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청공 3

2012.01.22 07:30

연규호 조회 수:587 추천:23

아오소라-제 3. 6장: 일본 여자는 안돼! 호사다마(好事多魔)란 말 그대로 제니퍼와의 만남은 하늘이 마련해 준 아름다운 인연이라고 생각했는데,누군가의 엄청난 반대에 직면하게 될줄이야.... 사랑은 국경을 넘고 인종을 초월한다고 하는 말처럼 비록 한국과 일본이라는 엄청난 장벽은 우리 이민 4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질 않을 거라고 자신을 했었는데 뜻밖에도 나의 어머니의 반대가 예상보다 훨씬 심했기 때문에 우리들의 데이트는 아주 힘든 상태가 되고 말았다. "빌! 안된다. 안돼! 일본 여자하고는 죽어도 안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된다. 이녀석아!" 얼굴을 붉히고 언성을 높인 어머니의 목소리가 내 귀에 천둥치는 소리처럼 들려오고 있었으며 걸칙한 침마저 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눈가에 가벼운 경련마저 일고 있었다. "아! 어머니, 제발 우리들의 사랑을 이해해 주세요. 그리고 결혼을 허락해 주세요. 어머니! 제발!" 나는 오늘도 대답없는 메아리처럼 어머니에게 빌고 있었다. * 분주하고 바뻣던 의과대학을 무사히 졸업한 후 예정대로 나는 스탠포드 대학병원에서 외과 수련의사가 됐다.외과 수련의사란 눈.코 뜰새없이 매일 매일을 바쁘게 살아가야 하는 중노동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니퍼가 보고 싶어 토렌스로 기쁜 마음으로 찾아가곤했다.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오월의 장미꽃처럼 피어 올랐으며 그녀를 보지 못하면 허전했다. 포옹을 통해 따듣한 체온속에서 전자파처럼 흘러 나오는 사랑을 느꼈으며 심장의 박동을 통해 사랑을 전달 받기도 했다. 제니퍼(Jennifer)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써빌(Bill)에게 보냈다.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땐 / 마치 나의 마음을 스치며 지나가던 그 어느 남자처럼 생각들었으나, 웬 일일까? 끊임없이 솟아 나는 빌을 향한 그리움. /아! 나는 빌을 사랑하오. 빌은 아마도 /하늘이 나를 위해 보내준 /귀한 선물입니다." 나(빌)의 마음도 그러했다. "제니퍼, 나 그대와 함께 하려오./내 마음속에 뜨거운 불꽃을 피우리다.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 진주같은 사랑을 피우리다. 그대를 사랑하오. 내 몸을 바쳐서라도. 그리고 나는 그대에게서 /둥지를내리우리다. /둥지를." 사랑하는 마음들이 뜨거운 용광로에서 녹아 하나가 되듯이 우리들이 알게된지 1년 2개월만인 2006년 12월, 떨리는 마음으로 나는 토렌스에 있는 꽃집에서 무릎을 꿇고 제니퍼에게 청혼을 했다. "제니퍼? 거짓말 잘한다는 조센진 4세가 잔인한 동물같다는 니혼진(일본인) 4세, 당신에게 청혼을 합니다." "예? 마늘 냄새나는 조센진이 피를좋아 하는 경제동물인 니혼진에게 결혼을?" "물론이죠, 받아 주시겠습니까?" "..............." "제니퍼? 왜 말이 없소!" 나는 당황해서 물었다. "빌, 사랑해요, 나도....."제니퍼는 나의 청혼을 미소로 받아 들였는대, 잠시후 그녀는 너무나 기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눈물을 흘릴만한 이유가 엄연히 우리에게 있었다. 제니퍼의 집안은 우리들의 결혼에 반대가 전혀 없었는데 비해, 나의 집에서는 반대하는 말들이 여기저기에서 봇물터지듯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믿었던 어머니의 반대는 지난 일년을 두고 끈질기게 우리들을 괴롭혔다. 생각해 보면, 내가 제니퍼를 데리고 살리나스에 있는 어머니에게 인사를 시켰을 때, 어머니는 인사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언지하(一言之下)에 안된다고 소리를 쳤을 때 나는 제니퍼를 쳐다 볼 수가 없었다. "이것보소! 우리 한국 사람들은 당신네 일본 사람들과 결혼 따위는 못한답니다. 아시겠죠?" "............." 제니퍼는 민망하여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자! 