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시조 당선작(2011)

2016.03.08 08:53

동아줄 김태수 조회 수:874

011년 신춘문예 시조당선작


추사 유배지를 가다


                        성 국 희

 

 

유년으로 가는 길은 안으로만 열려있다

지나온 시간만큼 덧칠당한 흙먼지 길,

낮아진 돌담 사이로 먹물 자국 보인다


푸르게 날 선 침묵, 떨려오는 숨결이여

긴 밤을 파고드는 뼈가 시린 그리움은

한 떨기 묵란墨蘭에 스며 향기로 깊어졌나


허기진 어제의 꿈 은밀하게 달래가며

빗장 풀어 발 들이는 적막의 뒤란에는

낮달에 비친 발자국, 추사체로 다가선다 

 

 

 

 

 

 

경상일보 2011 신춘문예

 

그, 자리 / 김진수 

 

우리 그날 마주보며 깊도록 껴안을 때

정겨운 너의 손이 깍지 끼던 그 자리

내 손은 닿지를 않아 그만큼이 늘 가렵다

 

 

찌르르, 앙가슴에 불현듯 전해오는

무자맥질 심장소리에 사과 빛 물든 등 뒤

네 손길 지나간 자리 바람이 와 기웃댄다

 

그 여름 지나느라 소낙비 지쳐 울고

푸르던 내 생각도 발그레 단풍졌다

아직도 남은 온기가 강추위를 견딘다

 

 

[시조부문 당선작 심사평]주제의식·참신성 돋보이는 수작 / 심사평 - 한분순

 

 신춘문예 당선 작품은 기성시인을 뛰어넘는 새롭고 신선한 것이어야 신인으로서의 조건을 갖춘 것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예선을 거쳐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 16편을 읽은 후 8편을 골라내었다. 이들 작품을 다시 반복해 읽은 다음 고심 끝에 당선작으로 ‘그, 자리’ 를 선택했다.

 

작품 ‘그, 자리’ 는 깔끔한 시어 선택에, 짜임새 있는 구성, 강한 주제 의식으로 작품의 참신성을 획득한 수작(秀作)이다.

 

이외 최종심에 오른 ‘비’는 섬세한 묘사에 시적 서정을 담아냈으며 작품의 균형 감각을 이뤄낸 점이 돋보였으나 기성세대에서 흔히 다뤄졌던 소재여서 망설이게 했다.

 

‘휴대폰’은 우리 생활 속에서 일상화된 소지품을 시적 대상으로 삼아 현대적 감각으로 이끌어간 점이 우수했고, ‘조간신문을 읽다’는 아침마다 배달되는 신문을 대상으로 시상을 유연하게 풀어나간 솜씨가 뛰어났으나 당선에는 미치지 못했다.

 

‘섬에서 온 편지’ ‘파씨’ 등도 저마다의 개성과 특색 있는 소재를 선택하여 글감을 다루는 솜씨가 세련되었으나 한 편만을 당선작으로 뽑아야 하는 고충이 따랐다. 더욱 분발하여 앞으로 좋은 기회를 맞이하기 바란다.

 

 

2011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커피포트 / 김종영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비등점의 포말들

음이탈 모르는 척 파열음 쏟아낸다

적막을 들었다 놓았다

하오가 일렁인다

 

 

선잠을 걷어내며 베란다에 내다건다

구절포 활짝 핀 손때 묻은 찻잔 곁에

식었던 무딘 내 서정

여치처럼 머리 든다

 

설핏한 햇살마저 다시 올려 끓이면

단풍물 젖고 있는 시린 이마 위에도

따가운 별살이 내려

끓는점에 이를까

 

 

[신춘문예] 시조 심사평 / 군더더기 없는 시어 돋보여

 

다양한 매스미디어의 활성화에 반해 문학의 침체는 양식 있는 사람들의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우려를 말끔히 씻어내기라도 하듯이 신춘문예 심사장의 분위기가 뜨거웠다.

 

예년에 비해 응모자가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실험적인 작품도 눈에 띄었으며, 무엇보다 응모작품의 질적 수준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이는 ‘경남신문 신춘문예’가 지역의 한계를 넘어 전국 규모로 확대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고무적인 현상이다.

 

응모작품 가운데는 시조의 형식과 내용의 조화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 치열한 에스프리로써 시적 성취를 보이는 작품도 있었지만, 내용과 형식의 부조화를 드러내는 작품도 있었다. 또한, 시조의 기본인 음보에 대한 이해 부족과 가장 우리말에 대한 신뢰를 보내야 할 장르에서 모국어에 대한 아쉬운 정성도 지적되었다.

 

언어의 절제와 응축의 미학을 추구하며 선명한 이미지를 구축한 작품으로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마지막까지 끌었던 올해의 작품은 ‘오징어 일어서다’, ‘모래산에서 쓰는 편지’, ‘커피포트’ 등 3편이었다.

 

‘오징어 일어서다’는 오징어에도 뼈가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작품으로 세속적 풍자성은 평가되지만, 시적 구성의 치밀성과 깊이가 지적되었다. ‘모래산에서 쓰는 편지’는 비교적 시적 완성도가 높으며 상당한 수련을 쌓은 응모자의 솜씨를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관념의 구체적 이미지화에 아쉬움을 남겼다. 2수 종장의 음보 문제도 논의점이 되었다.

 

언급한 2편의 작품에 비해 ‘커피포트’는 신춘 도전자들의 심경을 정갈한 시조의 형식에 잘 다듬어 갈무리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군더더기 없는 시어의 처리가 돋보였다.

 

‘적막을 들었다 놓았다’라든지 ‘식었던 무딘 서정이/ 여치처럼 머리 든다’라는 첫수와 둘째 수 종장의 산뜻한 비유가 격조를 더하고 있어 후한 평가를 얻을 수 있었다.

 

울림의 진폭이 좀 더 컸으면 하는 여운이 남지만, 앞으로 더 좋은 작품으로 보답할 수 있는 역량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라는 관점에서 심사위원들은 김종영씨의 ‘커피포트’를 당선작품으로 선정하였다. 오늘의 영광이 대성의 길로 이어지길 기대하며 다시 한번 축하를 드린다. <심사위원 이우걸·김연동>

 

 

2011 제주 영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제비집 / 임 태 진

  

푸른 오월 하늘에 제비 한 쌍 날아와서
한 올 한 올 물어온 흙더미와 지푸라기
이 세상 가장 튼튼한 집 한 채를 지었다

 

사글세로 떠돈 세월 돌아보니 아득한데
앞만 보고 달려온 날들의 보상인 듯
한 생애 빛나는 훈장 처마에 걸리었다

 

집이래야 단칸방 남루한 살림살이
굳이 인가에 와 터를 잡는 이유는
질기디 질긴 인연을 내려놓지 못함이다

 

결국 산다는 건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
강남으로 돌아갈 날 죽지로 헤아리며
해마다 삶의 이력에 둥지를 틀고 산다

 

 

(심사평)

 

2011년 뉴스제주 ‘영주일보 신춘문예’는 전국을 비롯한 해외에서도 작품을 보내왔다. 심사위원들은 267편에 이르는 응모작을 윤독하면서 탄성을 질렀다. 우리의 민족문학인 시조에 대한 열정이, 바다 건너 탐라까지 불꽃처럼 타올랐기 때문이다. 제주지역 신춘문예라는 것을 염두에 두었는지 응모하신 많은 분들이 제주의 정서를 작품에 펼쳐 보였다. ‘해녀, 용두암, 오름, 서귀포, 우도’ 등이다. 작품을 무리하게 이끌고 가느라 그러한 시적 주제들이 큰 결실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생활 속에서 발견한 소재들을 긴강감 있게 끌고 가는 응모작들이 눈에 띄었다. 감상을 진술하는데 그치지 않고 치밀한 묘사와 관찰로 새로운 감흥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최종심에 오른 임태진의 「제비집」, 이창선의 「섶섬」, 오창래의 「우도 생각」, 문제완의 「石衣, 바위가 옷을 입다」, 백점례의 「물의 길은 희다」가 올라왔다.

