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시조 당선작(2003-2004)

2016.03.08 08:42

동아줄 김태수 조회 수:1164

[2003 불교신문신춘문예 시조 당선작]-가작

수 국 / 정창영


추녀 끝 풀어 헤쳐 달아맨 풍경들이
산책을 하다 말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달리며 새벽참부터 절터를 흔들어댄다

일 바쁜 주지스님이 잠시 출타한 사이
늙은 절은 힘에 겨워
한참을 버티다가
마침 들어온 동자승에게 대웅전을 내준다

잠 취한 동자승은 성큼, 절 문턱 내려서고
절 혼자 가을이라
발갛게 취해서
활활 타오르다가 보살님 눈치만 본다
좌르르 쏟아지는 쌀 이는 소리에
잠 깨신 부처님
빙긋이 웃으시며
빈 소매 걷고 내려와 문턱에 턱, 걸터 앉으신다


* [시조 당선 소감]

열병처럼 감기가 왔다. 한참동안 들락거리면서도 감기는 좀체 낫지 않았다. 감기가 몸 안에 머물면서 괴롭힐 때마다 간헐적으로 온 몸이 후들거렸다. 하루종일 묵직한 머리, 아픈 목을 뒤로 한 채 버티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몹시 아프던 새벽 끝, 아직 진짜 아픔을 알기에는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나고 있었다. 시를 알게 된 이후 어둠은 감기처럼 내 곁에 머물러 있었다. 그 속에서 온 몸을 휘둘리면서 처음 시 쓰기를 배웠고, 본격적으로 친해지다보니 어느덧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강요하거나 애걸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지 나는 자연스럽게 시를 따라 나서게 된 셈이다.

시는 오늘도 끊임없이 나를 힘들게하고, 때로 좌절하게 만들면서도 어김없이 내 방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린다. 모든 것을 포기한 마지막 순간에 시가 나에게로 왔듯이, 나 역시 언젠가 흔쾌히 웃으면서 그를 떠나보내야 할 것이다. 온몸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감기가 소리없이 빠져나갈 때쯤이면 조금은 마음의 여유가 생길 것이다. 그 끝이 어떻게 마무리 될 것인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인가를 느끼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누군가의 물기어린 시선이거나 행복한 미소이거나 간에 말이다.

이제 조금씩 주변을 돌아보는 연습들을 서서히 해야하리라. 기억 저편에서 아슴아슴하게 다가오던 사랑들이 그러했듯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 적지 않은 도움이 있었다. 늘 믿음으로 묵묵히 지켜보아주는 가족들, 그리고 주위의 우정어린 시선을 기억한다.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한다.

약력 1967년 전주생, 전북대 국어교육과 졸업·전북대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현대시) 현재 전주대 교양학부 객원교수


* [심사평]

불교적 사유 시속에 녹아 / 시조 정형 탈피 파격 돋보여

응모한 작품들에는 응모한 사람들의 정성이 행간에 숨쉬고 있었다. 시를 사랑하고 불심에 가득찬 응모자들의 마음을 행간에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은 행복이었다. 우열을 가늠하기 힘든 작품들을 두고 고민에 빠졌던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시조에서 정현숙의 ‘11월, 장곡사에 비가 내리네’ 외 4편과 정창영의 ‘수국’외 6편, 시에서 박형수의 ‘佛影寺에서’외 4편, 박성필의 ‘남장사’ 외 5편, 이주렴의 ‘강’외 6편을 마지막까지 읽고 또 읽었다.

정현숙의 시조는 시조시의 정통성을 이은 모범답안적 작품이라 할만했다. 언어의 조탁과 시조가 가진 자수율에 의한 운율의 획득 등에서 나무랄 데가 없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모범답안이 항용 그렇듯이 파격적인 창의성과 무한한 상상력에로 향한 아쉬움과 갈증이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장창영의 응모한 시조들은 수준이 모두 고른 편이었고, 무엇보다 시조의 정통적 틀을 벗어나려는 파격과 개성이 돋보였다. 현대시조시가 추구하는 바람직한 행로를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예사롭지 않은 행갈이 방법과 언어의 조탁에서 현대시조가 고시조와 왜 다른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창영의 시조를 가작으로 선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형수의 시들은 단아했다. 그 단아함은 언어의 절제를 통한 조사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응모한 시편들의 수준이 고르지 않은 것은 흠이었다. 박성필의 시는 화려한 시적 수사와 자유분방한 시적 상상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는 기성시인 누군가의 시에서 읽었던 분위기가 자꾸만 느껴졌다.

이주렴의 시는 도도한 흐름으로 이어지는 강한 개성을 가진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언어의 절제도 생각하는 것이 이 시인에게는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강’은 불교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불교적 사유를 시 속에 용해시킨 작품이다. 윤회와 인연 그리고 부처님을 기다리는 마음을 이만큼 승화시켜 놓은 것은 이주렴의 시적 역량이 일정한 수준이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면서 이 시인이 더욱 분발하기를 기대한다.

김 선 학(문학평론가·동국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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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매일신문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남문산역에서 / 손영희


기차는 아직도 이곳에 닿지 않았다 해묵은 선로만 시린 발을 끌고 와
창문을 기웃거리고
나는 짐처럼 놓여 있다
갈 곳 잃은 전화번호와 헐벗은 상념들
한 줌의 값싼 희망 주머니에 구겨 넣은 채
바람의 갈피 속에서
들썩이는 잠이여
나를 깨우는 건 언제나 냉혹한 시간
완강한 어둠을 덧문 밖에 밀쳐 놓아도
저만치 유배된 내일이
복병처럼
달려든다


* [시조 당선소감]

그 숲은 물기 없는 마른 스폰지 같았다. 조형의 나무들이 바람도 없이 흔들리고 빗물도 잘 스며들지 않던 푸석한 내 눈물샘. 언제부터였을까. 읽히지 않는 기억들 이 굳게 닫혀진 문 뒤에서 서성이고 발이 짧은 아버지는 읽다만 소설책들을 불사 르고 있었다.

타다만 글귀들이 내 의식 언저리에서 아우성치고 꼬인 물줄기는 풀릴 줄 몰랐다. 너무 늦은 나이에 혼신의 힘으로 붙잡으려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항상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는 나는 너무 열등한 자아에 시달렸다.

들썩이는 잠 속에 아버지는 늘 등만 보였다. 나의 오래된 미래 샹그리라(히말라야 에 있다고 전하는 이상향의 나라), 미지의 거처에 이제 발을 들여 놓으려한다. 늘 서툴러, 무릎에 피가 배일 때도 있겠지만 내 안의 상처들을 하나하나 끄집어 낼 때마다 꼬인 물줄기는 시원하게 뚫릴 것이다.

시조라는 정형의 틀 속에서 자유한 시정신을 넋두리가 아닌 진솔한 삶의 풍경으로 풀어놓고 싶다. 그 문을 손수 열어주신 매일신문사와 심사위원 선생님께 진심으 로 감사드린다.

늘 격려를 아끼지 않던 석필 문우들과 교수님, 화요회원들, 박종현 선생님께 감사 드린다. 나에게 글방을 지어주겠다고 약속한 남편과 연이 연선이에게 사랑을 보내 며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약력 △1955년 충북 청주 출생 △창신대 문예창작과 졸업 △경남문학 수필 신인 상


* [시조 심사평]

문학은 시대를 앞서가는 정신의 소산이다. 우리가 신춘문예에서 기성문단을 흔드 는 정서적 충격을 기대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런 가운데 ‘푸른 곰팡이’.‘ 남문산역에서’.‘못물을 보며’.‘어항 속의 바다’ 같은 작품들을 만나면 흐린 안경알을 닦지 않을 수 없다.

저마다 개성적인 시각으로 다양한 경험의 세계를 녹여낸 작품들을 앞에 놓고 전체 를 한눈에 다잡아 읽기도 하고, 개별 작품끼리 맞씨름을 붙여 보기도 했다. 윤채 영씨의 ‘못물을 보며’는 미묘한 정서의 흐름을 안정된 호흡으로 풀어내고 있으 나, 신인다운 패기가 부족한게 흠이다.

‘어항 속의 바다’를 쓴 이우식씨의 경우는 선이 굵고 새로움에 대한 의욕이 넘 치는 반면, 관념적 어휘에 이미지의 반전 효과가 희석된 느낌이다. 김경미씨는 ‘ 푸른 곰팡이’를 통해 강한 자의식과 점액질의 서정성을 보여준다. 자연스러운 가 락의 운용을 체현한다면 한층 깊고 푸른 인식의 세계에 가 닿을 것으로 본다.

고심 끝에 손영희씨의 ‘남문산역에서’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이 작품은 시상의 전개가 역동적이면서도 도입부의 신선한 감동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또한 그것 이 완강한 어둠을 밀치는 힘과 치열한 정신의 깊이를 동반하고 있다.

외면할 수 없는 분단 현실 속에서 눈부신 자성과 생존의 의미를 일깨워 가는 것이 다 . 어디든 미답의 세계는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시조의 새로운 길을 열어 가기를 당부한다.

박기섭(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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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농민신문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판전(版殿) 앞에서 / 손태원


어슬렁 뒷짐 지고 숲속 길로 접어든다
가다가 걸음 멈추고 가쁜 숨결 고르는 듯
병중작 칠십일과(病中作七十一果)여! 맥박소리 들린다.

흙마당 쓸다 남은 비질 자국 보이는 듯
새하얀 아가손이 쓰다 멈춘 낙서인 듯
다가온 계곡 물소리 문득 끊긴 저 정적.

꽃도 잎도 다 시들어 빈 대궁만 남은 가을
얼마나 깊었던가 잠겨버린 하늘 위로
동동 뜬 낙관이 하나 늦잠자리 앉아 있다.


* 판전(板殿) : 추사 김정희 선생이 칠십일세 와병중 임종 3일 전에 썼다고 전해오는 봉은사에 있는 마지막 현판 글씨

* 병중작 칠십일과(病中作七十一果) : 판전의 낙관 글씨


* [시조 당선소감]

당선 통보를 받고, 정말 꿈인 듯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당선 소감을 쓰면서도 혹시 꿈에서 깨어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당선 소감과 사진을 보냈느냐는 기자님의 확인전화가 오는 것을 보니 정녕 꿈은 아닌 것 같습니다.

먼저 소중한 등단의 기회를 마련해주신 농민신문 신춘문예 관계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스승이신 정완영 선생님과 박영식 선생님,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큰절을 올립니다.

신춘문예에 응모하려고 마음을 먹기는 했지만, 너무나 부족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마감 하루 전날까지 망설였는데, 원고를 빼앗아 대신 보내준 친구 K 시인도 잊지 못할 은인입니다. 그리고 못난 자식의 뜨거운 시심을 꺾지 않고 자연인으로 살게 해주신 돌아가신 부모님의 맑은 피가 흘러 더욱 행복합니다.

