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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그림 그리기와 시의 생동성에 대하여

2008.11.11 03:43

박영호 조회 수:1002 추천:94

고원 추모 특집 문학세계 최종호에서


언어의 그림 그리기와 시의 생동성에 대하여                                                                                                                              박영호
                    
어느 소설 작가는 그의 글쓰기에 대한 그의 생각을 소개하는 말 중, 그의 창작의 도구인 언어에 대한 소견을 말하면서 “언어라는 표현은 불완전 하기 짝이 없는데, 이러한 도구를 사용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그 방법에 너무나 한계가 있고 부족함이 많아 어려움이 많다.”라고 표현하는 말을 들었다. 이는 소설을 쓰는 문학자나 작가적 입장에서 언어의 선택이나 조탁과 조련에 대해 작가로서 능력의 한계가 있다는 말이지, 언어 자체가 불완전 하다거나 한계가 있다는 말로. 표현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 언어를 단지 말과 문자라고 하는 하나의 언어 기호학적인 측면에서만 말한다면 극히 비사실적이고 현실적이지 못한 관념적인 점에서는 불완전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비사실적이고 추상적인 이 언어의 불안전한 점이 차라리 회화나 음악 등의 다른 단일 예술 도구에 비해 표현이 훨씬 더 미학적일 수 있고 그 운신의 폭이 더 넓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우선 다른 단일 예술들이 손쉽게 표현할 수 없거나 표현에 한계가 있는 그 어떤 내용도 언어로서는 얼마든지 표현을 할 수가 있다는 점으로 손쉽게 설명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언어의 기호학적인 측면만이 아닌, 언어의 함축성이나 유동성등을 통해 표현되는 언어의 상징적인 의미적 구실까지를 포함한 것이다. 또한 언어가 작가에 의해서 가장 적절하게 사용되어 사실적인 실용문의 경우를 넘어선 하나의 미학적인 가치를 지닌 언어 예술적 가치로 표현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언어의 표현에도 문제는 있다.  시각적인 회화나 청각적인 음악 등의 표현은 극히 사실적이고 현상적인 점에 비해 언어를 통한 그림 그리기인 이미지의 형성은 극히 추상적이고 비사실적이고 관념적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근원적인 문제를 제외한 일반적인 전달이라고 하는 개념에서 보면 언어는 가히 종합 예술을 뛰어넘는 엄청난 표현 능력을 지니고 있다.
다음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 시의 한 부분으로 한적한 어느 오후 무위의 즐거움을 나타낸 글이다.  
앞 부분은 극히 사실적이고 직설적인 표현인데 비해 뒤쪽은 이와 다르게 추상적이고 비사실적이며 상징적이다.

가) 할 일을 모두 밀쳐두고
햇빛 가득한 방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나)  방 한 가운데로 강이 흐릅니다
근심도 걱정도 없는 강
나는 배를 띄웁니다   (기형주 ‘무위의 즐거움’에서 인용)
                        