 

「우도 생각」은 우도를 어머니와 아버지의 절규로 중첩시키면서 시적 발상을 전환하였으나, 언어를 함축시키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石衣, 바위가 옷을 입다」는 4수로 이끌면서 시적 전개는 무리가 없었으나 부분 부분을 설명으로 처리해 전달의 힘이 약했다.「물의 길은 희다」는 시조를 다루는 부드러움의 힘은 앞섰으나 주제를 살리지 못해 난해한 면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임태진의 「제비집」과 이창선의 「섶섬」으로 압축되었다. 이창선의「섶섬」은 나뭇잎 섬으로 귀결하면서 그 풍경을 서귀포와 연결, 전개한 사유의 힘이 있었다. 예컨대 임태진이 다른 작품 「화재주의보」연작에서 보여준 삶의 비명과 탄식처럼. 그러나 「제비집」에서 사글세의 남루한 살림과 삶의 여정을 이입해 특히 “해마다 삶의 이력에 둥지를 틀고 산다”에서 볼 수 있듯이 춥고 가난한 우리 생의 아름다운 풍경과 서정의 밀도를 더 높이 평가했다.

 

심사 결과, 당선작으로 임태진의 「제비집」을 뽑았다. 앞으로 더 깊은 사유와 서정을 펼쳐 시조문학의 재목이 되기를 바란다. 끝까지 남으신 분들의 작품에도 깊은 애정을 금할 길이 없다. 이번 계기로 도약의 시간을 갖도록 부탁드린다.  -이승은 · 박현덕-

 

 

조선일보 2011 신춘문예 당선작

 

신 한림별곡<新翰林別曲>/김영란


전갱이 잔뼈 같은 어젯밤 하얀 꿈도
북제주 수평선도 가로눕다 잠기는
은갈치 말간 비린내 눈이 부신 이 아침

바람소리 첫음절이 귤빛으로 물이 들고
닻들도 기도하듯 조용히 기대 누운
기우뚱 포구에 내린 오십견의 저 바다

우리가 불빛들을 희망이라 말할 때
행성처럼 떠도는 비양도 어깨 위에
등 뒤로 가만히 가서 손 한 번 얹고 싶다

 

(심사평)

-신인 이지만 시상 전개 솜씨 빼어나-

신인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기성 작가를 뛰어넘는 참신성이다. 이번에 응모된 작품들의 특징은 고른 수준을 유지하면서 개성 있고 언어 감각이 뛰어났으며 대상을 장악하는 능력이 기성에 못지않았다는 점이다.

당선작 김영란의 '신 한림별곡(新翰林別曲)'은 신인다운 신선함이 묻어나면서도 시상을 전개해 나가는 솜씨가 빼어났다. 반짝 낚아채는 묘미, 강한 주제 의식 등이 언어 수련 과정을 상당히 거친 것 같아 믿음이 간다.

이외 최종심에 오른 성국희의 '시간의 길-천전리 암각화'는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매우 세련되었고 구성의 완결성도 돋보여 당선작과

겨룬 우수작이었다. 진수의 '공작도시'는 개성 있고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으나 신인에게 필요한 참신성이 다소 약했다. 서덕의 '컴퓨터 대화법'은 소재 선택에서 오는 신선감은 충족시켰으나 작품 속에 흐르는 어둡고 침울함이 새해 분위기와는 거리를 느끼게 했다. 고은희의 '쉿!' 은 시상의 발상이 독특하고 응모 작품 모두가 고른 수준을 유지했음에도 기교적인 면이 지나쳐 밀려났다. 장윤서의 '봉숭아꽃 누이-디도스 바이러스'는 소재 선택, 구성력이나 글감을 다루는 솜씨가 나무랄 데 없었으나 내용에서 병적 우울함이 비쳐져 선택을 망설이게 했다. 송필국의 '일어서는 빛-해송 현애(懸崖)'는 매끈하게 잘 다듬어진 작품으로 눈길을 끌었으나 당선의 벽을 넘기에는 미진했다.
당선작은 한 편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점에서 최종심에 오른 우수한 작품들의 탈락이 아쉬웠다. -시조시인 한분순-

 

부산일보 2011 신춘문예 당선작

 

의자의 얼굴 /고은희

 

땡볕이 그늘을 끌고 모퉁이 돌아간 곳

누군가 내다버린 꽃무늬 애기 의자에

가난을 두르고 앉아

졸고 있는 할아버지

 

무거운 세월 이고 허리 펴는 외로움이

털어도 끈끈이처럼 온 몸에 달라붙어

허기진 세상은 온통

말줄임표로 갇혀 있다

 

살다 떠난 얼룩만이 가슴깊이 내려앉은

폐기물 딱지조차 못 붙이는 그 몸피여!

사는 건 먼지 수북한

그리움 또

견디는 것

 

오늘도 먼 길 돌아 헤살 떠는 한줄기 바람

먼저 간 할머니 손길 덤으로 묻어온 듯

그 옆에 폐타이어도

슬그머니 이웃이 된다  

 

(심사평)

 

-노인문제 따뜻한 시선으로 형상화-

 

많은 응모작 가운데 값싼 온정주의, 식상한 고전적 사고의 답습, 낡은 생활 서정,

필요 이상의 민족적 혈기 등이 1차에서 제외되었다. 시는 말이 아니라 언어의

이미지 형상화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춘문예는 역량 있는 신인의 새로운 감성을

찾아내는 일이지 결코 낡은 서정의 윤곽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윤송헌의 '생레미 몽유도'는 한때 유행했던 소재의 선택이, 이태호의

'분청사기상감연당초문병' 역시 빼어난 표현임에도 고전적 소재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신선하지 못했다. 김희동의 '겨울 소리를 보다'는 정갈하나 단조로운 내용이,

김다영의 '악수'는 압축과 절제미의 부족이, 이윤훈의 '폭설'은 패기를 앞세운

나머지 섬세한 표현들을 놓쳤다는 점에서 아쉬웠다. 남은 작품은 김범열의

'을숙도 노랑부리저어새'와 고은희의 '의자의 얼굴'이었다. 앞의 작품은 부분

부분 모호한 표현들이 결정적인 흠이 되었다. '의자의 얼굴'은 시적 완성도 면에서

훨씬 앞서 있었고, 요즘 중요한 사회 문제로 등장한 노인 문제를 소재로 선택한 점

역시 주목할 만했다. 노인이라는 소재를 낡은 의자에 비유해 이만큼 따뜻한 시선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거듭 당선자의 새로운 문학적

가능성을 평가하며, 앞으로 더 노력한다면 현대 시조의 부족한 정서적 공간의 확대에

크게 기여하리라는 높은 신뢰감을 갖게 된다. -시조시인 유재영-

 

 

국제신문 2011 신춘문예

 

 

독도 /김덕남

 

한 방울 핏물 튕겨 뿌리박은 그대 모습

격랑激浪을 가로 막고 응시하는 눈빛이여

붉은 해 홰치는 자리

팔을 걷고 섰는가


열원熱願은 바위 녹여 바닷물도 식혀내고

동백꽃 봄불 태워 소지燒紙하는 기도 앞에

내 조국 아리는 사랑

그 소리를 듣는다

 

  

(심사평)

 

-민족의 아픔을 함축미와 언어감각으로 잘 표현-

 

시조를 업(業)으로 삼을 이를 가려 뽑아야 하는 게 신춘문예다. 한 작품이 두드러졌다 해서 역량이 탁월하다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여러 편을 제출하게 한 것이리라.

 

일단 3편 이상 투고한 작품들의 수준이 고른가에 따라 선별 원칙을 정했다. 1차 마중물(필명) 김덕남 이영혜 이영신 김범열 송영일 김희동 제 씨의 작품들이 우선 손에 잡혔다. 다시, 이들의 작품 중에 수작을 가리는 일도 결코 쉽지 않았다. 신춘을 알리는 신호음처럼 언어감각이 새로운 것에 관심을 두고 2차 선별작업에 들어갔다.

