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시조 당선작(2000-2002)

2016.03.08 08:26

동아줄 김태수 조회 수:841


***************************************************************** 

신춘문예 당선작 2000

부산일보 추창호 낯선 세상 속으로
조선일보 현상언 봄,유년,코카콜라 뚜껑
중앙일보 송필란 가자미
대한매일 신수현 길
매일신문 옥영숙 마지막 유배지-반 고흐의 '사이프러스나무가 ...
국제신문 임 석 개운포 辭說.1
경남신문 최영효 감자를 캐면서
농민신문 조현선 안부 -속앓이 하는 동강아
**************************************

낯선 세상 속으로

추창호(부산일보)

깎아 세운 차운 빌딩 그 수척한 키만큼
불 밝히던 그리움 층층이 꺼져 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번화가를 질주한다

빙그르르 돌아가는 판에 박힌 원형무대
떨이 못한 좌판 같은 시간들이 멈춰 서고
한 순간 탈 벗은 얼굴 신발 끈을 고쳐 맨다

걸쭉한 목청들이 남도 땅을 넘어선다
굿거리 장단에 맞춰 어깨춤도 얼쑤얼쑤
떠나는 슬픔을 딛고 새 길 환히 밝아온다

◑부일신춘 시조 심사평◑

`시절의 노래에 후한 점수 매겨`

시조는 애초에 시절의 노래라는 의미에서 출발한 정형시다.회고풍 또는 고답적 내용이 시조의 소재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시조란 말이 애초 의미하였던 바대로 이 시대에 걸맞은 소재 또는 주제를 우선하고 싶었던 게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소견이었다.
많은 작품들이 응모되었으나 우선 위의 조건에서 따져 보았다.
그 다음으로는 시조를 결구하는 시적 이미지가 보다 참신하거나 의미심장한지를 따져 보았다.그랬더니 "숲속의 축제"(김영국),"풍란"(정영도),"바다가 있는 풍경"(이승태),"겨울나무의 꿈"(박지현),"난꽃이 피고 질 때마다"(이민화),"가난"(박진희),"채석장 가는 길"(이우식),"낯선 세상 속으로"(추창호) 등 8개 작품이 심사위원들의 수중에 남게 되었다.
이들 작품을 더욱 세밀하게 검토한 결과 결국,"채석장 가는 길"과 "낯선 세상 속으로" 등 2개 작품이 종심에 남았다.
어느 것이나 우수한 작품이고 크게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이었다.많은 시간을 두고 고민한 결과,"낯선 세상 속으로"가 시로서의 완성도가 보다 높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다만 주제의식이 좀더 선명하지 못한 점이 흠이라면 흠이라 할 수 있으니 당선자는 이런 점에 유의해서 작품을 쓰시기를 당부드린다. (시조시인 최승범.임종찬)

◑부일신춘문예 당선 소감◑

`필생의 시조 한수 건져 올리겠다`

불혹이 되었을 때 나는 나의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천재가 되고 싶었지만 결코 될 수 없었던,너무도 평범한 한 사내의 후줄근한 모습을 발견하고 문득 슬퍼졌다.앞으로 남은 세월은 이러한 허상을 지우며 소박한 꿈 하나 지니고 살고 싶었다.
순간 불씨로 남아있던 문학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났고,시조 쓰기는 곧 나의 전부가 되었다.
낯선 세상에 대한 여행으로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때로는 만나는 사람들과 부딪치는 풍물들이 나를 아프게도 하였지만 행복해질 수 있었다.나의 실존을 확인하는 작업이었으므로.
이제 새로운 간이역에 도착하였다.기쁘다.어둡고 긴 터널을 지난 끝이어서 과연 나에게 어떤 세상이 도래할 지 궁금하다.운이 좋으면 현실세계를 바탕으로 한 필생의 시조 한 수 건질 지도 모른다.상처받고서도 사람냄새 물씬 풍기며 꿋꿋하게 살아가는.아,그런 행운이 함께 하기를!
아직도 끝없는 사랑뿐이신 부모님,나의 유일한 독자이자 IMF와의 한 판 승부로 고생한 아내,시조의 첫길을 열어주신 박선생님,.이 영광이 조그만 보답이 되었으면 한다.그리고 부족한 작품 선택해 주신 심사위원님과 부산일보사에 감사드린다.
내 말없음표 속에 묻어둔 많은 분들에게도.
**************************************

봄, 유년, 코카콜라 뚜껑

현상언(조선일보)

1.
코카콜라 뚜껑이 버려진 잔디밭에
푸르름은 그들의 작업을 봄이라 부르며 땅 깊이 산발한 머리를 가지런히 빗고 있었다. 그들의 생명 위로 쓰레기가 버려져도 푸르름은 열심히 땅을 일구고 뿌리 내릴 양분을 채웠다. 돋아나는 새순에 풀벌레 스며들면서 푸르름의 목소리는 한 뼘이나 커졌지만 빌딩숲을 이고 있는 숨가쁜 흙에서는 아늑한 숲의 향내가 새나올 수 없었다. 어느 날 문득 푸르름의 어깨 위로 낯설고 고운 아이의 손길이 내려와 버려진 장난감 같은 코카콜라 뚜껑을, 진달래 꽃잎에 미끄러진 햇빛을 줍고 있었다.
겨울의 빨간 귓불에 피가 돌고 있었다.

2.
끊임없이 표정 바꾸는 자화상을 그리며
봄아, 너는 투명한 손이다 아이처럼
흩어진 햇빛 조각을 이파리에 입히는.

◑조선일보 시조 심사평◑

시조문학의 새물결 이끌 ‘젊은 피’

21세기 시조문학의 큰 물줄기를 이끌어갈 「젊은 피」는 과연 누구일까. 자못 부푼 기대 속에 시조부문 응모작 뚜껑을 열었다. 저마다 음색이 다른 수백편 가운데 다음 일곱편이 당선권 반열에 올랐다. 「겨울 동강」(나홍), 「망포리 시편 1」(박지현), 「연어」(최영효), 「전설」(김종길), 「소래포구에서」(유종인), 그리고 「삼엽충」과 「봄, 유년, 코카콜라 뚜껑」(현상언)이 남다른 개성과 참신성을 드러냈다. 단연 도드라진 작품은 현상언씨의 「삼엽충」과 「봄, 유년, 코카콜라 뚜껑」 두 편이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두 작품을 놓고 어느 것을 「간택」 해야 할지 오랜 시간 고심했다
평시조 여섯 수로 마무리 지은 「삼엽충」은 유장한 호흡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생대 바다를 1억년 동안 지배했던 생물 화석을 소재로 한껏 상상력을 발휘한 이 작품은 군데군데 표현의 상투성을 걷어내지 못했으며, 어깨에 너무 힘이 실려 있었다. 달리 말하면 강물의 도도한 흐름처럼 유연성을 살려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점이 그만 흠집 작용을 했다. 당선작 「봄, 유년…」은 한창 변화· 발전을 모색하고 있는 시조문학의 새 물결을 이끌어갈 뉴벨 바그 계열에 드는 작품이다. 사설시조+평시조로 이루어진 당선작은 이른바 「옴니버스 시조」를 시도한 것이다. 오늘의 첨예한 관심사인 생태환경 문제를 다루면서 푸르름(봄), 고운 아이의 손길(유년), 버려진 쓰레기(코카콜라 뚜껑)의 이미지를 절묘하게 중첩시켜 평면구조가 아닌 다층구조의 시문맥을 일구어내고 있다. 새로운 세기의 희망이랄 수 있는 아이가 소비문화의 상징인 코카콜라 뚜껑을 줍고, 진달래 꽃잎에 미끄러진 햇빛을 줍는가 하면 흩어진 햇빛 조각을 잎파리에 입히는 등 당선작에 녹아든 그 이미저리는 놀랍도록 아름답다. (윤금초·시조시인)
**************************************

가자미

송필란(중앙일보)


금비늘 은비늘 빛살 좋은 봄날 어물전

좌판에 나앉아 호객하는 생선들 틈에서야 비릿한 냄새가 판치는 세상에서야, 이렁성저렁성 살아간들 어떠랴 비싼 값에 팔린다면이야 저잣거리에서 비늘이 벗겨진들 어떠랴, 알몸의 너덜거리는 부끄러움인들 어떠하랴 요리조리 뒤집어 보는 손길엔 세상 바닥에 철썩 들러붙어 살아가는 법을, 모로 뜬 눈으로 슬쩍 비껴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깨닫지 않고서야 어찌하랴 청정옥수(淸淨玉水) 에 고기가 꾀지 않듯 이리저리 몰려 다니는 파리떼도 불러 모으고, 지나가는 바람에 비린 풍문을 띄워보내며 이렁성저렁성 살아간들 또 어떠하랴

한물간 눈알 초점 없는 세상에 어물쩍 눈빛 맞추는 시절에서야

신춘중앙문예 시조 심사평◑

새로운 세기를 열어갈 '뉴 밀레니엄 시조' 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이번 응모작품의 전반적인 흐름을 간추려 요약하면 '뼈다귀의 포엠(Poeme) ' 과 '껍데기의 포엠' 이 반반씩을 차지하고 있었다.

주제를 구체적으로 소화해내지 못한 채 '날것' 을 들고 도전한 경우가 태반 이상이었다.

소화불량의 주제는 결국 백화점식 언어의 나열이나 부자연의 극치인 오버 액션, 우편엽서같은 풍광 묘사에 그쳤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이 가운데 '뼈다귀의 포엠' 과 '껍데기의 포엠' 을 적절하게 융화시킨 작품은 조현선씨의 '안부' , 김종은씨의 '광화문사(死) 거리' , 장민하씨의 '섬' , 이국희씨의 '인연(因緣) 에 대하여' , 김규씨의 '밤' , 강문복씨의 '섬가(歌) ' , 그리고 송필란씨의 '가자미' 였다.

당선작 '가자미' 는 손끝의 기교나 감성에만 의탁하여 시조문학을 경영하려는 안이한 태도와는 달리 문학적 진지성이 엿보였다.

장거리 어물전에 나앉은 생선의 시각을 통해 우리 사는 세상을 점묘법(點描法) 으로 그리면서, 지난 세기의 암울했던 정조를 오버랩시켜 비아냥거린 풍자수법이 돋보였다.

여기 이름 밝히는 일은 삼가지만, 한 작품을 들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이른바 '겹치기 투고' 가 성행하고 있는 현상은 시조부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세속적 명리(名利) 를 좇는 그런 행위는 어떤 수식어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고 판단, 최종심사 때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했음을 밝혀둔다. <심사위원 : 김제현.윤금초>
**************************************



신수현(대한매일)


추락해본 후에야 서는 수도 있었네
몽롱하게 날아다니던 별빛들 후루룩 숨고
날개가 되지 못하는 것들 꿈을 꾸고 있었네

아무래도 낯선 바람과 햇살이 손을 내밀었네
엎드린 정적 속으로 기어들고 싶었지만
별들은 쉴 사이 없이 태어나는 것이네

새 빛에서 눈뜬 사랑 하나 어느 틈에 자라
한 사람의 숲으로 순하게 들어서고 있었네
초록이 일어서는 순간 흔들리며 붙들며

◑대한매일 시조 심사평◑

한 세기를 접고 시간은 흘렀다.‘꿈의 21세기’벽두를 화려하게 장식한 ‘새얼굴’을 발굴해내는 자리는 용호상박(龍虎相搏)의 격전장을 방불케 했다.
응모작 수준이 상향 평준화를 이루어 그 어느 때 보다 각축이 치열한 가운데 1차 관문을 통과한 작품은 무려 아홉편이나 되었다.

다른 매체와 ‘겹치기 투고’작품을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한 다음 ‘초당기행’(곽지원),‘만년설 1’(이운정),‘다운동 고분’(임석),‘길’(신수현)등 네편을 놓고 당락을 결정하게 되었다.

‘만년설 1’은 은유의 문법 속에 시대정신을 가미했지만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지는 못했다.상징과 은유가 때로는 겉돌며,발상법이 기발하지만 그 재기가 경이로움을 이끌어내지 못했다.‘초당기행’과 ‘다운동 고분’은 고전과 현대의 뒤섞임이라고 할까.옛스러운 것과 새로운 것이 절묘하게 버무려져 있었다.복고 스타일과 첨단 스타일,발랄한 감성과 비판적 시각이 서로 뒤섞여 시적 긴장미를 연출해냈다.그러나 뼈대있는 메시지와 서정성 곁들인 힘찬 목소리가 서로 행복한 악수를 해야 하는데,그것이 그만 설득력을 지니지 못해 언어 유희로 흐르고 말았다.