가)의 내용은 완전하진 않지만 극히 직설적이고 사실적인데 비해 나)의 내용은 이와는 크게 다르게 비사실적이고 상징적이다. 이러한 두 유형 중, 가)의 내용을 일반 회화나 음악으로 표현하기란 어느 정도 가능 하지만, 나)의 내용을 표현하기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언어는 이처럼 몇 자 안 되는 기호적 언어를 통해서 얼마든지 상징적 내용이나 의미적 세계를 쉽게 그려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는 회화나 음악이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는, 시간과 공간의 이동이나 우리 의식의 흐름까지도 그려내는데 어려움이 없다. 따라서 언어는 그 어떤 단일 예술 형태보다도 종합예술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결국 언어는 인간의 표현 방법에서 거의 절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미학적 측면에서는 더욱 절대적이다. 이러한 점이 바로 언어의 꽃이라고 하는 시적 그림 그리기에서 잘 나타나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언어의 기호적 구실에서 의미적 구실로의 변용 과정에서 시의 상징성이나 은유를 통한 언어의 그림 그리기가 보다 생동감 있는 살아있는 그림을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의 시작과정은 바로 이 기호적 입장의 언어를 상징적이고 의미적인 입장으로 바꾸어가는 언어의 미학적 조련작업으로서 이것이 바로 시인의 언어를 통한 그림 그리기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러한 언어의 그림 그리기를 통해서 지난해  <문학세계>에 나타난 시들의 그림 그리기의 특색을 통해서 표현된 시들의 의미적 특색이나 그 가치를 살펴 보기로 한다.
먼저 ‘문학세계’ 지난호에 발표된 시작품들의 내용을 구분해 보면, 우선 자연과 함께 생명의 근원적인 신비나 그 가치를 다룬 작품들이 가장 많은데, 이 중에서도 먼저 역사적이거나 사회적인 사실에 대한 가치를 다룬 작품들이 눈길을 끌고 있고, 다음으로 개인적인 삶과 그 열정을 다룬 작품들과 함께 생과 사를 넘나드는 영혼 속에 연연히 흐르는 사랑의 정신과 그 가치를 다룬 작품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우선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에서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가치인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을 표현한 기영주의 ‘고사목 근처에서’ 가 특별하게 관심을 끈다.
이러한 점은 그의 역사적인 사색 속에서 그가 중시하는 것은 어떤 정의나 가치가 아니고, 어느 시대나 어떤 공간적인 곳에서도 우선 인간의 생명에 대한 가치와 사랑의 정신을 먼저 헤아리는 그런 근원적인 보편적인 가치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일 것이다.
우선 무엇이 정의이고 진리라고 하는 문제는 역시 수월하지가 않은 탓도 있지만, 시인은 이를 밝히려 하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사실 이전에 우선 생명의 소중함이나 인간적인 애증 관계를 생각하는 시인의 인간적인 측면에 대한 그의 진지한 자세가 돋보인다는 것이다.
일찍이 전투가 치열했던 한국 지리산 고사목 근처에서 시인은 무엇이 정의이고 애국인지도 모른 채, 단지 소수 지도자들의 판단이나. 그 시대적인 요구에 의해서 전쟁에 나와 목숨을 바쳐 싸우다 정의 없는 고지에서 죽어간 선량한 병사들을 그는 떠올리고 있다. 그에겐 시대적 이념이나 애국에 대한 정의나 가치는 전혀 소중하지가 않다. 이는 어쩌면 독자의 몫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지만, 그에겐 다만 죽어간 젊은 생명들이 소중하고, 그래서 그는 그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공감을 주는 인류 사랑의 장신이고 이 시의 시적 가치가 되고 있다.
특히 여기에서 말하는 남부군은 정규군이 아니고, 대다수의 병사들이 어린 학생이나 의용군으로 동원된 선량한 젊은이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거의가 정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정의 없는 고지에서 죽어갔다. 그래서 그들이 더 가여운 것이고, 그래서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 때의 비참한 전쟁의 잔상도 아니고, 그 어떤 역사적 사실이나 국가나 사회도 아니다. 다만 어지럽게 흩어진 한낮의 햇살뿐이다.  그리고 그 하늘에 떠있는 젊은 영혼들의 순한 눈빛들을 본다는 것이다. 결국 하늘의 햇살처럼 그들의 생명은 영원히 순수하고 소중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느끼게 되는 인간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연민의 정이다.
우리가 생각해도 허무하기 짝이 없는 느낌뿐이다. 당시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애국과 정의라는 명분으로 목숨을 바쳤다. 이러한 점 때문에 그들의 죽음이 더욱 애잔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시인은 이처럼 고사목 전투의 현장과, 수십 년이 지난 오늘이라는 현재의 모습과, 그에 대한 자신의 의식의 세계를 단 몇 행의 언어로 잘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그림은 극히 관념적이고 상징적이지만, 한 켠으로는 실제 그림과는 비교할 수 없이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함축미를 지닌 것으로, 어찌 보면 이러한 시적 그림 그리기는 그 어떤 종합 예술이나 동영상보다도 더 상징적이고 미학적인 그림 그리기라고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능선 위 고사목 근처에서는 / 애국도 정의도 말할 수가 없네
여기에서 시인이 말할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너무 소중하다거나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가 아니고, 꽃다운 나이에 죽어갔을 그들의 생명이 너무 소중하고 가엽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고, 결국 이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인 생명의 절대적 가치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인간애가 표현된 것이다.
시인은 이처럼 역사적인 배경을 통해 우리에게 역사적 사실을 환기시키고, 참된 정의나 애국이라는 개념 같은 가치가 시대나 상황에 따라서는 사뭇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을 묵시적으로 표현 하여 독자로 하여금 사색의 공간을 마련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다음은 사회적인 문제들 중 현실 속에서 직접적으로 충돌을 일으키는 현대 인간의 정신 세계나 가치기준 문제를 제시해 보이는 시들이 있다.  김병현의 ‘지폐’와  ‘가래톳’ 이 바로 여기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문명이 열린 후로는 어느 시대에나 빈부가 있었겠지만, 물질만능주의의 표본인 돈이 정신적인 칼이나 면죄부가 될 수도 있는 물질의 횡포가 지금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병현의 지폐’는 현대 인간의 배금사상으로 비롯되는 돈의 횡포를 나타낸 것으로. 부당하게 피해를 당하는 쪽과 이를 행사하는 쪽을 이중적으로 대비시켜  빈곤과 부,  유용성과  그 병폐를 양극 현상으로  표현 하고 있다.

