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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포에서는ㅡ

2007.09.18 17:44

박영호 조회 수:260 추천:15

 

 

 

-변시지의 작품에서-

-양방언 -
A Wind With No Name
<이름 모를 바람>
노래 - 치치크마(QIQIgemaa, 내몽골)

 

 

-바다를 품에 안은 여인-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절망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절망을 듣는다."
 


  이생진(1929 ~) 시인은 성산포바닷가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운 을 두어 시린 감회를 노래 했다.  

  섬과 바다, 그리고 그 곳의 질박한 바탕색이 시의 언어를 통해 파도가 되어 넘실거린다.

  예리한 시인의 시선은 척박한 섬 제주에서 절망과 한을 보았고

  모든 절망을 품에 안았던 아낙네들의 서글픈 사연을 시를 통해 읊었다.

  이 사연은 깊은 물 속에서 한차례 물질을 하고 수면에서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쏟아내던 아낙네들의 노래이다.

  오래 전에 고기잡이를 떠난 후 소식이 없는 남편을 그리워하거나

  난리 통에 먼저 저 세상으로 가버린 사람들에 대한 서러운 상념을 담고 있다.

  또한 홀로 지새워야 하는 흉흉한 밤과 동네 남정네의 야속한 시선 때문에

  남모르게 겪어야 하는 속병인가 하?누구에게도 털어 놓지 못한 푸념이다.

  이렇듯 성산포의 아낙네들은 한없이 서럽다.

  젊은 며느리가 홀로 추슬러야 하는 애 타는 마음을 시어머니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며느리에게 시어머니는 항상 친절하지만은 않았다.

  언제나 한 두 겹쯤 꼬아 건네는 시누이의 언사가

  겨우내 불어 닥치는 바닷바람보다 더욱 서럽다.

  아무도 그녀의 서러움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속절없이 쌓이는 조그만 앙심 덩어리들과 투기들만이 노래가 되어 흐른다.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는 힘겨운 상대를 타이르기 위함일까.

  아낙네들의 가슴에 빼곡이 묻어 둔 정염이 까만 앙금으로 가라 앉을 때면

  그 노래는 이내 욕이 되어 쏟아진다.

  욕으로 자신을 다그쳐 보지만 그것은 본의가 아니며 오직 반어법일 뿐이다.

  정염은 버거운 대상일 뿐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되는 금율이기에

  끝내 그녀는 뜨거운 마음을 한사코 경원(敬遠)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젊은 날의 정염을 바다의 품에 묻어

  몰아쉬는 긴 날숨에 담아 허공에 흩트린다.

  어쩌면 꽁꽁 묻어 두었던 사연들을 물질로 다시 캐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인들의 가슴속에 정염은 열기를 더한다.

  그러나 제풀에 꺽여 이내 힘없이 사그라진다.

  여인들은 오직 무심한 바다와의 대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잃어버린 로맨스를 확인할 뿐이다.

  서러운 여인들은 모든 절망과 한을 스스로 품안에 끌어안았다.

  이 척박한 땅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커다란 젖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여인들의 힘이었다.

  그래서 시인은 제주 아낙네들은 절망을 만들고

  바다는 그 절망을 삼킨다고 읊었는지도 모른다.


   

 

 


  시인의 목소리가 변시지(1926 ~)화백의 손끝에서 갈색물감이 되어 번진다.

  화면을 가득 메운 붓 자국에서 대기의 숨결이 느껴진다.

  적막한 바닷가에 거친 바람이 소용돌이 치고

  이 거친 바람이 또다시 그의 화폭 전체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멀리 일출봉과 초가집이 잇고 무기력해 보이는 노인이

  척박한 황토색을 배경으로 또각또각 걸음을 재촉한다.

  조랑말, 까마귀, 초가집, 그리고 검은색 돌담과 황토 빛 바탕이 만드는 강한 대비에서

  화가의 유별한 시선을 느낄수 있다.

  남도의 강렬한 햇살에 발색된 듯한 이 황토 빛은 원시성을 담은 태고의 빛으로

  우리에게 근원의 이야기를 전한다.

  성긴 붓 자국에서 이 지방 화산석의 뾰쪽한 모서리가 보인다.

  흙 냄새와 시름이 흠씬 배인 화폭이 황량하기만 하다.

  그리고 한없이 고독한 리듬이 배어있다.

  그 고독 하기만한 뉘앙스가 이 갈색 캔버스의 아름다움인지도 모른다.

  화백은 일관되게 제주도의 질박한 풍광에서 그림의 모티브를 찾았고 화폭 속에

  노인을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이야기할 만큼 갈색 물감 속에 동화되어 잇다.

  이렇듯 변시지의 제주 그림들은 인간의 삶에 뒤섞여 있는 비극적이고 운명적인 요소들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마주하며 소박하고 거침없는 표현들로

  우리에게 강렬한 감동을 선사한다.



   

                                   -이름 모를 바람-


  제주도. 이곳은 예로부터 임금님 용안에서 벗어난 단절의 땅이었다.

  좌천되었다 싶은 관리들이 만든 소외와 유리감 때문에 더욱 멀리 떨어져 있는 세상이었다.