 

'봄의 역사' '감자꽃' '희망' '깃 펴는 백목련' '그 여자의 강' '독도' '꿈꾸는 겨울나무' 7편을 선택하였다. 다음으로 언어의 함축미에 무게를 두기로 하였다. 언어의 함축미는 시조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긴 시조들은 언어의 함축미라는 점에서 약점을 갖게 되기 쉽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도'를 누를 작품이 없었다. 이 작품은 독도를 통해 민족의 시대적 아픔이 잘 묻어나도록 했다. 숙연함마저 느껴진다. 함축미와 언어감각 또한 참신함을 보여주었다. 당선자는 분발하여 훌륭한 시조시인이 되시기를 빈다. 본심 심사위원 시조시인 전치탁 임종찬

 

 

대구매일신문 2011신춘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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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선 한 척, 문지방에 닿다 / 백점례

 


참 고단한 항해였다

거친 저 난바다 속

풍랑을 맨손으로 돌리고 쳐내면서

한 생애, 다 삭은 뒤에 가까스로 내게 왔다

그 무슨 불빛 있어

예까지 내달려 왔나

가랑잎 배 버선 한 척 나침반도 동력도 없이

올올이 힘줄을 풀어 비바람을 묶어낸 날

모지라진 이물 쪽에 얼룩덜룩 번진 설움

다잡아 꿰맨 구멍은 지난 날 내 죄였다

자꾸만 비워낸 속이 껍질만 남아 있다

꽃무늬 번 솔기 하나 머뭇대다 접어놓고

주름살 잔물결이 문지방에 잦아든다

어머니, 바람 든 뼈를

꿈꾸듯이 말고 있다

 


(심사평)

 

곡식을 되로 될 때 반듯하게 깎아서 정량만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덤으로 한 줌 더 얹어 주기도 한다. 그 한 줌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은 인심이 후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응모작들은 저마다 되로 담기에는 모자라지 않았지만, 흑백 속에 숨어 있는 긁힌 상처의 흔적을 읽어내는 일에 다소간 편차를 보였다. 인심이 후하다는 말을 들을 길은 없는 선자(選者)는 여러 작품들 중에 단 한 편만 으뜸의 자리에 앉힌다.

 

당선작 백점례 씨의 '버선 한 척, 문지방에 닿다'의 시적 배경이나 제재는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인생을 "항해"로 본 것이 그것이고, 몇 군데 낯익은 표현이 드러나고 있는 점도 그렇다. 그러나 제목에서 보듯 참신한 착상과 네 수 한 편이 일정한 톤을 유지하며 주제 구현을 향한 강한 응집력을 보이고 있는 점에서 다른 응모작들을 뒤로 제쳐놓게 하였다. 특히 “어머니의 버선”으로 은유된 “배”의 항해를 육화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풍랑을 맨손으로 돌리고 쳐내면서”와 “올올이 힘줄을 풀어 비바람을 묶어낸 날” 등과 같은 대목은 인생과 세계에 대한 개성적인 재해석과 리얼리티를 내장하고 있다. 함께 보낸 작품들도 고른 형상 능력을 보이고 있어 신뢰를 준다. 그동안의 담금질을 바탕으로 기량을 잘 살린다면 오늘의 영광에 값하는 단단하고 옹골찬 작업을 보여주리라 믿는다.

 

끝까지 남은 작품들은 고은희 씨의 '입, 혹은 구두', 김석이 씨의 '아우라지', 이한 씨의 '과일가게 앞에서'이다. 깊이 있는 육화 과정과 새로운 감각이 돋보였지만, 마무리가 미흡하거나 호흡이 짧아 아쉬운 점 등이 당선작에 못 미쳤다. 에오라지 시조 하나만 끌어안고 일평생을 천착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기회는 올 것이다. 신묘년 새해에도 시조의 밝은 미래를 보여준 모든 응모자들의 건승과 건필을 빈다. 심사위원 이정환(시조 시인)

 

  중앙일보 2011신춘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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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바람의 칸타타 /김 성 현


오래된 LP판이 하나씩 읽고 있는

스산한 풍경 위로 바람이 불어간다

노래가 다 그런 것처럼 스타카토 눈빛으로


산까치 몇 마리가 앉았다가 떠나버린

잎 다 진 가로수들 우듬지 그 사이로

흰 구름 붉은 마음은 서쪽으로 흐르고


음역(音域)의 강을 건넌 짧아진 하루해를

빠르게 궁굴리며 다시 불어온 바람

아무리 되짚어 봐도 길은 너무 아득하다


누구나 한두 번쯤 절망 끝에 섰겠지만

지워진 음표만큼 눈은 더욱 깊어져서

LP판 둥근 세상으로 봄날은 또 오겠지

 

 

(심사평)

 -자연스러운 시상, 긍정의 사유 빛나-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중앙시조백일장 연말장원)은 국내 최고의 시조 등용문이다. 자신의 절실한 뜻을 자신만의 목소리로 잘 표현한 김성현씨가 마지막 문을 통과했다.

 당선작에서는 사물을 통해서 새로움을 읽을 줄 아는 역량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단순 서정에서 한 발짝 전진하여 인생의 의미를 찾아낸 점은 질량감을 느끼게도 했다. 오래된 LP판을 통해 사념을 독특한 질서로 정리한 점도 그렇지만 그것을 음을 읽듯 깊은 사유로 확장시키는 힘은 세심한 관찰과 일상의 성찰이 가져온 소산으로 보였다. 특히 아무리 칼바람이 불어도, ‘되짚어’ 보는 ‘길’이 ‘아득’해도, ‘둥근’ 이 ‘세상으로 봄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 긍정의 사유는 힘든 세상 사람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진술과 묘사의 적절한 활용, 자연스러운 시상도 눈길을 끌었지만, 이렇듯 시의 사회적 기능에 그 역할을 다 하고 있어 한층 믿음이 갔다. 이제 시조 세계에 한 점을 더하기를 바라며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마지막까지 당선자와 함께 겨룬 이는 김영란·김경숙 씨였다. 김영란씨의 ‘마음의 벼랑’은 그 시조보법이 매우 안정적이고 단아한 수준작이었다. 그러나 내용이 다소 추상적이라 견고하지 못하였다. 김경숙씨의 ‘환지통’도 밀도 있는 전개가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소재의 상투성이 문제로 지적됐다. 심사위원=정수자·오종문·이종문·강현덕(대표집필 강현덕)

 

 

농민신문 2011 당선작

 

(당선작)

 

시조당선작/설중매(雪中梅)

-도산서원에서 

                                                /성국희


어디서 시작되었나 저 깊은 설렘은,


어린 별과 손 맞잡고 귓속말로 건너왔나


선생의 잠든 붓 깨워 소리 없이 오는 새벽


때 이른 조바심을 수없이 비워내고


맨몸으로 일어나 찬 서리를 껴안으면


어느새 깊어진 향기 닫힌 문이 열린다


눈꽃, 그 하얀 무게 차라리 눈이 부셔


꼿꼿한 말씀 하나 안과 밖 경계를 넘자


행간 속 도산십이곡, 물소리가 차갑다
 

 

 

(당선소감)

 

-군말 줄일 줄 아는 절제미 본받고싶어-

 

겨울나무가 되어 섰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앙상한 가지마다 눈꽃이 피었습니다. 이 하얀 무게, 차라리 눈이 부십니다. 지금 제 키는 한뼘 더 작아지고, 외려 뿌리가 한뼘 아래로 자랐습니다. 햇살을 읽고, 바람을 만나고, 비에 흠뻑 젖던 지난 하루 하루가 감사할 뿐입니다.

