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라잇의 시와 해설

                                                      임혜신





제7의 센스, 제 7의 축복


                                
                                               나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랑하고 고통 받기 위해 태어난 자
                                                  - 프레드릭 휠더린-
                                
오직 하나뿐인 짐승
                                - 프란츠 라잇-
                                        (번역 임혜신)

자살을 하는 유일한 짐승이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네
딱딱한 벤치에 앉아 초저녁 
별빛을 쬐었네.
친구들은 안락의자에서 
조용히 이야기하는 동안
저 깊은 우주공간의 끝까지 여행했네
그러다 문득 돌아와 보니
방은 텅 비어있네.

눈물을 흘리는 유일한 짐승
옷을 벗는 유일한 짐승
거울을 보고, 칫솔로 이빨을 닦는
이 세상 단 하나뿐인 짐승

그 어딘가에

담배를 피우는 유일한 짐승이
누워서 과거를 향한 시간을 유영하는 유일한 짐승이
일어나 책을 집으러 가고
어휘를 하나 찬찬히 살펴보는 짐승이 
전화벨 소리를 들었네
어두운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기로 했네.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네: 몇 번이나
내 자신의 죽음 
그 마지막 시간에 머물겠다고 다짐 했던가 
(내가 있는 이 공간은
물처럼 무섭게 단절된 곳이네)
절대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몇 번이나
작정 했던가,
하지만 아직


이 아침
나는 세상에 다시 한 번 서 있네, 정원의
아치와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빈 무덤,
쌍둥이 영원들 사이에서,
일종의 날개,
서로에게서 거의 같은 거리로 유배된 두 날개들,
깨어있음‘이라는 꿈속을 윙윙
날아다니며, 그곳에
당신은 비밀스레 한 가지 감지할 것을 내게
주었네, 저 높고 푸른색의 별 같은
존재의 낯설음을

당신은 몰래, 우리들 각자에게 감지할 것을 준 것이네.

당신은 말하네
털 없는 , 직립하는, 사라진
내 실험용 
아이,

네 자신의 심장이 너를 비난해도

나는 너를 비난하지 않느니라.






[해설]

