푸르게 흘러 갈 것이다.

   한이 많은 한강 우리의 강
   우리의 마음 속에 영원히 흘러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