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hen Dunn의 시 소개                            
벌판을 달리는 두 개의 기차
                                                  임혜신

시 [잔과 메리]

                            -잔과 메리는 만난 적이 없네. 그들은 허밍버드 같았네.
                                                   서로 만날 수 없었던 허밍버드-
                                          - FROM A FRESHMAN'S SHORT STORY -



그들은 아프리카 영양 같았어. 
서로 다른 초원에 살면서 
서로 다른 사자로부터 쫒기며 
반대 방향으로 달아나던 두 마리의 영양. 
그들은 다른 구역을 맡았던 우체국직원 같기도 했지. 
휴가 가는 날짜도 서로 다르고 
시간을 재촉하는 지독한 상사도 각각 달랐던 거야.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어?
그들은 한 자리에 있을 수가 없을 듯 한 사람들이었지. 
잔은 회교 금욕주의자를 사랑하는 수피,
메리는 통금시간을 지키는 기독교인,
광대한 대서양을 제각기 유영하는
두 마리의 돌고래와도 같았으니까, 
한 마리는 놀기를 좋아하고 
다른 한 마리는 참치 잡이 그물에 걸린 듯--
아주 다른 어린 시절을 가진 두 마리의 돌고래!
희망이란 없었어. 서로에게 
말도 걸지도 않았을 거야. 바람이 몰아치는 
벌판을 가로질러 서로를 향해 달려갈 때는 
꼭 두 개의 화물기차 같았어, 
오후 6시 36분에 알 수 없는 속도로 
시애틀을 출발한 기차와
고장이 나서 토피카에 연착되었던 기차.
수학에 의하면 그들이 만일 다른 세상에서 만난다면 
평행선 같이 서로를 포옹할 수 있을 거래, 아니면, 
가까운 친척처럼 보일 지도 모른대, 별들처럼 말야,







시 [이 후]




넘어져서
양동이는 엎질러지고, 질의 무릎에는 큰 상처가 나고
잭은 아픔을 진정시킬 아스피린도 없어진 뒤에
잭과 질은 함께 집에 있네.
험난한 저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이네.
돈을 받고 물을 길어다줄 소년이 이제는 필요하네. 
함께 뭘 해보려고 했다는 것이 실수였어, 질이 말하네. 
네가 한 번이라도 그냥 내버려 뒀으면 그렇게 전율하지
않아도 되었을 걸, 잭이 말하네.
그는 휠체어에 있으나 그녀는 아직 보기 좋네--
살아있는 한 그들은 작은 
운문 같은 이야기 속에 갇혀 버린거네.
이 이야기를 우리는 아이들에게 전하네.
재난에 익숙한 아이들은 웃어버리네.
잭과 질에게 지나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법을 가르쳐보려 하나,
잭은 국 숟가락을 두드려대고
질은 머리카락을 잡아 뜯네.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자 우리는 돌아서네,  
삶의 표류물, 우리에게 남겨진
함께 하기라는 저 근본적인 사업으로부터, 행여
달아날 수 있을 거라는 듯이



