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소라 -제 8

2012.01.22 07:47

연규호 조회 수:714 추천:24

장편소설, 청공 제 8 제 17장 도공-심당길(沈當吉) 아리타 야키의 도조 이삼평을 말하다 보니 그와 같은 운명의 도공 심당길과 그의 후손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삼평하면 심당길, 심당길하면 이삼평인 것 처럼 같은 시기에 도공으로 조선에서 이름을 날렸는데 뜻밖에도 1598년, 정유재란이 끝날 때, 사쓰마 번주, 시마쓰 요시히로에 의해 규슈 남단 가고시마로 끌려간 사람이 바로 심당길이었다. 우리의 신혼 여행은 마치 꿈속에서 홀린 듯 했는데 이젠 내친김에 규슈 최 남단에 있는 가고시마로 가게 됐다. 가등청정의 본거지인 구마모토 산성을 지나 남쪽으로 약 2시간 조금 넘게 달려가니 57만의 인구를 가진 이국적인 항구 도시, 가고시마가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바로 뵈는 항구 남쪽 작은 섬에서 회색갈의 화산의 김이 살프시 살프시 위로 뻣쳐 오르고 있었다. 아직도 화산 활동이 역동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다. 마치 이태리의 나폴리를 연상시켰으며 화산만 빼면 한국의 통영에 온 기분이었다. 신혼 여행으로 많은 젊은 부부가 찾아 온다고 하니 우리로서는 너무나 좋은 여행 길이었지만 화산재 속에서 심당길과 같이 끌려온 조선의 도공들의 눈물이 실루에트를 이루고 있는 듯 했다. 대부분 전라도 남원에서 잡혀온 이들도 조선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저기 솟아 오르는 화산 재를 바라다 보며 울고 또 울었으리라 생각하니 우리의 눈가에도 눈물이 어른 거리고 있었다. 물어 물어 사쓰마 야끼의 본산인 심수관(沈守官) 가문을 찾았다. 훌륭한 집에 잘 가꾸어진 화롯불에서 아직도 사쓰마야끼를 실제로 굽고 있었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꽃이 마치 조국을 생각하는 열정과도 같았다. 마침 심수관가문을 설명해 주는 안내인이 있었기에 나는 진지한 마음으로 물었다. "아직도 대를 이어 도자기를 생산해 내다니, 대단하군요?" "그렇습니다. 현재는 15대 손 심수관이 이집의 주인으로 있지요." "15대 손이라고 하셨나요?" "그렇습니다. 16대 손도, 준비 중입니다." "16대 손이라고 하셨나요?" "예, 그리고 17대도 18대도..." "와! 대단한 기업이군요. 그런데심씨 성도 바꾸지 않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심씨 성을 지키면서 대대로 살아온 조선 사람입니다. 그래서 단군(檀君)을 기념하기 위해 옥산궁(玉山宮)을 건립했으며 그곳에서 제사를 드린답니다." "와! 정말 대단하군요. 일본의 압제와 간섭을 이기고 이렇게 전통을 지키다니... 이삼평은 가나에가로 성을 바꿨는대, 그리고 12대에서 도자기 굽는 것도 중단 됐다는대...." "아! 그거야, 사가의 번주가 성을 바꾸게 했으니까, 할 수 없었겠지요... 그렇지만 아리타 도자기는 정말 훌륭합니다." 듣고 보니 심수관가문은 이삼평과는 너무나 대조가 되었기에 이삼평을 도와 같이 도자기를 만든 이진구의 후손이라는 것이 다소 부끄러웠다. 반대로 심수관 가문이 너무나 존경스러웠기에 고개를 숙여 여러차례 인사를 올렸다. 심수관가의 초대 당주가 되는 심당길과 그 일행은 1598년 겨울 사쓰마 번주 시마쓰요시히로의 군대에 의해 일본 규슈의 최남단에 있는 사쓰마(지금의 가고시마)로 끌려왔다. 전라도 남원에서 도자기를 구우며 가정을 가지고 있던 이들도 잡혀 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을 게다. 채찍으로 맞기도 했으며 일본도에 의해 많은 사람의 피가 전라도 땅을 덮었다고 한다. 남원과 비슷한 토질을 가진 가고시마에서 그들은 화산재가 나오고 유황이 섞인 흙으로 옹기를 구웠다. 심당길도 역시 백자광을 발견하려고 무진 노력을 다했다. 사쓰마 번주의 칼 끝이 심당길의 턱밑에서 번쩍이기도 했으며 따귀를 맞기도 했다. 이삼평보다 2년후에 백토를 발견했으니 그 2년동안 그는 무척 고생을 했을 뿐만 아니라 죽음 앞에서 울기도 했다. 결국 20년 후, 그는 백자광을 발견하였으며 아름다운 백자를 구워 낼 수가 있었다. 사쓰마 번주는 그를 역시 사족(士族)으로 우대 했으며 400년간 심씨 성씨를 유지하며 살아왔다. 뿐만 아니라 일본 여인과는 결혼을 하지 않다가 12대 후손에 와서야 처음으로 일본 여인과 결혼을 했다. 마을에 단군사당, 옥산궁을 짖고 도공의 후예들과 같이 제사를 지냄으로 조선인임을 잊지 않는다고 한다. 일본 속의 한국인, 심수관가는 일본의 유명작가 '시바 료타료'가 말한 대로 두 개의 가슴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당신의 선조는 두 개의 가슴을 가졌군요. 하나는 선진 조선의 도예를 일본에 전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찬 조선인의 가슴이고 다른 하나는 타국 땅에서 살아 남기 위해 모든 것을 일본에 바쳐야 했던 일본인으로서의 가슴입니다." 얼마전, '400년만의 귀향(歸鄕)'이라는 제목으로 일민(日民) 미술관에서 심수관가의 작품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는데 하나 하나가 보화같았다. 400년간 14대가 쌓은 도예 기술의 전통과 작품 속에 스며든 심수관가(家)의 혼이 눈에 띄였다. 주:심수관이란 12대 때부터 집의 대표를 심수관 12대 13대 14대등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심당길은 심수관 1대가 되는 셈임. 현재는 심수관 16대가 있음. * 같은 도공의 후예라고는 하나, 웬일일까? 이삼평을 따라온 이진구(다카야마)보다는 심당길의 후손 심수관들이 더 훌륭해 보인 것은 그들이 비록 끌려 왔다고는 하나 본래의 한국성을 지금까지 바꾸지 않고 유지해 왔다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가고시마의 번주가 아량이 있어 성을 바꾸지 않아도 된 행운도 있었지만..... 한가지 마음에 위안이 되는 것은 우리의 선조 이진구(다카야마)는 조국을 배반 하지 않으려고 무단히 노력을 한 흔적이 너무나 역력했기에 ' 우리의 선조 이진구는 조국을 배반하지 않았어. 아내를 배반 하지도 않았어'라고 위안을 하게 됐다. 또 한가지 부러운 것은 심수관 가문은 당주, 심당길의 갓끈, 망건, 그리고 상투까지 잘 보관해 후손에게 전달했다고 하는 그 전통이 부러웠다. 특히 망건을 가보로 전달함에는 "영달을 바라지 말라. 금전을 쫒지 말라. 그저 근면하게 일하라!"라는 가훈(家訓)이 깃들여 있다고 하니 우리는 더 더욱 감탄하고 말았다. 나는 나보다 10여살 더 많은 15대 심수관을 잠시 만났는데 그는 와세다 대학 지리 역사학과를 졸업했으며 이태리의 도예대학에서 수학을 하고 경기도 이천에 와서 도예 수업을 하고 갔다고 한다. 그리고 16대 심수관은 아직 어리지만 역시 할아버지의 업을 이어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400년제(祭)에서 그들은 한국 남원으로 가 옛날 방법에 의해 채화한 불을 가고시마로 전달 할 계획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심수관 가문의 혼들은 이삼평의 가문보다 별로 서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400년전, 잡혀 오던 그날,그들도 소리 높여 울고 울었으리라.... 고향이 보고 싶어서, 처자가 보고 싶어서........... 미야마(美山)에 있는 단군(檀君)을 모시는 옥산궁(玉山宮)앞 돌계단에서 나와 제니퍼는 두 손을 잡고 동정의 눈물을 흘렸다. 돌계단 하나하나에 새겨진 눈물들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기 때문이었다. 붉은 색이 가슴에 진하게 밖힌 제법 큰 새가 나르고 있었다. 앵무새 종류같기도 하고 꿩 같기도 했다. 멀리로 날라가던 새가 다시 우리를 향해 되 돌아오고 있었다. 