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가지 고통 위에 피어나는 그대, 연꽃


                    -임혜신-
    
                              그대여, 봄의 과수밭으로 오라
                              빛과 와인과 석류꽃 속의 연인들이 있는 곳

                               그대가 오지 않는다 하여도, 이곳은 좋으리니
                               그대가 온다 하여도, 이곳은 좋으리니
                                                              -루미-



     깊은 밤입니다. 낮게 틀어놓은 실내용 분수에서 지줄지줄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윈드차임의 원통형 파이프들이 부드럽게 서로의 몸을 부딛는 소리도 들려옵니다. 깊고 고적한 밤입니다. 창밖에는 달빛대신 가로등이 빛나고 있습니다. 저 가로등 건너 어둠 속 어딘가에 는 못생긴 아마딜로가 뾰죽한 주둥이로 풀밭을 파헤치고 있을 것이며 오소리들은 바스락 바스락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을 것입니다. 큰길 건너 시네마크 극장의 바깥 층계에선 북쪽의 혹독한 겨울을 피해 플로리다로 내려온 거지 한 두 분께서 젖은 보따리를 베고 잠을 청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밝혔던 집안의 등불들을 하나씩 끄고 빛의 소음 속에 숨겨졌던 것들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깊고 고적하고 풍요로운 밤입니다. 이제 나는 침실의 한 구석에 놓인 소파에 깊이 몸을 묻고 김윤선의 시를 읽으려 합니다. 
     김윤선과 나는 십년 전쯤 글로벌 시인들의 모임인 [빈터]를 통해 만나 문학과 삶을 허물없이 나누어온 사이입니다. 우리는 청주근처의 어느 도기마을의 황토 마당에 누워 별을 보며 와인을 함께 마시기도 했고 인사동 골목에서 몇 번인가 차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미국에서도 만났습니다. 유학을 온 아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김윤선이 샌프란시스코에 몇 년 머물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말이 같은 미국이지 샌프란시스코와 플로리다 사이에는 미 대륙이 통째로 가로놓여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는 태평양가의 도시이고 잭슨빌은 대서양변의 마을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다섯 시간을 넘게 미대륙을 가로질러 그가 찾아왔습니다. 나를 보기보다는 플로리다의 푸른 바다와 한없이 넓게 깔린 모래사장을 보고 싶어서라고 했습니다. 한 번 오면 아무도 잊지 못해하는 플로리다에 그가 찾아 왔을 때 남쪽의 멜본에 사시는 한혜영선생님도 올라오셨습니다. 평생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한 그 밤에 우리는 와인창고를 드나들며 밤새워 포도주를 마셨고 노래를 불렀고 춤을 추었습니다. 수피들처럼 혹은 수백년 전 루미의 마을 주막에 모여든 주정뱅이들처럼 우리는 즐거웠고 아무 걱정이 없었습니다. 날이 밝자 우리는 바다로 나가 조개를 주우며 바다를 거닐기도 했습니다. 내가 그의 꽃무늬 블라우스와 밝은 햇살 속에 고해성사처럼 살짝 비추었던 이슬 같은 눈물방울을 기억하듯이 그는 풍요로운 플로리다의 슬프도록 눈부신 해안을 기억할 것 같습니다.
    그가 샌프란시스코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요가를 다시 시작했다는 소식을 보내 왔습니다. 그저 취미로 하나보다 했습니다. 그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요가강사 자격증을 받기위해 티칭 코스를 받고 있다고 했고 그러더니 코스를 다 마치고 시험에 패스하여 미국요가 강사 자격증을 받았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또 얼마간 지나자 파트타임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기고 하고 미국인 요가강사들과 우정을 나누기도 한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을 것처럼 잔잔한 자태의 어디에 그런 의지와 끈기가 숨겨져 있었는지 나는 감탄했습니다. 그러다가 시인에게 마땅한 스포츠(?)가 있다면 그것은 요가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시인은 골프를 치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일면 사교인 까닭입니다. 시인은 공차기 팀스포츠에 빠져들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시인에게 필요한 몽상과 우울을 너무나 말끔히 씻어갈 까닭입니다. 몸을 수련하고 몸과 놀기 위해서라면 시인은 아마 산을 타거나 걷거나 요가를 할 거라는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요가라는 몸의 극기예술에 도전하는 그가 자랑스럽고 또 부러웠습니다. 그렇게 요가강사 자격증을 가지고 그는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지난겨울쯤인가 그간 써온 시들로 그가 창작지원금을 받았다는 기쁜 소식을 들려주었습니다. 겸손한 그는 그 좋은 소식을 다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바다 건너 타국만리에 있는 내게만 슬쩍 귀뜸 해 주었습니다. 곧 시집이 나오려니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써온 시들을 밀어두고 요가를 배우고 가르치면서 시들을 묶어 요가 시집을 내겠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하 많은 책의 홍수 속에서 과연 시집을 내야 하는가를 골똘하게 고민하던 그가 ‘쓸데가 있는’ 시집을 내고자 무던히 애를 썼구나 생각이 스칩니다. 