    요즘 심한 경제난 때문에 힘들어 하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겨우 안정세를 찾았다 하지만 눈사태처럼 빠르게 굴어 떨어지던 경제난국의 회복은 남 아메리카 열대우림속의 나무늘보보다도 느립니다. 사람들은 사는 것이 재미없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복잡한 세상사를 잠시 덮어두고 지난 며칠간 나는 스테판 던의 시집을 읽었습니다. 2001년에 그가 퓰리쳐 상을 받은 ‘또 다른 시간’입니다. 이 시집 속에도 살아가는 일의 고통과 고뇌가 가득합니다. 사람 사는 일은 그러하나 창밖의 가을 햇살은 여전히 거리와 나무와 건물들 위에 빛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무심히 빛나고 있습니다. 문득 나는 ‘얼마나 아프면 시를 쓰겠는가.‘ 라고 말하고는 껄껄 웃어버리던 어느 서정시인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얼마나 재미없으면 시를 읽겠는가.‘ 라는 뒤늦은 우스개 소리를 그에게 건네주면서 나는 다시 시 읽기에 빠져듭니다.  
     그러면서 ‘재미없다‘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재미가 없다는 것은 눈을 번쩍 띄워줄 새로운 것, 신기한 것, 마음을 혹하게 하는 특별한 무엇이 없다는 것일 것입니다. 순간을 마비시키는 오락은 있어도 순간들을 빛내는 진정한 즐거움은 없다는 것이 현대인의 공통적인 불평인 것 같습니다. 시를 읽다가도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시가 독자를 새로운 곳으로 안내할 힘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고 독자가 시의 새로움을 알아챌 마음의 여유가 없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겁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더 이상 문학과 재미, 사는 의미와 즐거움을 나눌 수는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두 가지를 다 원합니다. 우리는 재미 속에서 의미를 의미 속에서 재미를 꿈꾸고 찾아 헤매는 재미있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깨우침의 재미이든 몽환의 재미이든 놀이의 재미이든 우리는 그것을 원하고 또 필요로 합니다. 좋은 시를 읽는 일이란 그러므로 재미에 의미를 더한 묘미를 찾아가는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재미를 운운하기에 스테판 던은 너무나 진지한 사색의 시인입니다. 그의 시에는 빌리 컬린즈나 마크 스트랜드가 가진 독특한 유머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세계를 여행하는 것은 즐겁습니다. 그 속에는 늙음의 문제, 가정의 문제, 생과 사라는 존재의 제반 문제가 진지하게 다루어져있습니다. 안내자의 시선은 날카롭고도 공정하고 풍요롭습니다. 자신만의 길을 갈 줄 아는 독립된 지성과 세상에 순응하나 굴복하지 않는 완숙한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또 그의 시에는 종종 심각한 문제들을 제기하는 심각하지 않은 톤이라는 기교적 가벼움이 있기도 합니다. 좀 비약된 이야기지만 그런 시를 만나면 나는 좋은 시의 몸은 때로 넝마 속에서 더욱 빛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넝마를 입은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은 순전히 내 개인 취향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저런 생각 속에서 나는 다른 시들과 쉽게 구별되는 두 편의 시 ‘이후’와 ‘잔과 메리’를 눈여겨 읽습니다. 가장 좋은 시라기보다 그중 재미있고도 뜻 깊은 시이기 때문입니다.       시 ‘이후’는 ‘잭과 질’이라는 구전 동요의 패러디입니다. 구전 동요 속에는 시대의 진실이 숨어 있었듯이 이 시 속에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실이 들어있습니다. 이 시 속의 문제는 노인문제이며 또 남녀의 불화의 문제입니다.  또 ‘노화’와 ‘빈곤’이라는 상황이 초래하는 인간의 보편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 누구도 듣기 좋아하지 않을 ‘늙은 아이들’의 이야기지만 이 시를 읽다보면 독자는 시 속의 아이들처럼 웃어버리고 말게 됩니다. 그것은 문제가 심각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문제를 수용하는 이들의 넉넉한 마음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잭과 질의 곁에는 재난을 보고도 웃을 수 있는 아이가 있고 또 그런 문제를 어떻게라도 중재해보려는 중간자인 화자가 있는 때문일 것입니다. 동요가 리듬을 타고 성벽을 넘고 궁궐을 넘어 퍼져나가듯 스스로의 심각성을 감춘 이 시도 독자의 가슴으로 그렇게 다가와 인간살이의 초라함을 웃음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잔과 메리’ 역시 화자의 의도를 슬쩍 감춘 코믹한 면을 가진 시입니다. 잭과 질이 개인사의 이야기라면 잔과 메리는 사회, 인종, 그리고 사회구조, 나아가 우주로까지 넓은 존재의 이야기라서 좀 더 다양하게 읽어보려 합니다. 아주 흔한 이름의 남녀, 잔과 메리를 이 시인은 서로 다른 생의 플랏을 살아가는 영양에, 우체국직원들에, 돌고래에, 그리고 화물차에 비유합니다. 영양일 때 이들은 서로 다른 초원에 살며 서로 다른 문제에 쫒기고 우체국직원일 때 이들은 서로 다른 상사 밑에서 서로 다른 스케줄에 시달리며 화물차일 때 이들은 각각의 짐을 싣고 서로 다른 경로로 달려갑니다. 종교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무엇보다 살아가는 시간과 장소가 엇갈리는 이들은 서로 만나지 않도록 만들어진 두 존재인 것 같습니다. 만일 궤도를 이탈하여 만난다면 충돌사고를 불러올 것이며 영토전쟁을 불러올 것이고 인종전쟁이나 종교전쟁을 일으킬 것 같습니다.  바로 이 발발하지 않았으나 언제 발발할지 모를 것 같은 충돌에의 긴장이 이 시를 재미있게 하는 가장 큰 요소입니다. 시적 행간에 놓인 아직 터지지 않은 사건이 주는 긴장감, 그 잠재적 충돌에의 팽팽한 기대와 우려와 호기심 말입니다.        
     시를 읽어보면 이들은 담을 쌓고 내부에 거주하며 외부를 거부하는 적극적이며 배타적인 타인들이 아니라 서로 다른 궤도를 돌며 안전한 중력공간을 유지시키고 그것으로 상호공존을 유지해가는 두개의 항성 같은 타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만나지 않았지만 만난 사람들입니다. 만남이란 거리적 정의일 뿐이고 거리란 상대적인 것이니까요. 또 엄청난 자력이나 중력을 사이에 두고 공존하는 관계를 만나지 않은 관계라 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거리’ 때문에 이들 사이에는 잠재적 위험은 있으나 서로를 간섭하는 악의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정면충돌한다면 파멸이 올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악의가 없으므로 그런 충돌은 그들이 의도한 바가 아니라 우연이며 운명의 장난이 될 것같이 보입니다. 만일 질서정연하게 서로 잘 돌아가는 우주가 심심하다 여겨지신 신께서 항성들의 궤도를 조금이라도 달리하신다면 이들은 충돌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보다 인간적 관계인 전쟁이나 사랑의 비극이 탄생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인간의 몸에 들어온 우주적 충돌이란 얼마나 자극적인가요. 아무튼 지금은 상대방을 모르는 채 달리고 뛰고 유영하고 있는 이들 두 존재, 그들의 에너지가 충돌하면 생길 일들을 상상하게 하는 것이 이 시의 재미 쪽의 묘미입니다. 
      