내 대답은 바로 '아니오'다. 그냥 집으로 돌아 가거라!" "어머니, 저, 빌을 사랑합니다." 제니퍼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것도 안돼! 자 돌아가...." 어머니는 아예 반말로 기분 나쁜 듯이 대답을 하고는 휑하고 바람을 이르키면서 나가 버렸다. 일본 여자이기에 그런건지, 아니면 꽃꽂이를 하는 것이 못 마땅한지 어머니의 반대 의사는 정말 강해 보였기에 감히 더 이상 말을 부치기가 힘들었다. 그날 저녁, 어머니와 내가 단둘이 있을 때 어머니는 더 강력한 말로 반대했다. "일본 여자? 구미호(鳩尾扈)라고 한다. 한국사람들의 적이다." "어머니, 제가 사랑합니다." "사랑? 일본 여자를? 그래도 안돼! 일본 사람은 죽어도 안된다. 너 죽고 나죽자!" "어머니? 왜 죽습니까?" "왜 죽느냐고? 네가 일본여자하고 결혼한다면, 그래 너 죽고 나 죽자는 거다. 알겠니?" "..................." 나는 대답을 더 하지 못하고 흥분한 어머니를 처다만 보았다. 도저히 어머니를 설득하기란 불가능 할 것 같았다. "아- 어찌하면 어머니를 설득할 수있을까?" 나는 황망히 사라지는 어머니를 바라다 보며 한숨을 쉬었다. "왜 어머니는 그토록 일본 사람을 미워하는가? 왜?" * 그래도 한가지 고마운 것은 비록 어머니보다 말발이 약하긴해도 아버지가 우리들의 결혼을 찬성해 주고 있다는 것이 가물음에 쏫아진 단비와도 같이 힘이 됐다. 뜻밖의 사실을 발견하고 나는 깜짝 놀랐던 것은 아버지가 제니퍼를 좋아 하는 이유가 다름 아닌 그녀의 웃음과 미소 때문이었다. "빌? 내가 제니퍼를 좋아 하는 이유는....." 그리고 아버지는 잠시 머뭇머뭇 했다. "아버지? 그 이유가 뭐죠?" 나는 아버지를 다구쳐 물었다. "엉, 사실 나는 제니퍼의 은근한 미소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게 아름다운 미소를 짖는담..." "아버지! 바로 그겁니다. 저도 그녀의 미소가 좋았습니다. 마치 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과 같답 니다." "미륵보살반가사유상? 네가 그걸 어찌아느냐?" 아버지는 의외라는 듯이 되물었다. "알고 말고요. 할아버지가 알려주셔서..." "할아버지가? 나는 네가 의사 공부만 하는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제니퍼를 좋아 하신 것도 어찌보면 역설적(逆說的)인 결과였다.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미륵보살반가사유상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한없이 고마웠으며 믿음직스러웠기에 어머니를 설득하려면 아버지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리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를 설득하려면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어머니를 설득한다고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였다. "안된다, 이놈아! 일본 년은 안된다!" 어머니의 외치는 소리가 내 귓전에서 왱왱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지나도 어머니의 반대는 변함이 없었으며 오히려 나를 당황하게 하는 사건이 생겼다. -어머니와 단 둘이 식탁에 앉아 담소를 할 기회가 있었다. "어머니? 제니퍼는 착한 여자입니다. 결혼하렵니다. 허락해 주세요." "빌! 안된다고 했지. 안된다고..." "어머니?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저를...아니면, 저 죽습니다." "죽는 다고? 그래 죽어보거라. 일본년은 안된다고 했어..." "어머니!" 순간 어머니는 부엌에서 예리한 칼, 두자루 들고 탁자로 와 그중 하나를 탁자에 콱 꽂았다. 그리고 다른 한자루는 오른 손에 들고 나를 향해 칼끝을 고추 세웠다. "그래! 너 죽고 나 죽자! 죽어!" "예?" 나는 당황하여 뒤로 물러섰다. "그래, 일본년하고 결혼 하려면 너죽고 나 죽자!" "어머니? 죽다니요, 죽긴 왜 죽습니까?" 나는 참았던 울음을 밖으로 내 보이고 말았다. 나는 어머니가 왜 이렇게도 반대를 하는지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일본이란 나라가 한국 사람에게 어떻게 했기에 이 토록 원한을 품는단 말인가? 