아마도 400년전의 한을 품은 도공의 사연을 간직한 새 같기도 했다. "아! 생각 못할 우리들의 신혼 여행이여! 알고 보니 우리네 조상은 일본인이 아니었소. 조선인이었소. 그것도 강제로 잡혀온 도공이었어... 고향을 그리다가 현해탄을 넘지 못하고 물속에 수장된 가련한 도공이었어. 그리고 400년 후, 우리는 고향을찾아 왔습니다. 마치 연어가 400년간 태평양을 헤메고 다니다가 찾아 온 것 처럼... 나르는 저 새가 나를 향해 울고 있네. 전하고 싶은 애틋한 소식이 있나보오. 새여! 내게 전해 주소, 그대를 대신해 전하리다." * 일본으로 간 우리의 신혼 여행은 이렇게 눈물로 마무리를 짖고 있었다. 무엇이라고 설명하기도 벅찬 우리들의 신혼 여행이었다. 임진왜란도 힘들었는데 납치되어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의 한 많은 400년의 세월을 한 눈에 보는 듯 했다. 우리들은 몸과 마음이 한결같이 피곤해 어디고, 멀리로 훌쩍 날라 가고만 싶었다.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다. 고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방향을 바꿔 규슈 동북 지방, 오이타(大分)에 있는 벳부(別府)온천으로 가 땃슷한 온천 물에 몸을 담가 보기로 했다. 100% 일본계 미국인이라고 생각해 왔던 아내, 제니퍼의 충격은 상상보다 심각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제니퍼의 혈액속에 한국인의 피는 불과 0.25%뿐이었지만 0.25%의 존재가 너무나 커 보였다는 말이다. 0.25%의 피, 한국사람의 피.......겨우 0.25%인데 왜 이렇게도 심각하게 느껴진단 말인가? "빌? 나도 한국말을 배우려고 해. 그리고 한국 요리도 배우고, 기회가 되면 한국에 가서 당신의 조상이 살았다는 여주에도 가봅시다. 경기도 여주라고 했지요?" "아! 그러지. 경기도 여주. 1905년, 22살 총각 김상환(결국 증조 할아버지)씨가 실연을 당하고 눈물을 흘리며 탓다는 하와이 노동 이민선...그리고 그 후손이 바로 나여. 제니퍼." "맞아, 하와이 이민선과 여주? 재미있겠다. 한번 가봅시다. 여주에." "그럴까, 제니퍼?" "그래요. 빌. 나도 이젠 한국사람이니까, 한국을 알아야해." 아내의 입에서 뜻밖에 나온 제안에 나도 동의를 하였기에, 우리는 머지 않아 한국을 방문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결국 일본 방문에서 우리는 한국방문을 계획하였다. * 오랜만에 벳부 온천에서 가진 온천욕은 그간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 주었으며 인종적인 갈등에서 느꼈던 고통도 온천물과 함께 말끔히 씻겨지고 말았다. "아, 일본이여, 안녕. 도공들이여 평안하소서." 제. 18장: 귀국(歸國) ( 조상 찾아 가는 길.) 우리는 며칠을 더 머물다가 동경을 경유하여 샌프란시스코 공항으로 돌아 왔으며 나는 또 다시 바쁜 외과 수련의사 과정을 시작했으나 아내는 잠시 시간을 내어 토렌스로 가서 부모님들을 만나 본 후 서니베일로 다시 돌아 오게 됐다. 일본 신혼 여행에서 돌아온 후 우리 가족들은 생각지도 않았던 뜻밖의 보고를 듣고 깜짝 놀란 것은 물론 갖가지의 불편한 반응들을 보여 주었다. "아니! 이시카와의 조상이 한국인이라면서? 일본 사람이 아니고? 김해에서 잡혀온 도공이라면서? 상놈보다 조금 낫다는 도공출신?" 나의 어머니의 반응이 가장 충격적이었나보다. 그것은 그만큼 반대가 심해었기 때문에 오는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됐다. '그러면 그렇겠지!' 어머니는 마음 속에 불쾌한 느낌을 갖고 있는듯했다. "거짖말 잘하고 더러운 조센진의 피와 잔인한 쪽발이 일본의 피가 섞였으니 오죽하겠니? 아휴! 상상만 해도 더럽구먼...." 어머니는 얼굴이 붉어 지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큰 소리로 분풀이를 하였다. "그렇습니다. 어머니? 제니퍼의 조상은 알고보니 조선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조선에서 잡혀간 도공이었습니다. 이진구라는 도공으로 물론 400년 동안, 16대로 이어지면서 99.75%가 일본 사람이 되었지만...." "99.75%가 일본 사람? 그러면 0.25%만이 한국인이란 말이냐? 그러구 보니 잡종이구먼!" "그래요. 0.25%만 한국사람입니다." "그리고 출신잉 진정 도공이었단 말이냐? 도자기 굽는 천한 사람?" "그래요. 도자기 굽던...." "알겠다. 도자기 굽던 주제에, 감히 우리하고 결혼을 했단 말이냐?" 어머니는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화가 솟는지 더 언급을 회피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 제니퍼의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00% 일본인인줄 알았는데 조선 사람이 조상이라니... 일부러 속인것도 아니고, 역사의 희생물이었는데....그래도 제니퍼의 몸속에는 99.75%가 일본인이고 단지 0.25%만이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 다소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큰 나라, 다인종의 나라에서 99.75%와 0.25%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무 것도 아녀.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세계에서 가장 수준이 높은 일본 사람이다. '라는 결론으로 모든 것이 일단락 지었다.. 제 3부: 한국방문(韓國訪問)에서도,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가? 제 19장: 경기도(京畿道) 여주(驪州)에서. 사야가(김충선), 마스나가(김영세)- ( 뒤 바꿔진 두 사람의 삶) 어느날, 나는 무심코 증조 할아버지가 살았다는 경기도 여주를 인터넽(콤퓨터)을 통해 검색을 하다가 여주가 아름다운 풍광과 더불어 질 좋은 고급 도자기를 생산해온 전통의 도자기의 중심 도시임을 알게 되면서 흠찢 놀랐다. "설마, 내 조상도 도자기 공은 아니겠지?" 나는 스스로 질문을 하였으며 스스로 "아니"라고 대답을 했다. 바쁜 외과 수련의사(外科 修鍊醫師)라고는 하나 한국 방문을 아내와 약속을 했었기에 7월이 되어 약 10일간의 휴가를 얻어 제니퍼와 더불어 이번에는 나의 조상이 살았던 경기도 여주를 방문하기로 했다. 한국계 미국이민 4세이기에 한국에 대한 궁굼증이 근자에 많이 생겼는데 특별히 사성 김씨(賜姓 金氏)라는 말이 나의 관심을 끓었다. "사성 김씨가 무슨 말인가요?"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한국인 노인에게 물어보니 "임금님이 하사해서 받은 성씨"라고 했다. "임금님이 성을 주다니요, 할아버지?" "어허! 자네는 미국에서 나고 자라서 모르는구먼, 쯪쯪...자네는 김해 김씨로군?" "김해 김씨요?" "그렇구먼. 임금님이 김해 김씨를 하사했군..." "왜? 김해(金海)요? " 나는 김해라고 하는 말에 마치 일본 방문에서 알아낸 김해 사람, 이삼평과 이진구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조국을 등진 배반자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그런게 아니고, 김해 김씨란 김수로왕(金首露王)이 김해를 근거로 해서 시작했다는 말이지..." "김수로 왕은 또 뭐고요?" "이것봐, 그러니까 한국 사람이 되려면 한국 역사를 공부해야지. 달랑 영어만 잘한다고 한국 사람이 아녀. 이녀석아!" "...................." 할아버지의 꾸중을 듣고 보니, 사실이 그러했다. "나는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니 어중쩡한 50%짜리 인간이구나"라는 후회가 들었다. * 7월 4일, 미국 독립 기념일 바로 전날, 나와 아내, 제니퍼는 한국행 비행기를 탓다. 