이 시인은 또 잔과 메리를 통해 잠재적 충돌 뿐 아니라 아주 평화로운 만남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러기 위해 이 시인은 일상인 잔과 메리를 일상에 묶어놓지 않고 다른 세상으로 갑니다. 들판을 달리고 우편물을 나르고 대양을 누비던 잔과 메리를 별과 별 사이의 우주로 데리고 나갑니다. 시간과 공간이 끝없이 펼쳐진 우주라는 새로운 곳으로 갑니다. 거기서 이 시인은 이 세상에서 서로 갈등하던 존재들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를 이야기 해줍니다. 그는 이들이 평행선처럼 만날 것이라 합니다. 모순입니다. 평행선은 만나지 않는 선들인데 어떻게 그들이 평행선처럼 서로를 포옹한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생각의 관점, 즉 차원을 바꾸면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또 논리적으로 봐도 모든 존재에 오류가 있듯이 평행선에도 오류가 있을 거고 그렇다면 언젠가 저 먼 곳에서 평행선도 그 오차로 하여 결국은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대체 평행으로 만날 수 있은 사람들은 얼마나 오래 우주 공간을 달려간 사람들일까요? 작은 오차가 마침내 둘을 만나게 할 만한 큰 오차가 될 때까지 얼마나 길고 긴 평행선을 그은 사람들일까요? 또 얼마나 마음이 크고 깊으면 수 억 광년을 건너서 별의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이런 만남은 그러나 슬픕니다. 슬프기에 아름답습니다. 이들의 만남은 영원한 이별과도 같은 평행선의 만남이고 멀고 먼 별들의 만남인 때문입니다.           
      이 시는 결국 서로 다른 잔과 메리를 통해 보여주는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스테판 던은 비관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는 낙관주의자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벌려놓는 시인이 아닙니다. 두 사람 사이에 전쟁을 일으켜 둘을 다 파멸시키는 시인이 아닙니다. 그는 아주 큰 위험을 피해가는 시인, 그러나 보다 넓은 의미의 중용을 지닌 시인입니다. 이 시 속에도  역시 인종, 생김새, 종교, 성별의 모든 차이를 넘어 우주적 만남을 향해 아주 멀고 깊게 마음을 펴보는 시인의 영혼이 보입니다. 위대한 영혼의 스승이나 성자의 가르침이 아니라  때로는 미워서 총을 들고 싶고 어떤 때는 너무나 고마워 쿠키라도 구워주고 싶었던 우리의 평범한 이웃, 잔과 메리를 내세워 이 시인은 독자를 시시한 일상의 순간에서부터 우주적 만남의 슬프고 아름다운 영원에까지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그리고 슬픈 만남의 여운을 끌며 저 높은 하늘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합니다. 이것이 이 시를 읽는 또 하나, 의미 쪽의 묘미입니다. 
   그러나 저러나 이 시에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잔과 메리는 이제 만남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잭과 질도 헤어질 수가 없게 된 것 같습니다. 별처럼 멀리 멀리 달아나도 결국은 만나게 되고 평행선처럼 한없이 멀어져도 서로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미워했고 싫어했어도 서로에게 사랑의 눈을 깜빡이며 깊고 너른 어둠의 호수를 건너가는 별처럼 만나야 되는 것이 저 큰 세상, 우주의 법칙이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잭으로부터 질도, 메리로부터 잔도 달아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치고 싫다고 울고불고 떼를 써도 스테판 던의 거대한 우주가 평행으로 감싸고 별빛으로 묶어버릴 것이니까요. 그러니 적이란 무엇이며 이웃이란 무엇인가요? 다음 세상으로 한 발 내딛으면 티끌처럼 사라질 적의란 또 무엇일까요? 




