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마의 휴일
2010.03.18 11:20
하마의 휴일
-빌리 컬린즈-
이건 영화제목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영화가 있다면
그 영화를 보고 싶군요.
지극히 하마적인 짧은 다리와
큰 머리를 가진 그들을 난 좋아하니까요,
수백 마리 하마가
천천히 흐르는 강가의 진흙 속에서 즐겁게 놀고
나는 컴컴한 동네 극장에서 팝콘을 먹겠지요.
크고 탄탄한 이빨이 죽 줄을 선
큰 입들을 떡, 벌릴 때면
난 콜라를 벌컥 벌컥 들이킬 것입니다.
극장의 내 자리에 앉아있으면서 동시에
물속에서 하마와 함께 노는 거죠.
정말 멋진 영화를 보는 일이란
바로 그런 것 아니겠는지요.
심술궂은 평론가들만이 캐묻겠지요?
이러쿵 저러쿵, 휴일 날에 관해 말입니다.
어린 시절, 그림책에서나 보았던 것 같습니다. 하마 말입니다. 짧은 다리와 거대한 몸통과 펑퍼짐한 코를 가진 짐승, 수영도 하지 못하면서 물에 사는 멍청한 동물 말입니다. 멸종 위기에 놓인 이 비현실적이며 비현대적인 동물 하마를 소재로 빌리 컬린즈가 쓴 ‘하마의 휴일’이라는 시를 읽으며 나는 웃음이 났습니다. 먼저는 오드리 햅번이 나오는 ’로마의 휴일‘이 아니라 ’하마의 휴일‘이라서 그랬고 둘째는 하마와 뒹굴 뒹굴 휴일을 보내는 시인의 편안하고도 게으른 모습이 떠오른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시인이라면, 하마의 이야기를 쓸 때 아프리카 탐험까지는 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동물원에 가서라도 하마를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써야하지 않겠는지요. 아니면 영화를 보더라도 하마의 생태를 새롭게 조명한 다큐멘타리를 보던지요. 헌데 뜬금없이 무슨 동네 극장에서 팝콘과 콜라를 먹으며 뒹글뒹글 노는 하마영화를 보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요. 그런데 가만히 읽어보니 이 시 속에는 기존의 시적 요구조건을 면제받을 자격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 자격은 이 시가 순전히, 온전히, 100% ‘휴일의 시’라는 것입니다. 휴일을 선언한 아주 비시적인 시라는 것입니다. 빈둥거림이 지당한, 휴일적이지 않은 아닌 어떤 시적 조건도 만족시킬 필요가 없는 시라는 것이지요.
시를 보다 잘 감상하기 위해서 나는 휴일의 신발, 그것도 하마의 게으른 휴일의 신발 신어봅니다. 휴일의 시이니까 당연히 복잡하게 엇갈린 사건이나 운명, 가슴을 파고드는 아픔이나 충격도 없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한숨을 쉬게 하는 전쟁과 사랑의 이야기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 모든 시적 충격에서 벗어나 아프리카의 하마처럼 흙탕물이 느리게 흐르는 강가에서 빈둥빈둥 노는 일이면 족할 것 같습니다. 고민하기 시작하면 심심할 만큼 시시한 휴일에 대해 시를 쓰기란 거꾸로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가장 심심하고 휴일적인 시시한 방법으로 그런 휴일을 시화합니다. 고민할 것이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휴일의 시를 쓰는 최선의 방책인 것입니다. 그렇게 휴일을 선언한 시는 자신만의 시시한 휴일로 한없이 빠져들고 있습니다.
대상과의 거리가 좁혀진 몰입은 시시한 휴일에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시인과 아프리카의 느림보 하마와 탐미적일 만큼 깊은 교감은 평범한 휴일의 내면을 풍요롭게 열어줍니다. 탐미를 넘어선 탐미, 보여짐을 넘어선 순수한 교감으로서의 몰입은 지루하고 평범한 휴일 속에 행복한 시간과 공간을 창조해 내는 것입니다. 게으른 하마들의 휴일에 폭, 빠진 시인은 하마의 짧은 다리와 커다란 머리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대상을 만난 자가 사랑에 빠지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랑은 주관적인 것입니다. 대상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는 자가 대상과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마를 지루한 동물로 보는 사람에겐 이 휴일이 지루할 것이고 그런 하마 속의 자연스러운 생명력과 느림의 미학을 읽는 사람에겐 재미가 쏠쏠한 휴일이 되는 것이겠지요. 그런 경위로 하여 동네 극장도 멋진 극장이 되고 영화 속의 것들도 다 살아있는 것들이 되고 콜레스테롤 많은 팝콘과 텅 빈 칼로리의 콜라도 신의 음식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이쯤 되니 가히 풍요롭고 호화로운 휴일입니다. 하마와 함께 자연과 야성을 향유하는 휴일입니다. 튼튼한 이빨에 흠칫 놀라기도 하고, 긴장감에 손에 땀이 흐르기도 하고 그럴 때면 콜라를 벌컥 벌컥 마시는 낮고 단순한 도취로 가득한 휴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인은 자신의 휴일에 대해 자신만만합니다. 누구든 이 시를 거론하여 시와 휴일의 정의에 시비를 논하고자하는 비평가가 있다면 그는 휴일의 의미를 모르는 자이거나 심사 삐뚠 사람일거라고 넌지시 말합니다. 이 말을 듣고 그 어느 비평가가 이 유명한 시인의 시를 혹평 하며 선뜻 나서겠습니까. 따져봐야 뭐 별것도 아닌 휴일에 대한 시시한 시인데 말입니다. 이러한 비평과의 결별선고는 어려운 시에 대한 쉬운 시의 권리 주장이며 복잡한 생에 대한 심플한 생의 권리 주장이기도 합니다. 휴일에 속한 휴일 같이 편한 시를 놓고 예술이니, 게으름이니, 아프리카니, 자연도태니, 역사니, 의미니 따지고 팝콘과 콜라가 몸무게에 미치는 영향 같은 걸 분석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하마적 휴일에 대한 권리침해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잣대를 물리쳐버린 빌리 컬린즈의 휴일은 편안하고 유머스럽습니다. 그 휴일은 역사와 의무 속에서 풀려난 개인의 멋대로인 날입니다. 내 맘대로 놀고 꿈꾸는 날입니다. 사회구조를 떠난 개인의 날이니까 예술로 치면 그중 순수예술의 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누구를 위한 예술도 아닌 자신을 위한 창작의 날이라서 창작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날입니다. 아나키스트의 날이며, 저항의 날이며, 반사회와 반구조의 개인적인 시간이며 지극히 파격적인 반예술로서의 순수예술의 날이겠습니다.
여기쯤 생각이 이르자, 휴일도 제대로 못 챙기고 흐지부지 살아가는 나의 일상을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행여 내가 내 몫으로 지당히 주어진 휴일까지 자발적으로 세상이라는 타인에게 바치고 있다면, 배당된 휴일조차 스스로 반납해버리고, 휴일 속에까지 이런 저런 비평가를 불러 들여 스스로 그들의 노예가 되어있다면 그래서 점점 하마의 휴일에서 멀어져가고 있다면, 그렇다면 다음 휴일이 오기 전에 필히 궁리를 해야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마의 휴일을 선언하고 비평가 없는 휴일의 극장에서 한 편의 순수시처럼 게으른 나의 하마와 하루라도 더 뒹굴 거리며 놀 수 있을 것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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