말이 한국 방문이지 나는 이번이 두 번째, 그리고 제니퍼는 처음으로 찾아 가는 낫설은 여행이었다. 한국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소위, "바나나"인 우리는 막연한 향수심을 갖고 찾아 가는 단순한 여행이었다. 태평양을 넘어 인천 공항에 들어서면서 한국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했다. 마치 일본에 온 것 같이 깨끗하게 정돈된 고국을 바라보면서 "와!" 한국이 이렇게 좋은 나라인가? 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왔으며, 일본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대등한 나라라는 자부심이 생겼다. 인천 공항을 벗어나 서울로 들어오니 마치 동경을 찾아 온 것처럼 큰 도시였으며 활기찬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뜨였다. 서울, 경성(京城), 한성(漢城), 그 이름도 다양했다. 그리고 수많은 고궁을 보면서 한국인의 후예임을 자랑 스러워 했다. 영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아 답답했으나 그런대로 물어서 영동 고속버스 정류장으로 왔다.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미국에서 온 한국 사람을 쳐다보는 매표원은 한심스럽다는 듯이 우리를 흘깃흘깃 처다보며 기분나쁘게 웃곤 했다. 말-, 언어가 이토록 중요한지를 나는 실감하고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회로부터 격리된 실패자일 뿐이었다. 이민 1세이든 4세이든 말이 안통한다면 같은 민족이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통하는 것 하나가 있었으니 바로 같은 민족이라는 마음의 교류였다. 서울을 떠난 버스는 영동 고속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더니 이천(利川)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여주에 도착했다고 안내원이 말해 주었다. * 여주(驪州)! 여주! 여주! -남한강변에 수려깊은 도시로 토지는 비옥하여 질 좋은 쌀이 생산됐으며 이곳에는 백토(白土)가 풍부해 아름답고 질 좋은 백자기를 생산해 내고 있는 도시가 바로 여주였다.- 여주는 남한강을 끼고 펼쳐지는 계곡이 있어 수려한 풍경을 만끽 할 수가 있는가 하면 유명한 신륵사(神勒寺)에서 아름다운 경관과 유물 유적들을 구경할 수가 있다고 했다. 신라시대, 원효대사(元曉大師)에 의해 창건 된 후 고려 우왕때 나옹선사(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신륵사는 아주 유명한 절이 되었으며 절벽에 세워졌기에 '벽절'이라고도 불리운다. 절의 정자인 강원헌(江月軒)에는 옛 시인들이 읊고 간 시들이 여기저기에서 볼 수가 있다. 신륵사는 나에게 있어 충격적인 사찰이었다. 일본에서 보았던 그런 절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고려의 학자 목은 이색과 같은 이가 여기서 태어난 것으로 보아 여주는 자랑할 만큼 훌륭한 도시임이 틀림 없었다. 조선의 성군, 세종대왕의 묘인 영릉이 강변에 있어 나무가 무성했다. 영릉를 보면서 일본의 왕릉보다 더 크고 우아한 규모를 보면서 자긍심이 솟았다. 세종대왕(世宗大王)! 한글을 만든 임금. 지구상에서 자기나라 고유의 글자를 갖고 있는 나라가 몇이나 되는가? 손꼽아 봐도 몇나라 안되는 것으로 보아 분명 우리 세종대왕은 세계적인 임금임에 틀림없다고 나는 확신하면서 영릉을 빠져 나왔다. 세종대왕이 눈이 멀도록 애써 만든 한글이 오늘날 이토록 우리의 글로 우뚝 서다니, 더욱이 미국도 만들어 보지 못한 자국의 글자라니 우리는 으쓱 기운이 돋았다. 남한강을 배로 거슬러 올라 가노라면 마치 라인강을 거슬러 올라 가는 듯 했다. 로레라이 언덕을 보는 듯한 곳에 우뚝 솟은 신륵사의 절탑이 처음 찾는 미국 이민 4세의 눈에는 마치 마녀의 성을 바라다보는 듯했다. 여강(남한강)을 따라 올라가면 북한강과 만나 한강의 본류가 되어 서울로 들어가게 된다. 비가 오는 날의 한강은 수심이 깊어 양평을 통해 서울로 직접 연결하는 큰 배가 다닌다고 한다. 놀랍다. 그리고 아름답다. 나의 고향 여주여! 여강과 산천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여기 여주에서 나온 왕비만도 수도 없이 많다고 한다. 조선 왕조, 고종의 아내였던 민비가 여기 여주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그녀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권력투쟁을 하리만큼 정치적으로 야망이 컸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온 낭인들에 의해 사살돼 죽었다고 한다. 민비를 살해한 자들이 바로 규슈의 구마모토를 중심으로 한 일본 사람들 , 낭인이라고 했을 때, 나는 구마모토에서 본 가등청정의 모습이 또 한차례 나를 울려 주었다. 구마모토에 살던 일본 사람들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경성으로 와 한성 일보를 창간하고 그 신문사를 거점으로 낭인들을 규합하여 깡패 행위를 했다고 한다. 일본 낭인들은 칼을 들고 궁중으로 들어와 민비와 시녀들을 도륙한 후 민비를 불태워 죽였으니 가히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는 악한 들이었다. 한 나라의 국모를 시해하다니, 그것도 일본 깡패들에 의해서 무참하게 죽다니. 일본 사람들이 원망스러워 졌다. 도리켜 보면 나의 증조부가 되는 김상환씨가 하와이로 가는 이민선을 타게 된 것도 민비와 대원군의 알력에 의한 쇄국정책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하니 민비에 대한 동정심도 잠시 일뿐,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여주 대교를 몇차례 왔다 갔다 하다가 여주 도자기 박람회장에서 나는 또 한차례 충격을 받았다. 혹시라도 내조상이 도자기 공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들었다. 여주는 질좋은 도자기를 생산하여 궁중에 상납하던 도읍이었으니까.... 그날 오후 우리는 여주 시내에 있는 홍문 사거리를 찾았다. 그리고 <김상환>을 잘아는 친척 집을 찾게 됐다. 같은 김씨성을 갖고 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영어에다 손 발짖을 하여 가까스레 통할 수가 있었다. "김상환이라? 아! 내 할아버지의동생벌이 되니 내게는 작은 할아버지가 되는군...그러고 보니 나는 자네의 아저씨가 되는 셈이고, 아저씨, 그래 엉클 엉클...." "Uncle? Are you my uncle?" "그렇다니까..." "Yes! you are my uncle." - 김상환 청년이 조선을 떠나고 난 후얼마동안 아무도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도 없었으며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기에 어디에가서 죽었을 게라고 생각하며 가족들은 잊어 버린채 살고 있었는데 5년후 집으로 보낸 편지를 통해 그가 하와이로 이주 했음을 알게 됐다. "아니? 이놈이 미쳤지. 하와이에가다니. 가서 뭘하는 거여?" "사탕수수밭에서 노동을 한다는 군요. 노예처럼..." "노예처럼?" "그렇다는 군요. 하와이로 이민간 사람들에 대해 신문에 난 것을 보았다니까요." "허긴, 이래저래 우린 일본 놈들의노예가 됐는데, 차라리 미국놈의 노예가 됐으니 더 낳지. 먹는것도 잘 먹고 돈도 벌고." "그래도 부모 떨어진 놈 어련하겠수." "불효자식 하나 뒀다고 생각하면 돼." 부모는 김상환을 아예 포기하고 말았으며 결국 그는 버려진 인간이 됐다.- * "이것봐? 너희들, 미국에서 왔다고 하는대 조상을 잘 알아봐야지? 너희들! 조상을 모르면 불효야 불효. 