제7의 센스, 제 7의 축복

                               임혜신


    지난 봄, 요절시인 실비아 플라스의 아들 니콜라스 휴즈가 47세의 나이에 자살을 했다는 보도를 접
했습니다. 그는 영국의 계관시인을 지낸 테드 휴즈와 실비아 플라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실비아 플라스가 자살할 당시 2살이었습니다. 테드 휴즈의 둘째 아내도 자살을 한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실비아 플라스의 아들 자살하다’라는 제목 하에 매스컴은 니콜라스 휴즈의 사진대신 실비아 플라스와 테드 휴즈가 포즈를 잡은 사진을 보도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매력적인 실비아 플라스와 잘 생긴 테드 휴즈의 사진 위로 겹쳐지던 그들의 비극적 삶과 사랑과 문학을 돌아보며 나는 참으로 복잡한 심경에 잠겼었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높고 가느다란 선, 대체 사람들을 저 가파른 마지막 벼랑으로 끌고 가는 그 병은 무엇일까요?
      프란츠 라잇을 소개하면서 이런 우울한 이야기를 꺼내보는 것은 이 시인의 시가 죽음에 아주 근접한 침울한 세상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는 이 시인의 시를 작년부터 품에 끼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풀어내야 할까 대책이 잘 서지 않았었습니다. 프란츠 라잇은 시인 제임스 라잇의 아들입니다. 이들은 퓰리처상을 받은 유일한 부자입니다. 아버지인 제임스 라잇도 우울증을 앓았고 알콜중독자었습니다. 아들인 프란츠 라잇도 알콜 중독과 약물중독과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었습니다. 14살의 아들이 시를 쓰는 것을 안 제임스 라잇은 ‘Welcome to Hell'이라고 반농담 반진담으로 말했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프란츠 라잇이 그 말을 격려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아무튼 병력답게 그의 시는 우울함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우울은 일상적 절망이나 좌절에서 오는 것이 아닌 본능적이며 심미적 우울입니다. 죽음에의 유혹과 충동이 지배하는 그 우울은 선동적이지 않습니다. 물처럼 가라앉은 세계, 연못을 향해, 혹은 강이나 바다를 향해 걸어드는 듯 느리고 낮은 우울입니다. 파괴적이거나 광란적인 불의 죽음이 아닌 침착하고 계획된 물의 죽음입니다. 그의 이 우울은 ’시인은 귀신들린 자’란 말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면 시인들은 조금 많이 혹은 조금 적게 다 귀신들인 사람들일 것입니다. 시인 뿐 아니라 사람이라면 다 조금씩 그럴 것입니다. 귀신들린다는 것이 별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감을 넘어서 제 6의 센스로서 영, 혹은 어떤 경계를 넘어선 세계와 교감을 하게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감의 세계에 갇힌 존재가 제6의 센스를 얻는 것은 더 넓은 생의 영역을 얻는 일인 동시에 불안과 소외와 고독을 얻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알지 못하는  무지와 무감각이 행복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술가들 특히 시인들에게 자살이 많았던 것은 ‘귀신들림’이 가져다준 고독과 불안 때문일 수 있을 겁니다.  
   여기 저기 시인과 우울에 대한 글들을 뒤적거리다가 흥미로운 나는 연구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텍사스 대학의 심리학교수인 제임스 페네베이커가 연구한 자살한 시인과 건강한 시인의 시어비교분석입니다. 그는 실비아 플라스, 하트 크레인, 앤 색스톤, 블라드미르 마야코브스키 등 자살한 시인의 작품 속에는 소외, 버림받음 등과 관련된 어휘와 내성적인 언어들이 지배적이고 또 ‘나( I )’ 라는 단어를 보다 건강한 시인들에 비해 눈에 띄게 많이 사용했다고 합니다. 또 이들 자살한 시인들은 ‘나’라는 것에 집착하고 외부를 단절하고 내면으로 깊어져 있으며 ‘듣는다’, ‘공유한다’, ‘말한다‘라는 단어를 그 반대쪽 시인들에 비해 훨씬 적게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들 시인들은 자신의 내면에 집중해있고 내성적이며 외부와의 커뮤니케이션을 거의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의 연구에 비추어보면 프란츠 라잇의 프로파일은 자살하는 시인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살하지 않았고 지금은 오히려 자살하고 싶어 하는, 우울에 빠진 그리고 약물중동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살하는 시인의 프로파일을 가진 그가 어떻게 자살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를 또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의 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프란츠 라잇은 퓰리처상을 탄 시집 ‘ Martha's Vineyard로 걸어가며’통해 과거와는 다른 긍정적 전환 포인트로서의 회복 증세를 내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 시집에는 재생을 향해, 우주 또는 종교적 세계를 향해 눈뜬 자가 볼 수 있는 생명의 아름다움, 그 자체로 빛나는 생명미학이 어휘적으로 보면 아주 적은 양으로, 그러나 향내 짙게, 그리고 끈질기게 깔려있습니다. 아주 적은 양입니다. 그러나 그 향은  마치 쓴 맛을 주는 음식의 향신료와도 같이 고통의 밑바닥에서 회귀한 자의 시적의 결말을 완성해줍니다. 