당선작 ‘길’은 언어 조탁 능력이 탁월했다.톡톡 튀는 맛은 없었으나 결코 서두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면서 끈적거리는 점액질(粘液質)같은,언어의 찰기와 흡인력을 거느리고 있었다.‘겨울나무에게’‘겨울 한계령에서’ 등 당선자가 접수한 일련의 작품 곳곳에 녹아있는 그 ‘풋풋한 감성’을 검출해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숱한 굴절과 신산의 지난 세기를 넘어 새 천년을 펼치는 오늘 ‘길’을 만나게 된 것도 행복이라면 그지없이 오롯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심사평=이근배, 윤금초>
**************************************

마지막 유배지
-반 고흐의 '사이프러스나무가 있는 밀밭을 보며-

옥영숙(매일신문)


요양소 창살너머 처음 본 풍경은
잘 익은 밀 이삭이 황금바다에 고개 숙여
밀밭은 사자의 갈기로 떠도는 섬을 휘감았다

사이프러스는 촛불처럼 어둔 하늘을 뚫고
바람과 투쟁하는 목선을 띄운다
한치 밖 세상을 보며 죽음을 감지하고

산과 하늘 나무사이로 침묵하는 얼굴들
목마른 강물 한줄기 끌어오지 못한 채
지난날 소용돌이치던 야윈 세월을 포옹했다

그리움과 노여움이 부딪히는 햇살에
이 시간 가고 나서 한 세월 밀려오면
고단한 삶을 씻어내고 쪽빛바다와 만나야지

해초처럼 파도에 밀려온 유배지에서
태어남도 죽음도 자유롭게 투망질하며
내 생을 노략질하던 항해에 돛을 올린다.

◑매일신춘 시조 심사평◑

200여편의 응모작들을 읽고 먼저 느낀 점은 아직도 현실과 너무 먼 거리의 대상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사력 또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고, 내 용과 형식이 어우러져 구조화된 감칠맛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고투하는 시인적 자질도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옥영숙·손능수·노종내·임석·김종길·김병환·김규·조현선·유종인씨 의 작품은 앞서 얘기한 문제점들을 충분히 극복하고 있거나, 극복해보려는 그 고 투의 흔적을 읽을 수 있어서 기뻤다.
조현선씨는 감각적인 시문장 쓰기에 능하고, 김규씨는 참신한 발상을 보여주고 있 다. 임석씨는 대상을 꿰뚫는 예사롭지 않는 관찰력이 돋보였고, 김종길씨는 운율 의 묘를 효과적으로 살려내고 있었다.
그러나 당선작 선정에 마지막까지 남아 고 심케한 작품은 옥영숙씨의 '마지막 유배지'와 손능수씨의 '소래일기·2'였다. 손 능수씨는 언어를 아끼며 긴장감을 적절히 유지해 내는 전통적인 시조시인이 될 가 능성이 높고, 옥영숙씨는 화려한 수사와 다변스러울 만큼 긴 평시조를 쓰는 참신 한 신인이라 생각되었다.
신춘문예는 참신성과 신뢰성을 동시에 충족해주는 작품 을 요구한다. 따라서 두 작품은 각각 한편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 시인들의 다른 작품을 검토한 뒤 선자(選者)는 참신성쪽에 점수를 더 주 기로 했다. 부디 옥영숙씨의 대성을 빌 뿐이다. <심사평 : 이우걸>
**************************************

개운포 辭說.1

임 석(국제신문)


회색빛 하늘 아래 맵차게 바다가 운다
버려진 목선 두엇 발목이 붙잡힌 채
개운포 고래 울음이 처용을 기다리는.

이제 세죽마을엔 사람들은 오지 않는다
그물코를 꿰매던 어부의 손놀림도
찢어진 삼색 깃발도 수장되고 없었다.

페허를 쓰다듬는 허름한 주막 한 채
아직 떠나지 못한 삐걱이는 소리들이
갈매기 울음 삭이며 해초되어 자라난다.

헐어진 벽돌 틈새 썰물떼로 덮친 일몰
처용의 빛바랜 넋이 철썩철썩 몸을 풀 때
실연한 달빛을 불러 별신굿이 곡(哭)을 한다.
**************************************

감자를 캐면서

최영효(경남신문)


박토를 헤집어서 울음 맺힌 감자를 캔다
여린 실뿌리에 달린 아득한 화전의 땅
이렇게 속살 여물어 우리가 살 줄이야.

북간도는 희망의 땅 가도가도 반목의 땅
아오지 탄광 너머 사할린은 유배의 땅
모정의 비탈 아래서 백의의 꽃 피어서 운다

남녘 눈물 모두 두만강으로 흘러들어
맨발로 맨손으로 거역하던 생명의 핏줄
하늘 밑 떠나지 못해 우리가 살았으리.

눈뜨면 죽자하고 눈감으면 살자하며
흙 속에 묻고 떠난 젊은 날의 씨감자 한 알
조선의 황톳벌 위에 우리는 다시 살리라.
**************************************

안부
-속앓이 하는 동강아

조현선(농민신문)


오늘도 흘러가는 너에게 편지를 쓴다.

피멍 든 노루 궁뎅이, 관으로 가는 관박쥐, 아 모르겟다 아무르장지뱀, 혓바늘이 돋았구나. 덥다 더워 더워지기, 노랭이 노랑 할미새, 괴물 같은 괴불나무 가지, 거기 그렇게 앉혀두고, 밝히고 싶은 반딧불이, 웃기만 하는 바보 여뀌, 절벽에서 다이빙하다 허리 삐긋 비오리님 아직 안녕하신지. 아아 알 낳다 자빠진 우리 신목물떼새, 어디서 어디서 젖은 날개 말리나. 금실 좋은 원앙부부 서둘러 이사가고, 저기 저 수달 총각도 어깨 처진 것 좀 보게. 둥글게 둥글게 수줍은 각시 둥굴레, 쉿! 며느리밑씻개, 말불버섯.

눈부신 이름들이여, 너희 근황을 묻는다.

 

2001년 신춘문예

 

 매일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낙동강/송 진 환


말없이 흘러가도
안으로 쌓인 세월의 깊이
응어리 왜 없었겠나만
모래톱에 묻어두고
보아라
가슴 그 안쪽
또다른 강이 되었다

햇살 더 눈부신 날
물빛 곱게 담아내면
굽이 돌아 서럽던
눈물마저 갈앉는다
이런날
강 기슭으로
갈대꽃이 피었다

물소리로 길을 열어
달려온 역사 앞에
미움도 사랑으로
달빛되어 내린다
어디서 풀잎 서걱이는 소리
내일을 여는 몸짓인가


* 심사평/이우걸

-절제와 균형의 긴장미가 생명

필자는 심사를 하기 전에 따뜻한 시심이 보고 싶었다. 정형을 정형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피 흘리며 싸우는 언어가 보고 싶었다. 또 적은 언어속에 가득 담긴 생각의 하늘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작품을 일별한 후 이러한 기대는 쉽게 채워지지 않는 희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조는 말을 많이 해서 소득을 얻는 장르가 아니다. 음보율을 쉽게 파괴해서 되는 장르가 아니다. 절제와 균형이 빚어내는 긴장의 아름다움이 시조의 생명이기 때 문이다.
박은서씨의 ‘우포늪, 일어서다’와 이숙경씨의 ‘가을저녁’, 송진환씨의 ‘낙동강’, 유인겸씨의 ‘풍장’, 오종열씨의 ‘로데오 거리의 환란’, 박지현씨의 ‘ 봄, 다시 서는 숲’, 박광훈씨의 ‘독도 4’를 먼저 가려서 몇 번이고 정독해보았다. 이숙경씨의 작품에는 군데군데 이미 낡은 유행가조의 언어들이 눈에 거슬렸고 , 유인겸씨는 절제의 미덕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오종열씨는 현대문명의 모순을 파헤치는 의욕이 돋보였지만 관념적이고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박광훈씨의 경우 작품 수준이 고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울러 박지현씨는 시상의 전개방식이 지나치게 고루하다고 보았다.
선자의 손에 끝까지 남은 작품은 결국 박은서씨와 송진환씨의 것이었다. 박은서씨의 작품은 발랄하고 따스한 감성이 탁월한 이미지에 의해 빛을 발하고 있고, 현실을 꿰뚫는 예리한 직관도 신뢰감이 갔다. 하지만 이미 같은 장르로 등단한 기성문인이라는 점에서 제외시켰다. 이에 반해 송진환씨는 해마다 느끼지만 바탕이 튼튼 한 시인이다. ‘낙동강’이 특히 그렇다. 새로운 시도나 신춘문예가 흔히 기대하는 개성을 발견하기가 어려웠지만 ‘보아라/가슴 그 안쪽/또 다른 강이 되었다’ 등이 보여주는 경륜의 결실을 간과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결국 송진환씨의 ‘낙동강’을 당선작으로 뽑기로 했다. 좋은 시인이 될 수 있으리라 믿으며 대성을 빈다.

* 당선소감/송진환
어제 내린 비에 묻어온 바람이 한결 겨울을 느끼게 합니다.
새 천년의 빛나던 시작도 오늘은 한낱 어제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내겐 이 2000년 이 소중한 시간으로 남는가 봅니다.
진정 시조를 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발표해 보고 싶은 욕망도 있었습니다. 그러 나 우리 문단의 현실이 시와 시조를 별개로 나누고 있어, 시조 작품을 발표할 기 회가 내겐 없었습니다. 그러니 시로 등단한 지가 20년이 넘었지만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찌보면 좀 억울한 느낌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이런 기회를 얻게 되어 나로선 다행입니다.
시조는 어느 문학 장르보다 언어의 조탁이 뛰어나야 좋은 작품을 일궈낼 수 있다 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시조의 형식적 제약 때문에 더욱 그러하겠지요. 바로 그것이 내겐 매력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조를 흔히 민족시라 일컫곤해도 시조의 저변 확대가 이루어져야 그 말의 참뜻이 빛날 것입니다. 이제 나도 그 밑거름이 될 수 있도록 좋은 작품 열심히 쓰겠습니다. 뽑아주신 분들게 감사드립니다.

▨약 력
△경북 고령 생
△영남대 국문과 졸업
△‘현대시학’으로 등단(78년)
△시집 ‘바람의 행방’ ‘잡풀의 노래’
△한국문인협회, 대구시인협회 회원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원촌리 겨울 -이육사 생가에서/정경화

한 시대의 회상처럼 원촌리 겨울이 오면
탱자 숲 언 가시도 기다림에 지쳐 눕고
철 잃은 어린 동박새 귀소(歸巢)하는 빈 하늘.

마른 살 스스로 발라 푸른 재 흩뿌리고
뼈마디 꺾어꺾어 광야에서 보낸 생애,
가두고 물길 돌려도 긋지 않던 그 혼불.

터지고 갈라진 틈에 생명의 풀씨는 자라
바람 시린 능선따라 오색 깃발 세워 놓고
청포도 그리운 날들을 알알이 물고 있다.

정녕 봄이 다시 오지 않아도 좋다.
덜 녹은 잔설 위로 서리 깊게 내려앉아
나목들 초록 깊은 넋, 그 넋으로 또 다시.


* 심사평

원촌리 겨울>을 뽑고나서/유재영(시조시인·'동학사' 대표)

시조에 있어서 정형의 의미는 우리 문자문화의 정신적 증명이라는 데 있다. 정형의 가치가 바로 시조의 가치라고 생각하며 우리는 시조를 쓰는 데 형식이 표현의 장애로 남지 않기를 희망한다. 아무리 훌륭한 형식이라도 형식의 지배를 받는 것은 문학의 본질과 다르기 때문이다.
올해 응모작 대부분은 이러한 형식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였지만, 아직도 형식을 극복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상도 결코 적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당선작을 놓고 겨뤘던 작품은 정종철씨의 '나도 풍란에게 갔다'였다. 그러나 앞서 말한 형식의 문제에서 많은 논의의 여지를 남겼다. 이미지나 상징 그리고 시적 재능이 결코 당선작에 뒤지지 않았지만 여러 군데가 시조의 형식과 어긋나 있었으며, 정씨의 다른 작품 '저수지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음보의 중요성이 먼저 인식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을 끝내 떨칠 수 없었다.

그와 달리 당선작인 정경화씨의 '원촌리 겨울'은 다른 응모작들에 비해서 정형에 대한 이해가 확실하고, 시적 정취에서도 앞서 있었다. 당선작 '원촌리 겨울'은 시인 이육사의 생가에서 느낀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질곡의 깊이를 시로 형상화하는 데 조금도 무리가 없었다. 특히 서정의 흐름이 고르며, 감성의 폭이 넓고 활달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당선자에 대한 신뢰이기도 했다.

그의 다른 작품 '사막의 강'도 기교와 세련미에 있어서 뒤지지 않았으나, 다소 관념으로 흐른 것이 흠이 되었다. 2001년, 우리의 민족문학인 시조의 새아침이 당선자의 기쁨과 함께 밝아오길 기대하며 대성을 바란다


* 당선소감/정경화

바람이 불지 않아도 저 혼자 흔들리는 게 사람의 마음이라 했다. 나 역시 얼마나 많은 날을 흔들려 왔던가. 흔들리다가 결국 범람해 버릴 때 그 때 나를 지탱해 준 것이 시조였다.
처음엔 그러한 내 감정을 카타르시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고 그 착각에서 하나 둘 벗어나면서부터 시조의 멋과 향기에 어느새 매료당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시조를 창작한다는 것은 사물을 보는 것(見)만으로는 부족하며 인식의 확장(觀)을 획득해야 한다는 사실을 조금씩 긍정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힘든 부분이 역사관이었다. 도도한 남강의 흐름 속에서 논개의 혈흔을 찾을 수 있어야 하고 다부동 격전지에서는 그 날의 총성을 들을 수 있어야 했다. 또한 원촌리에 가면 육사의 가슴을 그대로 내 가슴에 담을 수 있어야 했다. 현장에서의 느낌 뿐만이 아닌 내가 경험하지 못한 과거의 소리와 또한 그 내면의 소리까지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이미 공감하고 있는 사실을 어떻게 색다른 의미로 승화시켜야 할지 막막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물꼬를 틔어주고 길잡이가 되어주신 선생님이 계셨다. 바로 민병도 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은 시조 한 편을 완성하려면 얼마나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지를 언제나 몸소 실천해 보여주셨다.