나는 마침내 한국과 일본에 관한 역사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일본의 역사는 한국보다 짧고 한국으로부터 문화를 전수(傳受)받았는대, 일본은 근세에 들어와 부국강병(富國强兵) 정책으로 강대국이 되더니 한국을 송두리째 삼키고도 모자라 갖은 학대를 한 것을 알게 됐다. 일본사람들의 학대는 내가 봐도 정도가 심했기에 나도 분노를 느끼며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하게 됐다. 그래도 나는 제니퍼가 좋았으며 숙명이라고 생각을 했다. 어머니의 반대가 심하면 심할수록 우리의 사랑은 더 깊어 갔으며 확고해 졌다. * 해를 넘겨2007년이 됐다. 결코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우리의 사이가 금년에는 실타래 풀 듯이 풀리기를 소원했다. 용기를 내어 연초(年初)를 맞아 살리나스로 신년 세배차 제니퍼를 동반하고 부모님을 찾아 갔다. 가슴이 방방 뛰었으며 예상치 못한 어머니의 거친 반대를 감수하고자 마음을 궂게 먹었다. 나의 간절한 통사정과 제니퍼의 정성어린 세배에 마음이 다소 너그러워진 어머니는 이번에는 적극적인 질문을 제니퍼에게 퍼부었다. "부모님은 무엇을 하시나?" "토렌스에서 꽃 가개를 운영하십니다. 저와 같이요." "꽃가개를? "예." "그럼 어느학교를 나왔나?" "칼,스테이트 롱비치(California State University, Long Beach)를 졸업했습니다." "칼. 스테이트? 그리고?" "꽃꽂이 강습소를 다녀 면허증을 땃습니다." "꽃꽂이 강습소라?" "..........................." 어머니는 모든 것이 마음에 안 차는지 쓸개를 먹은 사람처럼 얼굴을 흉하게 찡그린 모습이었다. "제니퍼라고 했든가요? 이젠 집으로 가시지. 우리 한국 사람은 일본 사람하고는 혼인을 하지 않소. 가소!" "....................." "어서 가게! 보기도 싫소." 마침내 어머니는 큰 소리로 제니퍼에게 가라고 욱박 지를때, 나는 죽고 싶도록 미안한 마음이었다. 제니퍼도 더 이상 견디기가 힘든지 가지고 온 가방을 주섬주섬 들고 일어 나려고 했다. 그녀는 미소를 잃고 모욕적인 분을 참지 못하는 그런 얼굴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제니퍼는 체념을 한 듯이 고개를 숙여 어머니에게 절하고 난 후 아버지 쪽을 향해 작별의 인사를 하려고 하는 찰나였다. "제니퍼? 잠간! 살리나스에서 살았던 다카야마(高山)라는 일본 사람들을 혹시 아시나요?" 지금까지 어머니의 언성에 눌려 말도 못하고 있던 아버지가 오랜만에 말문을 열었는데 뜻밖의 질문이었다. "살리나스에 살던 다카야마(高山)씨를? " 인사를 하려던 제니퍼는 어색한 자세로 되물었다. "그래, 1946년 봄에 그들 가족은 가디나(Gardena)인지 토렌스(Torrance)로 이사를 갔었는데, 혹시나 그들을 알고 있나해서 물어 보는거요." "다카야마, 다카야마?" 제니퍼는두 번씩이나 입속으로 되물어 보았으나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 가족은 우리가 사는 살리나스에서 이웃으로 살았었지요. 나의 할아버지와 같은 연배로 우리처럼 장미, 카네이숀을 재배하여 산프란시스코에 내다 팔았지요. 그러다 이차대전이 나면서 1942년 봄에 불행하게도 멀리 콜로라도에 있는 아마체(Amache), 일본인 수용소에 강제로 수용되어 꼬박 3년간 춥고 배"樗�세월을 보내다가 1946년 2월에 되돌아 왔었지요. 그런데 콜로라도에서 받은 인간적인 학대가 얼마나 컸었는지 40년간 고향처럼 살아왔던 살리나스를 떠나 남가주로 이사를 갔었지요. 가디나로....그런데 그후 우리는 도무지 그들로부터 소식을 듣지 못했기에 아버지는 그들 일본 사람들을 인간이하로 생각을 하고 있는거지요." 뜻밖의 질문은 제니퍼뿐만 아니라 나역시 처음으로 듣는 질문이기에 아버지를 다시 쳐다보았다. "여보! 알아 볼 필요도 없어요. 다카야마란 사람, 이중인격자(二重人格者)요, 배반자(背反者)입니다. 할아버지가 그토록 잘 해 주었는데도 배신(背信)하고...." 어머니는 분풀이를 하듯이 큰 소리로 말하니 아버지는 조용히 듣기만 했다. '배신이라니?' 나는 문득 다카야마라는 사람과 할아버지 사이에 모종의 배신관계(背信關係)가 있었음을 느끼게 되었다. 제니퍼를 산호세(San Jose) 공항에 데려다 주고 집으로 돌아 오니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향해 큰 소리로 선언하였다. "이놈아! 