아무리 영어나 씨부렁거리고 잘산다고 해도 조상을 모르면 쌍놈들이야." ".........................." "고향을 버리고 미국으로 도망을 간 놈의 후손이니 어련할까? 조상도 모르는 쌍놈들이지!" ".............................." 우리는 아저씨라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으나 그 느낌으로 보아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리고 인석아! 너는 일본 년하고결혼을 했으니 조상들이 땅을 치겠구나. 땅을." "..................." "하필이면 우리 나라를 말아 먹은 일본년하고 결혼을 했어. 이 멍충아!" ".........................." 점점 아저씨라는 사람의 발음이 격해지는 것을 느끼며 더 기분이 나빠졌다. 가까스레 통역을 하여 알아 본 것은 김상환의 가문은 여기 여주에서 무관(武官)으로 살았는데 원래는 멀리 대구 근처, 우록 마을에서 살다가 여주로 이사왔다고 했다. 임진왜란때 조선에 공헌을 했기에 선조로부터 사성 김해 김씨가 됐으며 우록 마을에 살았다고 한다. 갑자기 나와 제니퍼의 눈이 둥그래진 것은 임진왜란때 무슨 공을 세웠기에 사성을 받았나 라는 궁굼증이었다. "사성이라면?" "1592년, 조선시대 선조가 직접 성을 주었다는 말이지...." "왕이 성을 주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게 나도 피곤하네. 정 알고 싶으면 여기 우리 조상, 김영세(金泳世)할아버지를 모신 사당에 가보면 그 내력을 잘 알 수가 있다내." "김영세라고요?" "그렇다내, 지금부터 406년전에 조선에 항복하고 조선을 도와준 공으로 선조로부터 성을 하사 받았네." "항복을 하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요?" "그러니까, 김영세 할아버지는 원래 임진왜란때 일본에서 온 무사로 조선에 항복을 한 후 큰 공을 세웠지." "일본? 일본이라고 했나요?" "그렇다네, 일본에서." "그러면 일본 사람?" "그렇지 일본 사람." "예? 일본 사람? 그러면 나도 일본사람의 피를?" "그렇다니까, 이녀석이, 꽤난 예민하군. 다 아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면서..." "아! 일본사람? 내가?" "그래. 녀석아, 너나 나나 일본 사람, 김영세의 후손이여. 제대로 알고 살아라!. 그러나 400년이 지난 지금은 한국사람이여. 한국사람. 알겠니?" "일본 사람 그리고 한국사람?" 이게 웬일일까? 일본에 신혼여행으로 가서 제니퍼가 조선 사람의 후손임을 알게 되어 몹시도 놀랬는대 이번에는 내가 조선 사람이 아니고 일본 사람의 후손이라니, 도깨비에 홀린듯한 느낌이었다. 일본 사람은 쪽발이, 악독한 놈들 그리고 왜구들은 임산부의 배를 갈라 아들인지 딸인지를 내기까지 했다고 하는 그 일본사람의 후손이라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말이었기에 우리는 김영세(金英世) 할아버지를 모신 사당으로 찾아가 그곳에 써 있는 돌비석을 면밀히 관찰했는대 우선 한자를 읽을 수가 없었다. 마침 그곳에 와 있는 노인을 통해 띄엄 띄엄 영어로 번역을 하여 조금씩 이해를 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것은 어느 비석에 써있는 글귀였다. 일본 가등청정의 선봉 장군이었던 사야가(김충선)장군을 모신 부장, 김영세 장군은 본래 마쓰나가 히데오(松永英世)라고 불리웠다. "아니? 김충선(金忠善)은 뭐고, 김영세는 뭐야? 게다가 사야가는 또 뭐고? 아니 마쓰나가는?" 나는 가슴이 쿵쿵 거리고 있었으며 불길한 생각이 엄습해 오고 있었다. "빌?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놀라고있어?"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제니퍼는 아직도 이해가 안되는지 얼떨떨 한채, 나를 보자 정색을 하며 물었다. "제니퍼? 이리와봐! 뭔가, 잘못 되고 있어." 우리는 비석에 써 있는 한자와 한글 그리고 몇 글자의 영어 글자를 지적해 주었다. 우리는 곧바로 그 친척 아저씨를 찾아가 심각하게 물었다. "아, 김충선 장군? 그러니까 하와이로 이민을 가면 안되는 거지. 나라가 망하든 말든 혼자 잘 살겠다고 하와이로 간 주제에....." "아저씨, 그러지 말고 자세히 말해주소. 제발." 나는 친척 아저씨에게얼굴을 붉혀가며 물었다. "그래, 말해주지. 너희들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후손들이니까... 죄가 없어. 그래 죄가 없어." 아저씨가 우리에게 일러준 김충선 장군과 그의 부장 김영세 장군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 가문의 시조(始祖)는 김영세 장군이시다. 용맹스러운 김영세 장군, 그는 본래 일본 사람으로 마쓰나가 히데오라고 하며 김충선 장군의 부장이었다. 김충선 장군은 가도기요마사의 부장겸 선봉장이었다. 김충선 장군의 본래 이름은 사야가(沙也可)이며 사야가의 번주였다. 임진왜란이 나자 그는 가등청정의 부장 겸 선봉장이 되어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1592년 4월 13일 부산성을 공격했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을 흠모했기에 다음 날 저녁에 27명의 일본군 부하들을 데리고 조선 왕에게 항복한 후 귀순을 한거여. 그때 이 사야가 장군을 보좌한 부장이 바로 마스나가 히데오, 김영세 장군, 다시 말하면 우리 가문의 조상이이란 말여. 그러니 우리 조상 김영세 즉, 마스나가 히데오 장군을 알려면 여기 여주에서 알아 보고 김충선, 즉 사야가 장군을 알고 싶으면 경상북도 대구 근교 달성군에 있는 우록 마을로 가보면 돼요. 알겠나? 자, 나는 바쁘니 이젠 가련다." 아저씨가 된다는 친척 아저씨는 무뚝뚝하게 대충 일러주고는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급히 사라졌다. "아니? 일본군의 장수?" 우리는 서로 놀라 바라다 보았다. 아니, 이게 무슨 변괴란 말인가? 규슈에 가서 제니퍼의 조상이 조선 사람인 것을 알아냈는데 여기 여주에 와서는 나의 조상이 일본 사람이라니.... "제니퍼? 무엇인가가 잘못됐어. 이번에는 나의 조상이 일본사람이라니....우리는 뒤바뀐 인생을 살아왔어. 우리는 뒤 바뀐 인생을 살아 왔어." "그러게, 이건 말도 안돼. 어제는 내가 당하더니 오늘은 당신이 당하네. 아무래도 세상이 거꾸로 돌아 가는 모양이여. 거꾸로 도는 풍차처럼말여. 빌!" "거꾸로 도는 풍차(風車)?" "그래. 잠간, 우리 휴식좀 하자. 숨좀 고르고 다시 알아보자. 제니퍼!" "그래 그게 좋을 것 같아." 잠시 우리는 조용히 앉아 생각을 멈추고 멀리 하늘을 바라다 보니 일본에서 겪은 일들도 같이 떠 오르고 있었다. 큰 충격을 겨우 진정하고 있었는데 더 큰 충격이 또 닥치다니.... "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을 정확히 알려면 대구 근처에서 살았다는 김충선 장군의 마을을 먼저 찾아야 할 것 같아, 그러니, 갑시다. 대구, 우록으로....."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제니퍼. 그는 장군이었고 김영세 할아버지는 그의 부장이었으니까...." 우리는 마치 긴 미로(迷路)의 혼돈속에서 가까스레 가닥을 찾은 우리의 뿌리를 찾게 되었다. 제. 20장: 대구, 달성(達成)근교 우록(友鹿)마을에서 사야가(金忠善), 마스나가(金英世) (적장의 귀화(歸化)) 묻어둔 역사는 찾아야 그 진가를 알 수가 있다고 했듯이 나의 할아버지(金英世) 마쓰나가 히데오를 여주에서 알아 보는 것을 잠시 멈추고 그가 섬겼던 김충선 장군, 사야가 번주를 찾아 보기 위해 일단 서울로 올라와 하루를 보낸후 고속 기차를 타고 대구로 향했다. 잠시 기차 속에서 나는 생각해 보았다. '왜? 여주에 사는 나의 친척들은 그들 조상이 일본에서 왔다고 하는대 저토록 무관심 할까?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일본에 사는 다카야마의 가족들도 마찬가지로 무관심했는데, 왜 그럴까? 