처진 어깨를 달래며 귀가하는 시간이었다. 동아일보로부터의 당선 소식은 입석표 한 장을 겨우 구해 들고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또 다른 이정표로 다가왔다. 그리고 출발 1초 전의 기차를 붙들어두고 호각을 마구 불어댄다. 단숨에 올라타는 내 모습이 보인다. 두렵다. 수많은 낯선 사람들의 시선이 마냥 두렵기만 하다. 그러나 이따금 멈추어 가는 간이역에선 계절을 잊은 마른 들풀들이 나를 위로해 주리라 믿는다.

창밖에 첫눈이 내린다. 내가 잠시라도 사랑했던 사람들 또 잠시라도 미워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저 눈발이 그들의 잠든 머리맡에 하이얀 축복으로 스며들기를 바라며 내 이제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큰 용기를 준 동아일보사와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께도 언제나 더 나은 작품으로 보답할 것을 함께 다짐한다.


* 약력/정 경 화

1962년 대구 출생
1983년 대구대학교 사범대학 일반사회학과 졸업
1997년 시조 동우회 '한결' 동인
1999년 대구시조 공모전 입선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보길도 시편/홍라나


처용의 달을 안고 즈믄 바다 찾아간다 깨어진 복사뼈로 곤두박힌 질경이풀만 무너진 언덕 괴면서 피돌기로 잇던 섬.

속살 찢어 일구던 땅 푸른 싹 언제 돋을까 희미해진 눈 비비며 북극성 불러와서 파도는 잠들 수 없는 빈 새벽을 깨웠다.

툭툭 튀는 포말 앞에 짙붉게 타는 동백 수평선 끌어당기면 어둠도 부서지고 먼 하늘 가로질러서 천궁을 퍼올렸다.

보길도 비탈마다 돌아갈 길 열어놓고 조선의 검은 깻돌 자르르 물살에 굴려 서늘한 무명의 아침 씻어 널고 있었다.


* 심사평

탄탄한 서사구조로 긴장감 유지/윤금초

절차탁마 내공이 녹아있는 작품 여러 편을 만나게 되어 즐겁다. 「황야에서」(김규), 「억새」(김수연), 「시립도서관」(이승은), 그리고 「신 동의보감」(최우현), 「알터, 그리고 암각화」(홍라나)는 녹록지 않은 「저력」을 보이고 있다. 당선권 반열에 오른 이들 작품이 지닌 밀도나 그 성취도는 저마다 한 두편씩 보내온 사설시조, 혹은 옴니버스 시조(평시조+사설시조)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비유로 말하면 평시조는 대중가요의 트로트나 뽕짝조의 가락을, 사설시조·옴니버스 시조는 랩이나 힙합 계통의 가락을 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작품이 지닌 공통적 결함은 사설시조의 필요충분조건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사설 및 옴니버스 시조의 요체는 서사구조·풍자정신·갈등구조를 오롯이 담아내는 데 있다. 걸쭉한 입담·웅장한 스케일·복선·판소리의 아니리조·휴지와 종장의 대반전 효과 등 여러 구성 요건을 두루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사설시조는 함부로 접근하기 어려운 것이다.

올해는 사설시조에 대한 기대를 접기로 했다. 당선작 「보길도 시편」(평시조)은 긴장을 늦출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내공이 부족하거나 연륜이 짧은 신인일수록, 주제의식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거기에 압도당한 나머지 서사구조를 포기하는 실수를 저지르기 십상인데 당선작은 그 함정을 절묘하게 빠져나가는 끈기를 잃지 않고 있다.

시조 특유의 폐활량을 유지한 「보길도 시편」이 커다란 임팩트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 당선소감

넘치지않는 가락으로 새벽별을 빛나게/홍라나

길은 멀리 있었다. 굽이굽이 휘어진 그 길은 보이는 듯 보이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봐도 지치고 허기진 것들, 두 손을 내밀어도 속내 보이지 않지만 버릴 수 없는 노래였다. 조금씩 타 들어가 감감히 사라질지라도 또 다시 가야만 할 길이었다.

물 한방울 찾을 수 없는 사막을 헤매고 있을 때 금호 강가에서 하야로비를 만났다. 철새도 길을 잃어 돌아오지 않는 금호에 하야로비 홀로 풀씨를 물어 기슭에 풀어놓고 있었다. 그날 이후 가위눌린 내 꿈 속에 하야로비 한 마리 둥지를 틀었다.

자글자글 끓어대는 매운 뙤약비늘 아래 목타는 나무들 등이 휘고 실뿌리 타닥타닥 핏발 서던 그 여름, 하야로비는 엉클어진 삶을 건져 강둑에 쌓아두고 있었다. 묵정밭 콩꽃, 깨꽃을 부리로 다 어루만지며…

천리 밖 묻혀있는 깊은 잠을 기슭에 풀어놓는 하야로비처럼 시조의 율과 격을 내 가슴에 심어두고 싶다. 이빠진 모음들 물어 시조의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가락으로 새벽별을 피워 올리고 싶다. 아직 가야할 길 멀고 험하지만 부족한 작품에 등불 밝혀 길 열어주신 심사위원님께 먼저 머리숙여 감사를 드린다. 시조의 길로 이끌어주신 심재완 선생님, 가르침 주신 이기철, 민병도 선생님, 시안(시안)을 키워주신 문무학 선생님께서도 아울러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흔들릴 때마다 바로 세워준 문우들과 모자람 투성이인 나를 따뜻한 눈길로 지켜보아 준 아이들과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이 기쁨을 드린다.


◇약력
-- 1960년 경북 고령 출생
--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동대학원 졸업
-- 한우리 독서 문화원장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모 과/정 경 화


어둠을 손질하는 휘인 가지를 내려서서

건넌방 반닫이 위에 가부좌 틀고 앉아

사초(史草)에 오르지 못한 먼길이나 닦을까 보다.


금이 간 함지박엔 이름 없는 별을 불러

이제 흙이 되어도 하늘을 잃지 않겠네

지그시 눈감고 보면 등잔 밑 환한 말씀.


젖은 살은 풀어 손 내미는 검불에 주고

꿈 비록 문드러져도 향기로운 삶이고자

거문고 목쉰 가락에 귀를 가만 세워보네.


울퉁불퉁 모진 자리 더께 앉은 종두자국이

어쩌면 닦다만 길, 그 길마저 버리라며

잊혀진 유훈(遺訓)의 끝을 등 밝혀 지키고 있네.


*심사평

시조라고 하는 형식미의 장르는 졸속으로 이루어지는 시의 길이 아니다. 시일과 고뇌를 지니고 터득해 가는 그 시대, 시대의 율조(律調)인 것이다.

예심을 거친 10명의 39작품이 본심에 넘어왔는데 문철의 <병상일기>, 손상철의 <막사발>, 윤명진의 <군산항 저물 무렵>, 정경화의 <모과>가 마지막까지 남았다.

<군산항 저물 무렵>은 관념어의 나열이 눈에 띄어 신선감이 반감되어 밀렸고, <병상일기>는 어휘를 다루는 힘은 능한 편이었으나 상의 나약성이 흠이 되어 제외되었다.

<막사발>과 <모과>는 우열을 가리기 힘든 수작이었다. <막사발>은 다름아닌 뒤울안 정안수의 그 물그릇이다. 언어와 시의 골격이 튼튼했다. 그러나 작의(作意)가 너무 드러나 거칠었고 작품이 다소 고르지 못해 당선의 자리를 획득하지 못했다.

이에 비해 <모과>는 상(想)의 깊이와 언어구사 능력이 빼어났다. '건넌방 반닫이 위에 가부좌 틀고 앉아/사초(史草)에 오르지 못한 먼길이나 닦을까 보다`와 같이 두드러진 이미지와 작품성이 눈길을 끌었고, 응모작 전편이 고른 기량을 보여 당선작으로 가려졌다. 축하와 함께 정진을 바란다.<이상범 시조시인, 김남환 시조시인>


* 당선소감/정경화

시조는, 늘 조화만으로 장식되어 가던 나의 가슴에 작은 들꽃을 하나 심어주었고 그 들꽃이 향내를 내면서부터 산의 말, 나무의 말에 조금씩 귀기울이기 시작했다. 자연의 소리 하나하나에 커다란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이 내가 선택한 언어에 의해서 또 다른 세계로 자리매김되는 경이로움은 그러나, 눈부신 설렘이었다. 지난 가을, 모과나무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울퉁불퉁한 모습이 오히려 아름다운 모과를 보며 우리는 왜 각자의 모습 그대로를 가꾸며 살아가지 않는가를 생각해보기도 했다. 아마 시조 공부를 하면서 배운 사랑의 자세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오늘의 당선 소식은 뒤늦게 문학의 길로 들어선 나에게 커다란 박수소리이기도 하며 또한 무거운 책임감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설사 남은 길이 깎아지른 벼랑과 늪보다 깊은 수렁뿐이라 할지라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시조, 거듭나는 길로 이끌어주신 민병도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께도 감사를 드리며 한결 동인, 가족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 <정경화 대구 북구 침산1동> 


[대한매일 신춘문예 당선작]

눈 녹는 마른 숲에/박지현


서릿발 무너지면
황토빛이 드러난다
ㅎ, ㅎ, ㅎ, 언손 녹이는 바람이 불고 있다
아직은 풀리지 않는
단단한 심줄의 땅.

차고 투명한 강물 속에
엎드린 피라미 떼
지느러미 파닥파닥 물풀 하나 흔들어놓는,
저 겨울 껍질을 깨는
뽀족한 눈 하나 있다.

눈 녹는 마른 숲에
텃새 다시 날아오고
뿌리를 감싼 물이 하늘 높이 차올랐다
아득히 잊었던 얼굴
연초록 물이 든다.

꽁꽁 막힌 길을
송곳으로 뚫는 소리
노랗게 물드는 그 울타리 긴 둘레로
가파른 숨결 고를 때
천지가 다 환하다.


* 심사평/윤금초 박시교

생명 부활의 경이로움을 섬세하게 묘사한 작품 ‘눈 녹는 마른 숲에
’를 당선작으로 민다.

특별히 과장하거나 필요 이상의 튀는 표현을 보이지 않은 단아함이
높은 점수를 받는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당선작보다 더 힘을 들인 듯한 함께 보내 온 작품 ‘겨울 구
상나무’가 뒷받침을 잘 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눈 녹는 마른 숲에’를 마지막으로 흔쾌히 가려뽑기까지 심사를 맡
은 두 사람은 두 번의 회합을 가졌고,그때까지 남아서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작품으로는 설규철의 ‘겨울 몽산포’,최영효의 ‘입춘’,김
보영의 ‘겨울비’,그리고 곽홍란의 ‘미완의 강’ 등이었다.

이들 네 편의 작품은 당선작과 견주어 볼 때 모두 나름대로의 아쉬움
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다.예컨대,내용의 단조로움이 지적된 ‘겨울
몽산포’,종장 처리의 미숙이 결정적인 흠이 된 ‘입춘’,시어의 돌
출과 보법의 불안정을 드러내고 만 ‘겨울비’가 그러했다.

끝까지 남은 작품은 ‘미완의 강’이었다.

생각을 이끌어가는 저력이나 눈부신 서정의 흐름 등에서는 나무랄 데
가 없었으나 종장 마지막 구 처리에서 보여준 어떻게 보면 아주 작은
결함이 결국 문제점이 되고 말았다.그러나 그 아쉬움은 훗날 더 좋
은 결과를 낳게 되리라 확신한다.

이제 이쯤에서 ‘눈 녹는 마른 숲에’ 따뜻한 생명을 불어넣은 당선
자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야 마땅하리라.

당선자와 아쉽게 탈락한 모두의 문운을 빈다.


* 당선소감

시조를 만나면서 내 삶에 허기가 조금씩 가시는 것을 느꼈다.고도로
절제되고 응축된 시어,겉으로 드러내지 않고도 모든 것을 말할 수 있
는 언어의 아름다움,그 깊은 맛에 빠져들기 시작하면서 나는 늘 내
의식의 한 가운데 나만의 비밀열쇠를 거머쥔 채 남몰래 내 길을 닦고
또 닦아왔다.살아 꿈틀대는 운율에 온통 나를 맡기면서….그래,지금
의 결과를 낳았다.

이젠 꼼짝없이 시조에 갇혀버린 셈이다.생활이 각박해질수록,세상이
더욱 감각적으로 치달아갈수록 삶의 진솔한 정서를 담아낼 수 있는
진정한 그릇은 시조이리라.국적도 모르는 문화와 그 잔재들이 판을
치고 있는 요즘 우리가 가야할 길은 어디로 뻗어있는 것인지 ….

어려운 길을 함께 걷는 분들께 이제나마 작은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직은 할 일이 많아 늘 허덕이는 나에게 어려운 길을 열어주신 심사
위원들께는 마음으로부터의 고마움을 전해 드린다.

장롱 깊숙히 묻어둔 패물처럼 소녀적 꿈을 남몰래 꺼내보며 이따금
즐거워하시던 친정어머니,고려대 문창과 교수님과 학우들,그리고 내
일처럼 기뻐해 줄 친구들과도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 약력
▲본명 박옥실 ▲1954년 부산 출생 ▲현 고려대학교 인문정보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중 


[부산일보신춘문예]

고한리 시편/박지현


녹슨 레일, 모로 누운 무개차 수레바퀴
이마에 등불 달고
추운 밤 밝히던 그날
잔기침 도진 바람이 억새풀을 베고 있다.

