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청공-제 2회편
2012.01.21 06:52
제 3장: 일본 사람의 미소(微笑).
(국보(國寶) 1호(一號)의 나무에 새긴 미소)
도리켜 보면 지금까지 살아 오는 동안 이토록 일본에대한 오해를 갖게 된 것은 생각해 보면 살리나스(Salinas) 고등학교에 다닐 때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말씀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11학년(한국에서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할아버지는 아주 엄숙하고 조용히 내게 마치 무성(無聲)영화의 변사(辯士)가 반복해서 말하듯이 훈계를 했었다.
"손자야! 일본 사람들의 미소를 경계하거라."
"예? 할아버지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나는 영문을 몰라 되 물었으며 아주 당혹스러웠다.
"일본 사람들은 누구를 보든 '하이!'라고 말하면서 교활하게 살짝, 꾸며서 웃는단다. 특히 여성들은 불여우처럼 교활하게 웃는단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정반대란 말이다. 겉다르고 속 다르다는 말이다. 손자야!"
"할아버지, 일본 여자들을 보세요. 아주 상냥하며 잘 웃지요. 그러기에 아주 매력적이지요. 이건 미국사람들도 인정한답니다. 할아버지는 오버 하시는군요."
"빌, 너는 그렇게 느낄지 모르나, 일본 사람들의 웃음은 훔쳐온 웃음이란다. 아니 모조품(模造品) 웃음이란 말이다. 알겠느냐?"
"훔쳐 오다니요? 그리고 모조품이라니,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군요." 나는 할아버지가 진정 인종 차별주의자라고 단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일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예의 바르고 살프시 웃음을 지으며 상대방에게 조금도 무례하게 대하지 않는 일등국민이라고 인정하며 살아 왔기 때문이었다. 반면, 한국 여성들은 웃음보다는 화난 얼굴이 더 많은듯해 사실 나는 같은 민족이긴 하지만 좋아 하지 않았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이런 생각을 전했더니 뜻밖의 말을 하셨다.
"빌! 일본 사람들은 남의 웃음 까지도 자기들의 것으로 포장하는 인간들이니라. 일본의 국보 일호(國寶一號)는 '웃음'이니라. 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橡)이라고 하는 목조미륵상이니라.이 유명한 반가상의 웃음은 인간으로 가질 수 있는 가장 오묘한 웃음인데 마치 자기들이 만든 것 처럼 선전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알고보면 신라때 만들어진 목조 반가상을 강제로 빼앗아간 것이란다. 아직도 보살인 미륵이 상념하고 생각하다가 마침내 진리를 깨닳으면서 해탈하여 석가가 되는 순간의 그 웃음이니라. 모든 것을 알게 된 후 느끼는 그 희열이 입에서 웃음으로 보이는 그 순간이니라. 이토록 거룩한 웃음을 일본 사람들은 단지 인간의 옅은 그 웃음으로 포장하였느니라. 알겠느냐? 빌!"
"예? 신라때 만든 것을 강탈해 갔다구요?" 나는 설마 하는마음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다 보았는데, 뜻밖에도 할아버지의 얼굴은 너무나 진지하며 내게 호소하는 듯한 간절함이 내 가슴을 화끈하게 적시고 있었다.
"그래, 신라의 웃음을 일본의 웃음으로 둔갑시켰느니라. 손자야."
'신라의 웃음을 일본의 웃음으로 둔갑시켰다니.....'
할아버지의 모습은 마치 강한 신념에 찬 도사(導師)님 같아 보였으며 그 비장한 모습에 나 스스로가 감동을 받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비상한 분이시구나.'
나는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웃음이란 말 하나로 미심적었던 할아버지를 깊이 이해 했으며 역설적으로 일본에 대한 반감이 급속하게 커지기 시작했다.
'일본 사람들, 아니 일본 놈들!'
주: 한국의 불교는 중국으로부터 전수 받았으며 백제 신라 그리고 고구려는 일본에 전수해 주었다. 그중 목조 불상은 7세기 이후에 일본에 전수해 주었는데 신라에서 만든 반가사유상에 쓰는 소나무가 다르며 기법도 다르기에 일본의 국보 일호는 신라에서 만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본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의 미소는 어떻게 다른가?'
나는 그날 이후 의도적으로 두 민족의 웃음을 비교해 보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들은 웃음보다 무표정한 얼굴이 더 많았으며 찡그리는 얼굴도 자주 보았다. 그런가하면 작은 일에도 화를 잘 내며 양은 냄비에 물 끓듯한 감정의 변화를 보여 주었다.
반면 일본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강력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들보다 감정의 변화가 적었으며 특별히 여자들은 늘 웃음을 지을 뿐만 아니라 애교마저 많은 것으로 보아 미륵 보살반가사유상은 자연스레 웃음이 많은 일본 사람들이 만들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왜? 한국 사람들은 일본사람들에 비해 웃음이 적은가?'
생각해 볼 때마다 나의 마음이 씁쓰름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사실이 그러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의 얼굴을 보노라면 마치 덜 익은 땡감을 먹고 찡그리는 구겨진 얼굴 모습이 유달리 많았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의 말씀과 현실 앞에서 나는 혼동을 느끼고 있었다.
4장: 엘리트(Elite)인 내가 사람을 죽이다니......