      요가에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리써치를 합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요가는 화합, 일체화, 결합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기원전 인도에서 시작된 종교적 수련으로서의 요가는 신과 하나가 되기 위한 실용적 몸의 명상이라고 합니다. 종교적인 기원을 가졌으나 요가는 불교, 흰두교, 이슬람교의 동방종교와 쉽게 화합되어 각국으로 확산되었고 20세기에 이르러서 서방국가에까지 이르렀으니 범종교적인 셈입니다. 60년대 말부터 서서히 미국에도 정착하여 지금은 웬만한 도시 어디를 가나 요가 스튜디오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어떤 이들은 요가는 뉴에지 스포츠라고 합니다. 요가는 피트니스 트레이닝이며 멋진 라이프스타일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요가는 정신적 극기 훈련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이론 저 이론을 살펴보다 나는 요가는 아방가르트적 의예술이라는 말 앞에 서서 귀를 기울입니다. 그 말에 호감이 갑니다. 전위의학예술이라, 삼천 년 전의 종교적 수행법이 현대에 이르러 아방가르트적 의예술이라 불리게 된 것을 생각하니 알 수 없는 신비의 힘이 느껴져 가슴이 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과학이라 부르는 것 속에는 만질 수 없고 딱히 증명할 수 없는 희망이나 사랑이나 꿈이나 그런 현실을 앞서가는 비현실적인 아방가르트적 영혼이 깊게 내재해 있습니다. 비약과 초월을 꿈꾸는 마술적 인간의지는 느린 실존의 현실을 마침내 내일에 이르게 하는 숨은 힘 같은 것이니까요. 이 시대의 과학은 드디어 명상마술의 내면공간을 심각하게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두렵고 어쩌면 신비한 미로 속에서 요가는 영육의 내밀한 일원성을 증명해가는 앞선 의술이라 불리우게 된 것입니다. 
     요가시집에는 일반시집과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물론 읽는 이를 요가의 세계로 안내하는 것입니다. 그간 보아온 김윤선의 시들은 도시적이고 비관적이기도 하고 아픔이 가시처럼 박혀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요가시들은 다릅니다. 여기 모여진 시편들 속에는 만 가지 고통을 훌훌 털어내고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깨침의 세계로 출항하는 사려 깊은 인간의 모습이 보입니다. 불신과 불화와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흐트러진 영혼을 가만히 모아 신비한 생명의 약초를 나누어주는 요기의 따스한 영혼이 보입니다. 문득 명상적이며 최면적인 요가시가 현대라는 불확실성의 미로를 살아남아 미래로 갈 수 있는 문학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머지않은 미래의 그 어느 날 인간과 문명이 극도의 하모니를 이룬 뒤 또는 그 불화가 최악에 이른 그 뒤에 다가올 미래, 3차 대전이나 대자연 재해 뒤에 다가올 미래의 문학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문명의 종말적 얼굴에는 두 개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비인성적 종말이며 또 하나는 파괴된 제 2의 원시세계로의 종말입니다. 전자의 경우 예컨대 Sci-Fi에서처럼 고도 문명의 두뇌공간을 차지할 할로그램시로는 명상시가 무척 유력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후자의 경우 동굴인으로 돌아간 미래적 원시인들, 만 번째 고통 뒤에 빈손이 된 그들, 문명과 몰락을 체험한 새로운 원시인에게도 어쩌면 요가적 명상의 에너지가 가장 소중한 재생에너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어느 쪽이든 간에 명상적 요가시가 문명의 브레이크 이븐 포인트를 넘어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것은 실용성 때문일 것입니다. 요가시는 명상에서 시작하여 우리의 몸을 생의 에너지가 가득한 곳으로 이끌어 올리고자 하는 목적이 뚜렷한 시입니다. 김윤선의 요가시는 자아를 우주적 신, 혹은 신적 우주에게 반납하고 우주와 하나가 되는 영혼의 탈개인성을 통한 자아의 회복을 추구합니다. 온 우주가 하나의 샘물이 되어 흐르고 하나의 꽃송이가 되어 피고 질 때 너와 나의 경계는 사라지고 잘함과 잘못함이 구별도 사라지고 모든 인과의 업도 사라져버립니다. 그리고 경계 없음 속에 출렁이는 무의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이 세상 모든 자아들은 스스로의 이름을 잊고 광대한 우주라는 무의미 꽃으로 피어나는 것입니다. 슬프다, 그립다, 아프다, 억울하다, 갈망한다라는 나, 자아, 혹은 우리라는 소아적 욕망의 감옥에서 탈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김윤선이 시집의 첫 장에 내걸어주는 ‘가만히 오래 오래’는 욕망의 화살들로 가득하여 더럽혀지고 소란스러워진 삶의 공간을 떠나 느리고 오랜 망아의 호수로 가는 두루미를 보여줍니다. 도대체 배가 고픈 것도 잊고 스스로의 이름도 잊고 물가에 서 있는 새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새는 욕망을 포기한 것일까요? 혹시 자학 행위일까요? 아니면 저항일까요? 아니면 그 어떤 자기보호일까요? 그 모든 것이 다 맞을 수도 있을 것이나 나는 그 중에서 저항이라는 말을 조심스레 택해 봅니다. 왜냐하면 김윤선의 요가시 속에는 순결한 자아를 점령해오는 온갖 소음들에게 저항하며 고독하고도 평화롭게 자신의 생명의 본질을 지키려는 저항의지가 여기 저기 스며있기 때문입니다. 