반백살, 늦은 나이에 얻은 영광인 만큼 ‘묵향 짙은 시, 시 향기 짙은 서예’에 더욱 정진하여 모든 분들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늘 보살펴주시고 기대해주시는 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손 태 원〈울산시 남구 신정동〉


* [시조 심사평]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김차순의 〈바늘쌈 보며〉, 장기숙의 〈꿈꾸는 침목〉, 손태원의 〈판전(板殿) 앞에서〉, 황성진의 〈칠판을 지우며〉 등 네 작품이었다.

이 가운데 〈바늘쌈 보며〉는 깨끗한 시상에 호감이 갔으나 시조의 형식에 많이 어긋나 있어 1차로 당선권에서 멀어졌고, 나머지 세작품이 끝까지 당선을 놓고 겨루게 되었다. 〈꿈꾸는 침목〉과 〈칠판을 지우며〉는 당선작으로 뽑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시를 다루는 솜씨가 능숙했다. 그러나 응모된 작품이 전체적으로 고르지 않은 것이 흠이었다.

이에 반해 〈판전 앞에서〉의 경우 손태원씨가 함께 응모한 〈운문사 하루〉〈토종에 대하여〉 역시 그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삼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완성도 면에서 뛰어났다. 이 가운데에서도 추사 김정희 선생이 71세인 임종 3일 전에 썼다는 서울 봉은사 현판 글씨를 소재로 한 당선작인 〈판전 앞에서〉의 명징한 이미지와 높은 서정성을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시인 탄생에 축하를 보내는 한편, 비록 당선은 되지 못했지만 장기숙씨와 황성진씨에게도 그 가능성에 격려를 보낸다.

박시교, 유재영(심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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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조선일보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봄의 계단 / 이송희


반쯤 열린 문틈에서 들어오는 햇살을 두꺼운 침묵으로도 밀어내지 못하고 푸석한 낯빛 하나로 거리를 나선다

반만 남은 노을이 감싸 안은 거리는 가슴까지 차 오른 꿈, 푸르게 출렁이고 그 속에 섞이지 못한 삼각 파도의 내가 있다

무심코 올려다 본 유년의 하늘은 골 패인 기억들만 촘촘이 찍어낸다 시간의 고삐를 풀어 얼마를 더 가야할까?

날카로운 바람이 붉은 알들을 쏟아내면 부스스 일어나는 어린 잎새 한 줄기 하늘가 꽃물을 토해낸 아침이 오고 있다


◆ [당선소감]“살아있는 삶의 언어 엮어낼 것”

12월의 어느 날, 거리를 가득 메운 수많은 발걸음들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추위에 떨며 싸늘하게 웃고 있는 가로수들, 낡은 콘크리트 벽면에 아무렇게나 그려진 낙서 자국들. 그 회색의 흔적을 따라 가끔씩 걷는 것은 나에게 크고 작은 위안이었다. 애써 찾으려 하지 않아도 늘 어떠한 의미가 되어 몽글몽글 부풀어 오르는 삶의 모습 속에서 때로는 박힌 못을 빼내고, 또 한 줌 빛을 발견했었다. 그러다가 두꺼워진 어둠 속에서 길을 잃어 헤맬 때면, 햇살이 올라올 즈음까지 기다렸다 부스스 일어나곤 했다.

이제는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빛줄기에 나를 꼿꼿이 세우고, 안개 낀 공간에서 살아 숨쉬는 삶의 언어들을 한 올 한 올 엮어내고 싶다. 미처 의미가 되지 못한 언어 조각들을 가슴으로 보듬고 싶다.

부족한 작품을 기꺼이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따뜻한 가르침으로 나에게 시조 창작의 문을 열어주신 이지엽 선생님과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켜봐주신 ‘우리시 문학 동인’ 에게도 감사드린다. 그리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아낌없는 격려를 해준 나의 가족들과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나무는 잎을 틔우고 열매를 맺을 때 가장 행복해 보인다. 시인은 가슴 속에 시(詩)를 키우며 향기롭게 뻗어나갈 때 비로소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것. 그 초록 희망으로 힘껏 내달리고 싶다. 또 다른 세계가 내게 문을 열 때까지…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으로 보답할 것이다. (이송희)

▲1976년 광주 출생 ▲2002년 월드컵 기념 시조 백일장 대상 ▲전남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재학중


◆ [심사평]‘인공 조미료’없는 그윽한 멋 우려내

올해 시조부문 당선작으로 이송희씨의 ‘봄의 계단’을 선정하였다. 흔히 시조는 맺고 푸는 시가형식이라고 말한다. “맺되 옹이를 지우고, 풀되 굽이치는 여울을 둔다”고 한다. 당선작은 그런 시조의 형식미학과 구문법을 오롯하게 갖추고 있다.

응모작 수준이 상향 평준화를 이루어 그 어느 해보다 각축이 치열했던 시조부문. 1차로 골라낸 ‘가을풍경’(이창호), ‘가을은 해탈을 꿈꾼다’(김경택), ‘가을 문턱에서’(김기철), 그리고 ‘봄의 계단’ 등 네 편을 놓고 당락을 가리게 되었다.

‘가을풍경'은 주제가 구체적으로 소화되지 않은 채 생경하게 겉돌고 있다. 소화불량의 주제는 결국 ‘백화점식 언어의 나열’과 우편엽서 같이 ‘화려한 풍광 묘사’에 치우치고 만 것이다. ‘가을은 해탈을 꿈꾼다’ 역시 상징과 은유가 때로는 겉돌며, 발상법이 기발하지만 그 재치가 경이로움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최근 문학작품 소재로 너무 많이 다루어 이제 식상(食傷)할 대로 식상해버린 특정 종교 주제를 다룬 점도 이 작품의 ‘간택’을 망설이게 하였다. ‘가을 문턱에서’는 완성도 높은 단아한 시조다. 그러나 ‘사유의 깊이가 따르지 않은 단순한 기교’에 의탁, 시적 긴장미를 연출해내지 못했다.

당선작 ‘봄의 계단’은 인공 조미료를 넣은 흔적이 없다. ‘관조의 총혜’를 읽을 수 있는 당선작은 조미료를 쓰지 않아 오히려 더 깊고 그윽한 맛을 우려낸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새로운 시조문맥을 일구어나갈 재목으로 성장하기 바란다. (윤금초·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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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동아일보신춘문예 시조당선작]

촉지도(觸地圖)를 읽다. / 유종인


휠체어 리프트가 선반처럼 올라간 뒤
역 계단 손잡이를 가만히 잡아본다
사마귀 그점자들이 철판 위에 돋아있다

사라진 시신경을 손 끝에 모은 사람들,
입동(立冬) 근처 허공 중엔 첫눈마저 들끓어서
사라진 하늘의 깊이를 맨얼굴로 읽고 있다

귀청이 찢어지듯 하행선 열차소리,
가슴 저 밑바닥에 깔려있는 기억의 레일
누군가 밟고 오려고 귓볼이 자꾸 붉어진다

나무는 죽을 때까지 땅 속을 더듬어가고
쉼없이 꺾이는 길을 허방처럼 담은 세상,
죄 앞에 눈 못 뜬 날을 철필(鐵筆)로나 적어 볼까

내안에 읽지 못한 요철(凹凸)덩어리 하나 있어
눈귀가 밝던 나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몸,
어머니 무덤마저도 통점(痛點)의 지도(地圖)였다.


* [당선소감]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시각표를 보았다. 가고자 하는 곳의 시간대를 보니 방금 전에 버스가 떠난 것을 알았다. 배차 간격만큼의 시간을 고스란히 기다려야 했다. 어디에다가도 쉽게 풀어버릴 수 없는 허허로운 시간이 정류장에 머물고 있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든 기다림이 그렇게 시작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먼 길을 가기에 앞서 내 앞에 고여 있는 시간의 물을 들여다보면 거기에 내 모습이 비춰지는 게 아닐까. 물 거울을 들여다보는 말없는 계절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거기 비친 잎새 무성하던 버즘나무는 갈퀴 머리를 하고 이즈음 제자리서 헤매는 미친 여인네 같다. 제 안에 품은 헤매임이 너무나 많은 가지의 길을 키웠던 것일까. 가을이 오기 전 그 가지들은 가뭇없이 베어져 파란 트럭의 짐칸 가득 실려 어디론가 실려갔다. 어쩌면 내 어지러운 모색이 누군가에게 번다(繁多)한 치장쯤으로 여겨질 때, 나는 그 어지러움 속에서 부드러운 칼 하나 뽑고 싶었다.

차창 밖으로 겨울빛이 빈 들녘에 쏟아 부어지고 있었다. 저 빛들은 다시 봄볕으로 바뀌고 뙤약볕이 되었다가 서늘해진 가을볕으로 멀어질 것이다. 그 멀어짐이 가까워지는 것임을 아는 순간, 겨울빛은 조금 눈물겨울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나에게서 멀어짐으로써 진정 나에게 가까워진다는 것을 나는 소외의 장르가 아닌 시조의 문맥(文脈) 속에 찾고 싶었다. 단순히 오래되고 낡은 것만이 아닌 새로움을 그 안에서 캐어낼 수는 없는 것일까. 광의(廣義)의 시에 있어서의 시조는 그 중핵(中核)임을 증거하게 해주신 심사위원님과 말없이 마음을 더하여 주신 많은 주위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시에 대한 외도(外道)로서가 아니라 시에 대한 본도(本道)로써 시조의 품격을 감히 생각해 본다. 미약함으로 떠나지만 뜨거움은 늘 가슴에 묻은 채 매진하라고 겨울 숲은 무수한 회초리들로 서 있다. 참 맑은 가난을 한 줌 가지고서 말이다.

유종인
△1968년 인천 출생 △1992년 인천전문대학 도서관학과 졸업 △1996년 계간 '문예중앙' 시부문 당선


* [심사평] 촉지도(觸地圖)를 읽다. / 이우걸(시조시인)

신춘문예작품들이 가져야 할 미덕은 무엇일까? 아니 우리는 신년호 혹은 그 근일 사이로 만나게 되는 작품들이 어떤 특징을 보여주길 바라고 있을까? 독자에 따라 그 주문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선자는 이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몇 가지 체크리스트를 가지고 작품을 대하곤 한다. 그 첫째는 젊은 시조이길 바란다. 두 번째로는 개성적인 시조이길 바란다. 세 번째로는 무난한 완제품보다는 흠이 보여도 가능성이 많은 작품을 휠씬 더 바란다.