(殺人者-엘리트)
"내 이름은 김병선(金秉宣, William, Bill)이라고 합니다. 1976년 8월 12일에 태어났으니 금년에 32살이 조금 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한국계 미국 이민 4세(世)이기에 겉모양만 한국 사람이지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은 완전히 미국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미국 은어(隱語)로 말하면 '바바나(Banana)'라고 부릅니다.
바나나(Banana)란 겉은 동양 사람처럼 노란 색이나 속은 백인처럼 완전히 흰색이란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스스로 미국 제일의 엘리트라고 부른답니다. 상위 5%에 해당되는 잘난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그것도 그럴 것이 스탠포드 대학을 나온 의사로 대학 병원에서 외과 수련과정을 밟고 있으니 누가 봐도 '와, 스탠포드! 당연하지 미국 제일의 대학인데...'라고 동의를 한답니다.
나는 알다시피 존. 스타인백(John Steinbeck)의 고향인 살리나스(Salinas)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치고 스탠포드에 진학해 의사가 되었지요."
*
미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팔로 알토(Palo Alto)에 있는 스탠포드 대학 캠퍼스를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대학교로 들어가는 입구인 캠퍼스 드라이브(Campus Drive)에 와보면 우뚝 솟은 야자나무가 마치 두 손을 높이 들고 어서 오라고 여러분들을 환영하는 듯하다. 세계 도처에서 온 관광객들이 가지각색의 옷들을 입고 슬렁슬렁 돌아다니는 모습들이 눈에 뜨이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즐거운 모습으로 마치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처럼 흥분되어 있는 듯 해보였다.
중세기 풍의 빨간 지붕을 가진 퇴락한 건물들과 우뚝 솟은 현대식 건물의 조화는 미국의 미래를 밝혀주는 상징처럼 보인다.
1891년 칼리포니아 주지사 스탠포드가 그의 아들이 향년 17세로 세상을 떠나자 하늘나라에 간 아들을 그리워해 전 재산을 바쳐 대학을 설립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과 아름다운 대학 캠퍼스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젊은이들의 사랑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듯하다.
그러기에 여기서 보낸 나의 4년간의 대학생활과 4년간의 의과대학 생활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리고 의사가 되어 여기에서 다시 수련을 받고 있으니 나는 과연 상위 5%에 드는 엘리트중의 엘리트라고 자부한다.
*
돌이켜 보면 의과대학 4학년 때 나는 여기 이토록 아름다운 스탠포드 대학 병원에서 사람을 죽인 사건이 있었다..
"아니? 당신, 사람을 죽였다고요, 살인자(殺人者)?"
"예, 사람을 죽였는데 다행스럽게도 용서를 받았지요."
"용서를? 어떻게?"
"일본사람이 나를 도와 줘서요."
"일본 사람?"
"예. 할아버지가 그토록 미워했던 그 일본 사람 덕분에 용서를 받았어요."
*
- 그 바보같은 의료 과실 살인 사건(殺人事件)도 따지고 보면 할아버지가 가르쳐 준 일본 사람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발생한 아주 어처구니없는 실수에서 온 것이었다.
의과대학 4학년(2005년 8월)이 되면서 스탠포드대학병원에서 외과 실습을 시작하게 됐는대, 외과 실습을 직접적으로 지도해 준 수련의사가 하필이면 할아버지가 그토록 싫어하며 경계하라고 일러준 일본 의사(외과 수련의 1년차), 리차드 이시카와( 石川.Dr.Richard Ishikawa)였다.
'이시카와? 일본사람? 아니 하필이면 일본 놈을...' 나는 기분이 나빠 닥터 이시카와에 대해 좀더 알아보았는데 뜻밖에도 그는 콜로라도 의과대학을 나왔으며 나보다 한 살이 더 많았다.
'콜로라도 의대? 말도 안 되지. 이류(二流) 의대를 졸업한 주제에 어디 여기 스탠포드에 와서 수련을 받는담. 말도 안 돼!' 나는 순간 그를 깔 보고 있었다.
이른 아침, 나는 외과 병동에서 이시카와를 만났다. 그는 비쩍 마른 체구에 키가 훌쩍 크고 머리가 조금 빠진 것으로 보아 영양실조에 걸린게 아닌가 의심이 생겼다. '그런 체격을 갖고 수술을 할 수 있을까? 아니지!' 몇 시간씩 물도 못 먹고 긴장해서 수술을 하려면 강한 체력이 필요한데 마른 명태처럼 비쩍 마른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문득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
그런데 뜻밖에도 이시카와는 일본 사람 특유의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지만 내게는 오히려 귀찮았다.
"하이, 빌(Bill)! 나는 리차드(Richard)라고 해요. 앞으로 2주간 나와 같이 일반 외과 병동에서 일하게 됩니다. 스탠포드 의대생이니 훌륭하군요. 허지만 여기 외과의 규율은 잘 알다시피 군대와 마찬가지이기에 윗사람의 명령에 철저히 따라줘야 합니다. 아니면 생명이 왔다 갔다 합니다.
아시겠죠, 빌? 자 나와 같이 외과 병동으로 가십시다. 어제 밤에 응급실을 거쳐 맹장 수술을 받고 누어있는 환자부터 회진합시다."