일본년은 안된다고 했지? 결코 안돼, 내가 죽으면 몰라도..." "어머니, 제발....." "말도 하기 싫다. 이 바보같은 녀석아!" "어머니? 그만하세요." "그만하라고?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겨우 일본년을?" "어머니!" "죽어도 안된다!" 어머니는 할 얘기를 다했는지 눈을 부릅뜨고는 후다닥 방으로 들어갔으며 나는 식탁위에 마시다 남은 붉은 와인을 후루룩 마신 후 병원 가방이 휑하니 열려진 채로 있는 내 방으로 들어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김빠지고 향기도 없는 붉은 포도주처럼 나의 마음은 황당하기만 했다. 문득 산호세 공항에서 힘없이 헤어지던 제니퍼의 모습이 안스러워 보였으며 화가 났는지 뒤도 바라보지 않고 탑승구로 들어가던 그녀의 모습이 나의 망막(網膜)세포에서 아른거렸다. 도대체 스탠포드에서 전문의사 수업을 받고 있는 20대 후반인 나에게 어머니의 존재가 얼마나 큰 것인가? 열심히 길러 주신 것은 좋으나 나의 사랑과 앞길을 좌지우지 하려는 어머니의 태도가 싫었다. 그것도 알고 보니 한 일본사람으로부터 받은 배신에 대한 단순한 원망일뿐인데 그것으로 인해 내 인생이 송두리째 영향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생각하니 어머니가 오히려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이토록 반대가 심한 어머니의 승낙을 받아야만 한다라는 생각으로 어머니를 설득하려고 했다. * 그리고 2주일후--- 토렌스에 사는 제니퍼의 아버지, 이시카와씨로부터 살리나스에 사는 나의 아버지, 김병국(金秉國)씨에게 한 통의 간곡한 편지가 배달되었다. -딸, 제니퍼와 나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아도 좋으니 딱 한번 만나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부디 여기 토렌스로 찾아 와 달라는 눈물어린 편지였으며 친절하게도 왕복 비행기표가 들어 있었다. "여보! 이시카와씨가 우리를 초청하는군요. 긴히 꼭 할 말이 있다는 군요." "뭐라구요? 우릴 초청한다....딸 결혼을 시키려고 별 짖을 다하는 군...우린 안가요. 안간다고 거절하소." "..............."아버지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아내의 얼굴을 빤히 쳐다 보고 있었다. "역시 일본 사람들, 건방지군. 그리고 뻔뻔해. 오라가라, 지가 뭔데..." 어머니는 생각했던 대로 오히려 화를 내고 있었다. "어머니? 그저 한번 다녀 오시죠. 무슨 말을 하는지. 비행기 표까지 보내는 것을 보아, 꼭......." "듣기 싫다! 비행기 표 살 돈이 없어서? 괜한 수작이지...." "어머니? 어머니가 찬성하지 않는 결혼은 저도 안합니다. 어머니의 축복 없이 저는 안합니다. 그러니 한번 다녀 오시지요. 저를 생각해서라도..." 나는 무릎을 꿇고 두손을 모아 어머니에게 간청을 하다보니 내 꼴이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울긴? 남자녀석이....바보처럼....." 어머니의 목소리가 다소 약해 진 것을 보아 어머니의 마음에 작은 틈이 생긴 듯 했다고 생각했다. "여보? 같이 갔다옵시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아버지가 옆에서 거들었다. "가도 나는 안 만납니다. 알죠?" "알겠소." 아버지는 담담하게 대답을 하였다. 토요일 2시, 산.호세에서 비행기를 타고 로스앤젤스 공항에 내려 인근에 있는 호텔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어둑 어둑한 저녁이 되어 토렌스에 있는 꽤나 큰 양식집으로 우리는 찾아갔다. 안가겠다고 우기던 어머니를 가까스레 설득하여 같이 가면서 나는 마음 한 구석이 두렵고 무서웠다. 혹시라도 어머니의 반대로 인해 불쾌한 저녁 식사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었다. * 몸이 불편한 제니퍼의 아버지는 지팽이를 집고 음식점 앞에서 우리 일행을 긴장된 모습으로 영접하였다. "알렉스 이시카와(Alex Ishikawa)라고 합니다. 제가 살리나스로 몸소 찾아가야 했는대 몸이 불편하여 비행기를 탈 수가 없어 이렇게 감히 오시라고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는 몸을 90도 굽혀 공손하게 인사를 하던중 잠시 비틀 넘어질뻔 하다가 가까스레 평형을 유지했다.