종이장이 칼이 되고
종이칼이 살인을 일삼는다

남보다 천만 배, 남의 몫까지 무한대 축적할수록
명검이 되고 살인 면허증이, 색맹 진단서가 된다.
명검에 피 한 방울이나 묻힐 수 있을까 보냐
손 안 대고 코 푸는 검법으로 살인을 일삼는다
                     ㅡ 김병현의 ‘지폐’의  일부 ㅡ

결국 없는 자에게는 있는 자의 돈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칼이 되어 그들에게 위협과 고통을 가져다 주고 심지어는 죽음이나 다름없이 그들의 인간성까지도 무참히 짓밟아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진자의 금력은 바로 칼의 구실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명검이 되어 이내 살인 면허증이나 다름이 없이 되고, 그래서 지폐 스스로와 이를 지닌 자는 세상의 바른 이치나 참된 가치에 대한 식별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일종의 색맹이 되고 만다는 이야기다.
결국 가진 자들은 세상을 보는 안목이나 도덕 기준에 무감각 하게 되고, 옳고 그름을 분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분별할 수 있는 기능을 상실해버린 극단적 현상을 비판하고 있는 말이다. 따라서 이는 일종의 사회 현실에 대한 고발이며 현대 물질 문병의 병폐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는 그의 다른 시 ‘가래톳’ 역시 마찬가지다. 현실 사회의 시대적 모순에 대한 고발로 가래톳이라는 통증을 극렬한 사회적 아픔으로 표현하고, 이러한 문제를 야기시키는 곳을 지진대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문제가 시작된 곳은 지진대라 할 수 있는데, 이로 인해 실제로 충격과 고통을 받는 가래톳은 지진대와 상관없이 세계의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는 개인이나 한 특정 사회만이 대상이 아닌 범세계적이고 범인류적인 공통 문제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다.
이러한 표현 방법은 극히 상징적이고 풍자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내용을 그림 그리기로 말한다면 실제 실사적인 그리기인 회화로는 한 장의 포스터가 거의 전부일뿐 거의 불가능 하지만, 이처럼 언어를 통해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만 시인이라고 하는 언어의 조련사에 의해서 그것이 효과적으로 그림 그리기(언어의 조탁(彫琢))가 되었을 때 비로소 더욱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앞서의 두 작품이 개인을 떠나 사회적이고 범시대적 가치기준의 양상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표현한 데 비하여, 다음의 작품은 이러한 사회적이고 시대 조류적인 특정한 사실에 대한 보편적인 가치를 극히 주관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작품들이 있다.

김동찬님, 미래의 배우자 얼굴 궁금하시죠?
라는 제목으로 스팸 메일이 왔다.

<중략>
나는 내 미래를 열어보지 않기로 한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미래.
미래가 지워진다.