먹이를 찾아 물가에 나왔습니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
잔물결이 그리는 물무늬를 보다
먹이도 잊고
돌아갈 곳도 잊고
이름도 잊고 가만히 오래 오래
물 속만 들여다봅니다.
                   [가만히 오래 오래]

잊는 다는 것은 놓아주는 것이기도 하며 용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가에 나온 두루미는 자신의 이름을 잊음으로서 자신의 욕망을 용서하고 자신의 욕망을 놓아줍니다. 이렇게 이름을 잊은 돌아갈 곳도 잊은 상실의 두루미는 먹고 먹는 세상에서 보다 때 묻지 않은 세상으로 전이해 가는 것입니다. 그 전이는 시집 한 장 한 장을 넘기면서 차차 진행됩니다. 시 [수직에 저항하다]를 읽어보면 사람으로 직립해 산다는 것도 좋은 일만은 아닙니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은 자연에 저항해야 하는 아이러닉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직립한 우리는 자유롭고도 고통스럽습니다. 요가는 직립했을 때의 고통, 그것은 대지와 평행으로 엎드리고 구부리는 것으로 치유하고자 합니다. 

앉아서 앞으로 구부린다는 것은
수직에 저항하는 의지의 표현
쉽게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게다는 것
잠깐이지만 운명을 거스르겠다는 것
                               [ 수직에 저항하다. ]

저항 혹은 역행은 기실 요가의 중심 철학입니다. 요가의 포즈들은 습관에 의해 굳어진 것을 습관의 반대방향으로 역행하게 합니다. 우리들은 열심히 걷고 달리고 먹고 채우고 소유하며 앞으로만 전진해왔습니다. 그러나 김윤선의 요가시는 그것을 역류하라 합니다. 비사회적인 호수, 먹지 않는 새, 거꾸로 서는 일은 다 자연스러워 보이는 생명현상에 제동을 걸고 그 흐름을 역류시킴으로서 보다 깊은 삶의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복된 자아는 축복 속에 환하게 피어납니다. 발바닥과 발바닥을 모으고 두 무릎으로 나비처럼 팔랑거리는 나비자세에 붙어진 축복의 시는 구속되었던 여성의 몸을 시원의 자유 속으로 날려 보내줍니다.