발목 부러진 버팀목 여기저기 나뒹굴고
죽은 사내의 울음이
입구를 막고 섰다
갱도는 와르르 무너질 듯 세월 버티며 서 있 고….

풀풀 풀 탄가루에 눈만 빠끔 열어놓은,
삶은 늘 비탈져서
끓어오르던 가래소리
요란한 기적소리도 막장 깊이 갇혔다.

아직 허파꽈리에 남아도는 돌가루, 화산재
기우뚱 폐광 막사엔
사람 자취 묘연하다
가시뼈 겨울나무만 그 자리를 지키고 섰다.

저 어둔 배경에도 둥지 트는 텃새 두엇
정수리 다 젖도록
알을 까고 새끼 치고…
연초록 예감의 봄을 자꾸 숲에 매달고 있다


* 심사평

폐허속 내일 꿈꾸는 반전 절묘/최승범, 장순하


응모 작품수는 예년과 비슷했으나 작품의 수준은 점차 향상되어 가는 추세가 뚜렷하다.

단순한 정서를 시조의 정형에 맞추어 표현하기만 해도 예선에 들던 시대는 지나갔다.이제는 그런 기초적 요건 위에서 더 깊은 창조 정신,더 높은 표현 능력을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다.그만큼 수준이 높아졌고 따라서 경합이 치열해진 것이다.마지막까지 선자들의 손에 남은 작품은 김병환의 '해빙의 아침',유인검의 '대설보',이가연의 '손에 대한 명상 노트',박지현의 '고한리 시편'이었다.

이들은 다 나름대로 개성과 역량을 보여 주었다.'해빙의 아침'은 남북 화해 시대라는 시사상을 평이하게 읊었고,'대설보'는 연모의 정을 눈(雪)으로 상징화했으며,'손에 대한 명상 노트'는 손을 매체로 한 지적 상념을 의식의 흐름 수법으로 형상화한 사설시조로 주목을 끌었다.

그 중에서 박지현의 '고한리 시편'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다 아는 바와 같이 고한리는 강원도 태백 지방의 탄광촌.이제는 폐허가 된 처참한 상황에서 가혹한 인간 생활의 한 단면을 리얼하게 깔아 놓고 그 속에서 새로운 내일을 도출해 내는 막판 뒤집기의 절묘한 수법을 높이 산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으니 이와 같은 폐광을 제재로 한 시조가 근래 더러 눈에 띄었다는 것이다.예술가에게는 주제나 기법에서만이 아니라 소재나 제재에서도 항상 신선미를 보여 주어야 할 책임이 지워져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당선소감 - '우리것 오늘 언어로 풀어낼 터'

나의 하늘은 오래 흐려 있었습니다. 며칠 전 현란한 일몰을 구경하러 서해대교 밑 송악 바닷가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진 포구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저마다의 꿈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지만 그것 또한 내겐 멀게 느껴졌습니다.

그랬습니다. 시조를 쓰다가 막막해지면 나는 늘 바다로 가곤 했습니다.저 억겁의 세월이 응축되어 있는 공간에 내가 펼쳐 놓을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우리의 것을 오늘의 언어로 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그러다가 오늘, 당선을 알리는 전화를 받았습니다.무척 기뻤습니다. 오래 떠나와 있던 부산, 태종대 그 앞바다에도 갈 수 있다니!

늦은 나이에 공부한다는 것이 과연 잘 하는 일인지 자주 내게 반문하곤 했습니다.제가 가야 할 길이 아득해지고 더러 안개처럼 가려져 절망 뿐일 때도 많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제게 열려진 이 좁은 문은 그냥 얻어진 것은 분명 아닐 터, 이제부터 더욱 노력하는 일만 남았음을 저는 잘 압니다.부족한 작품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는 좋은 작품으로 보답해야 할 것이고, 어려울 때마다 힘이 되어준 가족들과 고려대 인문정보대학원 학우들,그리고 지도교수님들과 이 작은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 약력
◇54년 부산 출생,방송통신대 중문과 졸업,고려대 인문정보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과정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당선작


구덕포 해조음 2/윤정순
 
 
 조준을 풀지 못한 초병의 매운 눈빛
 철조망 가시 찔려 익사하는 어둠 뚫고
 木船의 늙은 고막이 해조음을 들을 때
 
 
 구덕포 간이역을 미끄러진 기차는
 부풀린 그리움을 갯벌에 하혈하고
 겨울비 젖은 철길이 굵은 뼈로 서 있다
 
 
 뱃머리 만장기에 갈매기 끼룩인다
 착한 이웃으로 뱃길도 그려가고
 어깨를 다친 바다에 붕대를 감는 일출
 
 
 서울로 인천으로 훌쩍 떠난 이웃들
 갯내음 짙은 향을 곁눈질로 더듬으며
 풀어진 마음자락을 서녘 노을에 눕힌다


* 심사평/윤금초.정해송

 예심을 거쳐 종심에 오른 작품은 박지현씨의 「어느 선반공의 하루」, 김조수씨의 「미포만의 아침」, 유인검씨의 「소래포구에서」, 윤정순씨의 「구덕포 해조음2」이었다.
 심사와 토론 과정을 거치면서 「미포만의 아침」과 「구덕포 해조음 2」, 두 편이 남게 되어 경합하였다. 두 작품은 바다를 제재로 하여 문명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현장을 그리고 있다.
 김조수씨는 언어를 다듬는 솜씨가 뛰어났으며 이미지의 연결도 자연스럽고 신선하나 시조의 정형률에 충분히 용해시키지 못한 점이 결함으로 지적되었다. 시조는 정형시이기 때문에 시조의 가락을 체득하여 그 율감을 잘 살려내어야 한다.
 이 말은 형식을 잘 지키면서 리듬을 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김조수씨는 이 점에 유념해 주기를 바란다.
 당선작 「구덕포 해조음 2」는 시조가 지닌 간결성과 응축성의 강점을 살려 탄력있는 시의 문맥을 이미지로 조형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철조망 가시에 찔려 익사하는 어둠을 뚫고」라든가 「어깨를 다친 바다에 붕대를 감는 일출」의 이미지는 선명하고 참신하다. 그러면서도 문명비판적인 주제의식이 설득력을 획득하고 있다.
 이만한 기량이면 현대시조의 지평을 넓혀갈 한 몫을 감당하리라 판단되어 우리두 사람의 합의에 의해 당선작으로 민다. 더욱 정진해 줄 것을 당부하면서 당선을 축하드린다.


* 당선소감

 어느 모임에 갔었는데 이런 얘길 들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가곡 「가고파」 「성불사의 밤」 등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조」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음악, 하면 피아노등 서양음악을 가리키고 우리의 국악은 특별히 국악이라고 해야만 통하고 그림에서도 당연히 서양화를 가리키며 동양화 역시 위와 같은 경우이며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시는 자유시를 말하는 것이고 정형시인 시조도 같은 경우라는 것이었다.
 그 얘기의 상대가 성악가였는데, 외국에 나갈 때는 꼭 국악이나 민요를 한 두가지씩 배워서 나가야만이 외국인과 대화를 나눌 때도 체면유지를 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그렇다면 외국에서도 우리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는 말인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서자취급을 하는 것인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참 옳은 말을 한다는 생각을 했다. 나 역시 우리 문화에 대한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이를테면 서구문명의 물결을 거부할 수는 없지만 우리 것을 너무 쉽게 놓아 버린게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심정이다.
 정형시는 우리민족의 전통 시조로써 한국의 정서를 표현해온 장르이고 노래이다. 뿐만 아니라 문화의 세계화라는 거대한 틈바구니에서 모방과 창조가 진취적이라면 옛것을 가꾸고 지키는 일은 더욱 값진 것이라 생각한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민족시가인 단가 등을 육성발전시켜 범국민적 사랑을 받고 있는 현살과 비교할 때 우리의 시조 역시 우리민족의 영원한 노래로서 더욱 가치가 있지 않을까.
 이번 인연을 계기로 시조문학에 대한 더욱 깊은 애정을 갖고 싶다. 시조 창작에 대한 출판물이나 강좌가 부족한 실정이지만 서울 소재 문화센터의 시조강좌가 통신강좌로 수강이 가능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 시조를 함께 공부하는 「글거리」동인들의 열정도 한 몫을 단단히 했다.
 

* 약력

1957년 경남 창녕 출생. 영산고등학교 졸업. 「글거리」 동인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평 사 리 / 김종길


1.
포구의 물이 거슬러 강물을 부풀리면
은어떼 그리움 안고 약속처럼 모여든다.
평사리 너른 들녘에 잔잔한 물결이 일고

치마폭같은 밭뙈기 뜯어먹고 살았던
서로 몸부비며 피붙이로 살았던
검푸른 노송 두그루 가족사처럼 서 있다.


2.
언 땅에 서릿발 딛고 잠들어 섰구나
자운영 터뜨리던 추억을 간직한채
밟혀야 뿌리 내리는 튼실한 보리가 되어

켜켜로 쌓인 설움 한마디씩 잘라내며
한 눈에 볼수 없었던 청보리의 꿈들이
대지를 끌어 안은채 노을처럼 타오른다.

※평사리: 소설 「토지」의 배경 마을


* 심사평

올해는 응모작품 수에서는 흡족하지 못했으나 수준은 향상되고 있다는 느
낌을 받았다. 전 응모작을 읽고 난 뒤 임정집, 유인겸, 문무열, 김차순, 정
영도, 김종길의 작품을 먼저 가려 다시 읽었다. 작품이 고르고 정형시의 특
성을 잘 살린 시인의 작품을 최종적으로 몇편만 골라서 의견을 나누기로 했
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작품은 김종길의 「평사리」, 정영
도의 「기원」, 김차순의 「소나기」였다.

정영도는 노련해 보인다. 대상을 포착하는 시야가 넓고 시조적 운율도 적
절하게 배려하는 치밀함을 보여준다. 다만 새로움이라는 측면에서 좀 더 많
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김차순의 경우 새로움의 입장에서 살핀
다면 가장 두드러지는 시인이다. 그러나 이 시인에게는 정영도 시인과 같
은 정형시에 대한 운용의 노련함이 더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겁없이/ 맨 몸을 드러내고/ 하얗게 쌓여간다」와 같은 참신성 때문
에 아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정영도, 김차순의 단점을 적절히 채워주는
시인으로 김종길을 생각했다. 김종길은 우선 응모한 작품들이 두루 고른 수
준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 작품의 스케일만큼 적절한 울림을 지니고 있었
다. 당선작으로 뽑은 「평사리」는 조락한 농촌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린
가작이다. 「치마폭같은 밭뙈기」, 「밟혀야 뿌리내리는 튼실한 보리」,
「대지를 끌어 안은채 노을처럼 타오른다」등이 보여주는 표현의 묘는 시대
를 터치하는 섬세한 음영과 함께 시적 성취로 아름답게 읽혀진다. 대성을
빈다. 〈심사위원: 시조시인 김교한 이우걸〉


* 당선소감

지난 여름 우체국 청사 뒤편 담벼락밑에 까마종이 한 식구 살다갔다. 벽
과 바닥사이 단단한 시멘트 틈새에 뿌리를 박고 살았다. 봄부터 생겨 나와
그 무덥던 여름을 이겨내고 끝내 가을을 맺었다. 그리고 지금은 긴 겨울 속
으로 침잠하고 있다. 그 척박한 환경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검질긴 생명력!
시조는 정형률을 지키면서 그 내용을 담아내고 또 절제하는 가운데 언어
를 자유롭게 숨쉬게 하는 것이라고 배워 왔다. 나는 그것이 좋다. 언어들
의 숲을 헤치고 헤쳐서 마침내 단뿌리를 찾아내는.....

출근길에 겨울비가 내린다. 새 천년의 첫해를 보내면서 많은 사람들이
눈 소식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눈보다도 비를 더 좋아한다. 골고
루 내리기 때문이다. 휴대전화가 울리기 전 까지만 해도 비가 내리고 있다
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일상에 단단히 길들여진 탓이다. 반가운 전화
였다. 전파를 타고 가서 덥석 손이라도 잡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나 혼자
세상 한가운데 발가벗겨져 속내를 드러내 보이는 것 같아 두렵고 조심이 된
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앞으로 더
욱 정진하라는 뜻으로 새기고 여름날 까마종이의 생명력처럼 검질긴 시조
를 쓰도록 노력하겠다. 어줍은 흉내를 내기보다는 우리들 삶의 진솔한 모습
들을 우리 가락에 맞게 담아낼 수 있는 그런 시조를 쓰고 싶다.

감사할 사람들이 많다. 특히 칠순을 바라보고 계시는 부모님께 조금이라
도 기쁨이 되시길 바랍니다. 언제나 고마운 아내에게 진달래꽃 한 짐 지다
가 바칩니다.


* 약력
▲1958년 창녕 출생
▲경남대학교 법학과 졸업
▲의령정곡우체국장


[전주일보 신춘문예 시조당선작]

겨울, 금강 하구둑에서/김상선


산발한 바람앞에 흩어지는 눈발, 눈발
온기 잃은 밤바다에 등불처럼 내려앉아
진혼곡 넘치는 바다 넋을 놓고 울음 운다.