뿌리 깊은 우리 시조의 모습을 닮고 싶습니다. 군말을 줄일 줄 아는 절제미를 익혀 단아한 그 자태를 본받고 싶습니다. 끝없이 먼 길이란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어쩜 더 행복한지 모르겠습니다. 꽃도 열매도 잎도 스스로 버리고 맨몸으로 빗장을 건 겨울나무의 혹독한 가르침을 되새김질해 봅니다.아직은 서툴지만 저의 진심을 읽어 봐 주신 심사위원님들의 깊은 눈매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정성을 다해 열매를 맺을 줄 아는 시조 시인이 되어 오늘의 영광에 보답하겠습니다. 이러한 귀한 기회를 주신 농민신문사에도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 성국희

-1977년 경북 김천 출생

-한결 시조 동인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 재학중

-제6회 백수 정완영 전국 시조 백일장 장원

-대구 남구 대명6동
 

(심사평)

 

-눈속 매화에서 퇴계의 정신 잘 읽어내-


올해 시조 부문의 경우 두가지의 커다란 특징을 보여 주었다. 우선 두드러지게 눈에 띈 점은 응모 작품의 숫자가 예년의 두배가 넘었다는 양적 증가이고, 다른 하나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의 질적인 향상이 곧 그것이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16명의 작품은 나름대로의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것은 현란한 수사나 표현에 치중한 나머지 정작 시로부터 멀어진 작품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시의 표현은 전달의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설중매〉 〈꽃살문 독후감〉 〈수수꽃다리 자전거〉 등 세편이 남았다.

 

이 가운데 〈수수꽃다리 자전거〉는 발상의 참신함에 비해 중복되는 표현의 부조화가 지적돼 제외되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설중매〉와 〈꽃살문 독후감〉을 두고는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꽃살문 독후감〉의 경우 ‘꽃살문’을 통한 사색의 깊이가 주목을 끌었으나 주제의 불확실성이 지적되어 눈 속에 핀 ‘매화’에서 퇴계의 정신을 읽어 낸 사유의 깊이가 돋보인 〈설중매〉를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표현보다는 정신에 무게를 두기로 한 것이다.  -시조시인 민병도 백이운-

 

 

 

 

 

 

 

 

문화일보 당선작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

 

문득, 썩지 않는 것이 있다

74세 이만호 할머니의 짓무른 등이

늦여름 바람에 꾸덕꾸덕 말라가는 중에도

푸르스름한 눈썹은 가지런히 웃는다

그녀가 맹렬했을 때 유행했던 딥블루씨 컬러

변색 없이 이상적으로 꺾인 저 각도는 견고하다

 

스스로 돌아눕지 못하는 날

더 모호해질 내 눈썹

눈으로 말하는 법을 배울까

목에 박힌 관으로 바람의 리듬을 연습할까

아니면 당장 도매뱀 꼬리 같은 문신을 새길까

 

누구에게나 꽃의 시절은 오고, 왔다가 가고

저렇게 맨얼굴로 누워 눈만 움직이는 동안

내 등은 무화과 속처럼 익어가겠지만

그 때도 살짝 웃는 눈썹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얼굴이 검어질수록 더 발랄해지는 눈썹이었으면 좋겠다

 

나 지금 당신의 바다에

군무로 펄떡이는 멸치의 눈썹을 가져야 하리

눈물나도록 푸른 염료에 상큼하게 물들어야 하리

 

 

새장 

          강정애



나무 밑 떨어진 이파리들은 모두

누군가 한 번쯤 신었던 흔적이 있다

낡은 그늘과 구겨진 울음소리가 들어있는 이파리들

나무 한 그루를 데우기 위해

붉은 온도를 가졌던 모습이다


저녁의 노을이 모여드는 한 그루 단풍나무 새장


새들이 단풍나무에 가득 들어 있는 저녁 무렵

공중의 거처가 소란스럽다.

후렴은 땅에 버리는 불안한 노래가 빵빵하게 들어 있는

한 그루 새장이 걸려 있다

먼 곳을 날아와 제 무게를 버리는 새들

촘촘한 나뭇가지가 잡고 있는 직선의 평수 안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후드득, 떨어지는 새들의 발자국들


모든 소리를 다 비운 새들이 날아가는


열려 있으면서 또한 무성하게 닫혀 있는 새장

허공의 바람자물통이 달려 있는 저 집의

왁자한 방들

잎의 계절이 다 지고 먼 곳에서 도착한 바람이

그늘마저 둘둘 말아 가면

새들이 앉았던 자리마다 새의 혀들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늘이 사라진 자리에는 새의 혓바닥들만 부스럭거릴 것이다


모두 그늘을 접는 계절

간혹, 지붕 없는 새의 빈 집과

느슨한 바람들만 붙어 흔들리다 간다

한 그루 단풍나무가 제 가슴팍에 부리를 묻고 있는 저녁

후드득, 바닥에 떨어지는 나무의 귀

누군가 새들의 신발을 주워 책갈피에 넣는다.



동아일보 권민경


오늘의 운세


나는 어제까지 살아 있는 사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할머니들의 두 개의 무덤을 넘어

마지막 날이 예고된 마야 달력처럼

뚝 끊어진 길을 건너

돌아오지 않을 숲 속엔

정수리에서 솟아난 나무가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수많은 손바닥이 흔들린다

오늘의 얼굴이 좋아 어제의 꼬리가 그리워

하나하나 떼어내며 잎사귀 점치면

잎맥을 타고 소용돌이치는 예언, 폭포 너머로 이어지는 운명선

너의 처음이 몇 번째인지 까먹었다


톡톡 터지는 투명한 가재 알들에서

갓난 내가 기어 나오고

각자의 태몽을 안고서 흘러간다

물방울 되어 튀어 오르는 몸에 대한 예지

한날한시에 태어난 다른 운명의 손가락

눈물 흘리는 솜털들

나이테에서 태어난 다리에 주름 많은 새들이

내일이 말린 두루마리를 물고 올 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점괘엔

나는 어제까지 죽어 있는 사람



부산일보 2011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나무의 문

                  김후인


몇 층의 구름이 바람을 몰고 간다

그 몇 층 사이 긴 장마와

연기가 접혀 있을 것 같다

바람이 층 사이에 머무르는 種들이 많다

發芽라는 말 옆에 온갖 씨앗을 묻어 둔다

여름, 후드득 소리 나는 것들을 씨앗이라고 말해본다


나는 조용히 입 열고

씨앗을 뱉어낸 최초의 울음이었다


오래된 떡갈나무 창고 옆에

나뭇가지 같은 방 하나 들였다

나무에 걸린 바람을 들여놓고 싶었다

지붕이 비었을 때엔 빗소리가 크다

빈 아궁이에 솔가지 불을 밀어 넣으면

물이 날아올랐다

물기를 머금고 사는 것들이

방안을 채울 줄 알았다

아궁이 옆에서 뜨거운 울음의 족보를 본다


실어 온 씨앗으로 바람은 키 작은 뽕나무를 키웠다

초여름, 초록이 타고 푸른 연기가 날아오르고

까만 오디가 달렸다


문을 세웠더니 바깥이 들어와

빈 방이 되었다

바람의 어느 층이 키운 나무들은 흰 연기를 품고 있다

어제는 나무의 안쪽이 자라고 오늘

나무의 바깥이 자랐다


나무는 어디가 문일까


문을 열어 놓은 나무들 마다

초록의 연기가

다 빠져나가고 있다

 

 

[한국일보 신춘문예/시]

'새는 없다'

                   박송이

 

우리의 책장에는 한 번도 펼치지 않은 책이 빽빽이 꽂혀 있다


15층 베란다 창을 뚫고 온 겨울 햇살

이 창 안과 저 창 밖을 통과하는 새들의 발자국

우리는 모든 얼굴에게 부끄러웠다


난간에 기대지 말 것

애당초 낭떠러지에 오르지 말 것


바람이 불었고

낙엽이 이리저리 굴러 다녔다

우리는 우리의 가면을 갖지 못한 채

알몸으로 동동 떨었다


지구가 돌고


어쩐지 우리는 우리의

눈을 마주보지 않으면서

체위를 어지럽게 바꿀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멀미를 조금씩 앓을 뿐


지구본에 당장 한 점으로

우리는 우리를 콕 찍는다

이 점은 유일한 우리의 점


우리가 읽은 구절에 누군가 똑같은 색깔로 밑줄을 그었다


새들은

위로 위로

날아

우리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새들의 발자국에게 미안했다


미끄럼틀을 타는 동안

우리의 컬러링을 끝까지 듣는 동안

알몸이

둥글게 둥글게

아침을 입는 동안


우리의 놀이터에

정작 우리만 있다


중앙일보 2011년 시 당선작


사막 - 박현웅


오랜 공복의 胃, 넓고 메마른 허기를 본다.