삼 천년동안 잠겼던
꽃 대궐의 문이 열린다
태초의 하늘로 날아오르던 힘찬 나비처럼 활짝 
날개를 펴는 여인들 
비옥한 대지의 기운을 받는다 
              [축복의 날개]

삼 천 년 동안 잠겼던 슬픔과 아픔의 문이 열리고 나비떼가 날아오르는 평원의 이미지는 행복하고도 쾌활합니다. [수선화꽃밭에서는]는 평범한 사람들이 실은 얼마나 소중한 세상의 별이며 꿈인가를 일깨워줍니다. 그런가 하면 [천진난만한 아기처럼]에서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을 다 큰 아기들이라 부르며 그들에게 경계심 없이 몸을 풀어 천진무구한 어머니의 자궁속의 아기들처럼 행복하라 합니다. 또 다른 시들 속에서 번지점프의 자유로움과 환희를  들려주고 생명 하나라도 다칠세라 조심스레 발끝을 세워 서는 세찬 바람의 따스한 배려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십 편의 시들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시는 시집의 맨 끝에 편안히 자리 잡은 송자자세에 바쳐진 시일 것입니다. 이 자세는 그저 죽은 자처럼 바닥에 편안히 누워있는 자세입니다. 요가에서 명상은 바로 이 송장자세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송장자세에는 ‘제 3의 충전‘이란 제목이 붙어있습니다. 첫 장에서 나타난 배고픈 두루미는 호수라는 새로운 영혼의 창을 향해 눈을 뜨면서 영웅, 사자, 전사, 아이들, 나비들, 그런 것들을 지나 연꽃좌의 부처도 지나 마침내 이 송장자세에 이릅니다. 


지금은 완벽하게 죽음을 맞는 시간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던 매 순간
마음의 감옥을 열다
발 다리 허리와 가슴
두려울 때 움켜쥐던 두 주먹조차
스르르 풀리다
몸 보다 무거워진 머리를 이고 달려가는 길
지금은 새로운 탄생을 꿈꾸는 시간 
한 순간, 죽었다 깨어난 나는 충분히 자유롭다
                        [제 3의 충전]

     시인 루미는 죽을 때까지 기다리지 마라, 살아서 죽음을 누리라 말합니다. 산 자가 대체 어떻게 그리고 왜 죽음을 누려야 하는 걸까요. 그것은 마음의 빗장을 열어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명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생과 사의 깊은 뿌리에 닿아있는 우주의 샘물을 살아서 느끼라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우주의 숨결을 배우고 죽음이라는 절대패배의 속에 담긴 진기한 초월적 자아의 의미를 찾아내라는 것입니다. 사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상상이 빚어낸 기우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올 것이나 아직은 이르지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대한 깊은 명상은 이러한 본능적 기우를 잊게 하고 탈자아적 유포리아를 선물해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지고 가는 만 가지 고통과 우려는 만 가지 기쁨으로 환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생사는 서로 속에 열리고 서로 속에 닫히는 하나의 수레바퀴가 됩니다. 그것이 루미가 말하는 누림일 것이며 김윤선의 요가시가 긍극적으로 추구하는 세계인 것입니다. 호수로 갔던 평범한 요기, 두루미는 이런 저런 것들을 거쳐 마침내 죽음의 명상인 송장자세에 이릅니다. 거기서 일어서면 이 두루미는 먹이를 찾아 그의 배고픈 작은 몸을 채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먹으나 함부로 먹지 아니하고 사랑하나 함부로 사랑하지 아니하며 혹 싸우더라도 함부로 창을 쓰지 않는 사려 깊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해설이 필요 없이 맑은 시에 사족을 붙인 것만 같습니다. 이 사족이 축복의 사족이길 바랍니다. 이 시집이 병들고 아픈 이들에게 치유를 기쁘고 행복한 자에겐 더 큰 기쁨을 늙은이에게는 그만 늙기를 선사하는 좋은 책이 되길 바랍니다. 요가를 배우는 이에게 가르치는 이에게 혹은 요가를 하지 않는 이에게도 다 읽히는 시집이기를 바랍니다. 지하철이나 휴게소에서 찻집이나 벤치에서 혹은 흰 눈이 봉긋 봉긋 날리는 겨울 묘지 앞을 지나가는 버스 안 같은 이 세상 어디서나 아픈 영혼 위에 내리는 치유의 손길이며  배고픈 영혼을 먹이는 따스한 빵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008년 겨울