제 그리움 못이겨 신열이 돋는 바다
수평선에 닫고 싶은 늙은집의 발목까지
파도를 데리고 와서 적시고도 싶었다.

모눈종이 劃이 지는 바다의 깊은 상처
딱지처럼 붙어있는 폐선의 꿈 하나가
당골네 끓는 神氣運 시나위로 달래는 밤.

분분한 字母들은 눈발보다 더 맵차다
별 하나 저 갯벌에 힘겹게 내렸어도
우듬지 겨울냉기로 쓸고가는 천형의 땅.


* 심사평

현대시조를 일으켜 세운 가람의 고장 전북에서 처음으로 신춘문예 공모에 시조가 신설되어 감개무량하다.
시조의 생명은 형식 즉 정형성이다. 기교적인 언어구사로 그럴싸하게 겉포장한 작품보다는 투박하지만 진솔한 맛이나는 작품에 눈길이 멎었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16명의 작품중에서 참신한 주제, 창의성, 그리고 시조의 멋과 맛을 살렸는지 등을 살펴 우선 5편을 가려냈다. 전준의 '창밖으로 보는 겨울풍경5', 이순자의 '사념에 물든 거리', 김조수의 '도장공의 하루' 김수경의 '은가락지', 김상선의 '겨울,금강하구둑에서'.
특별히 김수경의 '은가락지'는 한국적 정서가 물씬 배어나는 돋보인 작품이었다. 한편 형상화가 쉽지않은 주제를 깔끔하게 풀어낸 시적 호흡과 긴장감, 시상을 표출하는 언어의 조탁 능력으로 미루어 앞으로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검증되었다고 보아 김상선의 '겨울,금강하구둑에서'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시조시인 정순량(전주 우석대 교수).


* 당선 소감

너무 빨리 터뜨린 샴페인이었다. 이제 막 습작에 솔솔 재미를 붙여 희미한 길 한 가닥 찾아 조심스럽게 내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당선 소식에 실감이 나지않고 또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이 엄습해 온다. 모든 것이 부족함을 알면서도 성큼한 샴페인을 겁도 없이 받아 마셔버린 지금, 이 賞이 내게 있어 毒이 될지 藥이 될련지 마냥 두렵기만 하다.
습작기 1년 반, 나는 늦게 배운 도둑이었다. 늦게 시작한 만큼 나는 새벽까지 돌아 다니는 도둑처럼 부지런히 썼고, 방황도 참 많이 했다. 그러나 시조를 쓴다는 것은 늘 즐거움 그 자체였고 내 생활의 싱싱한 활력소가 되어 주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습작을 해야 비로소 바로 설 수 있는 길 하나를 얻는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더 바램이 있다면 우리 시조의 고유한 가락 속에 세상의 喜怒哀樂을 정직하게 그 길속에 담아 내고 싶다.
이 자리에 있도록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인터넷 <시조박물관>운영진과 습작품을 독자 코너에 올릴 때마다 날카로운 비평과 희망을 주었던 금바다의 스승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늘 내 편의 독자가 되어 용기를 북돋아 준 아내와 아들, 딸에게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아울러 培英의 식구들과도-
오늘의 결과에 자만하지 않고 늘 초심자의 자세로서 미력하나마 자랑스러운 우리 고유의 시조의 발전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해 나갈 것을 다짐해 본다. 모든 것이 부족한 졸작을 선뜻 선택해주신 심사위원님과 이 자리를 마련해 준 전주일보사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2002 농민신문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유년의 판화 / 성지문




바람도 한 줄 없이 그림자가 일렁인다

눈 먼 기억들을 바늘귀에 꿰는 어머니

남루를 깁는 낙타여 촛불마저 목이 탄다

불빛도 지루한가봐 그을음을 피우는 밤

머언 곳 동정 살피듯 창문쪽으로 떠는 귓볼

밤 새워 사막을 기워온 어머니의 무르팍이여




연을 날려보면 아득함에 소름 끼친다

솟구친 가오리연은 하늘 호수에 숨었을까

끊어진 연줄에서는 사금파리로 우는 햇살

청국장 끓이는 냄새 솔잎 타는 저녁 연기

갈라진 손등에 문댄 가난 시린 콧물 자국

주접든 개를 붙들고 마구 뛰던 텅 빈 운동장




누군가 올 것만 같아 공연히 들창을 열면

이마에 닿는 하늘 혀로 받는 꽃눈송이

부엌엔 밥물이 끓고 감자싹이 돋는 윗목

먼 겨울 우레에 잠귀가 들린 외할머니

더 이상 늘린 입성은 저승에나 있다는 듯

두 손을 호도알처럼 비며 내 귓볼을 어루신다


*시조 당선소감

밤 사이 설핏 눈이 내렸다. 아파트 주차장은 빠져나간 차들로 휑뎅그렁했다. 그 빠져나간 차들이 머물던 자리엔 그 몸피만큼의 자국이 남았다. 거기에 몸을 머물게 한 차가 대신 그 눈을 맞았던 것이다.

내가 머물러 있어 그 눈(雪)을 맞지 못하는 곳이 있다면 그건 안된 일이다. 나도 느끼지 못한 눈이기에 그 누구도 느끼지 못할 눈일 거라는 생각은 그래서 나에게는 온당치 않다. 가끔 꿈속에서 내 머리 위에는 내리지 않고 눈앞의 개울 속으로 속절없이 녹아드는 눈발을 보다 깨어난 적이 있다. 다 같이 맞을 수 있고 다 같이 뒹굴 수 있는 눈발 속이라면 한번쯤 순수하게 세상이 어두워도 좋으리라. 아내와 딸에게 기쁨을 전한다. 아울러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성지문 <인천 남동구 만수동>


*시조 심사평

올해 응모작엔 수준작이 많았다. 끝까지 남은 작품은 이우식의 <印章에 새긴 그림>, 김산의 <어둠의 풀밭>, 김정연의 <우포늪 가시연꽃>, 성지문의 <유년의 판화> 등 네 편.

<印章에 새긴 그림>은 감각은 빼어났으나 일관성이 희박했다. <어둠의 풀밭>은 고요를 바라보고 일구어나가는 솜씨에 비해 주제가 명확하지 않았다. <우포늪 가시연꽃>은 세 수에 담긴 내용과 이미지가 깔끔했지만 주제가 빈약했다. 결국 남은 건 성지문의 <유년의 판화>.

이 작품은 3부(어머니·나·외할머니)로 나뉘어 여섯 수를 이끄는 서정의 힘이 돋보였다. '끊어진 연줄에서는 사금파리로 우는 햇살` 등 빼어난 영상이 작품의 위상과 격을 높이고 있다.

김남환 <시조시인>·이상범 <시조시인>


[2002 매일신문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어떤 肖像 / 이숙경


흐린 불빛에 돌연 어지럼증이 일어

불태워 밝히고 싶은

어둔 저 가슴 한복판

천천히

들이붓는다

몇 잔 검푸른 독주

입 닫고 눈 닫고

귀마저 틀어막던

차마 못 깨뜨릴

오랜 고독의 뼈대

누군가

나무마치로

바스러뜨리고 있다


▨당선소감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볼 때 그것을 밑줄 삼아 얹어 놓았던 숱한 그리움의 언어들,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 바람에 모조리 날려 버리고 싶었던 고통의 언어들, 잎새 한 잎도 거두지 못한 뼈마디 앙상한 나뭇가지에 다정히 걸쳐 주고 싶었던 언어들, 작은 가슴 넘치도록 솟아오르는 언어들 때문에 몸부림쳐봐도 시다운 시를 쓸 수 없어 자신을 몹시 책망하며 부끄러워했습니다.

작품이 당선작으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시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에 모든 것 들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워 벌떡 일어나 세상을 얼싸안고 싶은 감동이 느껴졌습니 다. 시조를 쓰게 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지만 시조에 대한 묘미를 발견했을 때의 감동은 참으로 컸습니다.

정제된 질서에 감칠 맛 나게 풀려 나가는 오묘한 말의 연줄이 마침내 무한한 허공 을 날았다 가슴을 타고 내려와 넉넉함으로 안기는 것을 작품을 통해 체험했을 때 저는 시조가 우리 민족문화의 당당한 유산임을 깨달았습니다.

존경하는 어느 시조 시인의 작품은 시조의 존재 가치와 고귀한 정서, 아울러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까지 느끼게 했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지만 이 소 중한 기회를 발판삼아 시를 통해 행복해질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에 더욱 힘쓰겠습니다. 당선작을 가려내느라 애쓰신 심사위원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약력 △1966 전북 익산 출생 △전주교대 국어교육과 졸업 △대구 율하초등학교 교사


▨심사평

신춘문예 당선작을 뽑는 일은 고통과 기쁨을 동반한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정신 의 숙도를 가늠하는 일이 고통이라면, 그로 말미암아 전혀 새로운 감성을 만나는 일은 다시 없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숙고 끝에 마지막까지 손에 남은 작품은 네 편. 이순희씨의 ‘鳶’과 최기송씨의 ‘떡살’은 우리 전통 생활 소재에다 생존의 애환을 담아내고 있다. ‘떡살’이 심상의 차분한 결구에 치중했다면 ‘연’은 좀더 열린 쪽이다.

두 편이 다 녹록찮은 시력을 보여 주지만 어떤 유형적인 본새를 벗지 못한 게 흠 이다. 이우식씨의 ‘한개의 달걀을 위한 명상’은 달걀 부화과정을 통해 생명에 대한 전율을 감지케 한다. 착상이 신선하고 이미지의 전개가 활달한 반면, 표현의 적확도와 완성도 면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당선작으로 가려낸 이숙경씨의 ‘어떤 초상’은 신춘문예의 일반적인 투에서 벗어 난 작품이다. 무리하게 상을 끌어가려는 욕심을 접은, 빈틈없는 구성과 개성적인 수사가 돋보인다.

찬찬히 들여다 보면 그것은 가식이나 욕망의 더께를 걷어낸 갈등의 내면 풍경으로 드러난다. 청렬한 정신의 순도를 느끼게 하는 ‘몇 잔 검푸른 독주’를 시대의 질곡 위에 ‘천천히/ 들이붓는’ 감각이 예사롭지 않다. 모쪼록 당선의 영예에 안 분하지 말고 더 좁고 가파른 길을 내달릴 각오를 다져 주기 바란다.

박기섭(시조시인)


[2002 불교신문신춘문예 시 당선작]
-시, 시조 공모전에서 시조로 당선되었기 때문에 수록합니다.-

[시 가작]

山家에서 / 김승호


나무 숲 바람소리 가만히 숨죽이면
못 물은 왜 이렇게 꼬리가 길은지,
돌담에 기대어 있는 산중의 의문 하나를
모악의 산맥같은 돌로 눌러 죽이고
석등 밑에 부려놓은 허리 휜 길 하나
가슴 속 붉게 흐드러진 화염도 밟고 와서
손 호호 불어가며 고봉 쌀밥 공양하고
그림자 가득한 창호문을 닫아걸면
화엄은 깊은 바닷속 늘 깊이 잠겨 있음을
비 끝에 쓸리는 적멸의 이 길을
시내에 모이는 솔 소리에 비내리면
미륵은 우리 곁에서 수행자로 걷고 있다.


* 시부문 심사평
“넓은 세계로 나가기를”

예년의 수준을 훨씬 넘는 많은 응모작 가운데 예선을 통과하여 본심에서 오른 작품들은 강재현 〈청평사 가는 길〉외 8편, 백하길 〈공사장에서〉외 8편, 김승호 〈山家에서〉외 5편, 정하해 〈살아서 관을 짜다〉외 4편, 이정원 〈빈 들에 서다〉외 5편, 홍 범 〈보이를 마시며〉외 4편, 이완 〈나비〉외 5편 장석원 〈낙하하는 것들의 이름을 안들〉외 4편 등이었다.

이 중에서 마지막으로 이은자, 장석원, 이정원, 김승호 네분의 작품이 최종 심사의 대상이 되었다. 이은자의 간결성, 이정원의 서술성, 장석원의 참신성, 김승호의 형식적 절제 등이 각각의 장점으로 돋보였다. 그러나 육화된 시적 사유와 투고된 작품의 균질성 등으로 인해 이정원의 〈빈 들에 서다〉와 〈등신불〉 등을 금년도 당선작으로 선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겨울은 그 빈 여백에 작은 움 하나를 그리기 시작한다’는 깨달음이나 ‘풍경에서 뛰어나온 마음들’을 붉은 배롱꽃에 전화시킨 상상들이 이번 수상을 계기로 크고 넓은 세계로 뻗어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드리며, 아깝게 탈락한 많은 분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전한다.

<심사위원 : 최동호 교수>


[2002 조선일보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겨울 판화 / 나홍련


바다 빛이 뚝뚝 떨어지는 어물전 좌판대 위

비릿한 냄새 풍기며 하얗게 뒤집힌 고등어들

얼음꽃 차디찬 살갗, 지느러미만 파닥인다.


시퍼런 파도소리 등줄기에 서럽게 실려

아가미를 벌리다가 하얀 소금알 몇 개 문

썰렁한 아침 너머로 먼 바다가 출렁이고.


겨울의 상처들이 찢긴 비늘 속으로 숨는다.

소금물에 절인 살점, 반란의 흔적이 얼핏 보이고

그들은 꿈꾸고 있다. 푸르게 닿는 바다새 울음


회색빛 물감을 풀어 희미해진 어물전 저녁

부서진 상자 속에 주검들이 줄줄이 꿰어져

눈발이 서럽게 내린 삭막한 풍경도 그려 넣자.