그는 일방적으로 자기 말만 한 후에 앞장서서 뒤도 보지 않고 저벅저벅 걸어가고 있었다.
'아니 볼품 없는 2류(2流) 의대를 나온 주제에 나더러 오라가라 하다니, 게다가 쪽발이 일본놈이.'
나는 다소 심통이 났으며 오기가 솟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한 말씀이 문득 전기에 감전된 듯이 생각났다.
"손자야! 일본 사람들은 잘 웃는 듯하나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으니 조심하라!"라는 말씀이었다.
나는 이시카와를 따라 외과 병동과 수술실을 오고 갔지만 마음속에서는 철저히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주일간 그와 같이 지내면서 이시카와에 대한 인식이 점점 바뀌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아주 예의 바르고 부지런한 의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나는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일본 사람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꿀 수가 없었다.
*
실습 2주 째 되 던 날....
의사는 모름지기 죽어 가는 사람을 고치는 것이 임무이지 멀쩡한 사람을 죽게 한다면 분명 실수로 인한 살인이 되는 셈이다.
내과병동에서 외과 수련의사, 이시카와에게 긴급하게 외과지원 요청(surgical consultation)이 들어와 이시카와는 물론 그 밑에 속한 나 또한 급히 내과 병동으로 달려가게 됐다.
헐레벌떡 급히 달려가 보니 내과 실습 학생으로 나온 동기생이 먼저 와 있었으며 그는 비교적 조용한 백인이었다.
나와 동기생은 이시카와를 기다렸으나 웬일인지 도착하지를 않았으며 환자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다소 뚱뚱한 히스페닉계통의 간호원은 발을 구르며 안타까워 했다.
"닥터. 이시카와는 왜 안 오는 거요? 빨리 와야지, 이러다가 환자는 죽어요!" 간호원은 안타깝다는 듯이 외과 의사를 일방적으로 원망하고 있었다.
"환자가 몹시 숨차 하는데 이시카와는 오지 않고, 이것 봐! 더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시술을 해 버릴까? 쇄골(碎骨)정맥에 주사바늘을 삽입하는 것 별거 아닌데....." 나는 내과 실습 나온 백인 친구에게 의기양양하게 나 자신을 과장했다.
"그래, 너 몇 번 해 봤니?" 친구는 부러운 듯이 내게 물었다.
"어, 두 번"
"그래? 그렇다면 네가 해도 되겠네. 나는 한 번도 못해 봤는데......"그는 부러운 듯이 운을 띄어 주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의과대학생이지 의사는 아니잖아. 옆에서 수련의가 같이 입회를 해야 하는데..."나는 의사와 학생의 법적 신분을 잘 알기에 친구에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환자가 죽어가는 데....네가 해봐! 어서!"
"그럼 내가 할까?" 나는 이시카와의 입회도 없이 당당하게 쇄골하(碎骨下) 정맥에 긴 플라스틱으로 만든 주사 바늘을 꽂아 넣기 시작했다.
콜로라도 의대를 나와 외과 수련하는 이시카와쯤이야 하는 깔보는 마음으로 환자의 목주위에 불뚝 솟은 정맥을 힘'�찔렀다.
"댐(Dam)! 아파! 아파!" 숨이 차고 바짝 마른 백인 환자는 아픔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를 쳤다.
"썰(Sir!) 조금만 참으세요, 조금만."나는 판단력을 잃어 버렸는지 당황하면서 오히려 더 깊이 찔렀다. 그 순간 '팍'하는 느낌이 내 손끝에서 느껴졌다.
'아뿔싸! 폐(肺)를 찔렀구나, 어쩌나.'나는 이성을 잃고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 순간 내 손을 낚아채는 또 다른 손이 있었는데, 언제 왔는지 이시카와가 바늘(catheter,카테타)을 어느새 빼버리면서 멍하니 서있는 간호원을 향해 명령을 했다.
"간호사! 산소통을 가져오소. 그리고 흉부 삽입 수술 세트(Thoracotomy set)도 가져오소. 빨리!"
닥터. 이시카와는 환자에게 산소마스크를 씌우고 가슴, 갈비뼈 사이를 뚫고 플라스틱 튜브를 순식간에 삽입하였다.
그리고 환자의 입을 벌리고 호흡기 튜브를 삽입한 후 인공 호흡기계를 연결한 후 중환자 실로 보냈다. 불과 몇 분 사이에 해 치운 아주 신속한 이시카와의 시술(施術)을 바라보면서 나는 감탄을 하고 있었다.
'와! 닥터. 이시카와? 훌륭하군, 아주 훌륭하구나.' 나는 마음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감탄을 했다.
백인 환자는 중환자 실로 옮겨졌으나 애쓴 보람도 없이 두 시간 후에 사망하고 말았다.
'어! 환자가 죽었어? 망했구나! 제길 할!'나는 벌벌 떨고 말았다.
의사 면허도 없이 더구나 수련의사의 입회도 없이 단독으로 시술하다가 죽었으니 나는 살인자(殺人者)가 되는 셈이며 처벌을 받아야만 했다.
의학생이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이 병원에 삽시간에 퍼지고 보니 병원측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화가 난 몇 명의 남녀들이 폭도들처럼 복도로 달려 들어오고 있었는데 모름지기 죽은 환자의 가족들 같았다.