많은 응모작 가운데 이런 관점에서 눈에 띈 작품들은 장기숙, 한경정, 김종길, 유종인 시인의 것이었다. 장기숙은 최근 우리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는 통일과 관련된 작품들을, 또는 젖은 농촌의 풍경을 균형 잡힌 어조로 노래했다. 한경정은 사소한 사물에도 새로운 발견을 하려는 성실한 노력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두 시인의 작품을 먼저 선외로 가려내었다. 장기숙의 경우 지나치게 안정되어 있고 작품의 폭이 좁다는 생각에서, 한경정의 경우 시어들이 다소 부정확하고 공소한 시구들이 많이 눈에 띈다는 이유였다. 이러한 지적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평가에서의 견해라고 얘기할 수 있다. 그 만큼 위 시인들의 장점 또한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김종길의 7편 응모작중 '붕어빵'과 유종인의 5편 응모작 중 '촉지도를 읽다'를 앞에 놓고 고심하였다. 김종길의 경우 다양한 소재를 다룬 모든 응모작품의 수준이 고를 뿐 아니라 특히 위의 작품은 대상을 철저히 묘사하면서 궁핍한 삶의 풍경을 적당한 거리에서 환기시켜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종길의 시조들이 강인한 개성을 독자들에게 각인 시키기엔 무언가가 아쉽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유종인의 '촉지도를 읽다'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그의 시조들은 호방하고 섬세하며 날카로웠다. 특히 당선작의 경우 그 소재가 특이했다. 그러나 대상에 대한 인식이 피상적으로 끝났다면 흔히 신춘문예작품에서 등장하는 소재주의의 혐의를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섯째 수가 일구어낸 반성적 사유는 이 시조의 시적 성취에 크게 기여하였다. 대성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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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경향신문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꿈꾸는 門 / 선안영


어둡기 전에 불을 켜야 조금 덜 쓸쓸하다는
아버지의 말씀 따라 촛불을 밝힌다.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
편지 속에 추운 문자들
흔들리는 불꽃 따라 바람벽이 출렁이고
마른 잎새의 귀를 달고… 웃고 있던… 눈사람
幼年이 긴 꼬리를 감고
소리 없이 굴러온다
우리 잠시 지나왔던 길들 다시 포개져
아버지, 지치도록 걸어온 불의 몸을
저녁 내 그림자가 껴안고
까무룩 졸고 있다.
뜨거운 세상 향해 심지를 밀어 올리는
그 열림과 닫힘의 門을 지나, 침묵도 지나
헐렁한 바늘귀를 건너
눈꽃들이 피어난다.


*[시조 당선소감]이 환한 꽃자리가 부끄럽습니다

나는 내 울음소리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언제부터 속으로 우는 법을 깨달았을까요. 크게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너무 일찍 늙은 나에게 오늘도 청각장애 아버지의 편지가 왔습니다. 그 쓸쓸한 마음을 다 따라가지 못하는 글들이 세상을 건너게 했습니다. 징검다리 건너듯 또박또박 걷게 했습니다. 빗나가지 못하게 나를 붙들었습니다. 아니, 나를 겁먹게 했고 자신 안에 갇혀 허약하게 살게 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가고자 했던 길로 한번도 가지 못하고 캄캄해진 몸과 마음을 가지고 일몰로 가고 있을 때 소식이 빛으로 왔습니다. 얼마나 낯설었는지… 빛에 버려진 필름처럼 며칠동안 하얗게 아무 기억이 없었습니다.
이 환한 꽃자리가 부끄럽습니다. 내게 어울리지 않은 자리이며 욕심 내지 않았던 자리입니다. 그저 끝모를 사다리를 오르는 것처럼 초록잎으로 피고 지는 날들이 행복했습니다. 한 잎의 초록잎으로 다시 내려설 수만 있다면 내려서고 싶습니다. 꽃을 떨구고서, 나를 지우고서, 열매를 매달아 키우는 일. 잘 여문 씨앗 한 알 남기는 일을 내가 해낼 수 있을지… 무척 떨리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고, 간절히 매달리고 싶은 일이 있어 가슴 설렙니다.
내 삶의 아픈 뼈마디 사이, 말랑한 연골이 차오르는 활력과 기쁨을 주신 경향신문사와 심사위원님께 깊은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말없이 곁에서 지켜봐 준 가족들과 문우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시조 심사평]아주 능숙한 솜씨로 일상 그려

거듭된 토의 끝에 최종심에 올린 작품은 김옥희의 ‘실상사에서 만난다’, 임정집의 ‘판화 작업’, 장기숙의 ‘두 여중생의 죽음, 그 뒤’, 손영희의 ‘여름, 동강’, 선안영의 ‘꿈꾸는 문(門)’ 등 다섯 편이었다.
이중 ‘실상사에서 만난다’는 시는 엮어가는 능숙한 솜씨에 비해 적절한 시어의 선택이 따르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고, ‘판화 작업’은 새로운 시각과 당찬 목소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갈무리 능력이 못미쳤다. 또 시사문제를 다룬 ‘두 여중생의 죽음, 그 뒤’는 의욕이 너무 앞서서 직설적이고 생경한 표현들이 군데군데 드러난 것이 결정적인 흠으로 지적되었다. 마지막까지 거론되었던 ‘여름, 동강’은 첫 수 종장 결구법을 놓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연시조라 할지라도 한 수 한 수의 결구(結句)는 바로 시조의 기본 보법이란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꿈꾸는 문’은 화자만의 이야기를 시로 엮어가는 데 아주 능숙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었다. 평범한 일상 또는 추억이 시로서 다시 태어났을 때 그 아름다움이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이미 터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한 믿음을 뒷받침해 준 것은 함께 투고한 작품 ‘SELECTION’ 연작이었다. 연작 여섯 편 중에서 한 편의 단수만을 당선작으로 뽑아도 결코 작품으로서 손색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아주 뛰어났다. 당선작 ‘꿈꾸는 문’으로 2003년 새해의 밝은 문을 연 선안영씨에게 뜨거운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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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부산일보신춘문예 시조당선작]

노을 / 반영호



피 토하며 꺼져 가는
운명을 보라.

애절함이 분노처럼 끓어 넘치는
차라리 황홀하고도
아름다운
장엄한 이별
저토록
처절한 아픔을 어이하리
저토록
처절한 사랑을 어이하리

해질 녘
붉은 물결에 꽃 그늘로 지는 바다.



* [시조 당선소감]
불혹의 마루에서 늠름하게

당선 소식을 접하고 아버님과 장인의 산소를 찾았다. 남에게 터놓고 기쁨을 전하기가,오히려 멋쩍고 또한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생전에 자상하시던 두 분을 뵈오니 들뜬 마음이 다소 가라앉는다. 한겨울인데도 묘소 앞 갈대들은 흐드러지게 피어서 다투어 나의 이 벅찬 기쁨을 축하해주고 있다. 한창 꽃피울 때,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다가 다들 시들어 말라비틀어진 뒤,죽어서도 죽지 않고 맞아주는 갈대. 돌아가신 후에도 기꺼이 따뜻이 반겨주시는 두 어른. 난 그 앞에서 울다가 웃다가 소리치다가,이대로 돌이 되어 산이 되어를 연발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황금기가 불혹이라 했다. 내 나이도 어느덧 꽉 찬 불혹의 서산마루에 닿고 있다. 해마다 이맘 때만 되면 좌절의 눈물로 원고지를 불살랐었던 암울한 기억들.

그래도 가슴에서 용솟음치는 뭉클한 그 무엇 때문에 언어와 싸웠던 불멸의 하얀 밤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었으리라. 시를 쓴답시고 어설픈 객기에 들뜬 마음으로 산과 강을 누볐었다. 정녕코 샘물처럼 맑은 영롱한 사리 같은 한 줄 언어를 줍기 위하여….

그동안 옆에서 용기를 주셨던 반숙자 선생님,증재록 선생님과 문우 여러분과 기쁨을 나누고 싶고,말없이 묵묵하게 지켜보며 뒷바라지를 해준 아내와 아들 국모에게 영광을 돌린다. 또한 졸작을 선해주신 장순하 최승범 두 심사위원님과 부산일보에 감사드린다.

不自屈不自高. 서산대사의 말이다. 스스로 비굴하지도 말고,스스로 교만하지도 말라는 뜻일 게다. 불혹의 마루에 늠름하게 떳떳이 서서 문학의 길을 가고 싶다. 결코 교만하지 않으며….

◇약력:55년 충북 음성 출생. 96년 '문예한국' 시부문 신인상. 도서출판 대광 대표.


* [시조 심사평]
자유시적 수법 시조 영역 넓혀

응모 편수가 예년에 비해 30%쯤 증가했다. 그새 꾸준히 전개해 온 시조 보급 운동이 열매를 맺어 가는 증거로 경사스러운 일이다.

근래에는 시조 정형에 아주 어긋나는 작품,단순한 글자 맞추기에 급급한 작품,고시조 같은 공소한 관념적 작품들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 대신에 생경한 언어들을 그럴싸하게 꿰맞추어 이미지에 통일성과 명징성을 잃어서 결국 무엇을 표현하려 한 것인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작품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일차적으로 이복순의 '겨울 산',정양숙의 '11월의 나무',박홍재의 '새벽 시장',반영호의 '노을' 등 네 편이 뽑혔다. 모두 수준작으로 수년 전만 해도 당선권에 들 만한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거의가 근래 당선작들의 경향에 따라가는 듯한 인상이 깊었다. 다소 아쉬운 구석이 있더라도 자기만의 목소리를 우리는 기대한다.

그 중에서 반영호의 '노을'은 해설적 형상화적 일반적 시조 작법을 완전히 배제하고 순수한 이미지만으로 해변의 저녁노을을 표현했다. 중장의 사설도 퍽 간결하게 처리되어 부담스럽지가 않다.

이런 자유시적 수법이 시조의 표현 영토를 넓히는 데 일조가 되리라고 기대하면서도 시조는 정형만이 아닌 시조 특유의 분위기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맛과 멋이 유지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함께 생각해 볼 대목이기도 하다.
(시조시인 장순하·최승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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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대한매일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산에들다 / 이안빈


세월 밖 먹 울음을
안으로 되 재우며
가슴속 묻어둔 불씨
봄 풀처럼 돋아나와
돌부처 앉은 자리에
꽃들을 피워낸다

일주문 주련글씨
일체가 없는 것이라고
말씀이 귀(耳)로 남아
생각은 되돌아 온다
눈물도 영글다 보면
사리되어 굳는가

한 생을 종이 접듯
세월을 비워두고 살라지만
뜨신 피 무지개 되어
빈 하늘에 부표로 뜬다
마음이 산에 가 닿으면
그리움도 헹궈질 것을


* [당선소감]

세상의 색깔은 빛과 어둠이다.나는 지금 깊은 터널의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한 걸음씩 옮기고 있다.

대학 초년시절 선배와 동료들이 버팀목이 되어 주었고 이제는 육군의 신병으로서 겪어 나가는 값진 경험들이 빛을 향해 나가는 징검다리가 되고 있다.

언젠가는 빛과 어둠이 둘이 아닌 하나로 어우러져 이글거리는 태양으로 온 천하를 환히 비추는 그런 날이 있을 터이다.

수없이 많은 고뇌와 삶에 대한 물음들이,거대한 짐승의 껍질 같은 소각로에다 나의 창작노트와 수첩을 연기로 날려버린 이후에도 계속 자라나고 있다.

나에게 가장 큰 스승은 아버지와 어머니셨다.오늘의 이 기쁨과 영광을 두 분께 송두리째 안겨드리고 싶다.