      그러한 ‘아름다움에의 감지‘를 나는 제 7의 센스라 부르고자 합니다. 제 7의 센스는 불안한 인간존재에게 미학적 타당성을 제공합니다. 제 6의 센스만을 가진 신들린 자는 불안하고 우울합니다. 반면 제7의 센스는 포용과 안정을 제공하고 감각, 센스들 간의 불화를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그것으로 하여 시인은 비극적 생 속에 담긴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존재의 아수라장에 내리는 구원의 햇살을 감지하는 것입니다. 장난삼아 나는 제7의 센스는 제7의 착각 혹은 환각이라 말해봅니다. 생의 본질, 존재의 진실, 구원으로서의 신의 존재의 여부 같은 것이 인간의 감각으로  증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지요. 그런 인간존재의 인지와 감각의 한계성을 감안한다면 사실, 착각이나 센스, 감각이나 환각은 서로 다른 말이 아닐 것입니다. 동의어지요. 그래서 영의 세계를 감지하는 착각이 6번째 착각이라면 구원과 절대 심미의 평화를 느끼는 것을 일곱 번째 착각이라 부를 수도 있다는 우스운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위에 소개한 시는 시집 ‘ Martha's Vineyard 걸어가며’의 맨 마지막에 실린 시입니다. 이 시를 살펴보면 시인은 먼저 인간을 자살하는 존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만이 자살하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살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을 것입니다. 오너킬링( Honor Killing), 집단자살, 종교적 제물, 자살폭탄, 그리고 안락사 등이 다 작게 크게 자살에 범주 속하겠지만 가장 많은 것은 물론 우울과 절망에 시달리다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병적인 자살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을 죽일 만큼 우울에 빠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 시인은 또 인간을 눈물을 흘리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합니다. 물론 인간만이 슬픔을 안다는 것은 물론 아닐 것입니다. 슬픔이나 기쁨의 감각은 모든 동물과 식물에게도 있다고도 합니다. 나아가 생명이 있다고 불리는 것이나 생명이 없다는 생각되는 돌이나 흙, 별이나 어둠이라는 우주의 공간에도 슬픔이나 기쁨이라는 감성은 나름대로 존재한다고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눈물을 흘리는 유일한 동물이 아니라 눈물을 흘려 아픔과 고통을 표출하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말이 더 마땅할 것 같습니다. 눈물이라는 소통의 도구를 소유한 유일한 동물인 것입니다. 인간이 다른 존재보다 더 절망하고 더 아파하는지 알 수 없으나 인간은 그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존재라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꽃이나 별이나 돌처럼 제 몸 속에 슬픔과 기쁨을 품어 사라질 때까지 영원토록 간직할 능력이 없는 어쩌면 무능하고 참을성 없는 존재입니다. 셋째 그는 인간이 자학하는 유일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호기심 많은 인간은 해로운 것을 알면서도 제 호기심에 중독되는 매조키스트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 존재인 그는 6번째 센스의 어둠과 7번째 센스의 빛을 들고 이 세상이라는 어둠을 방황하고 했다고 이 시인은 고백합니다. 죽음을 동경하고 수없이 생을 떠나고자 했던 과거를  고백합니다. 동시에 그는 이제는 자신이 몸속에 밤과 아침, 절망과 구원, 생과 사, 제6의 센스와 제7의 센스라는 두 날개를 가진 하나의 새를 감지할 수 있게 된 것을 또 이야기합니다. 
      하나의 날개로는 그 어떤 새도 날 수가 없습니다. 새는 그리고 우리는 5감의 몸과 제6, 제7 감각의 두 날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른 쪽인 밤과 왼쪽인 아침, 왼 쪽의 구원과 오른쪽의 절망, 그 둘은 ‘난다‘라는 일의 필수조건인 두 날개인 것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날게 된 이 새가 날아가는 곳은 어디일까요. 마지막 연에서 그는 그곳을 보여줍니다. 그곳은 갈등이 없어진 세계입니다. 종교적인 차별적 구원도 넘어선 공평한 구원의 세계입니다. 그 무슨 잘못도 탓하지 않는 만물에 공정하고 무한한 용서에의 감지입니다. 그렇게 그는 제6의 센스를 해독(害毒)하고 존재의 당위성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이 순간이 우주의 시간이며 나의 시간이고, 내가 지금 선 곳이 신의 땅이며 나의 땅이라는‘ 실존의 미학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7의 센스를 갖게 된 자는 자살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 시인처럼 자살을 할 만큼 아픈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자원봉사를 나서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적거나 많거나 우울증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시인과 정치인, 범죄자와 구도자 서로 다를 바 없이 우리는 같은 인간입니다. 고뇌하고 자학하고 눈물 흘리는 존재, 그들이 모두 우울과의 유전적, 환경적, 습관적 인연의 깊은 개연성을 넘어 프란츠 라잇처럼 우울하나 우울을 넘어선 자, 죽고 싶으나 죽고 싶음을 넘어선 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절망스런 세상의 몰골위에 빛나는 구원과 경이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일 것입니다. 우리의 아프고 우울하고 기쁘고 슬픈 감각들을 축복으로 바꿔줄 이 제7의 센스를 이제 나는 제 7의 축복이라 부르려 합니다. 이 세상 누구,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다만, 감각을 열면 거기 빛나고 있을  제 7의 축복이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환하게 깨어나길 기원하면서 드디어 나는 프란츠 라잇의 시집을 우울하지 않게 덮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란츠 라잇은 1953년에 태어났다. 시집으로 'The Beforelife',                         'Ill Lit', 'Walking to Martha's Vineyard' 등 여러 권이 있으며 라                         이너 마리아 릴케, 에리카 페드레티, 르네 샤, 등의 시를 번역했                           다. 펜문        학상, 구겐하임 펠로우쉽, 내셔날 예술지원금을 받았다.                         ‘Walking to Martha's Vineyard’ 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에머슨                         대학, 알칸소대학 등에서 시를 가르쳤으며 현재 매사츄세스에 살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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