보이는 것도 사랑하기에 벅찬
현재만 남는다.
ㅡ 김동찬의 ‘미래’ 일부’ ㅡ

시 속에 제시된 메일 속의 물음은 급변해가는 현대 사회의 현실적 모습을 밝힌 것이고. 이는 바로 시인의 주변에서 전개되고 있는 시대적 가치기준에 대한 혼란이다.
이에 대해 시인은 미래와 함께 시대적으로 밀려오는 새로운 가치기준의 변화에 단호하게 부정적으로 대응한다. 이러한 시인의 자세는 현재의 사랑이 소중한 것이고, 미래에도 변함없고 영원하리라는 사랑 자체에 대한 개인적인 처지나 신념 일 수도 있지만, 이는 시인이 생각하는 사랑에 대한 보편적인 가치기준- 다시 말하면 시대나 공간적으로 변함이 없는 사랑의 근원적인 가치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판단에서라고 말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시대에 따라 가치기준이 변해 진리가 아닌 것이 진리로, 그리고 진리가 진리 아닌 것으로 둔갑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진리 자체는 어제나 오늘이나 미래에도 변함이 없다.
시인이 말하고 있는 이혼이나 재혼은 얼마 전만해도 새로운 미래, 다시 말해서 재혼을 전제로 한 이혼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다반사이고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결혼을 두 번 이상 하게 되는 시대가 도래할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는 물론 개인적인 처지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대세가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고, 여기에서말하는 참된 가치기준은 물론 대세와는 별개의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필자가 고교시절에 맘보바지라고 해서 지금의 청바지 형태와 같은 바지가 처음으로 유행했을 때, 필자의 친구 중 좀 유별난 친구는 바지통을 손수 줄잡아 줄여서 청바지처럼 몸에 착 달라붙게 입고 다녔다. 그래서 나이 많은 어느 선생님이 그를 붙들어 새우고, 그게 내복이냐 바지냐? 하면서 벌을 준 적이 있다. 그 시대는 그랬다. 그러나 지금 기준으로 보면 청바지란 실용주의 상징물처럼 얼마나 활동적이고 보기에도 좋은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느 바지가 더욱 편리하고, 어느 시대의 바지가 바지로서 가장 효율적인가를 밝히는 데 있지 않고, 예전에 청바지를 내복처럼 흉하다고 입지 못하게 했던 사실의 옳고 그름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 스승의 판단이 그릇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복의 구실이 신체 보호와 격식 챙기기에 있다고 보면 그 격식을 중시했던 그 스승의 판단이 그릇되었다고만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벌을 준 것은 지나친 일이지만, 목장에서 일하는 카우보이가 아닌 학생신분이라고 본다면 그 스승의 가치기준은 비교적 보편성(시간 공간에 구애 받지 않는 )이 있는 도덕적 가치기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야기는 시인의 판단이 시대 상황이나 개인의 처지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가치에 충실 하려는 사고의 방향과, 그의 결혼과 사랑에 대한 가치기준이 이 시에서 하나의 가치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나 이러한 점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 받지 않는 사랑의 절대성이나 진정성을 표현하고도 있다고 보면, 이는 꼭 개인적인 의식 세계의 표현만이 아닌 하나의 사회성에 대한 관심이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이는 것도 사랑하기에 벅찬 /현재만 남는다.

미래나 현실의 중요성이나 가치 규정 보다 먼저 자신에겐 이혼을 통한 재혼 등은 있을 수가 없고, 사랑하기에도 벅찬 현재만을 사랑해야 한다는 보다 근원적인 가치를 밝히고 있다. 또한 시의 표현이 극히 현대적인 미디어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데도, 시인의 의식세계는 극히 보수적이고 고전적인 가치기준을 고집하고 있는 점도 이 시의 가치가 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점은 그가 함께 발표한 또 다른 시인  ‘결혼 서약’’ 에서도 간접적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현대의 결혼 풍토나 의식 세계를 극히 풍자적이고 유희적으로 표현하여 현대 사회의 모순된 가치기준에 대한 그의 비판 의식을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다음은 죽음과 생을 넘나드는 인간의 보다 근원적인 의식 세계를 통해서 우리와 신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시들을 살펴보자.
같은 지면에 함께 발표한 시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의미는 생과 죽음을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고, 우선 영생이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죽음을 비행기를 타고 지상의 산과 강을 건너는 한 낱의 여행일정처럼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점이 이색적으로 느껴진다.

<전략>
이제는 이승보다는
저승에 더 많은 친구가 가 있다고
그곳에 아는 사람이 많아져서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죽음이 한결 편안할 것이라고 전했다.

<중략>
죽음이란 우리 사람에겐 그지없이
무거운 뜻이지만
누구에게나 여행처럼 그렇게
그렇게 가볍게 맞이하는 우연
- 배정우의 ‘죽음에 대하여’ 의 일부 –

죽음이란 여행을 할 때 장소를 바꾸어 잠시 머물다 다시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기듯 극히 자연스럽고 우연스런 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내용이다. 사실 죽음이란 우리 모두에게 인생에서 가장 큰 절대 절명의 일일 수 있는데, 시인의 말을 빌리면 죽음은 이제 주위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겪는 일이고, 그래서 이미 떠난 사람들이 저승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리란 믿음까지 생겨, 이제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거나 엄청난 사실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마치 죽음이 어딘가를 향해 가다가 잠시 잠들었다 깨어보니 다시 알고 있는 곳에 가 있다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연상케 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신앙적 믿음에 대한 확신과 함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너무 자연스럽게 전해지는 죽음에 대한 언어의 그림 그리기라고 할 수 있다.

