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작

 

 

중앙일보

 

 

구두도 구두를

 

이가은

 

누가 벗어놓고 간 오목한 마음일까

조금 더 깊어지면 바닥에 닿을지도

 

발들은 지금 외출 중, 구두끼리 모였다

 

다른 길 걸어와도 아픈 건 같았구나

상처에 광을 내면 오래 빛날 별이 된다

 

마른 천 손가락에 둘러 그러안고 닦아준다

 

구두도 구두를 벗어보고 싶었을까

부르튼 밑창 대신 홀가분한 맨발로

 

헐거운 내일이라도 성큼성큼 가봤으면!

 

 

농민신문

 

 

다산茶山, 마임 무대에 선

 

송태준

 

천 리 밖 매운 탄식이 돌옷 거뭇 배어 있는

신새벽 화성華城 안길 헤집는 손수레 한 대

거중기 발치에 쌓인

야사野史 더미 고른다

 

빈 박스, 빈 깡통에 빈병서껀 넝마 조각

체념하듯 되돌아와 널브러진 성벽 위로

한잠 든 사직을 깨워

뒤척이는 깃발 소리

 

도돌이표 궤도 위를 수레는 굴러가나

받아든 푼돈 온기로 세밑 바람 뚫고 가는

판박이 목민牧民 앞에서

혀 차는 다산 줌 업

 

! 긴 숨 몰아쉬며 한 평 쪽방 찾아드는

노인의 굽은 등 위 펄럭이는 열두 만장挽章*

긴 심서心書 적어가던 붓

그예 꺾고, 암전暗轉이다

 

* 자살률 세계 1위 대한민국에서는 매일 평균 12명의 노인이 자살한다.

 

서울신문

 

막사발을 읽다

 

송가영(본명 송정자)

 

너만 한 너른 품새 세상천지 또 있을까

먼 대륙 날고 날아 난바다도 건너갈 때

태산도 품안에 드는 은유를 되새긴다

 

털리고 짓밟히고 쓸리기도 했을 게다

이 세상 누구에게도 친구가 되지 못해

바람에 말갛게 씻긴 꽁무니가 하얗다

 

바람에 몸을 맡긴 가벼운 너의 행보

새처럼 구름처럼 허공을 떠돌다가

양지 뜸 아늑한 땅에 부르튼 생을 뉜다

 

그리하여 정화수에 묵은 앙금 갈앉히고

눈빛 맑은 옛 도공의 손길을 되짚으면

가슴에 불꽃을 묻은 큰 그릇이 되느니

 

 

조선일보

 

쌍둥이양보의 대가

 

김상규

 

언니는 모르겠지, 그해의 봄 소풍을

반숙된 달걀에선 병아리가 나왔고

사라진 보물종이가 영원한 미궁인 걸

 

두 발은 위태로워 네 발이 필요했어

날개 없는 말개미가 꼭대기에 오르듯이

나 대신 이어 달렸던 언니만의 거친 호흡

 

서로의 옷을 입고 고백했던 그런 하루,

강에 버린 구두 대신 목발을 짚었을 때

우리는 만쥬를 가르며 용서하고 있었어

 

대구매일

 

 

동강할미꽃의 재봉틀

 

김 태 경

 

솜 죽은 핫이불에 멀건 햇빛 송그린다

골다공증 무릎에도 바람이 들이치고

재봉틀 굵은 바늘이 정오쯤에 멈춰 있다

 

문 밖의 보일러는 고드름만 키워내고

숄 두른 굽은 어깨 한 평짜리 가슴으로

발틀에 하루를 걸고 지난 시간 짜깁는다

 

신용불량 최고장에 묻어오는 아들 소식

호강살이 그 약속이 귓전에 맴돌 때는

자리끼 얼음마저도 뜨겁게 끓어올랐다

 

감치듯 휘갑치듯 박음질로 여는 세밑

산타처럼 찾아주는 자원봉사 도시락에

그래도 풀 향기 실은 봄은 오고 있겠다

 

경상일보

 

도르래,빛을 물다

박수근

 