[당선소감]

몸부림친 시간만큼 시조의 멋 깨달아

김천의 직지천 강변도로를 달리다 보면 이마에 닿을 것 같은 황악산이 환하게 우리 앞에 선다. 그 늠연한 기세에 나는 저절로 당당해 지고 있음을 느낀다. 가끔 일요일 오후 황악산속에 들면 산길 따라 달리는 바람과 함께 정신없이 능선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곧 갈증을 견디지 못하여 되돌아오는 하산길에서 만나는 운수암 마당에 있는 맑은 물에 한껏 취하게 된다. 얼마나 많이 찾아 헤매였던가 오래동안 풀지못한 갈등들이 눈빛을 붉게 하고 치졸한 세정속에서도 샘물처럼 맑은 시들이 솟아나고 있지 않는가.

산사에서 목탁소리를 들으며 자작나무 숲길을 걷다가 어느날 갑자기 시조와 만나게 되었고 직지사 대가람 뜰앞에 있는 백수(백수)선생님의 시비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어느날 고전시가집을 읽다가 고전시조 몇편에 반해 급선회 하여 스스로 시조세계에 파고 들었으나 제한된 형식 속에서 절제된 언어와 리듬을 어울리게 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되어 스스로 포기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몸부림 친 만큼 건진 노력들이 시조에 더 적극적으로 매달리게 하였고 낮익은 가락속에서 자연과 인생을 엮어 내면서 다른 시에서는 느낄수 없는 멋이 시조속에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많은 선배 시인들이 밝고 간 넓고 큰 뜨락을 이제 나도 막 발걸음을 옮겨 놓으려는 순간이다. 그동안 긴 공직생활을 청산하면서 새로운 시조와의 동행은 나에게 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의 이 기쁨을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김천의 문우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그리고 대구의 윤사섭 형에게도 이 기쁜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나에게 시조의 길을 열어주신 윤금초 심사위원님께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1942년 경북 김천에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 4년 수료 ▲제2회(’99년)공무원 문예대전 시조부분 우수상 ▲2001년 공모 가람시조 문학상 장원 당선 ▲경북 김천시 평화동 정휘맨션 A동 103호


◆심사평/ 삶의 현장 싱그럽게 풀어내

‘빙동삼척 비일일지한(氷凍三尺 非一日之寒)’.‘얼음 석자는 하루 아침 추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이다. 응모 작품 태반은 절차탁마의 내공 부족이었다. 곰삭지 않은 ‘날것 ’을 그대로 드러낸 경우가 많았다. 시조문학의 미덕은 선경(先景)·후정(後情)의 원리, 즉 묘사와 진술의 원리를 터득하는 일이다. 이미지를 끌어낸 다음 그 위에 담론(談論)을 실어야 하는데, 그것을 그만 놓치고 만 경우가 허다했다.

디지털시대는 세상을 자잘한 암호로 압축, 저장한다. 그것이 참 간편하고 빠르긴 하지만 문학세계는 좀 다르다. ‘다뉴세문경을 보다(성세경)’나 ‘겨울 산수유(황성진)’‘폐가(이시백)’는 시조 문맥 속에 정교한 복선을 깔지 못한 흠을 드러냈다. 이미지와 이미지가 가는 톱니바퀴처럼 정치(精緻)하게 맞물려 나가야 하는데 때로는 겉돌고, 때로는 움푹움푹 굴곡을 이루는 등 기복이 심했다. 직설적 서술방법에 치우쳐 찰기 있는 문장을 일궈내지 못했다.

‘개오지 설화(정평림)’나 ‘대금산조(송금례)’는 말 뽄새가 녹록지 않은 사설시조였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감성경화에 걸려 억지 제스처만 무성했다. 시는 현실을 끌어안되 그 현실을 날것으로 드러내지 않고, 잘 여과시켜 색다른 그 무엇으로 환치해 놓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당선작 ‘겨울 판화 ’는 관조의 총혜를 읽을 수 있다. 삶의 현장성을 싱그러운 언어로 풀어낸 게 이 작품이 지닌 매력이다. 패기에 찬 한 신인이 펼쳐보이는 격렬한 ‘힘의 시학 ’을 만난 것은 우리의 복락이다. (윤금초/시조시인)


[2002 동아일보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먹감나무 문갑 / 최길하


물 한 모금 자아올려 홍시 등불이 되기까지
까막까치가 그 등불아래 둥지를 틀기까지
그 불빛 엄동 설한에 별이 되어 여물기까지

몇 해째 눈을 못 뜨던 뜰 앞 먹감나무를
아버님이 베시더니 문갑을 짜셨다.
일월도(日月圖) 산수화 화첩을 종이 뜨듯 떠 내셨다.

돌에도 길이 있듯 나무도 잘 열어야
그 속에 산 하나를 온전히 찾을 수 있다.
집 한 채 환히 밝히던 홍시 같은 일월(日月)도.

잘 익은 속을 떠서 문갑 하나 지어 두면
대대로 자손에게 법당 한 칸쯤 된다시며
빛나는 경첩을 골라 풍경 달듯 다셨다.

등불 같은 아버님도 한세월을 건너가면
저렇게 속이 타서 일월도(日月圖)로 속이 타서
머리맡 열두 폭 산수, 문갑으로 놓이 실까.


[당선소감]

최길하
△1957년 단양 생
△1984년 중앙일보 시조 백일장 장원
△1994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현 성신양회 노동조합 사무장 근무

동아일보와 심사위원께 좋은 작품으로 보답할 것을 약속 드립니다.
힘든 세월이 있을 때 안쓰러운 마음으로 염려해주신 '성신양회' 사우 여러분께도….
먹감나무처럼 아버님은 홍시 같은 등불이었습니다. 아마 속 또한 불 밝힌 자국이 꺼멓게 그을려 있으셨을 겁니다. 그 꺼먼 무늬가 해와 달을 품고 산을 이루어서 말입니다. 이제 아버님은 떠나시고 제가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반짝이는 문갑 한 쌍과 함께….
먹감나무의 무늬와 별처럼 빛나는 장식이 서로 꾸며주고 비쳐주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남을 헐뜯고 자기 똑똑한 척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대에 대한 이해나 배려에는 아주 인색한 사람 말입니다. 조선시대의 문갑, 장롱, 반다지등 가구를 보면 나무와 장식의 조화가 마치, 맑은 날 밤하늘에 별이 돋은 것처럼 아름답게 서로를 꾸며주고 비쳐주고 있습니다. 나무(木)와 쇠(金)는 서로 상극이지만 서로를 꾸며주고 비쳐줌으로써 상생으로 변하게 됩니다. 시골집 마당에 홍시가 익으면 우리 모두 하루에도 몇 번씩 감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개도 닭도 늙은 염소도…. 그때 짐승들의 마음속에도 깊은 강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모든 사물에 자신을 비쳐 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은 둘이 아니다(不二). 담겨지는 그릇만 다를 뿐 서로 비쳐주고 비쳐보는 사이(間)만 있다가, 그 사이조차 지워지고 다 녹아서 원융(圓融)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곳에 이르면 모든 사물에서 관세음(觀世音)을 보게되고 상대성 원리가 합류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모든 자연계가 무상(無常)히 진행하는 흐름과 균형의 방향성에 대하여, 사물들의 설계도인 대칭의 구조가 균형과 질서의 꽃이 되는 것에 대하여, 그러므로 모든 사물은 숫자로 해독 할 수 있고, 그 궁극은 항상 부등호(=)로 끝나는 것에 대하여 문을 열어 보고자 합니다. 'DNA'를 시의 언어로 풀어가 보겠습니다.


[심사평] / 유재영(시조시인·동학사 대표)

70여편의 응모작 중 최종 심의에 오른 작품은 여섯 편이었다. 박소현 <푸드득, 꿈꾸는 아침>, 윤채영 <못물을 보며>, 최하록 <어머니, 세 개의 이미지>, 설혜원 <청량사 배롱나무>, 심석정 <염전에서>, 최길하 <먹감나무 문갑>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염전에서>와 <청량사 배롱나무>, 그리고 <먹감나무 문갑>이 당선을 놓고 마지막까지 겨루었다.
<염전에서>는 치열한 주제의식과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돋보였으나 군데군데 음보의 지나친 이탈과 감성을 다스리는 섬세함이 부족했고, <청량사 배롱나무>는 작가의 뛰어난 시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시조의 전통성과 무관한 구성상 문제가 흠이었다.
그와 달리 최길하 씨의 작품은 탄탄한 구성과 함께 미학적인 면과 작품의 성취도에서 단연 앞서 있었다. 그것은 당선작인 <먹감나무 문갑> 외에도 또다른 작품 <백자 연적> 역시 단수이긴 하지만 시인으로서의 역량을 평가받기에 충분했다. 신인답지 않은 지나친 능숙함에 전혀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조라는 완고한 형식에 잊혀져 가는 우리의 정서를 이만큼 담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시조가 아니면 결코 느낄 수 없는 <먹감나무 문갑>이 있는 저 아름다운 언어 풍경을 바라보는 새해 아침, 이 땅에서 시조를 쓴다는 것이 즐겁다. 당선자의 대성을 바란다.


[2002 경향신문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도산서원에서 / 이순희


파르라니 타는 혼불 안개로 감싸안고
濃墨의 시대사가 토담으로 둘러쳐진,
안동 땅 들어서면서 옷깃부터 여미었네.

완락재 앞마당엔 한 우주가 터지고 있었네
홀연히 몸을 날린 설매화 다시 이울고
부신 눈 지그시 감고 먼 훗날을 읽고 있었네.

적성산 한 자락이 북풍에 꺾여나가
문풍지 우는 소리에 저려오던 사무침도
한 마리 박새로 와서 세상의 잠을 깨우고

쉼 없이 솟는 사랑 빈배에 실어보내며
강선대에 홀로 앉아 뜯었다던 가야금소리
그 소리 영원을 돌아와 댓잎 끝에 아리네.


[시조 당선소감] 시조는 생의 의미이자 동반자

<이순희>
1960년 경북 성주 출생
영남대 국어국문과 졸업
2001년 전국 시조 공모전
장원(대구시조 주최)

내 유년시절 어느 날로 기억된다. 친구를 찾아 놀이터에 나갔는데 텅 빈 놀이터에는 잎 떨군 가지들만 쉰 울름을 울고 있었다. 나도 따라 울고 싶었다. 그러나 목구멍까지 치미는 울음을 꾸욱 삼켜버렸다. 가슴에 묵직한 것이 내려앉았다.

그날 이후 까닭 모를 병이 가끔씩 나를 찾아왔다. 가슴을 누르던 것이 걷잡을 수 없는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런 날은 바람에 떠밀려 진종일 거리를 서성거렸다.

끝이 없을 것 같던 방황은 끝났다. 나를 지탱해 주는 따뜻한 친구를 만난 것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 친구와 나는 모든 것을 주고 받았다. ‘시조’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였다.

처음부터 시조가 내 친구가 된 것은 아니었다. 느낌없이 지나치던 시조를 내게 소개해 주신 분은 민병도 선생님이셨다. 선생님께서는 시조의 깊은 매력에 대해서도 눈뜨게 해 주셨다.

무채색이었던 나의 생이 지금은 여러 가지의 색깔을 띠게 되었다. 때로는 짙은 회색이다가 때로는 화려한 무지갯빛이다가….

까닭은 동반자가 된 시조가 늘 함께 하기 때문이다.

부족한 작품에 등불 밝혀 길 열어주신 심사위원님께 먼저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따뜻한 충고의 말씀으로 이끌어주신 여러 선생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흔들릴 때마다 바로 세워준 한결 시조 문우들과 모자람 투성이인 나를 따뜻한 눈길로 지켜보아 준 아이들과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이 기쁨을 드린다.


[시조 심사평] 정신의 깊이에 대이는 보법

올해는 시조응모가 부활한 첫해이다. 신문사에 감사한다. 시조가 어렵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선 시로서의 성공을 거두어야 하고 형식미에 대입시켜 무리없는 성과를 이룩해야 하는 일이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예선을 거쳐 최종심에 오른 작품 중에서 전준의 ‘겨울, 능내에서’, 김산의 ‘낙타’, 그리고 이순희의 ‘도산서원에서’가 끝까지 남아 우열을 겨룬 작품이었다.

‘겨울, 능내에서’(전준)는 다산생가의 영상을 형상화한 작품이었으나 흐름이 핵을 찌르지 못하고 언어가 겉돌아 관념적으로 비쳤다.

‘낙타’(김산)의 경우, 매끄럽고 능란한 기교가 작품을 많이 다루어온 솜씨다. 그러나 작품의 깊이가 부족하다는 게 심사위원의 공통된 견해였다. 이 말은 진실성의 미흡으로 치부되었다.