<전략>
시간의 마법에서 깨어나려고
자주 눈먼 앵무새가 되어
나뭇가지와 가지사이로  포로록거리던
내 영혼의 모습이며
낯선 꽃을 꺾어 저기 별 하나
부질없이 죽게 했던 일까지
낱낱이 소상하게 또렷하게
화질 좋은 동영상처럼 기록되는 모양이라

아아 부끄러워라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의 내 생
ㅡ ‘내 이미 위의 하늘에는’ 에서의 일부  ㅡ

시인은 특정하게 신봉하는 종교가 없다. 그러나 그는 하늘이라는 신의 세계를 믿고 있고, 그는 신에게 고해하듯 자신의 인간 행적에 대한 부끄러움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앞서의 시에서도 그렇지만, 영혼의 세계라고 하는 신과 하늘의 세계에 대한 긍정을 전제로 하고, 이제 자신의 신에 대한 관계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셈이다. 자신의 생을 지구에서 산 생이라는 구체적 표현을 통해서 신의 영역을 우주로 확대하고, 우리의 생 역시 전생과 저승이나 지구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어딘가 다른 행성에서도 생이 있으리란, 코스모적이며 영생적인 표현을 하고 있는 점이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시인은 어느 특정 신앙인은 아니지만 유신론자임에 틀림이 없고, 이러한 점은 그의 세 번째 작품인 ‘작은 개 한 마리’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표현된다.
앞서의 시들이 경계가 없는 생과 죽음, 그리고 지구라는 행성의 현실적 나와 신이 존재하는 하늘과의 교우인데 비해 이제는 그 경계 사이를 넘어 흐르는 가장 소중한 것인 사랑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전략>
개 내장의 흉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먼 마을 달리며 마을 사람들의 잠과 몽환을 깨우던
흔한 울음 한 점 없이 오직 침묵으로 맞서고 있다.
자세히 보니 인형이다
저놈을 잃고 어린 주인은 온 세상 잃은 듯 흐느꼈으리
그 주인을 생각해서 그 여리고 따슨품을 생각해서
억센 차 바퀴에 치고 치어도
나처럼 차마 죽지 못하는 목숨 하나
                          ㅡ  작은 개 한 마리’ ㅡ 일부

차에 치여 죽은 납작하게 깔려있는 허무하고 황량하기 그지 없는 작은 개 인형의 죽음의 잔상을 통해서 사라지지 않고 연연히 흐르고 있는 인간의 따뜻한 정이, 죽음을 초월한 영원성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데, 이러한 점이 그의 앞서의 두 시에 대한 정점을 이루고 있다.
결국 ‘죽음에 대하여’ 에서는 죽음을 일상적 일로, 그리고 ‘내 이마 위의 하늘에는’ 에서는 하늘이라는 신에 대한 고해를, 그리고 마지막 작품  ‘작은 개 한 마리’에서는 이 승에서 저승까지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인간의 따듯한 사랑에 대한 연민의 정이 표현되고 있다.
다음은 가장 많은 부류를 이루고 있는 자연친화를 바탕으로 한하는 자연의 신비와 경이, 그리고 우리의 생과 자연의 조화를 나타낸 시들이다.

그냥 이름 그대로
구름이라 불러다오

유정하게 부르면
나도 금새 슬퍼지거든

호명이 끝나기 전에
내 빰을 적실지 몰라
ㅡ 김영수 ‘구름’ 전문  ㅡ

양장 세 연으로 된 연시조로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도를 보듯 모처럼 뛰어난 시조 수작을 대한 듯싶다.
원래 자연과 인생의 본질은 순수 무구한 것으로만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변화의 과정은 풍파와 파괴라고도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구름이라고 하면 그저 흘러가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유정한 인간사를 말하다 보면 그 구름은 아름다울 수만 없이 그 구름에서 비가 내리고 폭풍이 일 듯, 우리에게는 눈물이 흘러 내릴 수 있는 고통이 있고 슬픔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짤막한 글 속에 자연과 우리의 인생을 송두리째, 그리고 그것도 우수에 어린 서정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언어가 그려내는 그림에는 크기나 내용에 한계가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다음의 시들 역시 자연과 생명에 대한 가치와 함께 현실적인 삶의 모습과 그 열정을 표현한 서정시들이다.
우선 물과 동그라미의 상관 관계인 화합과 조화를 통해서 자연의 근원적인 섭리와 함께 삶의 근원적인 순리를 밝히고 있는 ‘물은 동그라미만 그린다’ 를 살펴보자.