반짝거리는 털을 곧추세우고 걸어가는

몇 마리 신기루가 보였다

아니, 걷는 것이 아니라 건너고 있는 중이다

평생 모래를 건너도 모래를 벗어나는 일 없이

발목의 높이를 재보는 은빛여우


오래 전 모래 속에서 귀를 빌려온 죄로

사막에 소리를 맞기고 다녀야 하는 은빛여우

넓은귀로 입맛을 다신다.

사구의 그림자가 모래 속에서 걸어 나와 주름으로 눕는 밤

은빛여우의 눈은 빛의 껍질을 벗겨낸 말랑한 과육

소리에 민감한 어둠덩어리다

허기진 소리들이 더욱 환해지며 서로의 먹잇감이 되듯

무서운 것은 포식자가 아니라

찾아야 할 작은 먹잇감이다

바람이 불 때를 기다려 식사를 끝내고

약간의 풀이 있는 곳, 여우가 제 발자국을 오래 천천히 핥는다.


작고 빛나는 사막 한 마리가 죽어 있다

바람이 만들어 놓은 칼날, 서서히 날이 서가는

죽음의 속도보다 느리게 생명을 쓰러드린다.

여우의 몸은 떠난 숨결이 오래

은빛 털을 핥는다.

걸음을 내려놓고 날개 없이 은빛 털들이 날아오른다.

채색하는 모래바람은 일렁이는 밀밭풍이다

사막에서 살찌는 것은 바람뿐이다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_ 신철규/ 유빙(流氷)





유빙(流氷)/신철규



입김으로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다


눈물 속에 한 사람을 수몰시킬 수도 있고

눈물 한 방울이 그를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시계 방향으로,

나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커피 잔을 젓는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마지막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못했다

점점,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갔다

입김과 눈물로 만든


유리창 너머에서 한 쌍의 연인이 서로에게 눈가루를 뿌리고 눈을 뭉쳐 던진다

양팔을 펴고 눈밭을 달린다


꽃다발 같은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고 백사장에 눈이 내린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하얀 모래알

우리는 나선을 그리며 비상한다


공중에 펄럭이는 돛

새하얀 커튼

해변의 물거품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시계 방향으로

당신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우리는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심사평] 인간의 비극적 관계를 미세하게 통찰하는 눈 돋보여



   신춘문예 투고 시는 한국 현대시의 미래를 밝히는 작품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작품을 찾긴 힘들었다. 최종심에 남은 작품은 임여기의 ‘면접관’, 정승기의 ‘실종’, 이재흔의 ‘스파이더맨의 후예’, 이도은의 ‘아주 식물적인 꿈’, 신철규의 ‘유빙’ 등 5편이었다. ‘면접관’은 면접관과 면접인 간의 관계 대립을 긴장되고 설득력 있게 고조시켜나갔으나 결구 부분이 너무 안이했다. ‘스파이더맨의 후예’는 고층빌딩 유리창을 닦는 삶의 현장을 선명하게 나타냈으나 ‘제각기 다른 일상의 벼랑 끝에서 한 번씩은 실족했던 사연들이’ 같은 표현이 산문적이고 진부했다. ‘실종’ 또한 현대인의 실종의식을 진지하게 추구한 작품이었으나 전체적으로 산문의 옷을 입고 있다는 점이, ‘아주 식물적인 꿈’은 식물적인 꿈과 연결된 우리 삶의 구체적 양상이 불명확하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돼 결국 당선작은 ‘유빙’으로 결정되었다. ‘유빙’에는 인간의 비극적 관계를 미세하게 통찰하는 개성적인 눈이 있다. 현대사회의 개체적 삶을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에 은유한 점은 높이 살만하다. 시 본래의 내재적 리듬감을 살려 유연한 속도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신인다운 내면적 사고의 흐름도 알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도 과장된 이미지나 허장성세가 없고 기성의 어떤 억지스러운 틀에 갇혀 있지 않아 자유분방하다. 한국시단의 대들보가 되길 바란다.

문정희· 정호승 시인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아버지의 발화점 / 정창준



바람은 언제나 삶의 가장 허름한 부위를 파고들었고

그래서 우리의 세입은 더 부끄러웠다. 종일 담배 냄새를

묻히고 돌아다니다 귀가한 아버지의 몸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여름 밤의 잠은 퉁퉁 불은 소면처럼 툭툭 끊어졌고 물 묻은

몸은 울음의 부피만 서서히 불리고 있었다.


올해도 김장을 해야 할까. 학교를 그만둘 생각이예요.

배추값이 오를 것 같은데. 대학이 다는 아니잖아요.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생계는 문제 없을 거예요.

그나저나 갈 곳이 있을지 모르겠다.

제길, 두통약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남루함이 죄였다. 아름답게 태어나지 못한 것,

아름답게 성형하지 못한 것이 죄였다. 이미 골목은 불안한

공기로 구석구석이 짓이겨져 있었다. 우리들의 창백한

목소리는 이미 결박당해 빠져나갈 수 없었다. 낮은 곳에

있던 자가 망루에 오를 때는 낮은 곳마저 빼앗겼을 때다.


우리의 집은 거미집보다 더 가늘고 위태로워요.

거미집도 때가 되면 바람에 헐리지 않니. 그래요.

거미 역시 동의한 적이 없지요. 차라리 무거워도

달팽이처럼 이고 다닐 수 있는 집이 있었으면, 아니

집이란 것이 아예 없었으면. 우리의 아파트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고층 아파트는 떨어질 때나

유용한 거예요. 그나저나 누가 이처럼 쉽게

헐려버릴 집을 지은 걸까요.


알아요. 저 모든 것들은 우리를 소각(燒却)하고

밀어내기 위한 거라는 걸. 네 아버지는 아닐 거다.

네 아버지의 젖은 몸이 탈 수는 없을 테니. 네 아버지는

한 번도 타오른 적이 없다. 어머니, 아버지는

횃불처럼 기름에 스스로를 적시며 살아오셨던

거예요. 아, 휘발성(揮發性)의 아버지.

집을 지키기 위한 단 한 번 발화(發火).


* 조세희 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화법을 인용함.


심사평


실종된 현실인식의 발견… 뭉클하다


   스무 분이 겨룬 이번 본심에서는 현실사회에 대한 관심이 반영된 시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특히 보수 정부가 들어선 뒤 일상화한 사회경제적 위기의식이 예비시인들의 마음 밑바닥에 고이면서, 불안을 나누고 싶은, 나아가 희망을 찾고 싶은 연대의식, 소통 욕구가 발현된 것일 수도 있겠다.


   최종심에 정창준(‘아버지의 발화점’ 외 4편), 김유미(‘삼거리식당 지나 명랑슈퍼’ 외 4편), 김영진(‘도끼발’ 외 4편), 류성훈(‘밤의 도플러’ 외 4편), 한주연(‘슬리퍼를 밟는 순간’ 외 4편) 이 다섯 분의 시가 올랐다.


   김유미의 시편들은 글 다루는 솜씨, 이야기를 꾸미는 솜씨가 돋보인다. 유머러스하기도 하다. 그런데 특별히 새롭지가 않고 고만고만하다. ‘고백’은 김유미의 장점이 생기있게 모인 시다. 다른 시들과 ‘고백’은 백지 한 장 차이지만, 그 백지는 얼마나 두꺼운가? 한주연의 ‘슬리퍼를 밟는 순간’은 슬픈 얘기를 담담하게 그려 독자로 하여금 고즈넉이 귀기울이게 한다. 잔잔한 매력이 있는 자기만의 화법이다. 류성훈은 시적인 순간을 발견하는 능력이 빼어나다. 그런데 그 시적인 순간을 자기화하지 못한다. 늘 최종심에 오르지만 결국엔 내려놓게 되는 시들이 있다. 언뜻 아주 시적이나 공허하고 생명감이 없는 시들. 경험이 내재화돼 있지 않은, 육체가 없는 시들.


김영진의 시들은 ‘새만금’이나 대학생들의 취직 문제, 세습되는 가난 등 오늘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소재도 주제의식도 상상력도, 다 좋다. 그런데 목적의식이랄지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작위적이고 과장된 표현이 끼어 있어 시가 덜그럭거린다.