"사람 죽인 의사, 동양 사람이라고 했지? 동양 놈!"
그들은 외과 의사인 이시카와를 주치의사로 혼동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몹시 화가 난 그들에게 섯불리 얼굴을 보였다가는 몰매라도 맞아 죽을 것 같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가끔 고개를 살짝 들고 그들을 흘끔 흘끔 훔쳐보았다.
잠시 후 복도에서 내과 레지덴트(수련의)와 외과 의사 이시카와가 그들 보호자들을 상대로 무엇인가 설명을 하고 있는 듯 했는데 보호자들은 더 이상 들으려고 하질 않았으며 그중 남자 하나가 갑자기 성질을 못 참고 이시카와의 멱살을 잡고 뒤 흔들면서 소리치는 것이 내게 똑똑히 들렸다.
"네가, 의사도 아닌 학생 주제에 바늘로 환자를 찔러 죽였니? 네가!" 이시카와가 학생인줄 알고 더 강하게 목을 뒤 흔들었다.
"...................." 불쌍하게도 이시카와는 대답을 못하고 그가 흔드는 대로 마치 갈대처럼 당하고만 있었다.
"너는 의료 보험도 없는 학생이야! 고소하겠어. 고소!"
"............"이시카와는 역시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었다.
"야! 너도 죽어봐, 너도!" 화가 극도로 오른 보호자들은 대꾸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는 이시카와를 마구 흔들다 못해 마침내 주먹으로 내리쳤다. 가엾게도 이시카와는 복도에 나딍글었으며 쓰고 있던 안경마저 땅에 떨어졌다.
"이봐요! 당신들, 감히 의사를 때리다니! 경찰을 불러, 경찰을!" 간호원이 보다 못해 보호자 중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의 팔을 잡고 항의를 했다.
"의사? 엉, 사람 잡는 의사! 당신은 저리가!" 화가 풀리지 않은 보호자들은 간호원을 밀쳐 버리고는 2층에 있는 병원장 실로 바람을 날리면서 우루루 달려갔다.
아마도 거친 항의를 하여 분을 풀뿐만 아니라 고소라도 하려는 듯했다.
"병원장 나와! 생사람 잡는 병원, 스탠포드?"
거친 항의를 받으며 겁에 질린듯 한 병원장 앞에는 건장한 수위가 이미 와서 지키고 있었으며 경찰이 출동하고 있다고 했다.
삽시간에 나에 대한 나쁜 소문이 병원 전체에 나 돌기 시작했는대 별로 좋은 반응이 아니었다.
"겁도 없이 스탠포드 의대생이라고 뽐내던 동양 놈이, 사람을 죽였으니 병원에서 돈 꽤나 보상해 줘야 될 거다. 동양 놈, 학생 주제에 사람을 죽였으니 졸업은커녕 교도소에 보내야 돼!"
병원 분위기는 험악했으며 어느 누구도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은 없는 듯 했다. 특별히 백인 학생들은 노골적으로 비아(卑下)하는 말을 서슴치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살아 날수가 있을까?'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방법은 몇 가지 있기는 했으나 모두가 이시카와의 입에 달려 있었다.
'이시카와의 허락을 받아서 시술을 했다는 것'과 아니면 '이시카와가 스스로 허락을 했다고 증언을 해주는 길' 뿐이었다.
'이시카와가 허락을 했다'고 내가 증언하면, 할아버지 말대로 '거짓말 잘하는 조센진'이 되는 셈이다.
'아-이걸 어쩌나, 더러운 조센진, 거짓 말 장이가 되는 구나.'
그렇다고 이시카와가 스스로 나를 위해 옹호 해 줄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의대에서 쫓겨나고... 의사도 못되고....' 절망이었다.
*
예정대로 나는 병원, 징계위원회에 불려가 엄격한 조사를 받게 됐으며 재판을 받게 됐다.
"외과 수련의사 이시카와의 허락과 입회하에서 시술을 했는가?' 가 질문의 초점이었다.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느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이 유리 할 것 같아서였다.
왜냐하면 이번의 문제는 내 개인의 문제보다도 학교의 명예와 법적인 문제가 더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세계적인 병원, 스탠포드의 명예 실추도 문제지만 나는 결국 경찰에 의해 살인 사건으로 재판을 받아 교도소에 가는 것이 명약관하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나의 앞길은 완전한 파멸이기에 나는 잠을 잘 수도 없었으며 밥도 제대로 먹질 못해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몇 차례 징계 위원회에 불려가서 조사를 더 받았는데, 어쩌다 닥터.이시카와를 본 일이 있었다. 그도 역시 수척했으며 우울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나는 웬지 미안함 마음으로 그를 처다 보지 못했다. 나로 인해 괜히 곤욕을 치루고 있는 그가 안쓰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일주일 후---
스탠포드대학 병원 징계위원회에서 나와 닥터 이시카와에게 내린 징계 처벌은 뜻밖에도 가벼웠기에 깜짝 놀랐으며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징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외과 수련의사 이시카와는 학생을 제대로 관리, 감독을 하지 못해 의료 사고를 초래했음을 시인했기에 향후 3개월간 어떤 수술에도 참여 하지 못하며 만일 의료사고가 다시 발생한다면 스탠포드에서 축출됨.