물가에 앉아 돌을 던진다
깊이도 알 수 없는 물 속에 돌을 안긴다
큰 돌은 크게 작은 돌은 작게 동그라미 그린다
파문이 일며 눈동자에도 무늬를 짖고
큰 결 뒤에 작은 물결 보는 아침
지난 여름 비 속에 휘불리던 동그라미
빗방울, 이슬방울 모여 큰 바탕이 되고
어울리면 그림자 둥글게 맴돌아
물가에 앉은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동그라미 번져만 간다.
                               ㅡ  김신웅 ‘물은 동그라미만 그린다’ 전문 ㅡ
물의 이치를 통해서 우리의 의식 세계나 바른 삶의 자세를 나타내 보이는 시다.
우선 물과 동그라미의 상관 관계인 화합과 조화를 통해서 자연의 근원적인 섭리와 함께 삶의 근원적인 순리를 밝히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 되어 모든 사물을 정에서 동으로 변형시키는 움직임의 근원이며, 또한 조화의 근원이 되는 생명력의 심볼이리 할 수 있다. 작은 충격을 모아 큰 힘으로, 그리고 큰 충격을 작은 적으로 순화시키는 움직임과 변형의 전령사라 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 말하는 조화란 원으로 상징되는 것으로 고통과 기쁨, 작음과 큰 것 사이를 연결하는 일종의 윤회의 이치와도 같다.
죽음과 같은 고통을 통한 생이 상대적으로 표현되어 있을 때, 비로소 그 생이 참으로 가치 있는 아름다움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선이나 생이나 천국 같은 긍정적인 세계도 홀로는 존재할 수 없고 상대적이어야만 한다는 이야기와 같다.
물은 작은 충격이 모여 큰 충격이 되고, 큰 충격은 다시 작은 충격으로 바뀐 다음 평온함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물의 이치를 지닌 것이 바로 원이라고 하는 동그라미다. 따라서 동그라미란 이치가 물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동그라미의 이치가 모든 사물의 근간이 되고, 이 원의 섭리가 바로 자연과 우주의 섭리이고 이를 따라 사는 것이 우리 삶의 순리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자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나
‘물가에 앉은 가슴 속으로/ 동그라미 번져만 간다’
의 표현은 물의 이치를 통해 가슴에서 이는 조화라는 융합과 그리고 사랑의 정신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는 시인이 가슴 속에 지닌 현실적 문제에 대한 갈등이나 고통을 다스려가는 일종의 은유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점도 그 자체로는 움직임이나 생명이 없고 원으로 형성될 때 비로소 움직임과 생명이 형성될 수 있듯이, 하나의 점과 같은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고, 사로 모여 사랑하고 조화되어야 가치 있는 삶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자연의 신비와 함께 생명의 가치와 그에 대한 사랑을 나타낸 작품이다.

<전략>
알 수 없는 짐승이 것 낳아 숨겨둔 듯
세끼 네 마리 꼬물거리고 있다.
얼른 마른 검불 도로 덮어주고
라면박스 엎어 보슬비 맞으며
집을 지어 창도 하나 내 주었다.
그런데 나는 누굴 위해 집을 지었나?
두더지? 생쥐? 다람쥐?
밤새 뒤척이다 새벽녁에 나가보니
내 신성한 노동이 폭삭 내려앉아
꼬물거라던 어린 것들 간데 없고
그 자리에 흙탕물 한 바가지만 찰랑이네
내 짓이 사약을 받아 마땅하다고요?
ㅡ 김행자 ‘ 봄비’  일부 ㅡ

이는 자연의 신비와 함께 생명의 가치와 그에 대한 사랑을 나타낸 작품이다.
시인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도 자연과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고 그에 대한 사랑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는 자연친화주의자다. 그의 모든 시작품속에는 생명의 근원인 모성에 대한 사랑과 함께 생명의 가치를 나타낸다.
가금이 아닌 야생의 동물인데도 하등의 징그러움을 느끼지 않고 보금자리를 발휘하여 그들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지만, 어디론가 옮겨가 버린 그들을 두고 죄의식 마저 느끼고 있는 점에서 보성본능 발로라는 숭엄함과 동물의 생명까지도 사랑하는 그의 의식세계가 아름답게 표현되고 있다.
시인이 함께 발표한’나를 키운 것들’ 역시 고국의 향토적 특색과 어린 시절의 추억담을 통해서 자연친화를 그 정서를 나타낸 아름다운 서정시다. 그를 키워낸 사실적이고 물리적인 측면 보다는 그의 가치 있는 서정성을 아름답게 키워준 감각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을 밝히고 있는 점이 하나의 특색으로 나타난다. 또한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풋풋한 채소밭이 연상되는 감각적인 점이 두드러지게 표현되고 있다. .
결국 그를 키운 것은 일반적인 사물이 아닌, 자연의 아름다움과 일상 속에서 느끼던 생동감 내지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자연의 서정과 그 생명력에 대한 사랑의 정신이 잘 나타낸 생태시를 통한 생명시 라고 할 수 있다.