차분히 생각을 해보니 모든 것이 긴 세월을 지나면서 희석이 되었으며 그들은 각각 살고 있는 땅에 동화되어 그 민족이 된 것이라고 나는 정의를 했다. 400년간 일본에 살아온 조선 사람, 이삼평과 이진구 그리고 심당길의 가족들은 일본 사람들과 같은 물 마시고 숨쉬고 살다보니 물리적인 변화와 화학적인 변화로 조선 사람임을 까마득하게 잊고 일본 사람으로 동화가 되었으리라. 반면 아무리 일본 사람이라고 해도 400년간 조선 땅에 살다 보면 역시 조선 사람으로 동화가 되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살다보니 각각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생겼다고 나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유태인들이 생각났다. -유태인들은 애급에서 400년간 종살이를 하였지만 동화 되지 않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나라를 세운 것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아닌 것 같았다. 반면 우리 조선과 일본사람의 미국 이민을 보면 불과 100년밖에 안되건만 우리는 조선이나 일본 말도 못하고 미국말만 하며 미국사람으로 불리우기를 더 좋아 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든가? 결국 민족이란 피도 중요 하지만 같이 살아 가는 환경이 더 중요한 것 같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기차는 대구역(大邱驛)에 도착했다. 7월의 대구는 무더웠으며 습기가 있어 찐득거리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찾아간 대구시 달성군 우록(友鹿)마을은 야트막한 산줄기에 둘러 쌓인 조용한 마을이었다. 이름 그대로 '사슴을 벗하며 살고자' 했던 김충선의 후손들이 400여년간살아온 집성촌으로 200여 가호중 50여 가호가 김충선의 가문들이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후손들을 따지면 4000여명이나 되며 족보에 나타난 남자는 700여명이 된다고 한다. 그뿐인가그들의 아들이 1천 3백여명이 된다고 하니 복받은 가문이다. 우록 마을에서 약 100미터를 걸어가니 녹동서원이 나오며 그곳에 김충선의 위패를 모신 사당 녹동사가 있었다. 해마다 3월이면 유림들이 여기에 모여 제사를 지낸다. 김충선이 죽은 후 모하당(慕夏堂 중국 문명을 그리워 함)이라고 호를 지을 정도로 김충선은 조선 문화를 사모했다고 한다. 다시 느린 걸음으로 약 10분간 걸어 우록교 다리를 건너고 보니 '우봉 역사 도서실"이란 작은 도서실이 있었다. 우리는 이 작은 도서실에서 옛 일본인 장군 '사야가'를 만났다. 사야가란 장군은? 그는 스스로 조선을 흠모하여 귀순한 장군이었지만 그도 역시 고향을 그리워했었다. 우리는 도서관 안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눈물과 한숨을 보고 듣는 듯 했다. 나는 그에관한 문헌을 찾아 진지하게 읽기 시작했다. 역시 1592년 임진 왜란 때였다. -406년전, 일본 땅에 한 장군이 살았다. 그는 영지(領地)에서 수만석을 거두는 다이묘(大名)로 그가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이 사야가(沙也可)였다. 그러나 사야가는 장군이라기보다 학문을 좋아 하며 조선문학을 사모하는 문인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평소에도 조선문집과 중국문집을 읽으며 대륙과 조선 반도를 사모했다. '조선은 일본보다 훨씬 우수한 문명과 학문이 있는 나라이다.' 라고 그는 조선을 늘 흠모하며 살아왔다. 음흉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천하를 통일하더니, 그는 엉뚱하게도 조선 정벌을 계획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망상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의 욕심을 성취하기 위해 모든 것을 파괴한다고 해도 마음이 아플 사나이가 아니었다. 히데요시는 규슈의 강자, 가토기요마사를 조선침공의 제 2장군으로 발탁했으며, 가토기요마사는 사야가를 선봉장으로 임명하고 보니 사야가는 당황했다. '안돼! 문명국, 조선을 치다니, 안된다.!'사야가는 무식한 칼잡이 히데요시와 가등청정이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사야가' 장군이 신뢰하는 부장이 있었는데, 오이타 출신의 마스나가 히데오(후일, 김영세가 됨)였다. 사야가보다 한 살이 어린 장수로 사야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섬긴 사나이였으나 사야가처럼 학문을 좋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수로서 우직하리만큼 주어진 일에 전념을 다했으며 배신을 모르는 바보같은 사나이였다. 조선으로 파병되기 며칠전 사야가 장군은 부장 마스나가 히데오를 만나 그의 마음을 밝혔다. "마스나가, 너는 나를 위해 목숨을바친다고 했지?" "예. 장군. 언제든지 명령만 내리신다면...." "알겠네. 마스나가!" "무슨 일이 있습니까?" "분명, 그대는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했어, 그렇지?" "예. 장군!" "마스나가? 네게 할말이 있어. 너는 조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조선을? 아- 조선이야 우리가 정벌하기로 한 나라입니다." "그럴까? 나는 조선을 흠모한다. 조선은 문명국이며 우리 일본은 조선을 존중하고 배워야 할 나라라고 생각한다." "........" "그러기에 나는 조선 정벌이 무모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주군(主君)!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조선을 정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 히데요시 장군의 명령을 어긴단 말입니까?" "히데요시는 과대망상병(誇大妄想病) 환자이니라." "과대망상?" "그렇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살리는 살인자란 말이다." "그래도 그는 일본 전국을 통일했으며 가토기요마사 장군도 기꺼이 그를 따르는대, 어찌, 장군은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그러기에 네게 묻는다. 너는 나와같이 행동을 하겠느냐? 언제든지?" "물론이죠, 주군." "고맙다. 나는 너를 믿는다." "예? 무슨?" "알았다. 마스나가, 나가 보거라." ".........................." 마스나가는 사야가 무엇을 하려는지 그의 마음을 꿰뚫어 알지 못했다. * 1592년 4월 12일------ 마침내 히데요시는 일본 군사들을 대마도(쓰시마)에 집결 시킨 후 4월 12일 이른 새벽에 함선을 띄워 부산성을 향해 공격하니 부산(釜山) 첨사(僉使) 정발(鄭撥)은 동요하지 않고 죽기를 다해 일본군을 막아내고 있었다. 일차 전투에 참여한 선봉장 중의 하나가 바로 사야가와 마스나가였다. 정발 장군의 강한 저항으로 인해 일본군은 어이없게 일단 후퇴를 하여 부산 앞바다에서 또 다른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날 밤, 사야가 장군은 부장 마스나가를 조용히 불렀다. "마스나가! 잘 듣거라. 너는 분명 나를 따른다고 했느니라?" "예. 번주님. 그렇습니다. 죽어도 같이 죽고....." "그래, 나는 너를 믿는다." "믿으십시오. 번주님!" "정신차려 듣게, 마스나가! 나는오늘밤, 군사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조선에 귀순하려고 한다. 오늘밤에...." "예? 번주님! 귀순을 하다니요? 무슨 말입니까? 내일 아침이면 부산성을 함락 시키고 곧 조선은 망하는데, 귀순이라니요?" "그렇다. 