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무꾼과 시인
2010.05.20 11:22
나무꾼과 시인
삶은 고통과 고독과 아픔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너무 빨리 끝나버린다
- 우디 알렌-
[감사의 시]
- 토마스 럭스
당신이 누구시든 신이여, 감사합니다,
들이쉬고 내 쉬는 공기를 주심에,
숲 속의 오두막과 땔나무
그리고 빛-램프와 잎들의 배면,
양치류와 날개 같은 자연의 빛.
피아노와 재를 치울 삽, 나방이 슨
담요, 돌처럼 찬 물:
감사합니다, 신이여, 나를 여기에
데려다주기 위해 이 땅까지 오심을,
내가 이를 악물고 살아가야할 땅
내가 마음을 진정하고
일할 곳, 감사합니다, 신이여,
저 빌어먹을 새의 노래를 주심에!
오늘은 나무꾼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나는 나무꾼을 잘 모릅니다. 나무를 지고 산길을 내려오는 이도 산 속에서 나무를 하거나 장작을 패는 이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무꾼을 동경합니다. 나무꾼은 내게 시인의 반대말인 동시에 시인의 깊은 가슴속에 사는 아름답고 충직한 시혼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나무꾼은 시인에게서 가장 멀고 또 가장 가까운 사람입니다. 많이 배우지 못한 밀크맨의 아들로 목장에서 자라난 시인, 토마스 럭스의 시를 읽으며 나는 내면에 나무꾼을 가진 시인을 생각 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떠오르는 대로 [나무꾼과 시인]라는 제목을 붙여놓고 상상의 미로를 따라갑니다.
이 시는 게리슨 키일러가 편집한 [좋은 시]에 첫 번째로 실린 시입니다. 감사로 시작하지만 실은 불평의 시입니다. 넉살스런 감사로 넉살스럽게 불평을 털어놓은 시입니다. 시의 첫 행이 주는 예감이 마지막까지 잘 맞아떨어진다면 아마 재미없는 시겠죠. 좋은 시는 언제나 독자를 예기치 못한 결말로 유도합니다. 바다에서 시작해서 산정에 이르기도 하고, 바람에서 시작해서 꽃으로 끝나기도 하고, 슬픔에서 시작해서 환희로 끝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독자여, 그대는 어찌하여 그런 단순한 이분법의 세계에 안주하느냐’ 추궁이라도 하는 듯이 순진한 독자를 오리무중의 캄캄한 골목길로 끌고 들어가 온갖 상상의 고문을 하기도 합니다. 몇 줄 안 되는 시작과 끝 사이에서 우롱하고 반항하고 변절하면서 시는 그렇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감사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불평이라는 것, 혹은 불평인지 감사인지 알쏭달쏭하다는 것 그것이 이 짧은 시를 읽는 반전과 혼란의 작은 즐거움일 것입니다.
보아하니 이 시인에게는 두 가지 불평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산다는 게 고된 노동이라는 것입니다. 신은 시인에게 싱그런 공기, 숲속의 오두막과 땔나무, 그리고 램프의 빛과 더불어 햇살, 달빛, 그리고 그것이 비추는 잎새 위의 음영 같은 자연의 빛을 제공해주었습니다. 또 일할 도구와 추위를 막아줄 담요도 한 장 제공해주었습니다. 그것까지는 참 좋고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신은 선물보따리와 함께 이 시인을 세상에 덩그러니 던져놓고 사라져버렸습니다. 혼자 남은 시인, 선물인줄 알고 신이 준 보따리를 풀어보니 그건, 선물이라기엔 너무 막막한 노동현장일 뿐이었습니다. 숲, 자연 , 그런 날것으로서의 환경으로 비유된 현실, 오로지 생이라는 노동으로만 채워줘야 하는 텅 빈 시간의 보따리가 바로 선물의 내용물이었던 거지요. 그러므로 그는 불평합니다. 왜,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는지도 모르는 채 살아남기 위해 죽을 힘으로 노동을 하게 되었으니 어찌 불평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은 아름답지만 강제노동수용소였으니까요. 그것이 이 시인의 첫 번째 불평입니다. 시인 속에 깃든 일하는 자, 생의 땔감을 마련해야 하는 자, 인내하며 미래로 끝없이 걸어 나가야 하는 자, 생명의 힘이며 원천인 나무꾼의 불평이며 이를 악물고 살아가겠다는 그의 굳은 의지이기도 한 것이지요.