   정창준을 당선자로 내세우게 돼 뿌듯하다. 응모한 다섯 편의 시 가운데 어느 작품 하나 모자람이 없지만, 제일 앞장에 놓은 ‘아버지의 발화점’을 당선시로 올린다. 정창준의 시들은 우선 신선하다. 우리 시단에서 꽤 오래 실종됐던 현실인식이나 생활감각을 가진 시를 보게 된 것도 반갑지만, 그 사회적 상상력을 드러내는 발성이 새롭고 독창적이어서 더 반갑다. 정창준의 시들은 감동적이다. 뭉클하다. 심금을 울린다.


- 심사위원 이시영(시인), 황인숙(시인)


201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파밭 / 홍문숙


 

비가 내리는 파밭은 침침하다

제 한 몸 가려줄 잎들이 없으니 오후 내내 어둡다

다만

제 줄기 어딘가에 접혀있던 손톱자국 같은 권태가

힘껏 부풀어 오르며 꼿꼿하게 서는 기척만이 있을 뿐,

비가 내리는 파밭은 어리석다

세상의 어떤 호들갑이 파밭에 들러

오후의 비를 밝히겠는가

그러나 나는 파밭이 좋다

봄이 갈 때까지 못 다 미행한 나비의 길을 묻는 일은

파밭에서 용서받기에 편한 때문이다

어머니도 젊어 한 시절

그곳에서 당신의 시집살이를 용서해주곤 했단다

그러므로 발톱 속부터 생긴 서러움들도 이곳으로 와야 한다

방구석의 우울일랑은 양말처럼 벗어놓고서

하얗고 미지근한 체온만 옮기며 나비처럼 걸어와도 좋을,

나는 텃밭에서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한줌의 파를 오래도록 다듬고는

천천히 밭고랑을 빠져나온다




심사평



예년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눈에 확 띄는 작품은 없었다. 오늘의 한국시가 갇혀 있는 프레임을 과감하게 깨트리는 작품을 찾을 수 없어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저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소리를 중언부언하는 시는 눈에 띄게 줄었다. 아주 뛰어난 작품은 많지 않으면서도 당선작이 되어도 손색이 없을 작품은 적지 않아 선자들은 마음을 놓았다.

  특히 다음 네 분의 시가 처음부터 주목을 받았다. 홍문숙의 ‘파밭’ 등은 시를 쓴다는 경직된 포즈가 안 보이면서, 자연스럽고 신선하게 읽혔다. 속도감도 있는 데다 요즘의 유행과도 한 발 떨어져 있는 것도 미덕이었다. 그러나 투고한 작품들의 편차가 심해 쉽게 신뢰감이 가지 않았다.

  종정순의 ‘개나리는 왜’ 등은 기지도 있어 보이고, 밝고 환한 분위기의 시여서 심사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우리 시가 가진 청승과 궁상이 없는 것도 호감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화문석’ ‘현대방앗간’ 같은 산문투의 시들은 시의 맛을 반감시킨다.

  유명순의 시 중에서는 ‘내통’이 가장 뛰어났다. 부부 간의 관계, 나아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보는 시각이 자못 설득력이 있다. 한데 시들이 전체적으로 숨통을 조일 듯 답답한 것이 흠이다. 게다가 ‘뫼비우스의 띠’ 같은 흔해빠진 이미지가 일부 그의 시를 상투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최인숙의 시들은 모두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데다 표도 큰 무리가 없고 자연스러웠다. 한데 어쩐지 시창작교실의 냄새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시는 쓰는 것이지 쓰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시를 위한 시가 가지는 감동은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이상 네 사람의 시를 놓고 많이 얘기한 끝에 결국 홍문숙의 ‘파밭’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심사위원은 합의했다            - 심사위원  유종호 신경림



2011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손톱 안 남자 / 송해영


 

매니큐어 칠을 한 손톱 안엔

내 손톱을 장악한 한 남자가 살고 있다.

자꾸 자기 말 좀 들어보라며 나를 불러들인다.

무시를 할수록 자꾸 성가시게 군다.

귓가에 쟁쟁하게 맴도는 그 말은

달콤한 사탕을 물려주는 유혹과 같다.

더욱 들여다보라고 보채는 남자,

이 남자가 주는 카타르시스라니!

칠을 벗길수록 더욱 강해지는 스릴정도는

그도 잘 알고 있어 나를 정도껏 조종한다.

받아들이기 힘든 컬러를 자꾸 재촉한다.

바르라는 속삭임이 귓바퀴를 타고 들려오면

어쩔 수 없이 들여다보고 한참 얘기를 해주어야 한다.

이것으로 나는 어디에서나 돋보일 것을 예상한다.

그냥 이 남자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이렇게 말을 잘 들으면 일주일은 잠잠할 테지.

손톱 속 남자는 변덕이 심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내가 원하는 것, 어느새 이 유혹에 빠져 있다.

손톱 안에 살고 있는 남자,

칠을 지우면 죽어버리는 가혹한 운명의 남자,

내 손톱 안엔 한 남자가 징그럽게 살고 있다.


 

심사평


마음 속 갈등 절묘한 표현 돋보여


  이번 본심에 올라온 23명의 시들의 경향은 전반적으로 사회역사적 상상력의 퇴조가 뚜렷하다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이라고 치부하기엔 문학의 사회적 기능의 약화가 염려스러울 정도였다. 이를 대체한 얄팍한 생태주의, 깊은 사유에 도달하지 못한 채 감상주의에 머무른 많은 내면의 시, 그리고 판타지들을 보면서 괴로움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다행히 주명숙의 '즐거운 제국', 강혜원의 '카나리아', 송해영의 '손톱 안 남자' 라는 시편들을 만난 것은 다행이었다.

  주명숙의 시에서는 주방을 '즐거운 제국'으로 보고 거기서 '장기집권'을 누리는 주부 입장에서 "잘 버무려진 식단은 제국을 견인해 나갈 크레인이니까요"라고 말하는 그 발성법이 발랄하여 오래 눈길이 갔다. 강혜원의 시는 새장에 갇힌 아이새와 엄마새의 논전을 통해 아이새의 위험한 자유에 대한 갈망과 이에 대응하는 엄마새의 안일한 통찰을 대조적으로 드러내 세대간의 갈등과 소통을 말하고자 한 상상력이 빛나는 시였다.

  송해영의 <손톱 안 남자>엔 반전이 있다. 일찍이 서정주의 시 이래 여자의 '손톱'은 성적코드였다. 이 손톱에 "받아들이기 힘든 컬러를 자꾸 재촉"하는 남자의 요구에 부응한 메니큐어칠 행위는 남자의 변덕스런 욕망에 노예가 되어가는 여자의 안쓰러운 심리가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이 시의 반전은 남자가 원하는 것이 곧 "내가 원하는 것"이라는 진술로, 이는 우리 마음속의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갈등을 절묘하게 표현한 것이다. 하나의 마음은 남자의 '조종'을 거부하면서도 또 다른 마음은 어느새 나도 그를 조종하고 싶은 성적욕망 말이다.

  위 시들 중에 한 편을 골라내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예심자를 불러 상의했으나 결국 나의 결정은 가능성 쪽에 무게를 둔 송해영이었다. 송해영은 다른 시편들도 일정한 수준을 유지해서 믿음이 갔지만 표현의 평이함이 자꾸 눈에 거슬렸다. 이를 보완하면 좋은 시인이 될 걸로 믿어 당선으로 민다.