그러나 조선은 문명국이요. 일본은 비 문명국이니 우리가 어찌 조선을 침공할 수 있느냐?" "안됩니다. 주군!" "아니다, 나는 오늘 밤 귀순을 하려고 하니 준비하거라. 너와 같이 갈 군사들을 조사해 준비하거라." "......................" "대답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싫다는 거냐?" "아, 아닙니다. 단지 이해가 안갑니다. 조선은 내일이면 우리에게 망할 텐대 왜 망하는 나라에 귀순을 하렵니까?" "내가 거듭 말했듯이 조선은 문명국이니라. 우리가 침공할 나라가 아니니라. 자, 준비하거라. 네 수하의 군대를 이끌고 한 시간 후에 여기로 오너라. 나도 준비하고 있겠다. 나는 너를 믿는다. 마쓰나가!" 숙소로 돌아온 마스나가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 조선 정벌을 하러온 선봉장이 싸움은 안하고 오히려 적군에 귀순을 하겠다니...... 조선은 아무런 준비도 안된 빈껍데기 같은 나라인데, 내일이면 부산성은 함락되고 곧이어 동래성도 그리고 북상하여 한양도 곧 함락 될텐데.... 조선에 귀순을 한다면 나는 부모를 배반하는 것, 그리고 일본을 배반하는 것인데..... 그럴 수가 없다고 생각을 했다. '차라리, 가토장군에게 보고를 할까? 그렇게 되면 사야가 번주는 가토에게 죽임을 당하리라. 그렇게는 못한다. 아니 못해. 내가 주군을 배반 할 수는 없지.' 마스나가는 너무나 엄청난 사실 앞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냐! 나는 사야가 번주에게 충성을 약속했어. 사나이로 태어나서 한번 맺은 약속을 지키리라.' 마스나가는 마침내 번주 사야가를 따르기로 마음을 정하고 수하 군사들 중에서 쓸만한 군인 30명을 뽑았다. 캄캄한 밤, 마스나가는 번주 사야가가 기다리는 막사 근처에 집결했다. "듣거라! 번주님을 따르는 것이 우리들의 운명이다. 그러니 우리는 사야가 장군의 명령에 따라 부산성으로 갈 것이다. 다들 나를 따르라!" 마스나가는 병졸들을 큰 소리로 설득하였으며 사야가 장군도 큰 결심대로 막사를 나와 캄캄한 밤길을 따라 부산성을 향해 탈출을 시도했다. 군영을 지키던 병졸에게 "잠시 정찰을 하고 돌아 오겠다"라고 거짖 말을 하니 사야가 장군을 의심치 않았다. 잠시 캄캄한 밤길을 가다보니, 오히려 사야가의 병졸 하나가 작은 소리로 겁먹은 말로 물었다. "장군? 어디로 가는겁니까?" "어디로 가느냐고? 잔말 말고 나를따르라." "장군! 내일 아침에 공격을 한다고했는데, 웬 밤중에?" "듣거라! 나는 우리보다 더 좋은 학문과 기술을 가진 문명국 조선을 존경한다. 그러니 나는 조선을 공격 하지 않으련다." "아니? 그렇다면 일본을 배반하시렵니까? 장군!" "배반이 아니라 귀순이다. 알겠느냐?" "못합니다. 일본을 배반하다니요?" "배반이 아니다. 순리이다. 순리!" "아닙니다 조선은 곧 멸망 합니다." "나를 따르겠느냐? 아니면?" "못합니다. 일본을 배반 할 수는 없습니다. 번주님!" "그렇다면 너는 죽음을 택하라!" 사야가는 칼을 들어 반항 하는 병졸의 몸통을 내리치니 "악!"하는 소리를 내며 병졸은 피를 토하며 쓸어졌다. "보았는가? 어느놈이고 반대 하는 놈은 죽으리라! "사야가는 소리쳤다. 졸병들은 묵묵히 사야가를 따랐다. 그래도 그날 밤 부산성으로 가는 동안 이탈한 병졸이 두명이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가토 장군에게 가서 사야가가 반역하여 부산성으로 탈출한 것을 보고 했다. "뭐시? 사야가란 놈이 조선에 항복을 하다니, 이놈이 미쳤나? 아니, 내일이면 부산성은 함락되고 조선도 곧 멸망 할 텐데, 거기가서 항복을 하다니, 사야가? 네가 제 정신이냐?" 가토는 길길이 날 뛰다가 큰 소리로 말했다. "죽일 놈, 네 가족을 모두 죽여 주마! 사야가를 잡아 오는 자는 상을 주마!" * 한편, 27명의 부하를 데리고 부산성 앞에 도착한 사야가 장군은 백기를 들고 성안을 향해 소리쳤다. "부산 첨사 정발 장군을 만나러 사야가가 여기에 왔소." "사야가? 누구냐?" 성루에서 묻는 질문은 거칠었으며 조롱하는 말투였다. "일본 가토의 부장, 사야가라고 하오. 조선에 귀순(歸順)하려고 왔습니다." "뭐라고, 귀순을? 아니, 너, 누구를 조롱하려고 하느냐? 이놈!" "조롱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발 장군을 만나게 해 주소." "썩 물러나라! 아니면 활을 쏘겠다." "여보소! 진심이요. 정발 장군을만나게 해주소." "진심이라니? 너희는 우리를 속여 성을 치려고 온 놈들이다." "아니요, 정발 장군을 만나 다 얘기하리다. 나는 조선을 존경하는 사야가라고 하오." "사야가? 잠간 기다려라. 장군이직접 오실 때까지.." 정발 첨사가 망루에서 바라다 보니 일본 군사는 고작 28명이요 백기를 들고 있는 모습이 예사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내가 정발이다. 네 놈이 귀순을 하겠다고?" "그렇소. 나는 가토의 부장, 사야가요. 나는 본래 조선을 흠모하여 귀순하려고 하니 문을 여시오." "조선을 흠모한다? 어떻게?" "장군? 나는 조선의 책을 읽기를 좋아하오. 그리고 조선의 문명을 숭상하오."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러니 조선은 일본의 침공을 받으면 아니되오." "침공을 받으면 아니된다? 그게 무슨 말이냐?" "조선의 문화재가 불바다가 되면 아니된다는 말이요." 그 순간 정발 장군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가 말하는 내용이 틀림이 없기 때문이었다. "성문을 열고 저놈들을 맞아 주라. 내가 직접 물어 보겠다." "안됩니다. 장군. 저 일본놈들이간교한 꾀로 우리를 교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저놈에게 활을 쏘아 보겠다." 마침내 정발 장군은 활을 들어 사야가를 향해 활을 쏘았다. 쏜 화살은 사야가의 투구를 마쳤다. 그래도 사야가는 꿈쩍을 하지 않고 "장군! 내 말을 믿으소서." 라고 외치고 있었다. "성문을 열고 저놈들을 들어오게 하라!" 마침내 정발 장군은 항복을 받아 드렸다. 성문이 열리면서 무장 해제된 28명의 일본 군인들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정발 장군은 생각지도 않았던 일본 장수의 투항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른지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우선 사야가 장군이 정말로 투항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속임수 인지 구별을 해야 되는데 워낙 진지하게 대답을 하니 혼동이 되었다. "부산 성은 내일이면 너희들에 의해 함락이 될터인대 네가 조선을 흠모하기에 투항을 한다고 하니 참으로 믿기지 않는구나. 네가 말하는 것이 다 진정이냐?" "예. 장군. 나는 충성을 다해 조선을 위해 내 목숨을 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받아 주십시오." "어허! 믿기지 않는지고..." "조선의 학문을 숭상하고 문명을 사랑하는데 무엇이 믿기지 않겠습니까?나는 조선을 흠모하는 마음 뿐입니다. 그러니 나의 투항을 받아 주소서." 정발 장군은 사야가의 참 뜻을 알 듯모를 듯 했다. "아니, 조선을 침공한 일본군 장수중에 이런 인물이 있다니....글을 사랑하며 학문을 숭상하는 장군이 있다니...." 정발 장군은 혀를 차며 감탄하고 있었다. "장군! 저놈이 필경 정탐꾼일지도 모릅니다. 참해 버리소서." 부관이 정발 장군에게 진언을 하였다. "그럴지도 모른다마는 진정일 수도 있다. 어짜피 부산성은 내일이면 이자들에 의해 힘락이 될터, 이자를 죽이거나 살리거나 어느것 하나 문제 될것이 없다. 일단 목숨을 걸고 들어온 이자들을 진정으로 믿기로 하자." 그날, 정발 장군은 사야가와 일행의 투항을 받아 주면서 조선 군사 복장으로 갈아 입히고 캄캄한 밤에 북쪽 문을 열고 한양으로 보내 선조를 뵙고 직접 귀순을 하라고 편지를 써 연락병에게 주어 보내면서 정발 장군은 아주 정중하게 사야가 장군에게 부탁을 했다. "사야가 장군! 