<전략>
계절풍이 삭아 내리는 세월
나는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하는가
고통과 슬픔 고인 심연에서
이글거리는 불씨
한 번 쭘쯤성난 폭풍이 나를 덥쳐오면
내 가슴 터질 듯 불기둥 솟아 오르고
흘러내리는 붉은 용암  
내 강을 가득 메우고

용암에 피어 오르는 불의 꽃
그런 꽃으로 활활 타오르고 싶다.                                        
석정희 ‘깨어나는 휴화산 (2)’  일부

앞서의 시가 자연을 통한 일반 생명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것처럼 위의 시 역시 자연을 소재로 한 생명력을 표현한 점에서는 동일하나, 위의 시는 객관적 대상이 아닌 자기 자신의 내면 세계에 대한 주관적인 세계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점이 다르나, 하나의 힘있는 생명력을 표현한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일찍이 불의 씨앗으로 태어나 영혼 속에 외로운 섬 하나로 떠있다는 자신의 현실적 처지를 운명적이고 숙명적으로 밝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자신의 삶에 대한 열정을 이글거리는 불씨로 삼아 자신의 삶에 대한 꿈과 사랑에 대한 소망 표현하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또한 휴화산이란 억압당하고 있는 자신이나, 아니면 스스로 자신을 제어하고 있는 극히 현실적인 표현을 통해 언젠가는 폭발하고야 말 필연성으로서의 휴화산이다. 따라서 휴화산은 그의 의식 속에 잠재된 삶과 사랑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마음 속에서 이글대는 욕망이나 꿈이라고 하는 용암은 결국 분출될 수 밖에 없고, 그 열정으로 빚어지는 희열이 그의 몸과 마음의 강을 모두 가득히 메운다는 것이다.

용암에서 피어 오르는 불의 꽃 / 그런 꽃으로 활활 타오르고 싶다 ‘

불의 꽃은 그의 가치 있는 삶의 결실을 표현한 것이고, 용암이라는 열정을 통해서 꽃이라고 하는 삶의 절대적 가치를 나타낸 것이다. 아울러 절대자에 대한 신앙적 접근이나  바른 삶의 자세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또한 그가 아직 이르지 못한 자신의 창작 세계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 것 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은 김 내수 ‘불꽃’ 인데 이 역시 삶의 열정을 나타낸 점에서 같은 유형의 시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주로 현실적인 고통이나 그 모순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전략>
허공에 띄운 흑남색 불 그을음이
꿈의 환상곡을 노래하니
희열의 언어
열광의 넋두리
슬픈 푸념의 눈물이었다

가야 할 저만큼 미로 지평선에 횃불을 지핀다
                                 ㅡ   김내수 ‘불꽃’ 일부 ㅡ

이 역시 불꽃 이라는 상징을 통해 삶의 열정을 나타낸 점에서 앞서의 시와  같은 유형의 시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주로 현실적인 고통이나 그 모순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불꽃은 현실 세계의 삶에 지핀 불꽃이 아닌 하늘의 별을 따다 지피는 꿈과 환상의 불꽃이다. 그래서 그 불꽃은 열광의 넋두리이고 슬픈 푸념의 넋두리 일 수 밖에 없다는 자기 모순이 표현되고 있는 셈이지만, 이는 결국 현실적인 슬픔이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현실 세계가 아닌 ‘가야 할 저만큼의 미로 지평선’에 그 횃불을 지핀다고 표현한다. 결국 시인은 현실의 세계가 아닌 그래서 아직은 환상 속의 세계나 다름없는 미로에서 꿈을 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현실과 꿈의 세계가 결코 화합할 수 없는 이원적인 세계로 표현된 피안과 차안의 이야기인 셈이다.  그러나 그의 다른 작품 인 ‘인생 찬가’에서는 차라리 꿈의 세계가 아닌 현실적인 삶을 통해서, 자연에 조화되어 자연의 섭리를 따라 살고 이를 우주적 시간과 공간으로 확대해서 생각하는 점으로, 우리의 생을 영원성으로 표현해 보려는 극히 순리적인 사색의 세계가 표현되고 있다.
다음은 김정기 시인의 작품으로 시인이 느끼는 지난 생에 대한 그 잔상을 ‘ 아직 풋내 간직한 비밀 밝혀 버리는 한 줌 가을 ‘햇볕’으로 표현한 김정기 시인의 ‘사과꼭지’를 보자.