한편 의과대학생 빌. 김은 학생 신분으로 적적할 감독을 받지 못한 상태로 시술을 했기에 실습을 중단하고 의과대학으로 복귀하여 그곳에서 징계를 받아야한다.-
정작 사람을 죽인 나에게 내린 징계(懲戒)는 의과대학으로 가서 징계를 받으라는 막연한 내용인데 죄를 짓지 않은 닥터 이시카와는 중징계를 받은 셈이었다.
"아니? 아무 잘못도 안한 닥터. 이시카와가 중징계를 받다니?"나는 너무나 미안한 마음으로 내 양심의 가책이 오기 시작했다.
죄를 짓지 않은 닥터. 이시카와가 죄를 덮어 쓴 이유를 알고 보니 너무나 뜻밖의 이유가 있었다.
닥터. 이시카와가 나를 구해 주려고 자기가 모든 죄를 덮어 썼기 때문이었다.
-"닥터. 이시카와? 의학생 빌. 킴에게 시술을 허락했나요?"
"............."
"왜 대답이 없소? 닥터 이시카와, 당신이 환자 곁에 오기 전에 빌은 허락도 없이 시술을 시작했다고 담당 간호원이 증언을 했군요."
"아니요. 제가 허락을 했으며 그 때 저도 곁에서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
"그렇습니다."
징계를 담담한 미국인 외과 의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닥터.이시카와? 대답을 제대로 하시오. 아니면 당신이 큰 징계를 받소."
"교수님, 저는 빌 킴(Bill Kim)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능력이 있었는데 실수를 한것일 뿐입니다."
너무나 뜻밖의 증언이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닥터 이시카와는 자기가 하지도 않은 잘못을 뒤집어 쓰려는지 담당 교수도 놀랐다.
'아니, 이 친구, 남을 옹호하디니, 자기가 화를 당할 줄도 모르고....'
담담 외과 교수는 순간 그가 겪었던 가슴 아픈 일화(逸話)가 생각나면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느듯 20여 년 전, 동부 하바드 의대 뉴 잉글랜드 병원에서 외과 수련을 받을 때였다. 같이 일하던 유럽계 의사가 분명히 그가 잘못을 하고는 자기(담당교수)에게 뒤집어씌우는 바람에 꼼짝없이 큰 징계를 받고 일개월간 고생했던 쓰라린 의료사고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의사들 세계에서 돌발적인 의료 사고는 언제나 일어나기 마련이나 문제는 남의 약점을 딛고 올라서려고 하는 의사들의 이기심과 명예욕이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해 주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인데, 닥터 이시카와는 자기 스스로를 희생하려고 하다니, 그는 진정 인간미가 넘치는 특별한 의사임을 담당 외과 의사는 알게 됐다.
'닥터 이시카와, 당신은 크게 될 의사다. 비록 가벼운 징계는 하겠지만 너는 우리 스탠포드 병원이 자랑하는 훌륭한 외과 의사이다.'
담당 교수는 마음속에 이렇게 정리를 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나는 이시카와가 갑자기 크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다음날, 나는 의과대학 징계위원회에 나가 조사를 다시 받게 되었는데 징계를 담당한 내과 교수는 빙그레 웃으면서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나에게 질문을 하였다.
"닥터 이시카와가 시술을 허락했으며 같이 옆에서 지켜보았다면서?"
"아닙니다. 허락 없이 제가 단독으로 시술을 하다가 실수했습니다."
"그래? 스탠포드에서 온 보고서에는 허락을 받았다고 했는데..."
"아닙니다. 허락 없이 제가 단독으로 했습니다. 교수님."
"허! 일본 사람도 한국 사람도 자기가 했다고 하니, 이 사람들은 너무 정직하군. 서로 남을 위해 희생을 하는군..."
독일계의 내과 교수는 고개를 흔들면서 백인들 사이에서는 좀 체로 보기 힘든 양보의 미덕을 느끼는지 무엇인가를 크게 결심하는 듯했다.
3일후에 발표된 징계는 예상대로 아주 경미했기에 나는 의과대학을 계속 다닐수가 있었음은 물론 교도소(矯導所)에 가지 않아도 되게 됐다.
그리고 '거짓말 잘하는 조센진'이 될 번 했던 위기에서 벗어 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일본 놈은 나쁜 놈'이라는 가르침보다는 '일본 사람 이시카와는 자기를 희생하고 나를 살려준 은인'으로 내 마음에 크게 부각되었다.
결국 할아버지의 가르침은 100% 잘못된 인종편견이라고 나는 정의를 내리고 말았다.
제 5장: 거꾸로 도는 풍차(風車)와 연어(Salmon).
(애정이 싹트던 시절)
거꾸로 도는 풍차를 본 일이 있었는데 모터가 거꾸로 달려서 그런 줄 알았는데 사실은 바람의 힘이 모터보다 강해 모터가 작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를 보면 인생도 때로는 생각지 못하게 반대 방향으로 바보처럼 질주해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을 앞둔 연어는 아무리 힘든 여정이라고 해도 반드시 자기가 태어난 작은 강(母川)으로 올라가서 산란을 한 후 죽는다고 한다. 그뿐인가 죽은 후, 그 시체는 부화된 새끼 연어의 먹이가 된다고 하니 가히 그 모성애를 짐작할 만하다.