부디 조선을 위해 큰 일을 해 주소서. 나는 내일이면 어짜피 이 성과 더불어 목숨을 내 놓아야 합니다. 그러니 부디 조선을 위해 충성하소서. 사야가 장군!" "정발 장군님, 명심하겠습니다. 장군, 감사합니다." 사야가 장군 일행이 한양으로 급히 떠난 다음날, 부산성은 가토가 이끄는 본대에 의해 무참하게 함락되었다. 마지막 순간 까지정발 첨사는 왜놈을 하나라도 더 죽이려고 군사들을 독려하였다. 성루를 점령한 일본군은 부산성에 남아 있는 모든 조선군사를 하나 하나 도륙을 하였으며 마침내 정발 장군도 칼에 맞아 땅에 쓸어지고 말았다. "지독한 놈이군!" 가토는 쓸어진 정발에게 조롱겸 경의를 표하였다. 정발 장군이 전사하던 그 순간 사야가 장군 일행은 한성으로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임진년, 4월 27일- 사야가 장군은 항복 문서를 정식으로 선조에게 올려 항복을 하였다. "임진년 4월, 일본국 우 선봉장 사야가는 삼가 목욕 재개하고 머리숙여 조선국 절도사 합하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저는 섬나라, 오랑캐의 천한 사람이요, 바닷가의 보잘 것 없는 사나이입니다. 사람이 사나이로 태어난 것은 다행인 것이나 불행하게도 문화의 땅에 태어나지 못하고 오랑캐 나라에 나서 오랑캐로 죽게 된다면 어찌 영웅의 한되는 일이 아니랴하고 때로는 눈물 짓기도 하고 때로는 침식을 잊고 번민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삼가 조선에 항복을 하여 신민이 되고자 합니다.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선조를 비롯한 조정의 관리들은 어리둥절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 일본 군이 한양을 향해 전진을 하고 있는 판국에 일본 장수가 조선에 항복을 한다니 믿어지지 않았으나 전사한 정발 장군이 써 보낸 편지를 읽은 왕은 그들의 귀순을 허락해 주었다. 정발 장군의 편지는 다음과 같았다. -전하! 부산 첨사 정발은 내일 이면 일본 군에 의해 죽음을 면치 못하오나 오늘 귀순한 사야가 장군의 귀순은 믿을 수가 있습니다. 부디 귀순을 허락하시어 조총과 화약을 만드는 부서로 편입하여 쓰심이 좋을 듯 합니다. 부산 첨사. 정발드림.- "사야가 장군을 예(禮)를 갖춰 귀순을 받아 주거라. 그리고 그로하여금 조선을 위해 충성을 하게 허락하라." 선조는 사야가의 귀순을 허락했으며 아울러 전사한 정발 장군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정발 장군을 추모하도록 하라!" 선조는 정발의 죽음을 진정 안타까와 했다. 사야가 장군은 귀순후 조총을 만들고 화약을 제조하여 조선을 도왔으며 말머리를 돌려 왜군을 물리치는 일을 훌륭히 해 내었다. * 번주 사야가 장군이 어이없게 그리고 비겁하게 조선에 항복한다고 생각한 부장 마스나가 히데오는 처음에는 불만스러워 가토 장군에게 고발을 하는 것이 일본을 위해 좋으리라고 생각을 했으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사야가와는 피로 맹세한 절대적인 관계이기에 죽으나 사나 주군으로 모신 사야가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사야가 장군을 따라 가리라. 죽으나 사나!" 그는 힘'�소리를 쳤다. 그리고 그는 병사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불만스럽지만 그래도 사야가 장군을 따라가야 한다. 너희들도 나와 뜻을 같이 해주길 바란다." 마스나가는 병사들을 설득했지만 그를 따른 병사는 고작 30명이었으며 그나마도 부산성으로 오는 도중 한명은 사야가에 의해 사살 당했으며 2명은 도망하고 말았다. 정발 장군의 도움으로 조선에 귀순을 했지만 임진왜란의 전황은 말도 안되게 조선에게는 불리하다 못해 일방적인 패배의 연속이었다. 사야가와 마스나가 그리고 같이 귀순한 일본군사는 조선 군사들에게 눈총을 받았으며 일본 군사에게는 쫒기우면서 동족인 일본군에게 총과 화살을 겨누어야 했으니 두배로 힘든 전쟁이었다. 그들의 손에 죽어 가는 동족 일본군을 바라보면서 사야가의 귀순 군대는 눈물을 흘렸다. '아- 내가 나의 형제를 죽이다니...저기에 죽은 저 일본 병사는 멀리 가고시마에서 왔으리라. 부모가 보고 싶겠지. 어쩌다 히데요시의 망상 때문에 이토록 처절한 전쟁을 치루다니....' 화살에 맞아 신음하는 일본 병사를 보면서 사야가 그리고 마스나가는 눈물을 흘렸다. '저 형제는 오사카에서, 아니면 구마모토에서 왔으리라....' 죽는 모습을 보는 사야가와 마스나가 군사는 차라리 조총이나 화약을 만드는 편이 더 마음 편했다. 사람을 직접 죽이는 편이 아니니까.... 그러나 그것도 마음 편하지 않았다. '아- 내가 만든 조총이나 화약으로 나의 동족 일본군이 죽어가다니..... 아, 내가 만든 화약과 조총으로 나의 동족이 죽다니....' 마스나가는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주인 사야가의 의지대로 따라야 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조선 왕은 의주로 몽진했으며 조선 반도는 일본 천하가 되고 보니 양식이 떨어져 마스나가의 군인들은 몹시 궁색했음은 물론 조선사람들도 외면하는 관심밖의 군대였다. 더 더욱 마음 아픈 것은 두고온 고향생각이었다. 두고온 부모가 보고 싶었으며 오이타 바닷가에서 만난 연인도 보고 싶었다마는 모든 것이 허사였다. 차라리 일본 진영에 가서 다시 항복하고 사죄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마스나가? 너는 조선에 귀순하는 것을 후회하느냐?" "예. 후회합니다." "그렇겠지. 그러나 우리는 찬란한 문화와 예의가 있는 조선에서 살아야 해." "............." "왜, 말이 없나, 불만인가?" "아닙니다." "조금만 참으라, 곧 전쟁이 끝난다. 그리고 우리는 당당한 조선인이 되는거다. 조선인." "예, 주군." 마스나가는 사야가 번주를 도저히 배반 할 수가 없었다. * 사야가와 마스나가에게 있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은 길고 배"杵�다. 이 전쟁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남은 것은 큰 행운이었다. 조선 사람도 아닌 일본 침략자로 부산성을 침공했다가 자진해서 투항은 했지만 이들은 조선과 일본 양편으로부터 미움을 받았기에 그들이 겪은 7년은 70년에 해당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스나가는 이순신 장군을 존경했다. 그러나 전쟁중에 보고 들은 조선의 당쟁으로 무고하게 이순신 장군이 투옥 되는 모습을 보면서 실망도 했으며 주군, 사야가를 원망도 해 보았다. 1598년, 일본의 영웅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 군은 사기를 잃고 허겁지겁 일본으로 후퇴하기에 바뻣다. 마침내 전쟁은 끝나고 마스나가는 사야가 장군을 따라 우록 마을로 가서 살게 되었다. 우록(友鹿)마을은 이름 그대로 사슴과 같은 마을이었듯이 김충선(사야가)은 자연 속에 묻혀 살고 싶었다. 사야가는 김해 김씨, 김충선(金忠善)이란 이름을 선조로부터 하사받았으며 마스나가도 김해 김씨, 김영세(金英世)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우록 마을에 이상적인 마을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온 조선인이라는 특성을 부각시켜 마을을 만들었으며 농사도 일본식으로 지었다. 모든 것이 하나 둘 안정을 보았으며 마을로서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조정에서 특별히 배려해 진주 목사의 딸을 김충선에게 주어 결혼케 했으며 종 6품의 직위를 하사했다. 결국번주 사야가는 일본인이 아니요 당당하게 조선의 녹을 먹는 관리에 해당됐다. * 부장 마스나가도 이젠 조선 사람, 김영세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 했다. 