-심사위원 고재종



2011 년<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덩굴장미 / 김영삼 



  저 불은 끌 수 없다

  차가운 불


  소나기 지나가자 주춤하던 불길 거세게 되살아나 담장을 또 활활 태운다 잔주름 늘어나는 벽돌담만 녹이면 단숨에 세상을 삼킬 수 있다는 건가 막무가내로 담장을 오르는 불살, 한 번도 불붙어 본 적 없는, 마를 대로 마른 장작 같은 몸뚱이 확! 불 질러 놓고 재 한줌 남기지 않고 스러져도 좋을 무덤, 큼직한 불꽃이 서로 팔들을 엮고 저들의 등을 밟고 올라선 불꽃들이 또 하나의 일가를 이룬 곳으로 나는 걸어 들어간다 나에게 불을 다오, 저들의 영토에 손을 내미는 순간,


  나는 차가운 화상을 입는다

  불똥은 땅에 떨어져 꽃으로 자꾸 피어나는데


  나는 졸지에 불을 잃다



심사평


참신한 언어감각과 신선한 비유가 좋아


  금년도 응모 작품들은 예년에 비해 작품 수는 많았으나 특출한 작품이 없어서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며 상투적인 언어의 시들과 신춘문예라는 옷을 입고 등장한 작품이 많았다. 그런 작품들은 자칫 진실성이 결여되어 가식적이고 허영적인 글이 되기 쉽다.


  이번 심사에서는 오늘 이 시대의 삶을 반영하는 시, 새로운 언어감각의 시, 그리고 신인다운 특성과 참신성을 높이 평가했다.


  본심에 올라온 열다섯 분의 작품 중 오영애씨의 `흰 꽃이 지다'는 언어감각은 뛰어났지만 주제의식의 깊이가 약한 것이 흠이었다. 정솔씨의 `공룡능선'은 비유가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어서 설득력이 약했다.


  당선작인 김영삼씨의 `덩굴장미' 외 `初冬'은 뛰어난 언어감각과 신선한 비유가 좋았다.


  예를 들면 `덩굴장미'를 `차가운 불'의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또한 “자신이 차가운 화상을 입는다”라는 비유는 매우 신선하고 감각적이었다. 주제의식 역시 보편성을 내면화하고 있으며 특히 “나는 졸지에 불을 잃다”라는 표현은 생명의 상징성을 아이러니한 표현 기법으로 승화시킨 뛰어난 작품이었다. 당선을 축하한다.

- 심사위원 이승훈·이영춘



2011년 <전북일보>신춘문예 당선작



오래된 골목 / 장정희



작은 아버지 바지가 걸린 바지랑대 사이로 푸석한 골목이 보였다.

구암댁 할아버지 이끼 낀 돌담을 짚으며 모퉁이를 돌아가고

양철대문이 덜컹, 삽살개가 기다림의 목덜미를 물었다.

입대한 큰아들 주검으로 돌아오던 그날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작은 아버지는 좀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발가락이 오그라든 대문은 문패를 버리고 밤새

신작로 쪽으로 귀를 던져 놓고 있었다.

낮은 지붕을 내려온 거미가 먼저 발을 내딛는 골목,

목줄을 잡아 맬 수 없는 굴뚝으로 연기는 담쟁이넝쿨같이 기어 나왔다.

뼈마디 드러난 상처를 덮듯 배추는 또 자라나고

햇살은 어두운 골목에 도둑고양이의 눈빛을 씨앗처럼 심어주었다.

다섯 살 박이 손자가 작은 아버지 팔을 잡아당기며 대문을 나서고.

나는 빨랫줄 문 집게처럼 뻣뻣한 골목의 시간을 만지고.

바람이 골목에 발을 담글 때마다, 나는

한 남자의 내면을 수없이 들여다보았다.



심사평


참신한 묘사적 표현, 시에 생기 불어 넣어


좋은 시는 남들과 다른 언어를 건지려는 노력에서 나온다. 그렇게 태어난 시는 이기적이면서 품이 넓다. 그런데 비유가 생경한 시, 비문이 노출된 시, 인위적으로 제작하는 데 급급한 시들이 지 않았다. 다들 조바심을 내는 듯했다. 발효와 숙성 과정을 거친 시들이 그만큼 아쉬웠다는 이다.


네 분의 시가 마지막까지 남았다. 정지웅 씨의 '매미'는 매미 울음이 공중에 구멍을 뚫는다는 치 있는 발상의 시다. 발상이 그저 발상으로 끝난 아쉬움이 크다. 소재를 끝까지 밀고 가는 힘을 워야 할 것이다. 이명옥 씨의 '사과 연대기'는 어투가 매우 발랄하고 상상의 진폭이 크다. 시에서 감각을 어떻게 끌어올려야 하는지 아는 사람 같다. 하지만 시를 만지는 손끝이 너무 쉽게 드나보이는 게 흠이다.최병국 씨의 '구름을 걷는 달팽이' 외 몇 편은 상당히 현란한 상상력과 언어 사 능력을 보여준다. 문장과 문장 사이 의미의 연결이 불투명한 약점을 시급히 보완하면 좋겠다.그리하여 우리는 장정희 씨의 '오래된 골목'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합의했다. 언뜻 보면 평이해 이지만 자신의 사유를 잘 간추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있는 시다. 군데군데 참신한 묘사적 표이 시에 생기를 더하면서 '오래된 골목'의 전경을 형상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앞으로 더 좋은 시를 보여주는 시인으로 성장하시기를 바란다. 축하를 드린다.


-심사위원  황동규(시인·서울대 명예교수),안도현(시인·우석대 문창과 교수)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 김지혜



들판의 지표면이 자라는 철


유목의 봄, 민들레가 피었다

민들레의 다른 말은 유목

들판을 옮겨 다니다 툭, 터진 꽃씨는

허공을 떠돌다 바람 잠잠한 곳에 천막을 친다

아주 가벼운 것들의 이름이 뭉쳐있는 어느 代

날아오르는 초록을 단단히 잡고 있는 한 채의 게르

꿈이 잠을 다독거린다.


  떠도는 혈통들은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어느 종족의 소통 방식 같은 천막과 작은 구릉의 여우소리를 데려와 아이를 달래는 밤

  끓는 수태차의 온기는 어느 후각을 대접하고 있다.


  들판의 화로(火爐)다.

  노란 한 철을 천천히 태워 흰 꽃대를 만들고 한 몸에서 몇 개의

  계절을 섞을 수 있는 경지

  지난 가을 날아간 불씨들이

  들판 여기저기에서 살아나고 있다.


  천막의 종족들은 가끔 빗줄기를 말려 국수를 말아 먹기도 한다.

  바닥에 귀 기울이면 땅 속 깊숙이 모래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초원의 목마름이란 자기 소리를 감추는 속성이 있어 깊은 말굽 소리를 받아 낸 자리마다 바람이 귀를 접고 쉰다.


  이른 가을 천막을 걷어 어느 허공의 들판으로 날아갈 봄.



심사평


삶을 응시하는 깊이와 고단한 삶 밝게보는 능력 탁월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의 심사는 예심 없이 271명이 보낸 전체 응모작을 심사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중에서 1차 심사를 통과한 작품은 총 27편이었다. 논의에 논의를 거쳐 최종심까지 오른 작품은 '벗어놓은 외출' '둥근 강' '폐기물집하장 가는 길' '비밀의 화원'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등 5편이었다. 이 중에서 '비밀의 화원'과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를 놓고 심사위원들의 최종논의가 있었다.