생각해 보면 나의 경우도 거꾸로 도는 풍차였다. 할아버지가 그렇게도 상대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한 일본 사람과 결혼까지 했으니 말이다.
"일본 사람과는 말도 하지 말거라, 손자야!"
근엄한 할아버지가 내 곁에서 말을 하는 것 같았는대도 나는 제니퍼 이시카와(Jennifer Ishikawa, 石川)라는 일본 여성과 작년에 결혼을 했으니 할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신다면 아마도 큰 회초리를 들고 나의 종아리를 피가 나도록 치실 것 같았다.
-돌이켜 보면 내가 일본 여자와 결혼하게 된 경유는 참으로 우연이었다. 아니 나의 생명을 구해준 닥터. 이시카와를 통해서 얻은 행운이었다.
나를 위해 모든 죄를 뒤 뒤집어 쓴 닥터. 이시카와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고맙다는 치하를 하기 위해서라기보다 비겁한 조센진이 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용기를 내어 닥터.이시카와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집을 방문하기로 허락을 받았다.
그는 팔로 알토(Palo Alto)에서 멀지 않은 서니베일(Sunnyvale)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초코리트 한 상자를 사 예쁘게 포장을 하여 그의 집으로 찾아 간 것은 어느 조용한 토요일 오후였다.
문제는 그의 아파트에서 닥터.이시카와 뿐만 아니라 그의 여동생이라고 하는 제니퍼 이시카와(Jennifer Ishikawa)를 만난 것이 내 운명이 될 줄이야.....
처음, 그녀를 보는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첫 인상에서 살프시 웃는 미소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저 미소! 아- 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이 아닌가?' 나는 은근하며 온유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다보면서 이시카와를 찾아온 본래의 이유를 잠시 잊고 있었다.
"빌, 앉으세요.?" 닥터.이시카와가 소파에 앉으라고 할 때 나는 비로소 제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소파에 앉자마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닥터. 이시카와에게 질문을 던졌다.
"닥터. 이시카와? 왜 나를 위해 거짓으로 증언을 해 주셨나요? 뻔히 아시면서...그래서 징계도 받으셨는데..." 나는 계면적은 말을 하다 보니 목소리가 더 커지고 말았다.
"아! 빌, 그냥 돕고 싶었습니다."
"예, 그냥 도왔다구요?" 다른 사람을 죽이고 자기가 올라서려고 하는 것이 머리 좋은 의사들의 세계일진대 그냥 돕다니, 말도 안 되는 위선 같았다.
"그렇습니다."
"닥터 이시카와! 무슨 이유가 있죠? 사실대로 말해주세요. 부탁입니다."
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간청을 했다.
"빌, 사실은 나의 할아버지가 조선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큰 은혜(恩惠)를 나도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갚으려고 했을 뿐입니다."
"예? 조선 사람들로부터 받은 은혜를?"
"그렇습니다. 빌."
"와!" 나는 너무나 뜻밖의 대답에 나는 나 자신을 의심하며 '무슨 사연이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궁금한 마음으로 되물었다.
"은혜라니, 무슨 은혜였습니까? 알고 싶군요."
닥터. 이시카와는 잠시 주저주저 하더니 조용히 말문을 열었는데 그의 얼굴은 마치 중대한 발표라도 하려는 사람 같아 보였다.
"돌아가신 나의 할아버지가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하셨습니다. '손자야! 1942년 2월부터 3년간, 나는 조선 사람들로부터 큰 은혜를 받았느니라. 그러니 너는 조선 사람을 만나면 나를 대신해서 늘 감사하고 은혜를 갚아주기를 바란다.'라고요. 마침 빌이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그 은혜를 갚은 것뿐입니다."
"예? 3년간 받은 할아버지의 은혜를 조선 사람인 내게 갚았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부탁이니 그냥 받아들인 거라구요?"
"그래, 빌. 나는 나의 할아버지를 존경하니까..."
그렇다면 유광렬씨가 쓴 그 논문 '멀고도 가까운 이웃 , 일본'이란 글은 말도 안되는 민족적인 갈등을 쓴 휴지 조각과도 같은 말이 아닌가?
"다른 한국 사람들이 베푼 그 은혜 때문에 엉뚱한 내가 혜택을 봤군요. 그분이 누군지는 모르나, 감사합니다." 나는 웃으면서 마음속에서 깊은 즐거움을 느끼면서 이시카와에게 대답을 했다.
"그렇습니다. 빌. 할아버지가 받은 은혜를 당신, 빌을 통해 갚았습니다. 오히려 내가 고맙군..." 이시카와도 마음이 기쁜지 꽤 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닥터. 이시카와? 도대체, 그 한국 사람들이 누굴까요?" 나는 정말 궁금하여 되물었다.
"자, 빌. 그 얘기는 궁금하지만 일단 그만하기로 하고, 아! 잠시 실례를 했군요. 여기 내 누이동생을 소개할까합니다. 어제 나를 보러 일부러 왔다가 오늘 가야 하는데....