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포로처럼 보였으며, 이를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마치 개선장군(凱旋將軍)처럼 당당해 보였다. 제니퍼의 모습을 슬쩍 바라다보니 잔뜩 긴장이 돼 있어 그녀 특유의 미소를 볼수가 없었다. 각자 자리를 잡고 잠시 덕담(德談)을 나눈 후, 마침내 이시카와씨는 비장한 얼굴로 우리에게 꼭 하고 싶다는 그 말을 시작했다. "아버님(김병국)이 제 딸, 제니퍼에게 물었던 다카야마라는 사람은......." "다카야마?" "예, 바로 우리 가문(家門)을 말합니다. 그리고 조선사람으로부터 큰 신세를 입었다는 그 일본 사람 다카야마 노부사가는 바로 나의 할아버지입니다." "예? 다카야마가 바로 당신? 이시카와라고요?" 나의 아버지는 너무나 놀라 눈을 껌벅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습니다." "아니? 다카야마와 이시카와? 성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성이 바뀐대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지요." "사연이라니요?" "김선생님! 우리 가문은 원래 다카야마였는데 저의 할아버지는 1946년 토렌스로 이사와서 성을 이시카와로 바꿨습니다. 콜로라도 수용소에서 미국 정부로부터 받은 비 인간적인 수모가 너무나 한에 맺쳤었나봅니다. 그래서 이시카와로 바꿨답니다." "예, 이해가 됩니다. 그러시겠죠." "김선생님? 많이 늦었지만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저의 부부는 이렇게 머리숙여 감사함을 표시하려고 합니다. 제니퍼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불편한 몸을 무릅쓰고 갑자기 식당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일본 식으로 감사의 표시를 했는데 보기에도 민망하리만큼 간절해 보였다. "아니? 이러시면 안됩니다. 이시카와씨!" 아버지는 제니퍼의 아버지를 나는 제니퍼의 어머니를 부축해 일으켰다. 조선에서 노동이민으로 왔던 김상환씨 덕분에 전재산을 잃지 않았던 다카야마의 후손인 이시카와씨를 이렇게 껄껄한 관계로 만나다니 세월의 흐름 앞에 두 가족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아니 지난 60년간 잊혀졌던 세월을오늘 다시 찾은 기분이었으며 결코 타협과 용납을 하지 못할 듯 했던 어머니의 얼굴에도 흘러간 세월에서 울려 오는 이웃과의 관계가 되살아나는 듯 했다. '이시카와가 바로 살리나스에서 이웃으로 살았던 다카야마라니....' 어머니의 눈동자 속에서도 지난 60년의 세월이 무성영화의 화면처럼 조금씩 조금씩 되 살아 나고 있었다. 60년의 긴 세월이............ 7장: 한국-일본 사람의 4대 이민(移民) 역사 두 가문의 만남(金祥桓, 金庚文, 金秉國, 金秉宣) (高山信孝,高山 James, 石川 Alex, 石川,Richard) 그토록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미워했던 일본 사람... 은혜(恩惠)를 잊고 배신(背信)했다고 늘 원망했던 다카야마라는 일본 사람들이 바로 나의 애인 제니퍼의 할아버지와 증조 할아버지라니......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큰 은혜를 받았는대도 불구하고 어떤 배신을 했기에 어머니가 그토록 원한을 품고 난리를 치는지, 나는 궁굼했다. -무슨 은혜? 그리고 어떤 배신? 지금까지 별로 입을 열지 않았던 나의 아버지와 제니퍼의 아버지는 나의 증조 할아버지와 제니퍼의 증조 할아버지로 시작된 두 가문의 이민 역사를 더듬더듬 망각의 기억속에서 조금씩 끄집어 내기 시작했다. 두분 아버지들의 기억에서 나온 과거 얘기를 듣다보니 너무나도 180도 다른 그리고 대조가 되는 이민역사였다. 