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폭풍은 사라지고
2010.05.11 11:22
2. 폭풍은 지나가고
[폭풍]
- 마크 스트랜드 -
우리가 자택연금을 당했던 마지막 밤
바람은 울부짖으며 거리를 휩쓸어가고
창문 셔터를 찢어대고 지붕조각을 날려버리고
쓰레기더미만 강물처럼 남기고 떠나버렸어.
태양이 대리석 게이트 위로 떠오르자, 경비들의
모습이 보였어, 아침의 열기에 나태해진
그들은 각자 보초구역을 떠나 시내 근처의
숲속을 향해 비틀거리며 사라졌어,
‘달링!’ 그때 나는 외쳐댔지 ’달아나자, 경비들이 사라졌어.
이곳은 이제 버려진 거야‘ 하지만 그녀는 관심도 없는 듯
‘당신이나 가요’ 하더니 담요를 눈까지 끌어올렸어.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가 나는 나의 말을 불렀어.
‘바다로,’ 내가 속삭이자 그는 달리기 시작했지.
말과 나, 우리는 얼마나 빨리 달렸던가,
싱싱한 푸른 들판 위로 마치
자유를 향해 가기라도 하는 듯이,
폭풍이 몰아치는 캄캄한 밤, 가택연금 된 사람처럼 어둠 속에 갇혀 본 일이 있으신지요. 갇힌 채 비바람의 긴 손가락이 세상을 할퀴는 소리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폭풍이 행패를 스스로 그쳐주기만을 기다리면서 잡음 석인 옛날식 라디오 채널을 돌리면서 덜 자란 진주 같은 촛농이 흘러내리는 작은 불빛의 방을 지켜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에 소스라쳐 담요를 뒤집어 써본 적이 있으신지요. 머리 위를 밟고 지나가는 폭풍의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두려움과 더불어 알 수없는 종말적 신비에 가슴이 이유 없이 부풀어 오르셨던 적이 있는지요.
이곳 플로리다 해안에 사는 사람들은 해마다 몇 번씩 그런 밤을 보냅니다. 여름철마다 태풍이 불어 닥치니까요. 캐리비안 남쪽에 내리쬐는 폭양에 한껏 달아오른 바닷바람이 무지막지한 욕망의 몸뚱이를 거대한 풍향계처럼 돌리며 달려옵니다. 제 몸 속에 차오른 고압의 욕망을 쏟아놓을 곳을 찾아서 말입니다. 그런 폭풍이 오는 날이면 우리는 짐을 쌉니다. 먹을 것, 마실 것, 비상약, 중요한 서류, 그리고 각자 소중히 하는 몇 가지를 넣은 상자를 차에 싣고 내륙을 향해 집을 버리고 떠납니다. 좀 견딜 만하다 싶은 낮은 강도의 폭풍이 오면, 창문을 꼭꼭 닫아걸거나 판자로 유리창을 막아버리고 집을 지킵니다. 그리고 기다립니다. 태풍이 지나가기를. 아내와 남편 아이들과 친척들 친구들과 연인들이 함께 기다립니다. 키가 2-3층짜리 건물의 지붕을 한참 윗 도는 소나무와 참나무 그리고 작은 관목과 풀잎까지 비와 바람에 몸을 맡긴 채 그렇게 몇 밤을 지샙니다. 짐승처럼 울어대는 바람의 도시, 일상은 완전히 정지하고 자연의 위력만 기승을 부립니다.
그러한 폭풍의 밤을 소재로 쓴 이 시는 퓰리처상은 받았던 마크 스트랜드의 시집 [인간과 낙타]에 실려 있는 시입니다. 이 시집은 행복이나 즐거움에 관한 시집이 아닙니다. 사실 이 시집은 전편이 다 죽음에의 징조와 연관된 시들로 묶어져있습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우울한 내용의 시집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시인의 천진한 시혼은 개인의 종말인 죽음을 절망적이지 않게 합니다. 일종의 슈르리얼리즘적 천진함인데 그런 천진함은 시를 코믹하게 합니다. 속도도 있고 색깔도 있는 무의식적 의식의 신선함은 죽음에조차 묘한 생기와 희망을 부여합니다. 그는 생의 소실점에 이르기까지 노래를 부릅니다. 소실점보다 좀 더 클 때는 좀 더 큰 노래를 소실점처럼 작을 때는 그처럼 작은 노래를 그리고 사라지면 사라지는 노래를. 나는 늙지 않는다’ 고집하지도 않고 나는 시들어가고 있다고‘ 징징거리지도 않고 너도 늙을 거라고’ 협박하지도 않고 늙는다는 것은...하면서‘ 명상에 돌입하지도 않으면서 그의 엉뚱한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칩니다. 늙음도 있고 패배도 있고 종말도 있으나 절망은 없는 시집입니다. 그 어떤 인생사의 아픔도 절망과 연결시키지 않는 그의 상상력은 읽는 이에게 긍정적 생체 에너지를 제공해줍니다.
원한다면 [폭풍]도 시집의 맥락에 따라 죽음과 연관하여 읽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영산홍 화사하게 피어나는 아름다운 4월에 이 귀한 시간을 바쳐서 죽음을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아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단순하게 [폭풍]을 ‘폭풍’으로 읽기로 작정합니다. 텍스트는 시인의 것이지만 텍스트라는 써브 된 케이크의 어느 쪽을 맛볼 것인가는 독자의 맘이니까요. 또 제공된 텍스트로서의 시가 모델이라면 독자는 사진작가라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모델의 어떤 아름다움을 어느 쪽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는 사진작가의 맘대로죠. 어떤 구도로 얼마만큼의 빛과 색으로 모델을 조명할 것인가에 대해 사진작가가 자유로울수록 창조적인 독서의 즐거움이 탄생할겁니다. 그런 자유를 누릴 수 없다면 사실 무슨 재미로 시를 읽고 예술품을 감상하겠는지요.