시인이 될 때 등 두드리며 문을 열어주신 설악산의 조오현 은사님과 시조시인으로 이끌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머지않은 날에 해가 되고,달이 되어 환한 모습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약력 81년 서울생
원광대 문창과 2년(휴학중)
육군 현역 복무중


* [심사평]

올해 시조 부문 당선작은 이안빈씨의 ‘산에 들다’로 결정하였다.예년에 비해 작품 응모 편수가 엄청 불어났고,작품 수준 역시 그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키가 훌쩍 커버린 것 같았다.최종심에 오른 작품들은 어느 것을 골라도 예년의 당선작 수준을 웃돌 만큼 남다른 개성과 성취를 보여주고 있었다.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위철)과 ‘부석사 무량수전’(전진환)은 소재의 신선도가 떨어지는 것이었다.유·불·선(儒·佛·仙)을 숭상하는 우리 정서상 불교사상은 높은 가치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지만,어느 작가의 소설 ‘부석사’이후 근자에 불교 소재가 문학작품 주제로 너무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 두 작품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그러므로 ‘참신한 맛’이 덜했다.

‘쐐기풀 옷 한 벌조차’(노영임)는 작품의 짜임새는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연초에 신문지상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신춘문예의 특성상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보다 밝고 진취적 메시지가 돋보이는 것이다.‘우담화’(정평림)는 이른바 옴니버스시조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옴니버스시조(혼작 연형시조)는 내공을 많이 쌓아야 하는 어려움이 뒤따른다.특히 사설시조의 구성 요건인 서사구조,복선(伏線),걸쭉한 입담,웅장한 스케일,극적 줄거리를 엮어내는 가락,갈등구조,풍자정신,말 엮음,휴지(休止),종장의 대반전 효과 등을 고루 갖추어야 하는데 그만 그것을 놓치고 말았다.당선작 ‘산에 들다’는 범상한 소재를 범상하지 않게 요리한 시조솜씨가 색다른 특색으로 다가왔다.사물에 대한 천착과,사물을 바라보는 진지한 태도가 이 신인의 매력으로 보였다.

심사위원 : 이근배·윤금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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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광주매일신춘문예 시조당선작]-가작

사랑니
 
이경숙

 
겉으로 솟지 않는 이름까지 알 수 있다면…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보이는 입안 저쪽
무언가 캄캄한 뿌리를 건드리고 다닌다

판독기에 X-ray 환하게 내걸린다
간단히 흑백으로 드러나는 뿌리 끝,
무엇을 잡으려는지 암팡지게 휘어 있다

한시도 쉬지 않고 들쑤신 게 너였구나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라는
밑둥치 아득한 데서 외침이 솟구친다

뺨에 멍들이고 두두룩히 부어오른다
여러 날 애먹인 후 빠져 나간 사랑니
그렇다, 안타까울수록 놓는 순간이 아픈 것 


* [시조 입상소감] - 이경숙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것들을 담고 있는 동안은 무거우면서도 행복하다. 쭈뼛쭈뼛하던 그것들이 가끔 글로 내게 올 때는 더 그렇다.
시조를 제대로 알고 읽는 것과 모르고 읽는 것의 차이가 있겠다 싶어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시조에 대해 이전에 가지고 있던 편견이나 선입견, 또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창작에 몰두하는 요즘의 몇몇 시조시인의 작품들을 접하는 과정에서였다. 그것은 장르를 떠나 내게 기쁨에 이어 힘으로 왔다. 나도 누군가에게로 가서 힘이 되는 그런 시를 쓰고 싶다.
학교의 선생님은 내가 이르고자 하는 곳의 선명한 지도를 가진 분들이었다. 그분들이 보내는 응원과 무언의 질책까지 늘 감사하다.
이제 옳은 것이나 그른 것이나 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볼 수 있게 솔직한 거울 하나를 내게 주신 심사위원과 광주매일에 고맙다.
힘들 때, 너무 멀어서 따뜻한 손으로 등을 두드려 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내 착한 가족 모두에게 어떤 자리에서도 최선을 다할 것임을 이 자리 빌어 약속한다.

<약력>
1967년 철원 출생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4년


* [시조심사평] - 송선영(시조시인)
 
먼저 신춘문예에 시조부문을 마련해 준 광주매일에 시조인의 한 사람으로써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광주에서의 신춘문예 시조가 20여년만에 부활되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앞으로 우리 시조문학의 중흥에 크게 기여하리라 생각한다.
이번이 첫회이니 만큼 응모량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적지 않은 작품량을 보였다. 그것도 광주지역에 편재되지 않고 전국 각 지역에서 고루 응모되었으며, 일부 응모자를 제외하면 수준 편차가 별로 크지 않았다.
응모자 중에 박형민(광주), 고명성(합천), 김옥희(진주), 황성진(태안), 박정호(부천), 배덕임(광주), 서영희(광주), 이경숙(광주) 등의 작품이 관심을 끌었고, 그 중에서 서영희씨와 이경숙씨의 작품이 마지막까지 남아 겨뤘다.
서영희씨는 좋은 시조를 쓸 수 있는 능력이 엿보였으나 종장처리의 어긋남, 동일시어의 반복이 흠이었다. 이경숙씨의 작품들은 고루 안정감을 보여 주었다. 그 중에서도 '사랑니'가 눈길을 끌었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사랑니라는 특별할 것도 없는 사소한 대상을 붙들고 파고들어 생의 깊이를 보여준 그 역량이 믿음을 주었다. 다만 첫째수와 둘째수 종장 첫구의 막연한 처리가 선자로서는 아쉬움이 남고, 나머지 작품들의 경우 신인에게 요구되는 시도성이나 참신성이 다소 미흡하게 느껴져 섭섭하지만 가작으로 올린다. 입선을 축하하며 계속 정진하기를 바란다.
끝으로 동일 장르로 이미 데뷔한 이는 신문사의 방침에 따라 심사에서 제외되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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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경남신문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눈길에서 / 이재호

쇠죽연기 서슬 퍼런 우윳빛 커튼 너머
잔설이 누더기 되어 걸어가는 산 마을
동그란
하늘 내려와
자갈밭은 은하 되고

얼면서 크는 나목 노란 햇살 새끼치자
비루먹은 거랑가 얼음 칼만 번득인다
작은 새
서툰 노저어
탱자울 넘나들고

타오르는 불면덩이 이엉으로 엮고 엮어
하얀 밤 눈사람이 끼적이며 부른 이름
오늘은
싸락눈 되어
새가슴 파고든다.


* [시조 당선소감]
눈밭에 발자국 찍어가듯 시 쓸 터 - 이재호(경북 영주시 휴천2동 현대아파트 110동 1206호)

밤을 낮 삼아 기적을 울리며 설원을 달리다 돌아온 아침 나절, 멀리서 꿈
결같이 들려오는 당선소식에 동지의 햇살이 내 좁은 베란다에서 연산홍을
피운다.

신춘문예 당선!! 이런 건 문창출신이나 천부적 소질이 있는 분들의 전유
물로 여겼는데 나같이 살며 즐기는 뜰에도 찾아왔으니...

정말 꿈같은 소식에 너무 기뻐 거실에 들어온 햇살처럼 싱글거리며 설거
지하는 아내를 불러 당선작품을 열어놓고 바보처럼 자랑도 하다가 늦깎이
로 들어서는 길이지만 이젠 졸작의 제목처럼 눈길을 걷고 싶다.
아무도 걷지 않은, 바람만 스쳐간 눈밭에 발자국을 찍어가듯 시를 쓰리
라.

나를 지켜보는, 나를 아는 분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는 그런 걸음으로 걷
다가 눈밭이 너무 아름다워 초라한 내 자국이 부끄러울 땐 그 자리에 서서
쪽빛하늘 찍어 바람의 밀어를 그리리라.

이런 좋은 기회를 마련해주신 경남신문 여러분들과 어눌하고 투박한 글
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하면서, 이 영광과 기쁨을
쓸 수 있는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 먼저 돌리며 부족해도 묵묵히 지켜 봐준
사랑하는 아내와 은미, 성호, 인호, 그리고 구곡시문학의 박성철교수님과
동인들, 또 나를 아는 모든 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 [시조 심사평] 결 바른 새로운 가락 시적 감수성 살려

말하자면 작품이란 하나의 물건이다. 되어 있는 상태가 곧 물건이라면 사
람도 지구도 우주 전체도 크고 작은 물건이며 심지어는 사계절과 같은 기
의 일도 물건이다.

문제는 그것이 어떠한 물건이냐에 따라 그 값이 매겨지게 돼있다.
되어 있는 상태가 바로 가치성 이어서 그러하다.
경남신문 신문문예에 응모된 모든 시도 또한 물건들이었으므로 두 심사위
원은 두루 신중히 살펴봤다.

참으로 그럴듯 하거나 남다른 상태 하나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 거 썩 괜찮은, 그야말로 물건다운 것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그것이 다름 어닌 당선작 「눈길에서」다.

두 심사위원이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된 합의점은 천부적인 시적 감수성을
결 바르게 선명히 처리해 낸, 뛰어난 표현 능력이라는 점에서다.
타고난 시적 재능, 여기에다 솜씨 기르기라는 충분한 과정이 없고서는 이
처럼 괄목할 언어의 물건을 성취하기 어려웠으리라.

따라서 「눈길에서」에 구현된 3수의 율격처리는 단순한 겨울 산 마을의
풍경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서정적 자아의 내면 정황이다.
아니게 아니라 으스스한 냉소성이 깔린 3장 연형이며, 결이 바른 새로운
가락이다.

『소죽 연기 서슬 퍼런』에서 부터 『잔설이 누더기 되어 걸어가는 산 마
을』 이라든가, 『얼면서 크는 나목』이라든가, 『비루먹은 거랑가 얼음 칼
만 번득인다』는 구와 장을 통해서 보다 확연히 감지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정황들이 걸맞는 분위기를 동시에 자아내어 3수 연형이 되
었다.

이는 오늘날 우리 현실중에서도 으스스한 겨울 산골마을의 현실을 서정
적 자아의 내면 풍경으로 가시화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겐 가락의 판화로 온다.

놓치기 아까운 두 사람의 물건이 더 있었다.
「연을 날리며」와 「연적을 비우며」였다. 둘다 함께 곁들여 보낸 2편씩
들과 연계시켜 봤을 때 차이가 남으로써 아직은 아니고 좀더 절차탁마해야
한다는 판단이 나와 도로 내려 놓았다.
다른 기회를 위해 분발하기를.

■심사위원=서벌(한국시조시인협회장·시조시인) 김남환(한국문인협회 시
조분과회장·시조시인)

 


 [2004 조선일보 신춘문예당선작/시조] 겨울, 연포에서 ----- 황성진


이 겨울 연포에서 파도 한 뿌리 캐어 본다
뜨겁던 여름 사내 온 몸으로 심은 그것
남겨진 잔물결 속에 밀려왔다 밀려가고

저 파도 뿌리는 늘 흰색 아니면 청색이다
사납게 일어나서 시퍼렇게 울다가도
가끔씩 잇몸 드러내 웃고 있는 것 보면.