Stephen Dunn (1939-    ) 은 뉴욕에서 태어났다. Hofstra 대학에서 역사와 영문학 학사를 받았고 Syracuse 대학에서 문예창작 석사를 받았으며 야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했고 광고업계에 종사하기도 했다. 시집으로, 세기의 마직막 풍경, 일과 사랑, 지역 시간 등 다수이며 또 다른 시간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제임스 라잇 상, 내셔날 예술 기금 펠로우십 등을 받았다. 현재 뉴저지 리차드 스탁튼 칼리지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고 있다. 







◈ 꼬리말 쓰기
 
최영숙 (2010-01-13 05:39:55)  
제가 소설을 써 보겠다고 어깨에 힘을 주기 시작했을 때,
그 때 만난 시인이 실비아 플라스 하고 존 던이었어요.
그들의 극적인 삶과 시세계가 같이 보여주던 잔인하고 어두운,
그러면서도 그들이 획득하고 있는 문학의 미학이
제게는 불가능하기조차 해서 두려웠지요.

저는 시를 쓸 엄두도 못내어 보았지만, 그후로는 읽는 것도
선뜻 맘이 내키지를 않아서 자주 시를 읽지 못했어요.
잘 썼다는 시를 대하면 우선 방어기제가 앞을 가로막지요.
아마 혜신씨의 시를 읽으면서 조마조마했던 심정이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어요.
제 앞에, 감당하기 힘든 그 세계가 시라는 이름으로 
튀어 나올까봐....아니면 시인이 그 세계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게 될까봐... 아니 어쩜 둘 다 일지도 모르겠어요.


프란츠 라잇이나 스티븐 던 같은 시인들이 저와 같은 하늘에서
숨쉬고 같은 환경 속에서 같은 고민을 하고,
그런 고민들을 깊은 사색으로 끌고 가는 시편들을
읽으면서 소개해주신 혜신씨께 감사드려요.

이제 저도 시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날카로우면서도 적요하고 풍요롭고, 또 공정하며 따스한
시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빠져 볼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실비아 플라스를 이해하고 존던을
다시 보겠습니다.
 
최영숙 (2010-01-18 12:55:53)  
스티븐 던이 아니라 스테판 던(Stephen Dunn)이었군요.
글머리에 이름을 소개해 주셨는데도, 전 이 분의 시를 스티븐 던이라는 이름으로 찾을 뻔 했어요.
"Where He found Himself"
"The Land of Is"
이 두 편의 시가 들어있는 시집을 구해서 막 읽고 났습니다.
우선 잘 이해되지 않아도 첫 느낌을 음미해 보려고 했어요. 
다시 한 번 제가 잘 모르고 있던 미국의 현존하는 귀한 시인을 
소개해 주신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혜 (2010-01-18 21:39:19)  
부족한 글을 써놓고서도
선생님께서 칭찬해주시니까 기분이 정말 좋습니다.

선생님이 시를 가까이 하지 못하셨던 이유를
(짐작하셨겠지만) 정말 잘 이해한답니다.
저에게도 오래 그런 시간이 있었습니다.

남기신 글을 읽으면
다시 대체 시가 무엇인가. 생각에 잠깁니다.
나에게, 세상에게 그것은 무엇인가.
시인은 또 무엇인가.
사악함이 없는 시경적 정의의 시가 아니라
초월적 명상의 시가 아니라
감당하기 어려운, 난해하고 어두운, 비극적인,
욕망이 날뛰는, 싸움같은 병같은 그것들은 또 무엇인가를,
...,
그러다가 문득,
끝없이 의문하고 생각한다는 그것이 혹시 답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합니다^^

혹시 못보셨다면
선생님께 Garrison Keillor 편집한 [Good Poems]를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탐미적으로 아름다운 시라기보다 어떤 실용미학을 가진, 보편정서를 쉽게 표현한 시들의 모음집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맘에 드는 시가 있거든 그 시인의 시집을 찾아서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이렇게 대화할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6.19

오늘:
1
어제:
0
전체:
22,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