일절하고, 다시 태풍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플로리다 해변을 마구 부수며 지나간 폭풍은 조오지아주와 캐롤라이나주, 그리고 델레웨어주를 지나 드디어 이 노시인이 사는 뉴욕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좀 누그러지긴 했지만 여전히 파괴적인 힘을 가진 거센 바람은 작은 도시의 골목골목 쏘다니며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창틀을 부술 듯 흔들어대고 지붕 조각을 날려 보내기도 합니다. 작은 상점의 간판이며, 쓰레기통이며 신문조각들을 거센 빗물로 쓸어가며 밤새도록 아우성칩니다. 어쩔 수 없이 시인은 가택연금 된 죄수가 됩니다.
여기서 경비가 등장합니다. 이 시가 재미있어지는 것은 바로 이 경비 혹은 간수의 등장부터입니다. 밤에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던 경비가 아침이 되자 죄수의 눈에 뜨입니다. 죄수가 도망가지 못하게 지키느라고 밤새 경비도 무척이나 힘들었나 봅니다. 아침 햇살이 뜨겁게 쏟아지기 시작하자 그만 지난밤의 피로를 어쩌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사라져버립니다. 임무를 내던지고 잠시 숲 속으로 가서 낮잠이라도 자려나 봅니다. 아니면 다 망가진 도시를 지킨들 무엇하겠나 싶어 아주 떠나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쨋거나 수인에게는 호박이 넝쿨 채 들어온 셈입니다. 드디어 폭풍도 사라지고 그 삼엄했던 경비도 사라졌습니다. 눈부신 아침햇살만 빛나고 싶은 대로 마냥 빛나고 있습니다. 간밤의 폭풍도 잊고 죄수가 있었다는 것도 잊고 경비가 떠났다는 것도 잊고 집이 감옥이었다는 것도 잊고 폭풍이었던 장소가 강렬한 망각의 강도로 빛나고 있습니다.
원한도 없고 슬픔도 없고 길고긴 이야기도 추억도 없는, 기억 상실에 걸린 햇살 속에서 이 시인은 역사성을 잃은 순간적 생명력에 감염됩니다. 그를 감금하고 있던 자연으로서의 폭풍과 감옥을 지키던 경비라는 현실세력조차 사라진 판에 무엇을 더 염려하겠습니까. 이 시인은 달아나기로 작정합니다. 정말 신나는 아침입니다. 죄수라면 가택연금으로부터 달아남 일거고, 또 태풍이라는 우울로부터의 달아남일 수도 있고, 만일 그가 폐렴이라도 치료받기 위해 병원에 있었다면 병으로부터 달아남이며 간호사와 의사와 엑스레이와 병상차트로부터의 달아남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 무엇이던 간에 이 시인은 지난밤으로 상징되는 과거의 장소를 탈출합니다. 망각처럼 눈부신 바다를 향해 말로 상징되는 상상의 속도를 타고 달려갑니다.
동반자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탈출입니다. 시인은 노인도 환자도 죄수도 아닌 이제 자유를 향해 달리는 천진난만한 청년이면 소년이며 마부입니다. 지난 고통을 되새길 생각도 시간도 없는 듯이 순간적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그는 모습은 아마도 그 보다 젊은이였을 경비나 간수보다도 건강하고 순발력이 있습니다. 바다로 달려가라고 말에게 지시하는 생의 당당한 주인, 그는 말과 함께 들판을 달립니다. 망아의 탈출입니다. 도시의 골목을 빠져나가 바닷가를 향한 길, 숲 속의 나무들이 푸른 눈으로 촉촉이 살아나는 신비의 새 세상, 자유를 향한 탈출을 시도합니다.
이 장면에 이르러 나는 ‘모든 노인의 가슴속에는 소년이 살고 있다’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나도 당신도 그렇게 늙어 가면 좋겠습니다. 몸의 우울을 영혼의 우울로 닦으면서 몸의 병을 마음의 빛으로 깨우면서, 아파도 늙어도 죽어도 햇살이라는 소년, 아니 소녀의 순수한 생명력을 받아들이는 자, 자유와 탈출을 꿈꾸고 상상하는 자,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실제로 아니면 상상으로라도 자유를 향해 말을 달리는 자, 그렇게 소년 아니 소녀를 가슴에 품고 아파지고 늙어가고 죽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참고로 ‘인간과 낙타’에 실린 시중 저 미래로 투영된 죽음의 순간까지도 아프로디테처럼 아름다운 그리스 여신의 모습을 불러들여 화려하고 풍성한 언어와의 사치를 누리기를 잊지 않는 마크 스트랜드의 시 [2032]를 세상 모든 이 가슴 속에 사는 소년과 소녀에게 전하면서 이야기를 맺기로 합니다.
[2032]
X라 불리는 도시에 저녁이 오고
한 때 나를 사랑하던 죽음이
담요로 무릎을 덮고 리무진에 앉아서
운전기사를 기다리고 있네.
흰 머리카락과 작아진 눈, 뺨은 윤기를 잃었네.
낫을 휘두르거나 모래시계를 만져본지도 오래인 그
그는 기다리고 있네 불루 호텔 -그 영원한
리조트로 가게 되기를
끝없는 고요가 라일락 향기로 가득 차있고
대리석 물고기들이 정지한 대리석 바다를
유영하는 ...그곳으로, 그런데 어디?
기사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아, 저기 있군,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벨벳 이브닝가운을 입고
금빛 보아를 두른 그녀가,
정원의 계단을 오르고 있군,
나무들의 향해 키쓰를 날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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