어느 누가 있어 쓰라린 이 상처 위에
간간한 바람 주고 쓴 포말 보내었나
시퍼런 해안선마다 눈물자국 번득인다


[시조/심사평] 순간적 충격 전하는 말부림 빼어나

아직도 의고체(擬古體) 시조, 상투적 언어를 구사한 시조가 응모작품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다.

신춘문예가 프로정신이 투철한 신인 발굴 무대라면 복고주의를 떨쳐버리지 못한 고풍스런 발상이나, 이제 식상할 대로 식상한 예사말의 늪을 훌쩍 헤쳐나오지 못한 작품은 의당 논의의 대상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술의 크나큰 적이랄 수 있는 도식성을 멋지게 극복한 당선작 ‘겨울, 연포에서’(황성진)를 만난 것은 경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이해가 넉넉한 당선작은 감각적 ‘말부림’ 능력이 탁월하다.

당선작과 호각을 이룬 ‘풀섶길’(김형태)과 ‘고등어의 눈’(이애자), ‘구절리 시편(詩篇)’(신희창)을 주의깊게 살폈다. 이 세 작품은 어디 한 군데 흠 잡을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우며 흡인력이 넘친다. 그러나 선경(先景) 후정(後情)의 원리·묘사와 진술의 원리를 잘 녹여내지 못하고 있다.

이미지를 풀어낸 다음 그 위에 담론(시적 화자의 내면세계)을 실어야 하는데 그것을 그만 빠뜨리고 만 것이다. ‘구절리 시편’은 이른바 풍자시조의 범주에 든다. 풍자시조가 설 자리가 어디인가. 시는 현실을 끌어안되 현실을 날 것으로 드러내지 않고, 그것을 발효시켜 새로운 그 무엇으로 환치시켜야 하는 것이다. ‘구절리…’는 우리가 너무 많이 들어 익숙한 세상 현실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데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

당선작은 시조 특유의 순간적 임팩트(충격)를 강렬하게 전달한다.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뜨거운 시인으로 성장하기 바란다.

(윤금초·시조시인)


[시조/당선소감] 억센 손에 멍든채 누운 사연들…

소중히 캐내 향기롭게 가꾸리

나는 이곳 태안에서 나서 태안에서 살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3면이 바다인 반도의 형태로 흔히 태안반도라 칭하는 이곳, 이 고향이 좋아 불혹 넘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어떤 이는 해안선의 길이가 천 리가 넘는다 하고, 또 어떤 이는 리아스식 해안의 전형이라고도 한다. 또한 만리포, 천리포, 몽산포 등 끝없는 포구와 갯벌이 천만 겁이 넘도록 예 그대로 철썩이고 있다.

이름하여 서해라 불리는, 그 끝없는 부침의 끄트머리 어디쯤 연포(戀浦)가 있다. 여름, 억센 장정의 손에 멍든 채 누운 시퍼런 사연이 있다.

이제 그 향기로운 사연을 캐낼 때가 된 모양이다. 이 땅 가장 깊은 곳, 조선일보의 바다에 우리 시란 파도를 캐낼 때가 된 것이다. 알맞게 간 맞추고, 소중히 말려서, 늘 먹음직한 해초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언제나 마음을 써주시는 부모님과 가족들, 나의 꽃다이 지윤숙 여사와 연이, 원이 그리고 우리 태안여고 학생 및 모든 선생님께 이 영광을 돌린다. 또한 조선일보사와 부족한 글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큰절을 올린다.

■황성진

61년 충남 태안 출생
청주사범대 국어교육학과 졸업
태안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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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부산일보 신춘문예]시조 당선작-풀꽃 연서 / 최기남


비 그친 언덕 너머 달려가는 구름 위에
마음 먼저 실어보내고 무얼 그리 적고 있나
떠나지 못하는 것들 엎드려 눈이 붉다.

이따금 목 메이는 쓰르라미 울음소리
긴 편지 읽어주다 그 목소리 젖은 뜻을
이제야 깨달았는지 곱게 쓰는 풀꽃 戀書(연서).

한 발짝 내려앉으면 그렇게도 편안할까
들숨날숨 깊어지는 가을녘 풀숲에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시간을 건너간다.


[2004 신춘문예]시조 심사평

상상·사유의 폭 넓어

360여편의 응모작을 놓고 심사에 임하였다. 지난해보다 18% 정도 늘었다고 한다. 양적으로 늘어난 것이 되겠으나,질적으로 눈에 들게 뛰어난 작품을 찾아 볼 수는 없었다. 거의가 형식만을 위주로 한 손끝재주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형식을 좇은 것만으로 시조랄 수는 없다. 말하자면,시조의 자수율만을 묵수(墨守)한다 하여 시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조 형식은 다식(茶食)을 박아내는 다식판 같은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치열한 시정신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기계적으로 자수만을 짜맞춘 말놀음 같은 것을 시조랄 수는 없다. 법고창신의 경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 점이 아쉬웠다.

응모작 중 1차적으로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김춘기 서영우 심석정 이탄솔 장찬영 전진환 조명숙 최기남 홍경화의 작품들이었다. 되풀이하여 살핀 결과 최후까지 남게 된 것은 서영우의 '연을 날리며'와 최기남의 '풀꽃 연서'였다.

두 편 중 '풀꽃 연서'를 당선작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연을 날리며'는 노성한 시인의 얼굴이 겹쳐 드는 것이 하나의 흠이었다. 신인으로서의 기대를 '풀꽃 연서'에 두기로 하였다. 연작의 짜임새나 시행의 함축성,그리고 상상과 사유의 폭에도 호감이 갔다. 최기남의 앞날을 빌어 마지않는다. 시조시인 정완영·최승범


[2004 신춘문예]시조 당선소감 /최기남/
어머니께 값진 선물

오후 내내 어머님을 생각하며 눈시울이 젖어 있었는데,뜻밖에 반가운 당선 소식이 달려와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뇌졸중으로 병원에 누워 계신 어머님께 무엇보다 값진 새해 선물이 될 것 같아 무척 기쁘다.

길 위에서 길을 찾느라 여기저기 헤매고 다닐 때,답답함을 견디기 위하여 주머니 속에 깊이 찔러 넣었던 손을 슬그머니 꺼내 펜을 들었다. 들판 한가운데 미루나무 줄지어 서 있는 냇둑길을 걸어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하굣길 흐르는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냇가에 앉아서 자연과 눈빛 맞추며 은밀히 주고받았던 말들,회유하는 은어 떼처럼 내 사유의 푸른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왔다. 아름다운 우리 가락이 살아있는 정형시에 퍼담아 보고 싶었다.

부족한 점이 많은 작품을 선뜻 뽑아주신 심사위원들님께 머리 숙여 감사 드린다. 울산시인학교 선생님과 회원님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1953년 경남 고성 출생 △2002년 '한밭시조 백일장'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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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동아일보 신춘문예]시조 당선작-왕피천, 가을 / 김미정


돌아오는 길은 되레 멀고도 낯설었다
북위 삼십 칠도, 이정표 하나 없고
피멍든 망막 너머로 구절초 곱게 지는데.

귀익은 사투리에 팔다리가 풀리면
단풍보다 곱게 와서 산통은 기다리고
한 세상 헤매던 꿈이 붉게붉게 고였다.

숨겨 온 아픔들은 뜯겨나간 은빛 비늘,
먼 바다를 풀어서 목숨마저 풀어서
물살을 차고 오르는 연어들의 옥쇄(玉碎)행렬.

건 듯 부는 바람에도 산 하나가 사라지듯
끝없이 저를 비우는 강물과 가을사이
달빛에 길 하나 건져 온몸으로 감는다.

*왕피천 : 연어가 회귀하는 하천으로는 위도 상 최남단에 있는 하천(울진군 서면)


[2004년 동아일보 시조 심사평] 이우걸(시조시인)

좋은 나무 한 그루를 만나고 싶었다. 깊은 인식의 뿌리가 있는, 건강한 주제의 줄기(기둥)가 있는, 아름다운 수사의 잎이 있는, 새로운 수종의 나무를 만나고 싶었다.

날을 바꾸어 가며 응모작을 읽다가 김영완의 「나비의 꿈」, 김경태의 「그때, 항구는」, 조성문의 「공단의 쑥부쟁이」, 김미정의 「왕피천, 가을」을 가려내었다. 그리고 다시 살펴보았다. 김영완의 「나비의 꿈」은 잘 정돈된 작품이지만 독자가 향유할 수 있는 상상력의 공간이 지나치게 좁다는 느낌이 들었다. 김경태의 작품은 이미지 구사 능력이 돋보였지만 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가장 늦게까지 남아서 선자를 망설이게 한 것은 조성문의 「공단의 쑥부쟁이」와 김미정의 「왕피천, 가을」이었다. 처음 읽을 때는 조성문의 작품이 두드러져 보였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조명도 시의 적절하고 선명한 이미지에도 호감이 갔다. 그러나 반복해 읽으면서 어떤 답답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목이 긴 여인」, 「헬쑥한 여인」, 「파리한 낮달」등의 수식어구 혹은 수식어의 기계적 배치와 다소의 분장술이 그 원인이라 생각했다. 그에 비해 김미정의 작품들은 응모작 전편의 수준이 고르다는 점에서 우선 신뢰가 갔다. 특히 「왕피천, 가을」은 연어들의 모성회귀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도 예사롭지 않은 수사력으로 시조를 읽는 재미를 풍요롭게 선사해주었다. 고향을 잃어버린 현대인에게 이런 시인의 작은 외침도 소중한 것이 아닐까? 비록 새로운 수종은 아니지만 나는 이 나무의 발견을 축복으로 생각했다. 건필을 빈다.


[2004년 신춘문예 당선소감]

첫 아이를 낳았을 때다.

10시간이 넘는 진통으로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가까스로 아이를 순산하고 조금씩 몸을 추스르고 있는데, 예기치 못한 많은 양의 下血로 인해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져들면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듯한 묘한 기분을 느꼈다.
다음 순간, 좀 전의 우렁찬 아이 울음소리가 다시 귓전을 울리면서 이상한 기운이 손끝으로 전해지며 순식간에 전신을 감싸고,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차가운 몸을 점점 따뜻이 데워주었다.
그 후로도 다시 두 아이를 더 낳을 수 있었던 용기는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
아무런 계산도 없이 다 줄 수 있는 사랑을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자식에 대한 어미의 사랑이라고 감히 말 할 수 있다.

연어는 산란을 위해 母川으로 回歸한다.
돌아오는 길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음은 미루어 짐작된다.
진정한 용기가 필요한 사랑의 실천 아닐까!
오늘은 첫 아이가 대학에서 논술 시험이 있는 날이어서 새벽에 서울 행 기차를 탔다.
기차가 막 종착역에 이른다는 안내 방송과 함께 울리는 전화벨소리… 그리고 당선 통지!
마치 감독이 미리 장치해둔 짧은 광고필름이 돌아가는 듯, 거짓말 같은 감동이 전화기를 통해 내게서 아이에게로 잔잔히 전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바라는 게 있다면, 아이의 기억 속에 언제나 노력하는 엄마의 모습으로 남고 싶다.
재주가 뛰어나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고 한결같은 모습으로 고민하는…
기왕에 들어선 이 길을, 차마 돌아서지 못하는 연어처럼 진정한 용기로 나아가려 한다.