끝으로 이번 수상작 ‘도산서원에서’(이순희)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작품을 일구어 나가는 보법이 아주 신중하다. 도산서원은 퇴계의 정신과 사상, 그리고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유림의 중심지요, 오늘의 대학과 대학원 과정의 인재를 육성한 곳이다. 이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작자는 대뜸 ‘파르라니 타는 혼불 안개로 감싸안고/농묵의 시대사가 토담으로 둘러쳐진’으로 작품의 문을 열고 있다. 퇴계의 정신을 포착한 서두다. 풍경을 소화하는 서정의 힘과 정신의 깊이를 감지하게 한다. 당선을 축하하며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김제현·이상범〉



[2002 부산일보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저녁밥상

 - 자화상-/장홍만


내게 돈벌이란

영 재주가 없는 건지

탐탁찮은 가장 노릇에 포크질하던 아내가

살빠진 월급봉투 얇게,얇게 저며 칼질하는,

조촐한 저녁 한끼 된장국 끓는 소리

오래도록 길들인 깊은 맛은 아니어도

공들인 값어치만큼의

그 빛깔은

씹히는데,



거른 적 없는 식탐에도

삭정이,삭정이처럼

위상은 어째 깡말라만 가는 건지

노동의 차디찬 현장에 모닥불감은 될는지.


[당선소감]
'타오르는 불꽃 다스리는 계기'

추운 겨울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열심히 생을 꾸려가는 사람들로 이 도시는 붐빈다. 참 많은 날들 패기도 억척스러움도 담배꽁초처럼 흘려놓고서 이 길 위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 망연할 따름이다.

진실한 그리고 간절한 고민 하나 미련처럼 끌어안고 아프게 흔들렸던 날들을 되새겨 본다. 얼마나 게을렀는지 의미 있는 흔적도 남김없이 지낸 많은 시간들을 이제는 조용히 뼈저리게 반성해야겠다.

반가운 소식이 있었으면,노곤한 삶의 한때라도 작은 설렘이 있었으면 하고 기다리던 전화연락이었을텐데 막상 너무 재미없게끔 당선소식을 받았던 듯싶다. 소식을 전해주었던 그 분의 마음까지 무겁게 만들지 않았는지 새삼 미안한 심경이다.

왠지 모를 막막함이 황량한 들판에 마구 쏟아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설렘일 줄 알았는데 전혀 낯선 두려움이 위용을 내세우듯 길을 막아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도 두려워해야 할 것들이 많은 모양이다. 이 난감하게 헤매는 마음도 추슬러야겠고 잊고 살았던 부분,잃어버린 것들을 소중히 되살려내는 한 계기로 삼아야겠다. 얼마나 부지런을 떨어야 할까….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못난 글 부끄러움이 깊었는데 이렇게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형언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사그라지던 용기와 자신감에 모닥불을 놓겠습니다. 마음속 화르르 타오르는 불꽃을 오래도록 다스리며 앞서가는 많은 분들의 좋은 글 더욱 많이 읽겠습니다.


[심사평]
이 시대 젊은 지성인의 자화상

응모자는 모두 50명. 하나하나 세어 보지는 않았으나 1인당 평균 4편으로 쳐도 모두 200편 쯤 되니 예년보다 좀 많아졌다.

응모자의 분포도 지역적으로는 부산 등 경상권 중심에서 서울 중부 전라 충청 강원 제주까지 전국으로 고루 확대되었다.

특히 작품의 질적 수준은 괄목할 만큼 향상되어 중간층이 많이 두꺼워지는 다이아몬드형을 보이고 있는 것은 시조의 앞날을 위해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 하겠다.

예선에 오른 사람은 김종길 손영희 김태영 이종대 박태진 이운정 장홍만 씨. 이들 7명은 각기 수 편씩의 작품에서 고른 역량을 보여 장래가 기대되는 사람들이었다.

이 중에서 장홍만 씨를 당선자로 낙점해 놓고 작품을 가리는데 시간이 걸렸다. '자화상'이란 부제가 붙은 '저녁 밥상'은 첫 수를 사설,둘째 수를 평시조로 처리하여 다소 요설스럽고,'가을 언저리 1'은 평시조 2수를 다양한 시행으로 배열해 간결한 상징이 인상적이어서 선자(選者)에 따라 당선작을 달리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저녁 밥상'을 가려 뽑은 것은 신문의 대중성이 작품의 평이성과 통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의 작품에 깔려 있는 '그늘''궁상' 등 그런 이미지는 이 시대를 사는 젊은 지성인의 자화상이던가.
<시인 최승범·장순하>



[2002 대한매일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흔들리는 構圖 / 박소연

말보다 깊은 기억 바랑에 가득 채워
보이지 않는 그곳, 뜬눈으로 걸어간다.
끝없이 타는 목마름 발길마다 밟으며

한 걸음 내딛으면 또 다가서는 생(生)의 갈증
기어이 넘어야 할 불혹의 기나긴 고비마다
바래고 주름진 흔적 혈흔(血痕)으로 남는다.

난타당한 푸른 수액 꽃가지에 동여매고
맨발로 계단을 건너 당도한 세월의 길
렌즈 속 흔들리는 구도(構圖), 돌아서서 지운다.

삭정이 성긴 힘줄 안으로 삭혀두고
막막한 저 발자국 정수리에 또 새길까
지워도 뚜렷이 남는 육면체를 꿈꾸며.


[당선소감] ‘박소연’

예고 없이 첫눈 내리던 날 기차 여행을 했다.싸늘한 들녘에 참으로 오랜만에 은빛 고요가 쌓인다.애써 어둠을 잡아둔그 대지 위에 의미가 되지 못한 언어들이 마구 뒹굴고 있었다.얼기설기 구도를 짜며 내 문학의 길도 그렇게 젖거나 마르곤 했다.

한 겨울,떠오르는 감정들을 밤새도록 끌어안을 수 있었던많은 나날에 감사드린다.밥 보다 더 배부른,차보다 더 향기로운 시조를 창작하면서 삶을 배우고 일렁이는 감정들을 삭히고 삭혔다.‘첫눈의 설레임을 어떻게 풀어낼까’하고.

고민할 때 신문사로부터 뜻밖의 ‘당선’ 소식을 받았다.사방으로 흩어지는 눈송이들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이더니 초조,기다림,환희의 나팔소리로 바뀌었다.

내 이제,나의 삶에도 형광색의 무대를 마음껏 꾸밀 수 있으리라 믿고 싶다.

그 동안은 바람에 부서지고 어둠에 찢겨지는 가설무대였다면 이젠 혼자서도 넉넉히 마임을 할 수 있는 작은 단상이었으면 한다.열병처럼 쏟아지는 언어들을 모아 몸짓으로 풀어보리라.때로는 단아하게 또 유장하게.

부족한 작품을 흔쾌히 뽑아주신 신문사와 심사위원님께 먼저 깊이 감사 드린다.겉으로는 신랄하게,속으로는 따뜻하게보듬어 준 곽홍란 시인과 문우들께 이 벅찬 기쁨을 바치고싶다.

또 어설픈 아내에게 내색조차 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준 남편,엄마 작품이라고 줄줄 읽으며 즐거워하는 아이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심사평]

총응모작을 둘로 나눠 두 심사위원이 각자에게 할당된 작품을 가려뽑는 1차 심사가 있은 뒤,그 뽑은 작품을 또 서로 바꿔 읽어서 몇편만을 고르는 2차 심사를 가졌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이 김미영의 ‘복천동 고분(古墳)’과 김종길의 ‘산수유’,박소연의 ‘흔들리는 구도(構圖)’ 등 세 편이었다.

이들 세 편도 모두 조금씩의 결점을 내보이고 있었다.예컨대,‘복천동 고분’은 시어의 불필요한 남용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는데 ‘무덤’,‘토우’ 등 이 시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시어들이 두세 번씩 쓰이고 있는 점이었다.‘산수유’에서도 ‘노랗게,노랑,노란’ 이라는 봄을 가리키는 단어가 짧은 시속에 세 번씩이나 사용되고 있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더 좋은 시어로 바꾸어놓을 수있었을 것이란 아쉬움이 있었다.

끝까지 거론된 작품들이 예년의 당선작 수준을 크게 뛰어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신춘의 화려한 등단을 가리는 이 불꽃튀는 경선이 분명 신인다운 패기와 참신성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데에 역점을 두게 되면,이러한 생각에 가장 접근한 작품이 바로 ‘흔들리는 구도’였다.군데군데 설익은 표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뽑은 데에는 함께 투고한 ‘폐광,그후’ 등이작자의 역량을 뒷받침해 주었음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당선작에 축하의 박수를 보내며,아울러 앞으로의 정진을 기대한다.

박시교 윤금초



[2002 국제신문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우포늪 가시연꽃 / 김정연


문명이 뒷짐지고 돌아앉은 외진 그곳

넓디넓은 늪물 속에 까치발 딛고 서서

가시연, 저무는 빛에 파르르르 전율한다.



그리움 물고 나는 도요새는 오지 않고

가시에 찢기는 아픔 비명조차 삼켜가며

절정의 그날을 위해 숨 고르며 기다린다.



갓밝이 그 초입에서 꽃송이 툭 · 툭 터져

보랏빛 얇은 속살 한겹한겹 드러내며

남몰래 품었던 하늘 되돌리고 서있는 너.


[당선소감]- 김정연

행여나 행여나 하며 기다림에 뛰는 가슴 토닥이던 시간의 끝을 지나 체념으로 마음을 돌려 내년을 위한 신발끈을 질끈 동여 맬 때, 불쑥 들려 온 낯선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흐르던 눈물은 반가움과 늦은 것에 대한 투정이었을까요?
새벽 한시, 도전을 결심한 그 날 후로 습관처럼 의식이 맑아지는 시간입니다. 남들이 잠든 시간에도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 삶의 큰 위안이었는데 그 작업이 고도의 절제와 함축을 바탕으로 한 언어의 운율에 맞추어 춤추는 것이었으니 그 즐거움은 가히 가히 짐작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많이 노력하였으나 모자람의 벽을 뛰어 넘기에는 아직도 긴 절차탁마의 시간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평소 존경해 오던 두 분 심사위원 선생님들께서 내미신 손을 꼭 잡고 그 믿음에 어긋남이 없도록 매진하여 긴 겨울 끝, 얼음 녹이는 복수초처럼 가장 먼저 상큼한 봄 소식을 알리는 그런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
무지한 저를 여기까지 이끌어 주신 윤금초 선생님과 많은 선배님, 이 밤을 까맣게 태우고 있을 문우들에게 먼저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외조를 아끼지 않았던 남편과 사랑하는 아들 근호와 딸 소영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약력=△1963년 부산 출생.
[사평]- 이근배 정해송(이상 시조시인)

오직 이 땅의 모국어로만 빚어지는 시조는 신춘문예의 벽을 넘어설 때 그 가락과 숨결을 한 층씩 높여왔다.
올해도 시조의 형식에 천착해 온 숨은 신인들의 작품을 읽는 기쁨은 컸다.
그러나 시적 감수성과 시재가 시조의 형식에 부딪쳐 기대만큼의 새 지평을 열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당선작 ‘우포늪 가시연꽃’(김정연)은 글감의 발견부터가 시적 안목에 믿음을 주고 있으며 자칫 낯익은 서정에 빠질 소재이면서 그 내면의 깊이를 예리한 칼끝으로 도려내고 있어 이미지가 낱낱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문명의 그늘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생명이 온 몸으로 터뜨리는 눈부신 개화. 그 절정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가슴에 묻혀진 욕망을 읽게 한다.
특히 셋째 수의 초장 ‘갓밝이 그 초입에서 꽃송이 툭 · 툭 터져’에서 종장 ‘남몰래 품었던 하늘 되돌리고 서 있는 너’로 다시 일으켜 세우는 솜씨는 높이 사고 싶다.
이 작품이 대체로 시적 전개가 활달하고 시조의 운율에 익숙한 점이 예년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으며 시조단에 한 몫을 보태리라는 기대도 갖게 한다.
끝으로 성대현의 ‘못질하기’ ‘김미영의 ‘연탄을 갈며’, 김진순의 ‘겨울의 河口에서’가 최종심에서 마지막까지 불꽃을 피웠으나 ‘못질하기’는 관념적인 서술과 굳은 낱말들이, ‘연탄을 갈며’는 시조의 운율을 벗어난 산문적 음보가, ‘겨울 河口에서’는 낯익은 시상의 전개가 지적되어 상대적으로 뒤에 밀리게 되었다. 더욱 분발하여 시조의 내일과 손잡기 바란다. / 이근배 정해송(이상 시조시인)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당선작]

컵 / 김보영


1.
손과 손을 둥글게 맞잡은 물방울이
수채화 속 휘어진 세상을 담아든다
구포역, 낡은 탁자 위 덩그러니 놓여진 꿈.

2.
어릴 적 뛰놀던 길, 그 컵을 들여다본다
헤엄치는 물고기의 일렁이던 비늘이
희미한 汽笛되는가, 그림자가 되는가.

3.
노을 속 동백꽃 빨갛게 타오르다,
보송한 솜털 박힌 이파리 하나 톡 떨군다.
새하얀 목덜미 두르고 겨울이 오고 있다.


[중앙 신인 문학상 시조부문] 수상자 김보영씨

"제 또래에 시조를 쓴다고 하면 주위에서 박물관 유물 같은 걸 왜 쓰냐고들 하지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 태반은 글이 뭔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글을 쓰는 사람에게 시조는 기본과 같은 겁니다. 특히 틀을 바꾸지 않고도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장르가 바로 시조지요."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 수상자 김보영(20)씨의 당찬 수상 소감이다.

이제까지의 수상자 중 최연소인 김씨는 현재 광주여대 문예창작과 3학년에 재학중인 학생. 그런만큼 젊은이다운 패기와 시상(詩想)을 떠올리는 감각에 신선함이 그득하다. 선정 과정에서 "구태의연한 게 시조가 아니며 당대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심사위원들의 절박한(!) 기준에 가장 부합했기에 당선자가 됐다.