  하루 속히 붓짐을 싸서 뭍으로 떠나야 하는 이방인들이 모인 곳이었고

  이제나저제나 임금님 부름에 목을 빼고 기다리던 관리들이

  연북정에 가부좌를 틀고 모여 앉아 발바닥 만지는 일밖에 할 일이 없던 곳이었다.

  이렇듯 제주는 언제부터인가 군마 사육을 위한 장소로 폄하 되거나

  좌천된 이들의 자조 섞인 농담 속에 유배지의 대명사가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방인들이 만들어 놓은 나그네 문화가 제주도에 자리잡게 되었고

  그 피해는 작고 순박한 갈색 잠방이를 입은 사람들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겨졌다.

  불과 반세기 전에는 이데올로기의 탈을 쓴 집단 히스테리와 그 광풍이

  다시 한번 이곳 순진한 섬사람들을 원한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고

  그들은 다시 입에 담기 꺼려지는 묵시록을 안은 채 살아가야 했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 시인이 노래한 절망의 배경인지도 모른다.




            


  이 음악에서 아일랜드와 몽골의 가락의 미묘한 관련성을 느끼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게다가 이들이 서로 어우러져 제주의 풍광을 노래하는 것을 보면

  대단히 절묘한 섞임이라 감탄하지 않을수 없다.

  매우 다양한 연주 형태를 보이는 것은

  양방언의 가락이 뿜어내는 흥은 이제 희망을 이야기한다.

  제주의 가락이 섞여있을 새로운 월드뮤직, 혹은 ‘에닉스 퓨전’을 들을 것 같은 예감이다.

  성산포의 어느 장날에는 굿거리 장단에 태평소의 익살스런 가락이 있어야 할 듯 하다.

  밝은 색으로 제주도의 새로운 경치를 그려 놓은 양방언의

 <제주의 왕자 Prince of Cheju>를 연주 했으면 좋겠다.

  양방언이 들려주는 분명한 가락에는 오히려 죤 테시(1959~)의 톤이 섞여 있고

  에냐(1961~)의 소리결 속에 갈색 잠방이를 입은 사람들의 노래가 숨어 있다.

  무척 자유로운 그의 음악적 시선과 섞임에 대한 의지가 과거 해녀들이

  바다에 쏟아 놓앗던 넋두리에 밝은 새 옷을 입혀줄 것만 같다.

  바다와 은밀한 대화를 나누며 제주도를 품에 안았고

  기꺼이 젖줄이 되어주었던 여인들은 바닷가 언덕 위에 석상 하나를 남기고

  모두 먼 곳으로 떠나버렸다.

  타고난 정염과 로맨스가 버겁기만 했던, 생존의 인고를 한 몸에 끌어 안았던 여인들이었다.

  이제 누구도 떠나버린 여인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유람객들의 들뜬 웃음소리가 뿌려진 자리에 고허함이 대신 그 자리를 채우고 있을 뿐이다.

  여인들이 떠난 자리에 어느새 시인과 화가와 음악가만이 물위에 뜬 정염을 음미하고 있다.

  화가는 질박한 잠방이 속에서 여인들의 체념을 보았고 음악가가 그 조화를 노래한다.

  시인은 성산포 앞 바다 파도 소리에 아낙네들이 밷어놓은 크고 작은 앙심을 다시 듣는다.



 


  하지만 제주도는 아름다운 그림이 잇는 곳이다.

  크지않은 오름들이 겹쳐져 구름 위에 아름다운 곡선을 그린다.

  섭지코지에 부딪치는 파도가 아름다운 음악으로 흐른다.

  알 수 없는 신령한 기운이 배인 삼방산이 있고

  일출봉이 커다랗게 솟아오르는 해를 품에 안는다.

  양방언(1960~)의 <이름 모를 바람 Wind with no name> 선율에서

  어두운 황토색보다 더 맑은 색채의 제주도 풍광을 보게 된다.

  화가와 시인이 노래했던 어두운 제주의 풍광을 언듯 엿들을 수 있지만

  선대의 고통스러운 고향을 경험하지 못한 그의 가락은 밝은 빛을 띠고 있다.

  키보드 사운드가 비교적 낮은 음을 들려주고

  한 몽골 여인의 목소리가 멜로디 전반을 애잔하게 물들인다.

  양방언의 피아노와 귀에 낯선 이국 악기 ‘마두금’이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무리없이 대화를 이어가며 아주 섬세한 멜로디 라인을 이룬다.

  몽골여행에서 언은 악상을 연주하며 뜻 모를 이국가락의 가장 밑바닥에

  제주여인들의 이야기가 묻어난다.

  아일랜드풍 가락의가장 밑바닥에 제주 여인들의 시린 사연이 가라앉아있음을 보게된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원한을 만들고
                                               바다가 그 원한을 삼킨다’

  

  출처 : 미술, 뉴에이지를 만나다 

시공아트 2005  양한수 지음

 

 *

 음악은  "나는 그냥 나" 님 이 수고해 주셨읍니다.
   2007.9.19.
-carlas-
 
*
 
폭풍이 일어 대지를 삼키고있군요!
지금은 조용하지만 내일이면
다시 비가 온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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