부족한 작품을 選해주신 심사위원님께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때로는 날카롭게 또한 인자하게 가르침을 주신 민병도 선생님께 감사드리고 서로를 격려하며 부족함을 채워 가는 한결 시조 문우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끝으로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이 나보다 더 좋아했음을 밝혀두고 싶다.

김미정
△1961년 경북 영천 출생 △1984년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국문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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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매일신문 시조 당선작] 까치밥 / 이원천


심야버스 마지막 달빛마저 끌고 간 뒤
싸늘한 밤에 기대 허기의 뼈를 만져본다
이면로 달리지 못한 꿈도 끙, 돌아눕고

갈 곳도 오랄 곳도 어디 없는 지도 속을
둥둥 떠 부표처럼 깜빡깜빡 헤매는 밤
눈 소식 아득도 하다 하늘 저도 빈 몸이다

허리 굽혀 누군가 흩어진 꿈 쓸고 가는
가파른 언덕배기 붉게 걸린 가로등
세상 저 귀퉁이마다 까치밥은 남아 있다

나머지 생 내걸까 얼음장 어둠 속에
얼얼하게 달궈낸 단내 나는 목숨이여
깍깍깍 쪼아대는 부리 절망마저 밥이다


[심사평-시적 얼개 속에 잘 짜인 생명의지]

번잡한 세상 속에 시는 늘 떠다닌다. 눈부신 감성이 눈부신 시를, 활달한 상상력이 활달한 시를 만난다. 우리가 신인들한테서 기대하는 바도 바로 이러한 시가 던지는 새로움의 파장이다.

이교상씨의 '꽃의 내부'와 김경미씨의 '구석'이 미묘한 정신의 풍경을 그려낸다면, 이분순씨의'아파트, 한낮'과 김정숙씨의 '병실 풍경'은 생활 주변의 체험적 상황을 담고 있다. 작품의 곳곳에 번득이는 표현들이 눈길을 끌었으나, 완성도 측면에서 좀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고 본다. 황성진씨의 '백야, 옛집에 들어'와 배인숙씨의 '이명 앓는 지리산 자락'은 자성의 시각으로 역사 인물에 다가가고 있지만, 대상에 대한 나름의 해석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마지막까지 선자의 손에 남은 두 편은 현실 감각이 단연 돋보인다. 이태린씨의 '녹슨 배'가 가지는 서사 구조의 치열함은 쉬 떨치기 어려울 만큼 소중한 시적 자양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거듭해 읽는 가운데 어딘가 설익은 채 떠도는 이미지를 극복하지 못한 게 흠이다.

당선의 영예를 안은 이원천씨의 '까치밥'은 '심야버스'나 '이면로' 등이 상징하는 도시적 삶의 진정성을 감동적으로 묘파한 작품이다. 부유하는 존재의 허기와 '절망마저 밥'이 되는 강인한 생명의지가 잘 짜인 시적 얼개 속에 밀도를 더해 준다. '세상 저 귀퉁이마다' 남아 있는 '까치밥'은 이제 새로운 시인 이원천이 켜든 생존의 등불이다. 좁고 가파른 정형의 길에서 또 한 사람의 동행을 만나는 기쁨이 크다.

박기섭(시조시인)


[당선소감-정형시인 시조 매진]

나, 문득 어린 시절 사랑방이 생각난다
온 마을 두루마기들 모두 빙 둘러 앉아
한 세상 흰 날갯죽지 쳐 올리던 선학들

선친과 친구 분들의 시조창을 들으며 자랐던 내 어린 시절, 시조는 자연스럽게 내 몸 속에 녹아들었다. 누님이 읽던 잡지의 글들을 어깨 너머로 즐겨 읽던 일, 시냇물을 거슬러 오르던 은어 떼를 친구들과 함께 좇던 일, 아련한 추억 속에 자리하고 있는 고향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 같다.

고향과 가까운 매일신문사에서 저에게 시조를 향한 첫 문을 열어주신 것을 더욱 큰 영광으로 생각하며 부족한 글을 선택해주신 심사위원님께 깊이 고개를 숙입니다.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문화의 유산이자 이 땅 유일의 정형시인 시조를 위해 다소 늦은 입문이지만 꾸준히 걸어가리라고 다짐을 해봅니다. 낳아주신 부모님과 소질을 키워주신 스승님, 묵묵히 기다려준 가족 모두에게 감사를 드리며 기쁨을 함께 합니다.

오늘도 님의 모습 時空없이 오십니다
드는 잠 깨는 잠 녹차 잔 속으로도
느지막 얻은 이 사랑 품어 함께 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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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농민신문 시조 당선작] 남한산성 수어장대 / 전세중


발치에 한강 두르고 솟아오른 남한산성
성채를 굽이돌아 아픈 기억 저 편에는
북풍에 깎여 무너진 인광(光)들이 번득인다

홑처마 청량당은 굳게 잠겨 말이 없고
무망루 등 돌려 앉아 반쪽 하늘 바라본다
새하얀 억새꽃 무리, 안개 속을 떠도는데

수어장대 팔작지붕 비상을 꿈꾸는가
추녀 끝 웅크린 저 수막새도 불러세워
해빙의 아침을 연다, 물안개를 걷어낸다


<심사평>

예심을 거쳐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겨울 문장대〉(이교상), 〈자옥산의 봄〉(배인숙), 〈적일〉(김명희) 그리고 〈남한산성 수어장대〉(전세중) 이렇게 4편이었다.

〈겨울 문장대〉의 경우 작품을 형상화하는 과정은 빼어났으나 오히려 너무나 안정적인 구도가 신인이 지녀야 할 패기와는 거리가 있었다. 〈적일〉은 여러 곳에서 시조의 형식에서 벗어난 것이 결정적인 흠으로 지적되었고, 〈자옥산의 봄〉의 경우는 당선작과 마지막까지 겨뤘으나 작품의 균형과 완성도 면에서 안타깝게도 당선작에는 미치지 못했다.

〈남한산성 수어장대〉는 그 소재가 다소 낡은 감은 있으나 전체적으로 작품의 짜임새가 고르고 기승전결의 묘미가 다른 응모 작품들보다 앞서 있었으며 특히 셋째 수는 작자의 숨은 역량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외에도 당선자의 다른 작품 〈부석사 무량수전〉과 〈모둠발 서는 저 나무〉도 당선작 못지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만큼 완숙한 경지에 이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에 우리는 시조단의 이름으로 그가 앞으로 펼쳐 갈 새로운 세계를 주목하기에 이르렀다.


<당선소감>

3년 전이었다. 고향 울진에 모셔져 있는 15대조 선영(북면 갈영)에 다녀오다 어릴 적 기억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그것을 글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 까맣게 잊혀져가는 그 추억을 시로 남기자. 단 한편만이라도….’ 나의 시 쓰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조선후기 한은규는 〈쌍선기〉 20권을 펴내면서 세상에 이름을 유전케 함이라고 적고 있지 않은가!

그동안 문학은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긴 하였으나 직접 글을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잡문처럼 늘어진 글을 다듬는 일이란 많은 날들을 필요로 했다. 끊임없는 내면의 성찰과 함께 소재에 비추어 자신을 삭이지 않고서는 결코 맑은 소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배 시인들의 잘 정제된 작품을 읽을 때는 온 몸에 전율을 느끼기도 했다. 참 멀고 아득한 문학의 길에 농민신문사에서 놓아준 다리는 주춤거리는 나를 위한 튼튼한 다리일 것이다.

‘남한산성’은 우리에게 뼈아픈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고 잊혀져가는 과거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묵묵히 한강을 끼고 솟아오른 남한산성을 보고 있으면 시대의 흐름을 안고 해빙의 아침을 여는 수어장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곳을 오래도록 끌어안고 있었다.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정형의 틀에서 핵심을 꿰뚫는 짧은 텍스트로, 창조와 논리의 서정을 담은 시조를 쓰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싶다. 그간 함께 공부한 문우들, 직장동료들과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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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경남신문 신춘문예-시조] 당근밭에서(이명자)


이 세상 정전 상태 언제까지 계속될까
아무리 둘러봐도 안팎 다 깜깜하다
불지펴 밝히고 싶은 어둠 저 한복판
흙에 묻힌 깊은 기억 꿈속에서 몸부림친다
마음을 갈아엎고 회심줄기 찾고있는
명멸의 흔들림 속에 머언 훗날 낯선 기척
눈튼 새순 입맞추고 샐샐 웃는 꽃샘바람
수줍어 뿌리까지 새빨갛게 젖었는가
지심(地心)을 딛은 발걸음 뽑아들면 횃불이다.


[신춘문예-시조] 시조 심사평 -남다르면서도 당당한 패기

시조로 쓴 자유시, 아니 자유시로 쓴 시조, 이런 느낌부터 주는 「당근밭에서」를 두 심사위원은 당선작으로 밀었다. 응모된 많은 시조들 가운 가장 남다른 성취의 실체였기 때문이다.

 이 시조의 경우, 말을 놓는 처음 단계부터 “이 세상 정전 상태 언제까지 계속될까”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 다음 “아무리 둘러봐도 안팎 다 깜깜하다”라고 스스로에게 답한다. 당근 밭에 선 작중 화자의 자문 답은 이처럼 특수어 아닌 일상어로 돼 있지만, 기실은 놀라운 발상이다. 당근 밭은 이 세상이고, 정전상태는 이 시대여서 그러하다. 그 같은 자문자 답의 한 결말은 “불지펴 밝히고 싶은 어둠의 저 한복판”이다. 이처럼 성취된 제1수의 언어 능력만 봐도 명민한 자의 눈이 어떻게 밝은가를 곧바로 전달받게 된다. 시제인 「당근 밭에서」를 연상하고서 말이다.

 그런데, 이 시조는 1편 전9장으로 수간(首間)없이 되어 있다. 얼핏 자유시로 읽혀진다. 그리고, 시조 문장은 산문성이다. 말하자면, 수간(首間)없는 산문성 일상어의 율격화이다. 전9장 1편을 단숨에 읽도록 하는 의도에다 1천년 가까운 시조 흐름의 가락 특징인 유장함에 식상했다는 뜻이겠다. 3·4조 4·4조에만 얽매이지 않고, 2·4조와 4·5조도 거침없이 섞어서 최소단위인 음보와 음보 연결을 거뜬히 해냈다. 따라서 율독 호흡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명실상부한 신인의 패기가 이러도록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뭔가 좀 께느른한 점은 이런 패기있는 신인일수록 신춘문예의 당선 영광과 함께 상금만 챙기고는 다른 분야로 가거나 잠적한 나머지 시조작단을 실망시켜 왔다는 점이다. 이 점을 우려하면서도 설마하니 이번에까지 그럴라고 하는 반신 반의에 모험 한번 걸기로 했다.