제니퍼라고 합니다. 토렌스에서 꽃집을 운영하고 있지요. 물론 아버지가 거동이 불편해서 동생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
닥터. 이시카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의자에 앉아 조용히 경청하고 있던 동생을 불러 세웠다.
"처음 뵙습니다. 닥터. 빌 킴, 줄여서 빌이라고 부릅니다."
나와 제니퍼는 정식으로 인사는 하지 않았으나 이미 아파트에 들어 올 때 목 인사는 했으며 이시카와와 중요한 말을 하면서 가끔 곁눈으로 훔쳐보았기에 낮이 익어 있었기에 구차한 소개는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제니퍼의 얼굴은 약간 갸름하고 5피트 5인치정도의 적당한 키에 머리를 다소 길게 느려뜨렸으며 검은 눈동자가 하늘처럼, 아니 호수처럼 맑았다. 게다가 일본 여성 특유의 은근한 미소가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그 미소보다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결국 나는 할아버지가 그토록 경계하라고 일러준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웃음을 가진 일본 여성 제니퍼에게 처음부터 반하고 말았다.
"토렌스에 사는 제니퍼입니다. 빌!" 그녀도 어느새 알고 있는 사람처럼 간단한 소개를 하였다.
"토렌스라면, 남가주에 있는 도시인가요?" 나는 무엇인가를 말해야 하는 의무감에서 토렌스가 어디에 있는가를 물었다.
"예. 토렌스는 로스앤젤레스 공항 남쪽에 있는 도시로 한국사람, 일본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기에 동양에 온 듯한 도시지요. 한번 찾아오세요. 빌?" 제니퍼는 또다시 미소를 지으면서 오히려 놀러 오라고 권했을 때 뛸 듯이 마음이 기뻣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미리 연락을 주세요."
"네, 그러지요."
우리는 너무나 뜻밖의 약속을 한 셈이었는데 도리켜 보면 내 일생에서 가장 큰 약속을 한 셈이었다.
꽃집을 운영하며 꽃꽂이를 하다보면 짙은 향기에 코가 아리고 장미 가시에 찔리기도 하지만 늘 웃음을 띄우며 고객들에게 꽃으로 평화를 선사하는 그녀를 상상해 보니 마치 꽃 속에 있는 천사라고 생각을 했다.
"꽃 속에서 사시고...얼굴도 꽃처럼 예쁘시고...웃는 모습도 참으로 아름답군요."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를 칭찬해 주었는데 갑자기 나 자신도 쑥스러운 마음이 들어 얼굴을 들지 못했다.
"예, 꽃을 좋아 하구요. 그리고 대대로 내려오는 가업(家業)이기에...."
"대대로 내려오는 가업이라...."
"4대째 내려오는 가업입니다." 제니퍼는 자랑스러운 듯이 당당하게 말했다.
"사실, 저의 부모님도 꽃 농사를 한답니다."
"오빠가 알려 줘서 알고 있습니다. 살리나스에서 장미, 카네이숀과 딸기 농사를 하신다구요?"
"예. 살리나스에서 4대째 살고 있습니다. 제니퍼."
"살리나스에 가 보고 싶군요. 저의증조 할아버지도 거기에서 사셨다고 하든군요."
"증조 할아버지도?"
"그래요. 저희도 미국 이민 일본인4세가 되니까요."
"4세라고요? 나도 미국 이민 한국인 4세인데....."
"4세라고요? 4세, 4세....."
"그러네요. 우리는 4세, 4세."
우리는 4세라는 공통점에 마음을 열고 큰 소리로 동시에 웃다보니 서로의 감정이 아무런 스스럼없이 바닷물이 모래밭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가듯이 이민자의 감정이 서로서로 뒤엉켜 하나가 되고 있음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이민 4세라면, 100년, 아니 한 세기의 얘기인데....'
*
어둑어둑한 저녁이 되자, 닥터. 이시카와는 나와 여동생 제니퍼를 데리고 인근에 있는 이태리 음식점으로 데리고 가 처음 만난 기념으로 파스타와 가지 요리에 나파산(Napa) 붉은 포도주를 곁들여 먹었는데 내 일생에 이처럼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고 느꼈다.
붉은 나파산 포도주의 감미로움처럼 처음 만난 제니퍼의 미소가 내 망막 속에 가즈런히 총천연색의 사진으로 각인되고 있었다.
제니퍼는 마음속 깊이에서부터 사랑하고 싶은 은근한 여인이었으며 나는 그녀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절대적인 연인이 되고 싶었다.
나파산 붉은 포도주처럼 다소 붉게 상기된 내 볼에 제니퍼가 살짝 다가와 "안녕히 계세요."라고 속삭이면서 볼에 키스를 하고 토렌스로 돌아가자 나는 봄날처럼 따슷한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늦은 밤, 나는 시간에 맞춰 그녀가 알려준 토렌스의 집 전화를 떨리는 마음으로 걸었다.
"제니퍼, 잘 도착했지요?"
"어마! 내게 전화를 해 주시다니, 아니 걱정을 하시다니...."
"걱정이 됐습니다."
"오빠 말로는 빌은 일본 사람을 싫어한다고 했는데....."
"아닙니다. 일본사람에게는 거부감이 있으나, 제니퍼,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나는 그토록 오랜 동안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전면 부인하고 말았다.
"그럼 좋아하세요?"