플로리다에 
임혜신




[자서]

사람 몸속에는 약 72,000개의 나디Nadi라 불리는 길이 있다. 나디는 기氣가 흐르는 신경통로, 만약 이 길이 막히게 되면 프라나(기)가 자유롭게 흐를 수 없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어두워지게 되는 것이다. 

내 몸속에 72,000개의 길을 놔두고 나는 자꾸 어딘가를 찾아 헤맨다. 

마음 깊은 곳에 72,000개의 꽃등을 걸고 이미 당신 와있었는데도 당신을 찾아 헤맨다. 

내 눈길 아직 먼 곳에 있으나 마음 가끔 고요하니, 이 길고 가늠하기 힘든 길속에 당신이 있고 시가 있고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 


[약력]

서울에서 태어나 중앙대 예술대학원을 졸업했다. 2006년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비상구」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요가명상을 좋아하던 중 2005년 미, 샌프란시스코 The Yoga Company 요가지도자 200시간 과정과 미, 숀콘 빈야사 요가 워크샵 및 미, Intro to Meditation 시리즈를 마치고 요가지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지금은 분당 삼성플라자 문화아카데미와 평촌 꿈마을에서 시인 요가지도자만의 감수성과 정통요가수련법을 조화시킨 니콜의 흐름(Flow)요가 클래스를 진행하고 있다. 글로벌 시인들의 모임인 [빈터] 동인이다.



[발문] 

만 가지 고통 위에 피어나는 그대, 연꽃   

—임혜신(시인)     



[추천글]
시는 음악이나 미술, 혹은 영화와 친연성을 가져왔다. 그런데 우리 시문학사상 처음으로 언어와 몸짓언어가 일체를 이룬 ‘요가시집’이 나오게 되었다. 수강 학생들에게 요가를 가르치며 살아가고 있는 김윤선 시인은 요가 동작 하나하나에서 시적 영감을 얻어 언어로써 낱낱의 동작을 표현하였다. 동작마다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따지고 보면 요가란 몸으로 표현하는 마음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시가 언어로 표현하는 마음이듯이. 몸(손)으로 묘사하는 영혼이듯이. 

시인은 요가 자세를 스케치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자세를 모티프 삼아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편다. 때로는 신화와 설화의 세계를 여행하고 때로는 환상과 몽상의 세계를 유영한다. 요가 자세에는 인간 생로병사의 비의와 희로애락의 진실이 담겨 있다. 우리의 몸은 그 자체가 자연의 이법대로 살아가게끔 되어 있지 않은가. 동양에서 일찍이 몸을 소우주로 여긴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요가 시를 쓰면서 자연의 이법을 하나하나 깨쳐간 것이리라. 

요가 자세가 이렇게 시가 되었다. 

시를 보니 요가의 자세를 알 수 있다. 

몸과 마음이 이렇게 일체를 이루었다. 

—이승하(시인 ‧ 중앙대 교수) 


[추천글]

그간 보아온 김윤선의 시들은 도시적이고 비판적이기도 하고 아픔이
가시처럼 박혀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요가시들은 다릅니다.
여기 모여진 시편들 속에는 만 가지 고통을 훌훌 털어내고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깨침의 세계로 출항하려는 사려 깊은 인간의
모습이 보입니다. 불신과 불화와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흐트러진 영혼을 가만히 모아 신비한 생명의 약초를 나누어주는 
요기의 따스한 영혼이 보입니다. 

   - 임혜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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