나의 증조 할아버지는 노예처럼 하와이 노동자로 이민을 왔는데 비해 제니퍼의 증조 할아버지는 신식 일본의 학생으로 서구 문명을 더 배우기 위해 자비로 미국을 찾아 온 엘리트였었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큰 세상에서 마침내 공교롭게도 두분은 살리나스에서 장미와 카네이숀을 재배하여 생계를 유지한 원예인으로 30년을 살다가 1946년, 이유도 없이 헤어져 다른 60년을 살아온 이웃이었다. * 먼저 일본 사람에게 큰 은혜를 끼쳐주었다는 조선사람인 나의 증조 할아버지의 이민사(移民史)를 직접 나의 아버지의 입을 통해 들으면서 나는 나의 현재의 존재가 안스러웠다. -경기도 여주(驪州)에 살았던 김상환(1884년 출생)씨가 언제 조국으로 돌아 갈지도 모르는 미국 이민선을 타게 된대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여주 출신의 민비(閔妃)와 시아버지 흥선(興宣) 대원군(大院君)의 권력투쟁으로 조선은 국력이 피페해 졌으며 쇄국 정책으로 인해 외국 문명을 접하지 못한 조선 반도는 둘러싼 4대 강국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청일전쟁(淸日戰爭)과 로일전쟁(露日戰爭)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조선반도를 지배하는 실력자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극동은 일본천하가 되고 있었다. 일본 사람들을 조선반도에서 쫓아내려는 조선 독립군들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났으며 외국으로 망명을 가는 애국지사들도 많았다. 지도자들을 잃은 조선 사람들은 매일같이 잔인한 일본군에의해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었으며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었다. 나의 증조 할아버지가 되는 김상환씨는 물론 애국지사는 아니었다. 단지 배고프고 굶주렸기에 미국으로 이민가면 잘 먹고 잘 살수 있다고 하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주인의 가짜 선전에 미혹돼 혼자 잘 살고자 하와이로 가는 이민선을 타게 된 것이 고작이었다. 1905년 2월이었다. -뱃고동 소리들리는 이별의 항구, 제물포(인천)항을 떠난 제 63차 미국 이민선은 일본 고베항을 거쳐 하와이로 향하기로 예정됐다. 구슬비가 솔솔 나리는 제물포 항구의 부두에 서 있는 21살의 김상환이 이민가는 것을 전송하러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물포(濟物浦) 항구는 여기저기에 버려진 쓰레기로인해 지저분했으며 술마시고 토한 음식에서 풍기는 시큼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지난밤을 싸구려 하숙집에서 자고 나온 장가도 못간 총각 김상환은 오늘 이민을 간다고 생각하니 기쁨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이민선을 타느니 차라리 도망을 가고 싶었으나 살 길이 망막했다. 부모들 모르게 도망가는 이민이기에 더 괴로웠다. 말이 이민이지 톡 까놓고 보면 하와이 사탕수수밭에 가서 흑인,중국인 일본인 노동자들보다 더 값싼 임금을 받고 하루종일 일을 해야 하는 조선 사람, 노예라고 불러야 했다. 그러나 그돈은 조선 사람들에게는 큰 돈이었다. * 이민을 가게 된대는 그럴만한 또 다른 기막힌 이유가 있었다. -'애라! 미국에 가자! 조선에서는 아무런 희망이 없으니......' 무조건 조선을 떠나고 싶은 그에게 하와이가 유일한 탈출구였다. 결국 제 63차 미국 이민선에 운명을맞기고 떠나야 하는 신세가 됐다. 부모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음은 물론 사랑했던 아가씨에게도 비밀로 한채 입술을 질근질근 씹어야만 했다. 사랑했던 아가씨라고 말했지만 실상은 실패한 짝 사랑의 아가씨였다. 여주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는 정씨 집의 둘째딸, 정순임(鄭順任)을 총각 김상환은 먼 발치에서 보았을 때 그는 그녀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같아 보였기에 넋을 잃고 바라보기를 반복하다가 그녀를 만나기위해서 정씨집의 한약방에서 값싼 임금을 받으며 한의학 공부를 시작한 순정파였다. 순임은 김상환보다 세 살이 어렸으나 한약방과 서당에서 한자를 이미 배웠으며 한약 공부도 먼저 시작했기에 김상환보다 훨씬 더 앞서 있었다. 김상환은 착실했으며 마음속으로부터 순임을 사랑했기에 두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랑하게 됐다. 