두 번째 불평은 새소리입니다. 모든 새소리는 노동의 방해꾼입니다. 묵묵히 일하는 이의 마음을 마구 흔들어놓기 때문입니다. 소쩍새는 슬퍼서 아침의 종달새는 한없이 청명해서 그렇습니다. 새소리가 들려오면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멈추어서 시인이 되어야 합니다. 신은 시인을 나무꾼을 만들어 강제 노동을 시켜놓고 귀에는 감미로운 새소리를 들려줍니다. 달콤한 새 소리가 들리는 강제수용소가 시인이 사는 곳입니다. 장작을 패듯 바르고 곧고 성실하게 수행해야 할 ‘삶‘이라는 의무 앞에 놓인 새는 선물이 아니라 방해물인 것입니다. 새 때문에 삶이 복잡해 진 것입니다. 새 소리만 없어도 시인이 되지 않고 그냥 나무꾼만 해도 되었을 거고 그래서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을 거고 그렇다면 사는 건 덜 힘들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니 어찌 불평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요, 이 빌어먹을 새소리라고.
이렇게 불평하는 나무꾼인 시인의 방에 피아노가 놓여있습니다, 좀이 슨 담요와 함께. 피아노와 낡은 담요라, 혹시 피아노라는 영화 보신 적 있으신지요. 뉴질랜드 바닷가 원시림 속에서 피아노라는 감각적이며 관능적 상징물을 중심으로 욕망의 집요한 싸움이 전개되는 그 영화 말입니다. 이 시인의 방에 놓인 피아노는 문득 그 영화를 생각하게 합니다. 열대림 속의 피아노, 아무 훈련 없어도 단 하나의 키를 눌러 아주 심플한 소리를 낼 수 있고 미친 듯 두들기면 광염 소나타를 만들 수도 있는 악기, 그러므로 악기 중 가장 까다롭지 않은 악기, 손가락 하나로 통 통 소리 낼 수 있는 악기, 누구나 연주를 시도해 볼 수 있는 몸집이 크고 단순한 악기, 영화 피아노에서처럼 거추장스러워 숲 속까지 끌고 가기는 힘든 악기, 그래서 누군가에겐 쓸모없는 악기,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목숨처럼 소중한 악기, 피아노. 그것은 나무꾼처럼 단순하고 시인처럼 복잡합니다. 그런 단순하고 쓸모없고 복작하고 집요한 욕망의 악기를 곁에 두고 낡은 담요를 덮고 잠드는 램프와 풀잎의 세상에 아침이 오면 아무리 게으른 시인이라도 기꺼이 나무꾼이 되어 강제노동수용소에서의 노역을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쓰다 보니 상상은 나를 너무 먼 곳까지 끌고 가 버린 것 같습니다. 나는 그저 시를 읽으면서 우리들 가슴 속의 노동자, 생이라는 힘든 여정을 성실하게 이끌어가는 아주 깊은 숲 속의 일꾼,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물들지도 않고 묵묵히 짐을 지고 가는 사람, 내가 나무꾼이라 부르는 그 사람을 밖으로 잠시 꺼내놓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아무도 모르게 잠시 짐을 내려놓고 나무 그늘아래 쉬면서 듣는 미칠 듯 고운 새소리는 이 세상 어떤 새소리보다 아름다울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렇게 노동이 시가 되고 시가 튼튼한 의지의 노동이 되길 함께 꿈꾸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릅니다. 감사해야 할 지 불평해야 할 지 알 수 없는 생이라는 매혹의 수용소를 살아가는 우리들 삶은 그 안에 시인이 있고 또 나무꾼이 있어 믿음직하고 풍요로운 것이 아니겠는지요. 그러므로 나는 지금 이 순간, 이름 모를 신에게 감사하듯 이 두 사람에게 감사하고 싶습니다. 서로 반대말인 동시에 서로의 가장 깊은 정의인 시인 그리고 나무꾼, 혹은 나무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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