마스나가는 어느날, 번주 사야가를 찾아 갔다. 그리고 그는 뜻밖의 결심을 말했다. "번주님, 저는 도자기 공이 되렵니다." "도공이 되고 싶다구, 마스나가?" "예. 장군님" "마스나가, 아니, 김영세 장군? 어디로 가고 싶나?" "경기도 여주라는 곳으로 가 그곳에서 도자기 굽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경기도, 여주?" "예." "왜 하필이면 중인들이 하는 도자기를 굽겠다는가?" "아시디시피 소인은 글을 모릅니다. 듣기로는 많은 도공들이 일본으로 잡혀 갔다고 하든군요. 가토도 고니시도 많은 도공을 데려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네가 사죄하는 마음으로 대신 하겠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번주님. 사죄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시게. 김영세 장군." "감사합니다. 번주님." "이제부터는 번주라고 부르지 말게. 그냥 장군이라고 부르게."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번주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어허! 번주? 이젠 번주가 아니고 조선사람이라네." "아닙니다. 번주님! 제 목숨 다할 때까지 모시겠습니다." "고맙네. 마스나가(金英世) 장군." * 마스나가, 김영세는 29살의 나이로 경기도 여주로 이주를 했다. 1599년 여름이었다. 오이타에서 태어나 구마모토에서 무술을 닦고 사야가를 만나 조선 출병을 한 후 대구 우룩에서 살다가 여주로 옮기면 그곳에서 뼈를 묻겠다고 다짐을 했다. 대구에서 여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그가 택한 길은 임진왜란 때 가토기요마사가 침공했던 그 길이었기에 그에게는 감회가 새로웠다. 상주를 거쳐 문경, 조령(鳥嶺, 새재 고개)을 넘어 충주로 가야 했다. 조령고개는 바위, 나무 그리고 절벽으로 된 천연의 요새 였건만 어짜자고 신립 장군은 여길 버리고 충주로 가 탄금대에서 무의미하게도 학익진과 배수진을 치고 일본군을 대했지만 몰살 당하고 말았다. 조령고개를 넘다보니 솔개가 하늘 높이에서 맴돌고 있었다. 문득 산길에서 들리는 울음 소리도 있었다. 조총에 맞아 죽은 조선군의 섬찢한 울음과 돌에 맞아 죽었던 일본군의 비참한 울음소리가 웬일일까? 슬픈 화음을 이루고 있었다. 섬찢하다 못해 애처러워 김영세는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려 주었다. 저녁 노을이 꼴깍 넘어 가기전 붉은 섬광이 서쪽 하늘을 덮는가 했는데 이내 캄캄한 어둠이 찾아 왔기에 그는 개나리 봇짐을 풀고 노숙을 하게 되었다. 초생달을 바라다 보니 멀리 오이타(九州 大分)에 두고온 가족들의 얼굴이 떠 오르고 있었다. 승냥이의 울음 소리가 멀리서 들려 오는가 했는데 어느새 깊은 잠에 들었나보다. 그리고 꿈을 꾸었나 보다. 멀리 오이타 해안에서 만났던 그의 연인의 헬쓱한 얼굴이 눈에 선했다. 머리를 길게 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는 온통 눈물이었다. 생사를 모르는 마스나가를 기다리다 지친듯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마스나가는 그의 그의 부모님이 울고 있는 모습이 떠 오르고 있었다. "히데오(마스나가)? 너는 어디에있는냐? 아직도 조선에? 너는 일본을 거역한 반역자가 되었느니라. 마음이 강팍한 가토가 군대를 보내 우리 가족을 멸했느니라. 어서 돌아 오거라. 우린 너로 인해 멸족이 되었어......" "아버지! 어머니! 미찌꼬!" 머리를 풀고 울고 있는 애인 미찌꼬의 목에도 가토의 예리한 칼날이 광채를 내더니 급기야, "얏"소리를 내더니 피를 뿜으며 머리가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미찌꼬! 미찌꼬!" 히데오(김영세, 마스나가) 는 고함을 치며 땅에 쓸어진 미찌꼬를 부등겨 안았다. 놀라, 눈을 뜨니 한바탕의 꿈이었다. 승냥이가 냄새를 맡았는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기에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침, 동이 틀 무렵 그는 그는 벌떡 일어나 산길을 밟아 올라갔다. 이마에는 식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나 때문에 온 가족이 죽다니. 아- 내가 내 가족을 죽였다니....아버지,어머니!' '아- 미찌꼬를 죽이다니!' 그는 울면서 조령 고개를 넘고 있었다. 한발작 한발작 띄어 놓는 것이 마치 죽음을 향해 걸어 가는 사형수와도 같은 심정이었다. 조령고개 여기저기에서 죽은 조선의 군사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으며 일본 군이 소리치며 조롱하는 소리가 더 더욱 귀를 거슬렸다. 죽은 혼들이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듯 했다. 솔개가 끽끽 소리를 내며 하늘 높이 솟구치고 있었다. 규슈 아소산(阿素山)에서 불어온 화산의 열기 때문인지 그의 얼굴에서는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한발작 한발작 걷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들었는데 멀리서 가토기요마사의 고함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일본을 반역한 놈! 마스나가!' 구마모토의 성주, 가토 기요마사가 소리를 치며 큰 칼을 휘두르고 있는 것 같았다. 다음날이 돼서야 겨우 충주땅을 밟게 되었으며 충주 입구에서 탄금대를 바라다 보았다. 충주천의 한 부분인 탄금대는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탄금대와 충주 호수에도 죽은 영혼들이 울고 있는 듯 했다. 신립장군이 어이없게 패배한 탄금대에 조선 팔도가 가로 누어 있는 듯 했다. 그리고 그위를 밟고 지나간 가토의 말발굽이 또렷이 새겨진 듯 했다. 갑자기 가토의 목소리가 찌렁찌렁 울려오고 있었다. "멈추거라! 거기 오는 놈, 너, 마스나가가 아니냐? 너는 배반자, 네 애비와 에미의 목을 쳐 구마모토의 성루에 걸어 놓았느니라." "보십시오. 가토 장군님? 나는 일본을 배반했으나 나의 주군 사야가를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너는 배밴자니라." "나는 당당한 조선이인이 됐소. 문명국인 조선..." "어쨌건 너는 배반자! 죽어 마땅하다. 마스나가!" ".........................." 일본을 배반하고 그 결과 부모의 목이 짤려 구마모토의 성루에 걸려 있다니, 원통했다. 일본을 배반한 것이 마음 아파, 마스나가는 일본을 향해 무릎을 끓고 '일본, 반자이!'라고 외쳤다. 그리고 그는 덧 부쳤다. '일본은 나의 조국이요. 그러나 나는 다른 조국을 선택했습니다. 용서 하소서.' 그는 다시 일어나 갈길을 재촉했다. 마침내 동쪽에 보이는 천둥산 박달재와 정 반대인 서쪽으로 발길을 돌려 장호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하루 반을 걸어 북쪽으로 향했다. 마침내, 여주가 가까웠는지 여강이 눈에 보였으며 강물은 꽤 많이 불어 있었다. 여강변에 우뚝 솟은 신륵사가 눈에 띄였다. 높은 강 절벽에 세운 절이 마치 성벽같아 보였다. 오사카의 천수각보다 더 훌륭해 보였다. 아니 구마모토에 있는 가토(嘉藤)의 천수각보다 더 훌륭해 보였다. 문득 그는 그의 고향 오이타를 생각에 떠 올렸다. 해안을 끼고 말을 타고 가다보면 여기저기에 높은 산들이 길을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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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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