당선 연락을 받았을 때 "거짓말 하지 마세요"라고 첫 반응을 보인 김씨는 "아직 어린 나이고 평생 시조를 쓰며 살건데 상을 너무 의식하면 잘해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부자유스러워질 것 같아 기쁜 마음과 일부러 거리를 두고자 한다"고 말했다.


[심사평]

중앙신인문학상 시조부문은 그 관문이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있다.달마다 예선을 통과한 후보들의 새로운 작품을 받아 심사위원들이 전체 윤독을 거친 다음 다수득표자 3~4명으로 압축한 뒤 이들 작품을 면밀히 검토하여 당선자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번에 최종적으로 남은 분은 김기철.손영희.강경화.김보영 씨였다.`봄이 종종 말을 걸다`등의 작품에서 김기철씨는 선명한 이미지와 각 장 사이를 끊어내는 듯 하면서도 이어가는 유연함을 보여주었다. 손영희씨의 간결하면서도 중량감 있는 시상, 강경화씨의 체험 속에서 우러난 삶의 발견과 잔잔한 감동 또한 주목됐다.

김보영씨는 `꽃`등의 작품에서 새로운 감각이 뛰어나고 전편에서 아우르고 있는 세계가 탄탄해 보인다. 심사위원 전원이 주목한 `컵`은 버려진 하나의 평범한 사물을 통해 과거와 현재로 이어지는 물고기 비늘과도 같은 섬세한 에스프리와 잔잔한 감동이 있는 수작이다.기운차게 당선의 자리에 놓는다. 정진해주기 바란다.

<심사위원:윤금초.박시교.유재영.김영재.박기섭.이지엽.정수자.홍성란>



[2002 경남신문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또 하루 / 서성자


박제된 그리움 같은 앨범을 뒤적인다
우유빛 날개 입은 순백의 기러기 한 쌍
무지개 융단 위를 날아
꽃 계단을 오르고.

담장 밑에 심었던 박하 풀 마른 자리엔
가난한 내 유년의 여린 목을 휘감았던
퇴색한 희망 몇 포기
잡초로 웃자라 있다.

이렇게 반쯤 걸어온 하루가 또 가고 있다
선 밖에서 떠돌던 상념의 찌꺼기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각 틀을 맴돌고.


당선소감-시조(서성자)

『엄마, 해 나왔어요.』
꼭꼭 닫힌 두꺼운 커튼을 아이가 힘껏 밉니다. 오전 내내 흐린 하늘이었는데... 언제 나왔을까? 유리를 통과한 햇살이 유리문보다 더 넓게 거실에 쏟아집니다.
기쁩니다. 또 두렵기도 하구요. 허공에 발을 딛고선 기분이 이럴까요? 언제나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초조한 일상들이었습니다. 희미하게 지난 며칠 불면 속에서 조금씩 다져갔던 생각들을 다시 떠올립 니다.
사실 고백하면 저는 아직 좋은 시조가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모든 예술 장르가 그렇듯이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 어렵다는 생각뿐입니다. 정해진 율과 절제된 언어로 감정을 담아내야 하는 것은 물론, 그 기본의 틀 속에 어떤 현장을 통한 역사와 사회의 새로운 인식을 생각하는 일은 제 게 특히 그렇습니다. 그런 만큼 성취감도 크겠지요. 그러나 한 편의 글에 서 사회, 역사적으로 어떤 큰 의미를 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의 감정을 잔잔하게 표현하여 작게나마 공감을 줄 수 있다면 그 또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마음으로 어떤 내용의 글을 쓰든 단 한 사람의 마음에라도 오래 남 는 글을 쓰리라는 생각을 살짝 보이는 길 앞에서 조심스레 해봅니다.
엉거주춤 서 있던 나를 공부의 길로 적극 밀었던 가족과 친구들, 늘 겸손 과 자신감의 조화를 강조하시며 이끌어 주신 창신대 문창과 교수님들, 시조 의 첫 걸음에 사랑과 용기를 실어준 학교 언니 동생들 모두 고맙습니다. 그
리고 모자라는 글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 드립니다. 지금의 설렘과 마 음가짐 꼭 간직하여 더욱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습니다.

▲1963년 마산 출생 ▲창신대학 문예창작과 재학
사평-시조]

가능성이 많은 시인, 참신한 시인, 실험정신이 투철한 시인을 대망하며
백여편의 작품을 읽었다. 몇 차례 정독했지만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작품
이 보이지 않았다. 우선 연시조의 경우 각각의 수가 완결되어 있으면서 시
상의 전개나 의미확장에 기여해야 하고, 사설시조의 경우 엮음의 미학이
잘 빚어져야 하는 것 등은 정형시인 시조에 대한 기본상식이다. 아울러 현
대시조답게 우리 시대의 정서를 노래해야 한다. 이러한 주문은 언제나 심사
의 기본 관점이지만 오래 습작해 온 사람들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 최기송의 「풀꽃」, 정양숙의 「눈내리는
바다」, 차창수의 「도배하는 날」, 우은진의 「강」 「거울」, 장홍만의
「문자메시지」, 하주은의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린 제비」, 손영희의
「완사역에서」, 서성자의 「거리에서」 「또 하루」 등을 가려서 거듭 읽
었다.

「풀꽃」은 참 안정된 서정시였다. 가락도 잘 살려내었다. 그러나 너무
평이한 느낌을 주었다. 「눈내리는 바다」는 백수류의 정통시맥을 잇는 작
품이었다. 좀 더 많은 시적 공정이 요구되었다. 「도배하는 날」은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린 제비」와 같이 일상적인 소재를 시화한 것이었다. 그러
나 두 작품 모두 시적 긴장이 부족했다. 「강」 「거울」은 예사롭지 않은
시적 안목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물을 감각화하는 것, 사물을 통해 초월적
존재를 그려내는 것 등이 그러했다. 그러나 안정감이 부족했다.

결국 「또 하루」, 「거리에서」, 「완사역에서」, 「문자메시지」 등으
로 초점이 모아졌다. 「문자메시지」의 경우 그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
이 가장 절실한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셋째수는 둘째수
까지 유지해 온 긴장감을 완전히 이완시키고 있다. 이 시인의 사설시조관
또한 문제가 되었다. 드라이한 대신 시적 탄력이 부족했다. 현대적이면서
도 감동스럽지 못한 이유를 깨달아 더 노력했으면 한다.

「완사역에서」는 처음 가장 두드러진 작품이었으나 「주머니」 등의 중복
사용, 표현의 묘를 얻었음에도 느껴지는 상투성이 문제가 되었다. 서성자씨
는 작품이 모두 고르지만 특별히 빼어난 작품을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결
국 지리멸렬한 삶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이면서 그 고난에 대한 극복의지로
읽히는 「또 하루」를 뽑기로 했다. 축하드린다.
(심사위원:시조시인 김교한·이우걸)

 

 

[2003 불교신문신춘문예 시조 당선작]-가작

수 국 / 정창영


추녀 끝 풀어 헤쳐 달아맨 풍경들이
산책을 하다 말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달리며 새벽참부터 절터를 흔들어댄다

일 바쁜 주지스님이 잠시 출타한 사이
늙은 절은 힘에 겨워
한참을 버티다가
마침 들어온 동자승에게 대웅전을 내준다

잠 취한 동자승은 성큼, 절 문턱 내려서고
절 혼자 가을이라
발갛게 취해서
활활 타오르다가 보살님 눈치만 본다
좌르르 쏟아지는 쌀 이는 소리에
잠 깨신 부처님
빙긋이 웃으시며
빈 소매 걷고 내려와 문턱에 턱, 걸터 앉으신다


* [시조 당선 소감]

열병처럼 감기가 왔다. 한참동안 들락거리면서도 감기는 좀체 낫지 않았다. 감기가 몸 안에 머물면서 괴롭힐 때마다 간헐적으로 온 몸이 후들거렸다. 하루종일 묵직한 머리, 아픈 목을 뒤로 한 채 버티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몹시 아프던 새벽 끝, 아직 진짜 아픔을 알기에는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나고 있었다. 시를 알게 된 이후 어둠은 감기처럼 내 곁에 머물러 있었다. 그 속에서 온 몸을 휘둘리면서 처음 시 쓰기를 배웠고, 본격적으로 친해지다보니 어느덧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강요하거나 애걸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지 나는 자연스럽게 시를 따라 나서게 된 셈이다.

시는 오늘도 끊임없이 나를 힘들게하고, 때로 좌절하게 만들면서도 어김없이 내 방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린다. 모든 것을 포기한 마지막 순간에 시가 나에게로 왔듯이, 나 역시 언젠가 흔쾌히 웃으면서 그를 떠나보내야 할 것이다. 온몸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감기가 소리없이 빠져나갈 때쯤이면 조금은 마음의 여유가 생길 것이다. 그 끝이 어떻게 마무리 될 것인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인가를 느끼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누군가의 물기어린 시선이거나 행복한 미소이거나 간에 말이다.

이제 조금씩 주변을 돌아보는 연습들을 서서히 해야하리라. 기억 저편에서 아슴아슴하게 다가오던 사랑들이 그러했듯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 적지 않은 도움이 있었다. 늘 믿음으로 묵묵히 지켜보아주는 가족들, 그리고 주위의 우정어린 시선을 기억한다.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한다.

약력 1967년 전주생, 전북대 국어교육과 졸업·전북대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현대시) 현재 전주대 교양학부 객원교수


* [심사평]

불교적 사유 시속에 녹아 / 시조 정형 탈피 파격 돋보여

응모한 작품들에는 응모한 사람들의 정성이 행간에 숨쉬고 있었다. 시를 사랑하고 불심에 가득찬 응모자들의 마음을 행간에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은 행복이었다. 우열을 가늠하기 힘든 작품들을 두고 고민에 빠졌던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시조에서 정현숙의 ‘11월, 장곡사에 비가 내리네’ 외 4편과 정창영의 ‘수국’외 6편, 시에서 박형수의 ‘佛影寺에서’외 4편, 박성필의 ‘남장사’ 외 5편, 이주렴의 ‘강’외 6편을 마지막까지 읽고 또 읽었다.

정현숙의 시조는 시조시의 정통성을 이은 모범답안적 작품이라 할만했다. 언어의 조탁과 시조가 가진 자수율에 의한 운율의 획득 등에서 나무랄 데가 없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모범답안이 항용 그렇듯이 파격적인 창의성과 무한한 상상력에로 향한 아쉬움과 갈증이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장창영의 응모한 시조들은 수준이 모두 고른 편이었고, 무엇보다 시조의 정통적 틀을 벗어나려는 파격과 개성이 돋보였다. 현대시조시가 추구하는 바람직한 행로를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예사롭지 않은 행갈이 방법과 언어의 조탁에서 현대시조가 고시조와 왜 다른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창영의 시조를 가작으로 선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형수의 시들은 단아했다. 그 단아함은 언어의 절제를 통한 조사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응모한 시편들의 수준이 고르지 않은 것은 흠이었다. 박성필의 시는 화려한 시적 수사와 자유분방한 시적 상상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는 기성시인 누군가의 시에서 읽었던 분위기가 자꾸만 느껴졌다.

이주렴의 시는 도도한 흐름으로 이어지는 강한 개성을 가진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언어의 절제도 생각하는 것이 이 시인에게는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강’은 불교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불교적 사유를 시 속에 용해시킨 작품이다. 윤회와 인연 그리고 부처님을 기다리는 마음을 이만큼 승화시켜 놓은 것은 이주렴의 시적 역량이 일정한 수준이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면서 이 시인이 더욱 분발하기를 기대한다.

김 선 학(문학평론가·동국대 국문과 교수)

 


======================================================================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3 2017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동아줄 김태수 2017.01.11 284
32 뇌졸증 예방 신비의 약 만드는 법 동아줄 김태수 2016.09.13 261
31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2012 동아줄 김태수 2016.03.08 413
30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2011) 동아줄 김태수 2016.03.08 874
29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2008-2010) 동아줄 김태수 2016.03.08 1356
28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2005-2007) 동아줄 김태수 2016.03.08 1443
27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2003-2004) 동아줄 김태수 2016.03.08 1165
»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2000-2002) 동아줄 김태수 2016.03.08 841
25 흥하는 말씨, 망하는 말투 동아줄 김태수 2016.01.21 110
24 건강을 위해 버려야할 물건은? 동아줄 김태수 2015.12.26 50
23 번개탄, 곶감, 매실 액기스의 불편한 진실 동아줄 김태수 2015.10.16 301
22 우리의 전통 차에 대하여 동아줄 김태수 2015.10.12 229
21 수유칠덕 동아줄 김태수 2015.09.14 103
20 나무 젓가락의 불편한 진실 동아줄 김태수 2015.06.01 340
19 GMO - 유전자 조작 생물체 동아줄 2015.04.11 471
18 <문장 부호> 용법 현실화, "한글 맞춤법" 일부 개정안 고시 동아줄 2014.12.15 831
17 표준어 13개 추가 인정 동아줄 2014.12.15 314
16 천부경 해설(2) 동아줄 2014.12.04 617
15 소주의 진실 동아줄 김태수 2014.01.12 605
14 국어 현실 개선을 위해 언론계가 할 일 동아줄 2013.05.25 335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8
어제:
60
전체:
1,167,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