  '비밀의 화원'은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룬 시로서 작가의 현실인식이 돋보이는 시였다. 이주노동자를 형상화하는 데에 있어서 그들의 수난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는 정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거리를 두고 조심스럽게 그들의 아픔에 다가가는 솜씨가 뛰어난 시였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가 오히려 이주노동자의 삶을 자기 아픔으로 여기는 데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화자가 관찰자의 태도로 물러서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는 민들레의 씨앗이라는 미시적인 사물들에서 유목민들의 삶을 거시적으로 이끌어내는 발상이 참신한 시다. 민들레의 꽃말에서 유목을, 민들레 홀씨가 부푼 모양에서 유목민의 텐트인 게르를 연상하고, 이를 수태차, 말발굽 등으로 이어나가는 이미지가 자연스럽다. 이를 통해 유목민의 고단한 삶을 봄의 이미지를 살려 밝게 형상화하는 능력이 탁월한 점이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두 편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역량이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응모작의 전반적인 수준에 있어 김지혜가 고르다는 점을 높이 사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를 당선작으로 하기로 했다. 당선을 축하하며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  정희성 강영환 시인, 허정(문학평론가)



2011년 <무등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외출을 벗다 / 장요원



한낮의 외출에서 돌아가는 나무들의 모습이 어둑하다

탄력에서 벋어난 하반신이 의자에 걸쳐 있고

허공 한쪽을 돌리면

촘촘했던 어둠들, 제 몸쪽으로 달라붙는다

의자의 각을 입고 있는 외출

올올이 角의 면을 베꼈을 것이다

이 헐렁한 停留의 한 때와 푹신함이 나는 좋다

실수를 엎질렀던 재킷과

몇 방울 얼룩이 튄 블라우스의 시간을 벗을 수 있는 헐렁한 집


여전히 외출들은 걸려 있거나 접혀져 있다

그러고 보면 문 밖의 세상은

모든 외출로 건축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빛도 식욕도 변기의 물 내리는 소리도 모두 외출에서 돌아와 있는,

텅 빈 건너편이 조용히 앉아있는 의자

침묵의 소요들이 모두 돌아간

세간들에 달라붙는 귀가한 소음들

왜 집안엔 깨어지기 쉬운 소리들만 있는 것인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저녁

오늘의 바깥은 다행히도 한 올의 올도 나가지 않았다

눅눅한 각을 입고 있는 스타킹과

긴 팔을 뻗어 아카시아 이파리를 헹구는 바람의 시간

잠든 몸을 조용히 돌아다니는 숨소리

괄호를 열고 몸을 구부리는 잠이 깊다.


==================================

심사평


시의 새벽을 여는 신생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20년 역사의 신춘무등문예는 가히 전국적인 위상을 구가하는 듯 보였다. 풋풋함의 기척들이 채 가시지 않은 십대들의 투고작에서부터 멀리 해외 이민자에 이르기까지 원고들이 걸어온 주소지는 경향각지에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천 여편에 이르는 투고작들에게서 아직은 기척같은 시의 유용성을 감지하는 일만으로 선자는 잠시 기꺼워지기로 하였다. 그리고 곧 '한 편의 시'를 찾아나서는 고통의 축제는 시작된다.


  순간마다의 갸우뚱거림과 안타까움과 아쉬움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최종적으로 6명의 작품이 남았다. 어쩌면 그렇게 줄여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민달팽이'외 4편을 투고한 정순의 작품에서는 타자들에 비해 튼실한 시적 문장의 안정감이 짚혀졌다. 그러나 문제는 5작품 모두가 동어반복으로 읽힌다는 점이다. 좀처럼 표정을 바꾸지 않은 시안(詩眼)과 보폭으로 그의 시는 앞을 향해 나아가는 모험을 주저하고 있었다.


  '화장터 가는 길'외 3편을 낸 박다영은 표제시의 수준을 다른 작품들이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사막의 오후 세 시는 당신이 가루가 되기 적당한 온도" 등에서 보이는 고투의 언어를 통해 미지의 그의 시의 기미가 짐작됐다.


  '거울을 마주한 이상'외 2편의 서경에게서도 지난한 습작기를 거쳐온 노회한 문장들이 읽힌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에게서도 "시의 새벽을 여는 신생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발자국에 빠지다'외 3편을 낸 유시은의 시는 한편으로 기성에 가까웠다. 여기 '풀밭'인 경연장에서 그의 시는 자연히 불리했다.


  '전어'외 3편을 응모한 김정애와 '바람의 고삐'외 2편을 낸 장요원의 작품이 남겨졌다.


  김정애의, '전어'가 올려진 아버지의 밥상은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양철밥상'이다. "젓가락 끝을 맞추려는지" "탕 탕" 양철북 소리를 낸다는 바라봄만으로, 실상(實想)이 시가 되는 지점을 간파한 듯 여겨졌다.


  그러나 그의 시 역시 '그늘'을 거느린 완성된 시력에는 다소 미치지 못했음이 아쉬웠다.


  세 편의 투고작이 고른 수준에 올라 있는 장요원의 시 '외출을 벗다'를 당선작으로 결정한다. "오늘의 바깥은 다행히도 한 올의 올도 나가지 않았다" 는 '스타킹'의 환치는 비교적 젊고 튼튼하게 읽혔다. 한 편으로 어딘지 수사와 외피에 조율하는 듯 여겨지는 그의 시업의 미래는, 현재의 바탕 위에서 '깊이'의 모서리를 체득하는 일에 한동안 복무해야할 것으로 비쳐졌다.


  당선자의 장도가 보다 원대하고도 높이 있는 영토에 거뜬히 안착하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 정윤천



2011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아주 흔한 꽃 / 변희수



갈 데까지 갔다는 말을

안녕이란 말 대신 쓰고 싶어질 때

쓰레기통 옆 구두 한 켤레

말랑한 기억의 밑창을 덧대고 있다

달릴수록 뒷걸음 치는 배경 박음질 해나가듯

나란히 하나의 길을 꿰고 갔을 텐데

서로 다른 기울기를 가진 한 짝

축을 둥글게 깎고 고르는 순간

길은 저마다 제 발에 꼭 맞는 문수로

열려 있었을 것이지만 떠날 때는

모두, 안개를 배경으로 걸었을 것이다

가파른 직선 혹은 곡선의 에움길을

밀어 넣을 때마다 팽팽하게 긴장하던 구둣볼

끈을 고쳐 매고도매듭 없이

결의만 다지던 저녁이 온 것처럼

코끝을 돌려놓고 자도

늘 잘 못 든 길처럼 헛갈리는 아침

이정표 없는 허방에도 덜컹, 꽃피는 길 있었는지

밑창에 찍힌 발가락 모양이 꾹꾹 눌러놓은

압화처럼 선명하게 피어 있다

어느 고대국가의 지층에 새겨진 족적처럼

누구나, 뒤축이 닿는 순간 스스로의 삶을

탁본하게 되는 것이므로

몫의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어놓고

서늘하게 빠져나간 맨발

얼룩도 꽃의 흔적을 닮을 수 있는지

헐렁한 구두 속의 여백이 꽉 찬다



심사평


사물과 세계 적절히 통제, 시적긴장 부여


  예년에 비추어 특별히 뛰어나다 할 수 없는 올해의 응모작품들을 두고, 심사위원들이 숙고 끝에 마지막으로 간추려보았던 시편은 변희수, 황제윤, 권명호 제씨의 것이었다. 위의 세 분은 균제미가 고루 돋보이는 시적 성취들을 함께 선보이고 있었다.


  권명호씨의 시는 생활의 이면들을 어느 정도 생생한 시화로 구체화시킬 줄 아는 응모자의 절제된 구상력을 엿보게 했다.


  혈육의 애틋한 정을 일깨운 '아버지의 발등'과 같은 시가 일례일 것이다. 그러나 일상성을 뚫고 솟아오르는 이런 감동이 역설적으로 신인다운 상상력과 개성을 희석시키는 것이 아닐까 판단되었다.


  황제윤씨의 시편에는 풍경을 해석하고 감싸 안는 시선의 깊이가 느껴졌다.


  웅장하게 세워지는 대불보다 환하게 꽃피운 해당화의 생명력에 주목한 '꽃불'이나,눈발들의 시각화로 차창 밖의 풍경을 문면 가득 흘러넘치게 한 '운주사, 덜컹거리는' 등은 응모자의 패기와 시적 자질을 충분히 읽어내게 하였다.


  변희수씨는 전체적으로 사물과 세계를 적절히 통제해 시적 긴장을 부여할 줄 아는 응모자로 여겨졌다.


  범상한 소재들로 삶의 미묘한 국면들을 저울질하고, 그만한 짜임새의 시로 격상시킨 것은 그의 수련이 어느 정도의 성취를 아우를 만한 수준에 이르지 않았을까 기대하게 하였다.


  그런 기시감이 황제윤씨의 앞자리에 그를 내세우게 한 까닭이다.


심사위원들은 변희수씨의 응모작 중에서 '아주 흔한 꽃'이 고단하게 걸어온 삶의 내력을 행간과 행간 사이로 더욱 섬세하고 선명하게 부조(浮彫)해 보인다고 평가했다.



- 심사위원 이하석·김명인 

 

[출처] 아련한 가슴시린 추억때문에.... 작성자 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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