 〈흙에 묻힌 깊은 기억 꿈속에서 몸부림친다/마음을 갈아엎고 회심줄기 찾고있는/명멸의 흔들림 속에 머언 훗날 낯선 기척//눈튼 새순 잎맞추고 샐샐 웃는 꽃샘바람/수줍어 뿌리까지 새빨갛게 젖었는가/지심(地心)을 딛은 발걸음 뽑아들면 횃불이다〉 할 정도로 자기화한 대상의 인식 능력의 소유자이고 보면 허튼 짓을 못할 것이다. “지심(地心)을 딛은 발걸음 뽑아들면 횃불이다”라는 이 초심대로 정진하여 대성하길 바란다.

심사위원=서벌(한국시조시인협회장·시조시인) 김남환(한국문협 시조분과회장·시조시인)


[신춘문예-시조] 시조 당선소감 - 청아한 가락으로 보답

 긴 세월 쉼표 같은 책상 서랍 속에서도 아름다운 선율을 꿈꾸던 악보 한 장 한꺼번에 터뜨리는 연 분홍빛 환성을 듣습니다.

 時調를 쓰는 일은 이규보(1168-1241)의 〈論時〉에서 이미 노래 했듯이意本得於天 難可率爾致 (뜻이란 본래 하늘에서 얻기에 쉽게 이루어지기가어렵다.). 빛나는 하늘호수 거기 몸 담그면 시간 밖으로 웃음처럼 번지는파장의 동그라미에 시조 가락 실어내고 싶습니다.

 문학의 밑거름이 되어준 인보성체수도회 식구들 큰언니 남동생 가족들 지구 동네 한 분 한 분께 뜨거운 사랑을 드립니다.

 유난히 깨끗한 장을 마련해 주신 경남신문, 턱없이 부족한 글에서 청아한 가락 흐르도록 높이 들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내면 깊은 곳에서 울러 나오는 감사를 드립니다.

 함께 응모하셨던 분들께는 죄송한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곧 농익은 작품으로 만나 뵙기를 기원합니다. 하늘의 파란 축복 가득 하소서. (이명자 전주시 덕진구 팔복동 2가 220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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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긴 이별 짧은 편지 / 이교상

(매화산)

길 속에 빠진 발목,

복사뼈 안 보이고

시간은 굽이굽이

물소리로 흘러가네

안개는 눈꺼풀 속에

매화산을 감추고

(가을 비)

마음 뜬 한 사내가 나흘째 오락가락 젖어서 갈 수 없는 하늘을 바라보다 산 아래 못물 속 깊이 빠져버린 그림자

(단풍나무)

단풍나무 한 그루가 붉게 붉게 피었다

참았던 신열이 한순간에 다 터져서

눈감고 날고 싶었다,네 곁으로 가고싶다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긴 이별 짧은 편지-심사평

모국어의 뿌리가 시조에 와서 더 깊이 파들어가고 있음을 본다.우리 시의 원천이고 큰 줄기이면서 형식의 제약 때문에 자유시에 비켜있는 듯하지만 역량있는 시조시인들이 끈질기게 개척의 삽질을 하고 있고 신춘문예의 마당에서도 신인들이 새틀을 짜기에 골몰하는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들어서지 못하고 있는 우리 문학의 현실에 오래된 고유의 시형식을 새롭게 빚어내는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벅찬 일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올해의 응모작들이 한결같이 고른 수준을 갖추고 있고 그 위에 이미 뻗어온 가지에 새 잎을 틔우려는 안간힘이 있어 시조의 내일을 밝게 해주는 것이었다.

당선작 ‘긴 이별 짧은 편지’(이교상)는 시조의 원형인 단수 3편을 옴니버스 스타일로 묶은 것이다.단수이기 때문에 중량감에서 떨어진다고 생각할는지 모르나 단수가 더 어렵다는 장인(匠人)들의 토로가 맞는다면 이교상씨의 작품은 그 완성도에서 높은 평점을 주지 않을 수 없다.특히 ‘가을비’에서 “마음 뜬 한 사내가 나흘째 오락가락”으로 말문을 여는 것은 소월을 떠올리게도 하고 미당의 솜씨를 닮은 것도 같으나 목을 젖히고 뽑는 가락이 득음(得音)의 경지에 이른듯 사뭇 마음에 감긴다.이만한 그릇을 빚는 솜씨라면 우리네 조선백자나 고려청자를 구워내던 그것과도 견줄만 하지 않은가.더 바쁜 물레질로 시조에 새 빛깔을 입히기 바란다.

끝까지 겨루던 작품으로 ‘금동반가사유상’(한분옥) ‘탱자의 꿈’(장창영) ‘원산 가는 길’(임채성) ‘억새밭에서’(방승길) 등이 제각각의 목소리와 사물에의 눈뜸으로 돋보였음을 밝힌다.

이근배 한분순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긴 이별 짧은 편지-당선소감

나는 지금 붉은 신호등 앞에서 파란 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때로는 눈 질끈 감고 저것을 무시하고 지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언제나 쓸쓸한 그림자가 슬며시 내 마음에 와 닿으면 나는 금세 물렁해져 버린다.이것이 내 모습이고 나의 시다.슬픔이나 사랑의 마음은 사람을 독하게 하기도 하고 또 바보로 만들기도 한다.그 차이는 저 바람만큼이나 사소하고 미세하지만,소리 하나가 풍선처럼 몸을 공중에 띄우기도 하고 터져서 산산이 흩어지기도 한다.

말은 현란한 문양의 옷을 입고 있다.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올 한 올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꿈틀대거나 서로 부둥켜안고 꿈을 꾸기도 한다.시조는,그 거추장스러운 말의 겉옷을 벗어 던지는 일이다.그리하여 하얀 알몸의 시신경으로 사물의 미세한 소리와 먼지와 떨림조차도 느껴야 한다.그리고 바다 저 넓고 낮은 곳으로 강물처럼 흘러가야 한다.

시를 쓰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직물공장 사장이나 멋진 여성의 옷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슬픔이거나 웃음이었거나 혹은,구름이었더라도 내가 만난 인연들이 소중하고 그저 감사할 뿐이다.

스승께 큰절을 올린다.그리고 서울신문과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앞으로 최선을 다 하는 것이 보답의 길일 것이다.

약력 63년 경북 김천 출생
상주대학교 축산학과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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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 연적을 비우며/장명웅]


먹보다 검은 속내 언제쯤 맑아질까
끈적한 벼룻물로 가슴을 갈고 갈아
묵향에 젖어든 온기, 가득히 안을 그 날

반질한 붓대 세워 농담(濃淡) 한껏 풀어두고
휘적댄 대나무 숲 문기(文氣) 얹어 더 푸를 때
휘영청 달빛 내려와 달무리로 번진다

격자 무늬 창틀 너머 은은한 저 달빛은
남몰래 묻어둔 일, 밤마다 들추어내며
푸르른 저 묵죽마냥 속까지 비우란다


[2004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 연적을 비우며] 심사평

현상을 절감하게 하는 절제된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가, 참신한 표현으로 시세계를 새롭게 만들어 내었는가, 자유시가 당도할 수 없는 절장(絶章)이 시조시임을 말해주는 작품인가 등등의 기대와 기준으로 우리는 작품들을 읽었다.

우선 초심을 통과한 작품들은 ‘河口에서 서성대다’ ‘지팡이 짚고 오는 봄’ ‘목화8’ ‘겨울 숲에서’ ‘나무 바위 위에 서다’ ‘연적을 비우며’ ‘분재’ 등이었다. 이를 다시 신선도와 압축미, 완결성 등에 잣대를 맞추어 읽었다. 종심에서 ‘목화8’ ‘분재’ ‘연적을 비우며’ 등이 선자의 손을 떠나지 않았다.

신춘문예는 기성인의 티가 너무 진한 작품은 제외해야 한다는 의견의 일치로 ‘연적을 비우며’를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당선작은 전통의 운율을 적절히 살려 시적 표현력을 이끌어내는 힘을 갖고 있었다. 당선자에게는 시대에 맞는 새로운 시적 형상력의 향상이 요구된다는 지적도 있었음을 알린다. 당선자는 그러나 5편의 응모작 수준이 고르다는 점에서 신인으로서의 발전가능성이 높았다는 점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 심사위원 전치탁 임종찬


[2004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 연적을 비우며] 당선소감

어릴 적 소박한 산골 마을에서 모든 것이 부족한 것에 대한 갈망으로 소중한 꽃씨 한 알 가슴에 품었으나, 다른 나무 돌보느라 언제 돌볼 사이 없이 그냥 묻어둔 채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제 이순(耳順)의 언덕에서 지난 날을 뒤돌아 보며 가슴을 열어 그 씨앗에 물을 주고 가꾸어 온것이 몇 해가 지났습니다. 드디어 여린 꽃망울 하나를 터뜨렸습니다. 너무 어여쁘고 귀하여 가슴이 벅차 오르고, 열심히 키우고 가꾸어야 겠다는 각오가 새롭습니다.

앞으로 가능하다면 작은 소우주인 인체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미생물들의 신비로운 조화를 시조로 표현하여 볼 수 있도록 노력하여 보고 싶은 작은 꿈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직 부족한 글을 어여삐 보시고 뽑아 주신 심사위원들께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리며, 더욱 부지런히 써서 좋은 글로 보답하겠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그 동안 소중한 꽃망울 피울 수 있도록 물주시고 북돋아주시고 이끌어 주신 윤 교수님과 우리시조연구회 여러분, 그리고 제게 많은 도움을 주신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그 동안 말없이 지켜 보아준 가족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자 합니다. / 장명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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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전북중앙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시조] 존재의 발자국 - 정평림


꽤나 허덕이면서 키만 훌쩍 키웠나보다
가파른 첨탑 위로 구름 몇 점 서성이고 굽어 본 저 바닷가엔 숨찬 길이 누워 있다
파고 끝 모래판에 찍어 놓은 발자국들 저마다 누구인지 그 존재를 알 수 없고
쏴르르 밀물이 와서 그것마저 끌고 간다


<시조부문 심사평>

시조는 세계적으로 손가락을 꼽는 ‘민족 정형시’ 중 하나이며, 현대 시조의 비조(鼻祖)인 가람 이병기 선생이 이 곳 전주에서 후학들을 양성했다. 전주는 현대 시조의 본향인 것이다.

그러므로 전북 중앙 신문이 각별한 애정으로 신춘문예에 시조 부문을 신설한 것은 지성적 통찰의 소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감회와 설레임 속에서 선자들은 응모자의 신원이 가려진 채 넘어온 백 수십 여 편의 작품들을 검토했다.

응모작들은 대체로 세 부류, 즉 전통적인 소재로 결 고운 겨레시의 서정을 재현하려는 시도, 현대적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해 고뇌하는 실험적인 시편들, 그리고 소시민의 고충에 천착하는 현실적 관심사의 경우로 분류됐다.