한 치 틈도 허여 않고 흙과 돌 살을 맞댄

성곽 안 둘레길엔 넘지 못할 선이 있다

배흘림 성벽을 따라 나부끼는 저 깃발들

 

밑돌은 윗돌 받치고 윗돌은 밑돌을 괴고

저마다 가슴에는 난공불락 성을 쌓는,

팔달문 층층 불빛이 도르래에 감긴다

 

망루에 올라서면 성채 너머 또 다른 성

가납사니 군말 아닌 실사구시 공법으로

날마다 허물고 쌓고 허물어선 다시 쌓고

 

장안문 홍예(虹霓)를 짓던 옛 사람은 어디 갔나

그때 그 거중기로 들어 올린 금빛 아침

빗살문 빗장을 따고 성문 활짝 열고 싶다

 

동아일보

 

자반 고등어

 

정진희

 

푸른 등이 시린지 부둥켜안은 몸뚱이

제 속을 내주고 그리움을 묻어둔 채

장마당 접었던 밤은 해풍만 가득하다

 

기댈 곳 없었다. 그냥 눈 맞은 너와 나

천지사방 혼자일 때 보듬고 살자했지

소금물 말갛게 고인 눈알 되어 마주친

 

동살이 밝힌 물길 야윈 등을 다독이다

나 다시 태어나 너의 짝이 되리라

살 속에 가시길 박힌 그 바다를 건넌다

 

 

국제신문

 

 

과녁

 

김장배

 

겨운 날 활터에서 낯선 활을 당겨본다

번번이 빗나가다 운이 좋게 다가가도

내 인생 한가운데는 맞출 수가 없었다.

 

삶도 한낱 무예일까 날과 기()도 무딘 지금

펄펄하던 지난날이 초점을 흐려놓고

빗나간 화살 한 대는 행방마저 묘연하다.

 

숨 고른 시간 앞에 조용히 활을 내리고

욕심의 핀을 뽑아 모난 마음 다스린다

마지막 남은 화살이 명중하길 바라며.

 

 

부산일보

 

 

겨울, 횡계리에는

 

 김종호

 

횡계리 황태밭에 비린내로 돋는 달빛

송천(松川) 얼음물에 무장무장 뜨는 별빛

영 너머 파도소리까지 에돌다가 매달렸네.

 

눈발 들이치는 목로에 마주앉아

내 배알, 버렸지라, 빈 가슴 두드리던

노인의 시린 등허리가 흔들리고 있었네.

 

돌아보면 산문 밖은 모두다 덕대였지,

한 생애 흔드는 게 눈발이며 바람뿐일까

노랗게 물들어가다 엇갈리던 환한 꿈들,

 

무두태*로 떨어져서 드난사는 동안에도

코를 꿰인 영혼들이 칼바람에 흔들리며

노을 진 엄동설한을 건너가고 있었네.

 

* 건조과정에서 머리가 떨어진 명태.

 

경남신문

 

인어의 꿈

 

임채주

 

바닥을 기고 있는 인어 같은 저 남자

풀 수 없는 가슴앓이 누군들 알까마는

진창길 바닥에서도 꿈을 줍고 있나보다

 

눈물로 짓이겨온 질척이는 저잣거리

밀고 가는 무거운 짐, 고단한 삶이지만

저 길이 끝날 즈음에 일어설 수 있겠지

 

찢어져 펄럭이는 검은 고무 가죽

또다시 동여매고 두 팔로 끌다보면

인어가 바다를 가듯 푸른 생이 열릴거야

 

한라일보

 

삽화=화가

 

고예현

 

따끈한 흰밥으로 아침을 열어 주며

우리 식구 이어 주던 식탁의 전기밥솥

한 달째 하품 중이다

속이 텅텅 빈 채로

 

어머니는 일터에서 동생은 기숙사에서

나는 또 새벽 출근, 끼니가 다 다르니

저 친구 존재 가치가

슬그머니 없어졌다

 

빵 조각에 커피 한 잔 홀짝이고 있는 사이

덩그러니 나앉아서 빠끔히 쳐다본다

저 혼자 배고프다고

시무룩한 늦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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