<전략>
이제는
당신 말이 내 말이고
내 말이 따로 있지 않아
당신이 배부르고 잔기침하면
내 허파에 구멍 내는 겁쟁이지만  

사과나무에도 열매에도
깊숙이 녹아
모진 빗줄기 견뎌오고 그래도 황홀한 길을 내고
씹으면 아직 풋내 간직한 비밀
밝혀 버리는 한 줌 가을볕인가  
                                김정기 ‘사과꼭지’ 일부
시에서 시적인 기교보다는 역시 시의 서사적 가치나 서정성이 우선이어야 한다고는 하지만, 언어의 그림 그리기라 할 수 있는 회화성이 잘 표현되어야 하는 시적 기교가 없이는 좋은 시가 되기 힘들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시는 이러한 양면이 점이 잘 조화된 시라 할 수 있다.
오랜 세월을 혼연일체의 부부로 살아온 부부의 끈끈한 정을 사과와 꼭지라는 상징적 표현으로 그 연결고리를 나타낸 시다. 사과와 나무는 삶이라고 하는 모진 풍파를 겉으로 겪으며 이를 이기고, 사랑의 수액이 흐르는 황홀한 길을 통해서 보람이라고 하는 결실의 열매 맺고 있다. 이러한 결실은 가을볕이라고 하는 인생의 황혼 길을 상징 하는 것이지만, 시인은 이를 결실이나 보람이라는 무거운 개념 보다는 풋내라고 하는 풋풋한 젊음을 통해서 아직 힘있게 살아있는 생명력과 그 환희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점은 세월이나 노년 황혼의 무게를 느끼게 하지 않는 밝고 맑은 생명력으로 또 다른 생명력을 불러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올림픽 거리라는 한인 촌을 배경으로 한 한인 2세들에 대한 이야기로 이는 일종의 이민시로 우리들의 꿈나무인 2세 젊은이들이 우리의 소망대로 자라주기를 기원하는 시다.

<전략>
이국의 땅, 사막에 심어놓은 가로수
지나는 바람에 옆구리를 차이며
웰셔가와 올림픽 거리에 자라는 팜 트리
우리 사춘기 아이들

옮겨 심은 그 손으로 다스려 주시겠지
                                 - 조 옥동의 ‘올림픽가 사춘기의 아이들’ 의 일부 –

시인은 지상의 모든 것은 신에 의해 운용되듯이 우리가 옮겨와 살게 된 것도 모두 신의 의지에서라고 믿고, 이 땅 위에 사는 우리 젊은 한인 2세들이 이 땅에 뿌리 내리고 반듯하게 성장시켜 주는 것도 신에 의해서 일거라고 기대해 보는 일종의 이민시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우리 젊은이들을 한인타운에서 자라고 있는 가로수인 팜 추리로 상징하고 있다. 팜추리는 남국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이제는 이곳 캘리포니아의 상징물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그들의 키에 비해 뿌리가 거의 없다시피 아주 짧고 빈약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바람에 꺾이는 일이 없다. 이는 그들이 뿌리는 짧지만 줄기가 질기고 유연해서 바람에 잘 휘어지기 때문이다.
바람은 팜추리에게 고통이듯이 우리 젊은이들에게 부는 바람은 그들이 이곳에서 부딪치는 이민의 고통과 아픔이다. 그래서 그들은 팜처럼 폭풍 같은 바람에 좌우로 휘둘리며 갈등을 겪기도 하고 방황도 하지만, 팜트리가 결코 꺾이지 않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 오듯, 그들 역시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그들에게 폭풍과도 같은 사춘기를 잘 넘겨 이 땅에 굳게 뿌리 내리기를 바란다.
시인의 이러한 소망은 이제 현실적으로 한인 타운에서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이 올림픽 가와 윌셔 가에 즐비한 팜 추리와 함께 나풀거리는 한인 간판들의 요란 빛깔들이다.
일찍이 캐티 송의 ‘사진신부가’ 현지인들에게 관심을 끈 것은 그녀가 쓴 이민시들 때문이다. 우리가 빛을 보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좋은 이민시가 현지나 본국에서 우리 미주시인들의 이름을 빛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