이 모든 경향의 궁극적 목표는 우리 고유의 정형시를 통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이며, 선자들이 유념한 것은 ‘현대인’의 다양한 정서를 시조 삼 장을 향해 완성해내려는 문학성이었다. 그리하여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들은 ‘아버지와 기차’, ‘박쥐’, ‘묵화 10’, ‘존재의 발자국’ 등이었다.

처음 두 작품은 사설시조 또는 복합시조의 실험적 의욕에도 불구하고 율격의 결여가 눈에 거슬렸으며, ‘묵화 10’은 이미 등단한 작가의 것임이 판명됐다. 자연히 당선은 존재의 발자국’에 돌아갔다.

당선작은 제목이 좀 무겁기는 해도, 압축미라는 시조 특유의 장점을 주지적 사유로 표출했다. 하늘과 해변 길의 대비, 그리고 파도에 쓸려가는 발자국을 통해 자신의 존재와 삶에 대한 성찰을 상징적으로 표상하였는 바, 선자들은 이러한 시적 진술 능력을 높이 사기로 의견을 모았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호흡이 짧고 관념화로 쏠리는 경향이다. 부디 외길로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현대 시조를 쓸 때 시조의 기본 율격에 대한 이해와, 시적 메시지를 작품 속에 앙당그려 모아 넣는 형상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자수 맞추기를 넘어서서 시대적 배경과 삶의 담론을 현장감있게 시화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당락에 관계없이 시조 쓰기를 평생의 업으로 삼는 시인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 이기반 시인(전 전주대 사범대 교수), 정휘립 시인(전북대 언어교육원 토플교수)


<시조 당선소감>

멀리서 울려오는 크리스마스 캐롤을 들으며 밤늦도록 서재에 박혀 있었다. 괜스레 쓸쓸하다는 생각도 들고 하여 지난 한 해를 곰곰이 돌아보았지만 삶의 곤혹스러움 밖에는 무엇 하나 남긴 것도 없고 부산스레 찍어 놓은 발자국들조차도 모두 풍화되어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도전을 좋아한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자기 하는 일에 도전정신이 없다고 하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리라. 이 도전정신은 꿈이나 이상과도 통하는 말이며 자기 개발의 원동력이 된다고 믿는다. 이웃과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끝없이 추구하는 자기 개발이야말로 이승을 사는 정도가 아닌가 싶다. 이래서 성경말씀에도 “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이 창대하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언제부터인가 하나의 꿈이 있었다. 그것은 내 주위의 사물과 나의 하찮은 삶까지도 재인식하여 가락을 붙여 써내는 일이었고 그것도 기왕이면 우리의 전통적 운율에 맞추어 그 맥을 이어 보자는 것이었다. 나의 전공과는 거리가 아주 먼 시조쓰기였다. 뒤늦게 정신이 든 나는 바쁜 일과 틈틈이 이것저것 습작하게 되었고 이 노력은 헛되지 않은 셈이 되었다.

내가 몸담고 있는 학교의 실험실 사정을 점검하려고 좀 늦게 출근하던 차속에서 당선통보를 받게 된 것이다. 우선, 보잘것없는 작품을 뽑아주시고 그렇게도 꿈꾸어오던 시조시인의 반열에 올려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의 말씀을 올리며 이런 자리를 마련해 준 ‘전북중앙신문사’에 또한 감사드린다. 그리고 오늘의 이 영광은 함께 공부하고 있는 문우들과 선배 시인 여러분의 성원과 격려가 없이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당선작 ‘존재의 발자국’은 우리네 삶과 존재가 높고 낮거나 또는 크고 작거나 간에 파도에 쓸려가는 모래판 발자국처럼 흔적없이 사라지는 것이지만 어차피 그 발자국을 찍고 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겠는가 하는 나의 진술인 것이다. 참으로 어렵고 두려운 첫 발자국 하나를 찍게 되었다. 등단이란 시작활동의 한 과정이고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많이 잃고 많이 쓰고 더 많이 생각하는 철저한 신출내기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하늘나라에 계신 부모님, 사랑하는 가족들 그리고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주의 분들에게 감사드리면서 어지러운 책상을 다시 정리하고 나니까 마음이 조금은 환해진다.

< 약 력 >
-성명 : 이 정(본명 : 정평림)
-1938년 강원도 평창 출생
-서울대 생물학과 졸업
-미국 미시건대 이학박사
-현재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양도마을 서해아파트 204동 5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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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광주매일 신춘문예당선작/시조 가작] - 시간 밖의 집 / 김선옥


 식구들 온기가 다 떠난 고향집에
 마당 가득 잡초가 돌담과 키 맞댄다
 길 잃은 하늬바람이 잎사귀 뒤집는다.

 신발들 자리다툼 분주하던 섬돌 위엔
 삶의 때 눌러 붙은 어머니 신발 한 짝
 한평생 부르트도록 육 남매 키워냈다.

 마루에 걸려있는 상처 난 사각거울
 칼집 낸 귀퉁이에 아버지가 웃고 있다
 결혼 초 군복차림의 반명함판 사진이다

 지금은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다
 발빠른 세월이 당신의 몸 훑지만
 거울 속 제복 입은 아버지는 시간 밖에 있다.


[시조 심사평-이한성·이재창 시조시인]

많은 응모작 가운데 아직도 시조형식을 모르는 예비시인들이 많다는데 저의가 놀랐다. 그런데 어떻게 시조시인이 되겠다는 말인가 반문하고 싶어졌다.
 예심을 넘어온 10편 중에서 선자가 투고자의 입장에서 수없이 반복해 읽으면서 4편으로 압축할 수 있었다.
 서순영의 '사마귀를 닮은 아이'외 4편, 김경태의 '피아노의 뿌리'외 4편, 김형태의 '곶감 나비'외 7편, 김선옥의 '시간 밖의 집'외 4편 등…
 위 작품들은 어느정도 시조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몸에 맞는 옷이 아닌 헐거운 옷이었다. 먼저 김경태의 작품을 보면 소재는 참신하나 내용이 받쳐주지 못하고, 김형태의 작품은 너무 풀려 있어 흠이었다. 압축과 생략의 묘를 더 많은 시간을 통해 터득해 주었으면 싶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으로 서순영의 '사마귀를 닮은 아이'는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를 요즈음 아이들을 인상깊게 노래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기성시인 작품을 본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고 있어 당선권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김선옥의 '시간 밖의 집'은 홀로 고향집을 지켜온 어머니의 아픔을 노래한 무난한 작품이었다. "신발들 자리다툼 분주하던 섬돌 위엔"에서 보듯 육남매를 키워 분가 시키고 홀로 적막강산으로 남아 고향을 지키고 계신 우리들의 어머니 모습이기에 더욱 가슴이 저려온다. 김선옥의 작품을 당선의 영예를 주지 못하고 가작에 앉힌 것은 참신성 부족 때문이었다. 문운을 빈다.


[시조 입상소감-김선옥]
집착이 시를 잉태하고

 내가 그를 처음 가슴속에 품은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이다. 그는 내게 '창문이 해를 잉태하고 있었다' 란 한 구절을 선물하며 지금껏 그를 외면하지 못하게 하고 짝사랑의 열병을 앓게 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그 시절에 다른 것도 아닌 이 단순한 이 한 구절을 머릿속에 담아놓은 순간부터 내 미래는 항시 그를 동반하게 되리라는 것이 이미 예고되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그를 한결같이 사모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너무도 그리움의 대상 이였기에 가슴이 아려와 반발로 때론 몇 년 동안 외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반동작용으로 그를 더욱더 갈망하게 만들곤 했다.

 하루 종일 눈이 내린다. 작년 겨울에 빗장을 걸어둔 눈 창고 문을 활짝 열자 함박눈이 서로 등을 떠밀며 정신없이 땅으로 곤두박질을 치고 있다. 난 강아지 티니를 안고 베란다에 웅크리고 앉아 눈송이에 달라붙은 언어들을 건져 올린다. 아니 그를 그리워한다.

 운이 좋으면 눈송이에 한 뭉텅이의 언어를 만날 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달랑 몇 단어만 건져 올려 하나의 형상으로 만들지도 못하고 미완성으로 놓아둘 수도 있다. 잘 빚어진 한 구절이라도 가슴속으로 들어와 준다면 기꺼이 흥분과 감동으로 며칠 밤을 그와 지새울 수도 있을 것이다.

 몇 년만에 처음으로 그가 나를 보고 아주 조금 얼굴을 내밀며 웃음을 던졌다. 기쁨이고 환희다. 또한 부끄러움이다. 이 계기를 통해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싶다. 다시는 외면하거나 거역하고 싶지 않다.

 지금껏 그를 사랑할 수 있도록 마음을 나누어준 가족들과 그의 곁으로 더욱더 가까이 가는 길을 인도해준 많은 스승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 드린다. 마지막으로 변변치 않은 내 작품을 세상과 만나게 해준 심사위원님께 감사의 말씀 올린다.

 1966년 전남 영광 출생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4학년 재학중
 2003년 제4회 전국 가사·시조 창작공모전 우수상 수상 
 광주광역시 남구 주월동 경남아파트 103동 8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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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대한저널 신춘문예 시조당선작/시조] 구름 詩篇 외1편 - 황재연
2004년 제1회 대한저널 신춘문예 시조당선작

구름 詩篇


한 무리 양 떼들이
하늘길을 가고 있다.
아우성의 이 세상을
우회하며 지나치며....
저것봐! 저 장엄한 행렬
성자들이 가고 있다.



老 시인의 思婦曲
-아내의 맨발-

신문의 톱기사엔 자꾸만 구토가 나서
한참 뒤쪽을 펼쳐 '사람들'을 찾았을 때
불현듯 핑도는 눈물, 그 애절한 박스 기사.

시인을 키운 8할은 '아내의 맨발'
시인이 키운 8할은 '아내의 백혈병' 뿐
시로는 한 방울의 피도 살 수 없는 시대여!

*송수권 시인의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아내에게 바치는 산문집



<당선소감>
꽤 오랫동안 시조 3장 6구에 매달려 나만의 텃밭을 일구어 왔으나 '신춘문예'와는 별반 인연이 없는 것으로 여겨 왔습니다.

대중문화가 판치는 이 시대에 시조란 고루한 장르라고 여기는 일부의 그릇된 생각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좋은 시조를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감동은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무릇 시(시조)라는 것은 목관악기나 현악기처럼 깊은 울림과 긴 여운을 오래오래 남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라도 텃밭 가꾸기에 정성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려운 여건임에도 '신춘문예'를 마련하신 늘 푸른 신문 '대한저널'과 졸작임에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깊이 감사 드립니다.

더불어 존경하는 부모님과 스승님, 사랑하는 아내와 문우, 여러분께 이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당선자 약력>
1961년 경북 문경시 산북면 출생
1985년 관동대학교 체육교육과 졸업
2001년 전국 시조 공모전 입상
현재 문경신기동 우체국 사무원 재직

 

 [2005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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