김상환은 순임을 가슴속 깊이 새기고 살았다. 20살 총각과 17살의 처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신륵사(神勒寺)에 가서 두 손 모아 불공을 들였다. 같이 평생을 살게 해 달라고 부처님에게 빌고 또 빌었다. 남한강(驪江)에 나가 발에 찬물을 적시며 사랑도 했다. 진달래와 철쭉이 필때는 그들의 마음에도 화사한 봄꽃이 피었다. 경성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학교에도 다니고 싶었다. 이화학당(梨花學堂)과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여 신식 문명을 공부도 하고 싶었다. 여주에 들어온 천주학도 부모님들 몰래 가서 배우기도 했다. 가을 단풍이 온산을 붉게 물 들일 때 그들은 영릉( 寧陵.세종대왕의 능)에 가서 사람 몰래 숲속에서 뜨겁게 포옹도 했다. 그리고 천지 신명께 결혼을 하게 해달라고 빌기도 했다. 딸이 과년해지자 한의사 정씨는 1904년 여름, 순임을 여주 부자 김진형(金進亨)의 아들과 강제로 결혼을 시키고보니 김상환은 닭 쫓던 개처럼 허탈한 꼴이 됐다. 짝 사랑하다가 사랑하는 여자를 놓치고 만 셈이었다. 사랑하는 순임이 연지찍고 곤지찍고 쪽도리 쓰고 혼인하던 날, 그 모습을 먼 발치에서 바라다 보던 김상환은 울고 있었다. 더욱이 그를 더 안타깝게 한 것은 분명, '울고 불며 시집가지않겠다고 아버지에게 항의'하리라고 믿었던 순임이 오히려 울기는커녕 좋아서 웃으며 먼 발치에서 바라다 보는 김상환에게 조금도 눈길을 주지 않으니 김상환의 마음속에는 억울한 배신감이 울컥 올라오고 있었다. 돈 많은 부자 앞에서 여자는 다 그런건가? 돈돈돈....김상환의 마음속에는 돈이라는 시컴한 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돈을 벌자, 돈을!" 그는 홀로 눈물을 흘리며 신륵사 앞 강변에 앉아 도도히 흐르는 여강을 바라다 보노라니 신륵사에서 울려 퍼지는 아련하고 청아한 종 소리가 김상환을 마음'�비웃고 있는 듯 했다. '그렇다, 김상환! 돈이란 모든 것을 다 하느니라. 크고 많은 것만을 원하면 그 욕망을채울길이 없느니라.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삶의 향기인 아름다움과 고마움이 스며 있느니라. 세상에 속한 모든 것, 다 헛된줄 알고 손에서 놓을 때, 너는 진정 부자가 될 것이니라.' 신륵사의 종소리는 김상환의 머리를 둔탁하게 그리고 강하게 때리고 있었다. '그래, 미국이라는 부자 나라에 가서 돈을 벌어오자. 그리고 순임을 내 사람으로 되찾자!'라는 결론을 내리고 강을 향해 조약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돌은 원을 수없이 그리면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 이민선을 타마!' 하와이 노동 이민선을 마지 못해 타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 * 하와이로 가는 이민선을 타기 며칠 전, 그는 짝사랑의 연인 순임이 살고 있는 고래등처럼 큰 시집 대문 앞에서 남이 볼까 조마조마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가면 언제 돌아 올지도 모르는 이민선을 타기 전에 그래도 사랑하는 순임을 만나 손이라도 잡아 보고 싶은 마음에서 였다. 몇 시간이나 기다렸을까, 꿈에도 그리던 정순임이 화사한 옷을 입고 밖으로 나오고 있었는대 모르긴 해도 어디론지 나들이를 가는 듯 했다. 30세 정도로 보이는 가냘프게 생긴 집 침모(針母)를 대동하고 있었다. 기회를 보아 김상환은 가까스레 순임에게 다가 갈 수가 있었다. "순임, 나야. 나. 상환이야!" 김상환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신가요?" 순임은 잘 모르는 사람을 만난 듯이 알면서도 김상환을 따돌리려고 했다. "나요, 나, 김상환!" "잘 모르겠는데요, 자, 가자!" 그녀는 당황스러워 하는 침모에게 말하면서 김상환을 비켜 나가려고 했다. "이것봐! 순임, 나야!" 김상환은 더 가까이 다가섰다. "가자!" 그녀는 침모를 오히려 독촉하며 앞장을 서서 급히 걸어 가려고 했다. "잠간!" 김상환은 다급한 마음으로그녀의 앞을 막으면서 급기야는 순임의 팔을 잡고 말았다. "강도여! 강도!" 그녀는 팔을 뿌리치면서 마치 정말로 강도를 만난 듯이 큰 소리를 쳐댔다. 