"노력하겠습니다."
"노력? 와 대답이 묘하군!"-
*
결국 나는 할아버지의 충고를 어기고 일본 여성을 사랑하게 됐으니 흘러가는 세월을 막을 수가 없는 인지상정인 듯 했다.
그날 이후, 나는 부모가 사는 살리나스 집으로 가는 것 보다, 고속도로(5번)를 타고 멀리 연인이 사는 토렌스로 가는 것이 내 일정이 됐다.
오늘도 나는 고속도로를 질주하면서 한 손에는 전화기를 들고 사랑하는 제니퍼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어머! 전화를 주셨네요? 운전 조심하세요. 빌!"
토렌스에 도착한 것은 7시간 후인 오후 3시경이었다. 남가주의 9월은 아직도 따가운 햇살이 눈부셨으며 바다가 가까운지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토렌스(Torrance blvd)와 호손(Hawrthone)길이 만나는 코너에 있는 아담한 꽃집(Flower shop)이 눈에 보였다. 살그머니 문 앞에서 꽃집 안을 들여다보니 보고 싶었던 제니퍼가 저녁 햇살처럼 타오를 듯이 붉고 황홀한 장미꽃 12송이를 꽃병에 가지런히 꽂고 작고 예쁜 카드를 꺼내 무슨 글자를 써서 중년의 백인 남성에게 건네주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사나이는 기쁜 듯 웃으면서 무슨 말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결혼 기념일을 맞아 아내에게 장미꽃을 바치고 저녁에는 인근에 있는 분위기 좋은 음식점에서 포도주를 곁들인 텍사스 산 불고기를 먹을 예정일거라고 추측을 하니 내 가슴이 방방 뛰었다.
꽃집을 운영한다는 것이 의사라는 직업 보다 더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꽃은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선사하는 행운의 중간 매개체가 되기 때문이었다.
"어머! 빌? 언제 오셨나요? 들어오지 않고..." 제니퍼는 계산이 끝난 손님에게 작별의 인사를 하다가 문밖에 서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목소리로 나에게 접근 할 때 나는 그녀의 은근한 미소에 또 다시 반하고 말았다. 일본 여자의 은근한 유혹적인 미소요,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진실된 미소였기 때문이었다. 꽃 가개의 주인이 되려면 은근한 미소와 선천적으로 꽃을 좋아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됐다.
"제니퍼, 나도 장미 12 송이를 주세요. 12송이를...." 나는 앞서 나간 백인 신사처럼 꽃집 주인인 제니퍼에게 정식으로 꽃 12송이를 청구했다.
"예? 장미, 12 송이를? 뭘 하시려고요?"
"선물할 사람이 있어서 주문합니다."
"선물할 사람이요, 누군데요?" 제니퍼는 기이한 듯이 되물었다.
"그런거 묻지 마시고 주세요. 예쁜 카드도 같이 넣어서요."
"묻지 말라니요?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그렇다면 말하지요. 제니퍼 이시카와라는 여성에게 주려고요."
"아이구! 농담도, 제게요?"
"그렇습니다. 제니퍼. 당신에게요."
"................"
탐스러운 12송이의 붉은 장미를 제니퍼의 가슴에 듬뿍 안겨 주었을 때, 그녀는 기쁘다 못해 이번에는 미소가 아닌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너무 기쁘면 웃음보다 눈물이 나온다고 했다.
그날, 저녁 나는 토렌스에 있는 일본 음식점에서 사시미와 스시를 같이 먹으면서 그녀의 오물오물거리는 입을 바라보며 한 없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어둑어둑한 레돈도(Redondo) 바닷가에서 손을 잡고 물결치는 태평양을 바라다보다가 자연스레 포옹을 하면서 느끼던 그녀의 따슷한 체온을 그녀의 사랑으로 받아드리고 있었다.
멀리 뵈는 태평양 저 바다를 헤치고 나간다면 우리는 마침내 일본과 한국에 도달할 수 있을거라면서 서로 웃고 말았다. 마치 초등학생이 힘든 수학 문제라도 푼듯한 자신감을 느끼면서...
6장: 일본 여자는 안돼!
호사다마(好事多魔)란 말 그대로 제니퍼와의 만남은 하늘이 마련해 준 아름다운 인연이라고 생각했는데,누군가의 엄청난 반대에 직면하게 될줄이야....
사랑은 국경을 넘고 인종을 초월한다고 하는 말처럼 비록 한국과 일본이라는 엄청난 장벽은 우리 이민 4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질 않을 거라고 자신을 했었는데 뜻밖에도 나의 어머니의 반대가 예상보다 훨씬 심했기 때문에 우리들의 데이트는 아주 힘든 상태가 되고 말았다.
"빌! 안된다. 안돼! 일본 여자하고는 죽어도 안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된다. 이녀석아!"
얼굴을 붉히고 언성을 높인 어머니의 목소리가 내 귀에 천둥치는 소리처럼 들려오고 있었으며 걸칙한 침마저 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눈가에 가벼운 경련마저 일고 있었다.
"아! 어머니, 제발 우리들의 사랑을 이해해 주세요. 그리고 결혼을 허락해 주세요. 어머니! 제발!"
나는 오늘도 대답없는 메아리처럼 어머니에게 빌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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