그 순간 집안에서 몇 명의 집사(執事)들이 뛰어나오더니 앞을 막고 있던 김상환을 무자비하게 잡아 끌었다. "어, 이놈, 김상환, 아냐? 자식이 어딜 찾아와서 행패야!" "행패라니?" 김상환은 억울한 마음으로 집사들을 향해 반박했다. 순간, '악' 소리를 내면서 김상환은 맨 땅에 항아리처럼 내동댕이 쳐졌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여기저기에 선지피가 묻어 있었다. '아-순임아, 순임아.' 그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순임을 여러차례 불러 보았으나 대답은 없었다. 눈 두덩이가 벌겋게 물들었으며 잘 뵈지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입술은 주먹만큼 부어 올라 있었으며 찢겨진 베잠뱅이에는 더러운 흙이 온통 묻어 있었다. '이럴 수가, 순임아, 네가? 나를 이렇게 배신하다니.....' 분통이 터졌으나 어쩔 수가 없었으며 돈도 없고 힘도 없으니 손 한 번 써 볼 수가 없었다. 이젠 여주 땅에서 남들 보기가 부끄러워 얼굴도 못들고 다녀야 했기에 결과적으로 망설이던 하와이행을 재촉하게 됐다. * 시큼한 냄새가 풍기는 제물포 항구을 떠난 제 63차 하와이 이민선은 일본고베항에서 이틀을 머물러 항해 준비를 마친후, 고동소리를 내면서 망망 대해로 나와 항해를 하였는데 태평양의 거친 파도에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며 약 일개월간의 긴 항해를 계속하더니 마침내 하와이 왕국의 수도 호누루루에 도착했다. 3월달인대도 화끈한 더운 공기가 마치 조선의 여름처럼 따가왔다. 냄새나고 더러운 3등 선실에서 1개월 동안 꾹 참고 미국(하와이)에만 가면 모든 것이 해결 될거라고 부푼 꿈을 더 부풀렸다. 돈도 많이 벌어 고향으로 금의환향 할 것이라는 장미빛 미래를 수 놓기도 했다. '그래, 미국에 가서 조금만 고생하면 분명 성공하리라.' 그러나 정작 하와이에 도착 하자 마자 모든 것이 오산이었으며 거짓이었음을 알게 됐다. 그를 고용한 사탕수수밭 농장 주인은 신경질적으로 생겼으며 키가 크고 매서운 성깔을 가진 아랬배가 불룩한 백인이었다. 게다가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었기에 그를 볼 때마다 "@�나며 몸이 움출어 들었다. 성깔이 나면 총을 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야무지며 인정도 없어 뵈는 40대의 사나이였는대 가끔 화가 나면 노동자들을 시도 때도 없이 불러 기합을 주었으며 총으로 위협을 했기에 섣불리 불평을 하지도 못하고 주인이 하라는 대로 꼬박꼬박 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일은 고됐으며 생각보다 돈이 모아지지 않았다. 부지런히 돈을 모아서 여주로 돌아가 땅을 사고 사업을 일으켜 남들이 보란 듯이 그를 배신한 애인 정순임을 찾아 아내로 삼아야 하는대 뜻대로 되질 않았다.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일본은 조선과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을 맺어 외교권을 빼앗아 갔기에 하와이 이민도 65차로 끝나고 말았다고 했다. 말이 을사보호조약이지 조선은 완전히 일본에게 먹혀 하라는 대로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일이나 해야 하는 종이되고 만 꼴이 됐다. 굶주린 조선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아 만주와 중국으로 도망을 갔으며 애국자들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해외로 빠져 나갔다. 이런 와중에 일본 군인에게 잡힌 많은 사람들은 비참하게 죽었으며 독립군들은 늑대같은 형사들에게 잡혀 교수형 내지 총살형에 처해 처참하게 죽는 것은 물론 손발도 잘려 나갔다. 결국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같았다.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고되고 바쁘게 일하다보니 연인 정순임을 생각한다는 것은 사치였다. 먹고 사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 사탕수수밭과 파인애플 농장에서 일한지 5년..... 그래도 꽤많은 돈이 모아졌다. 먹지 않고 악착같이 모은 금쪽같은 돈이었기에 가슴에 품어 보기도 했으며 쓰다듬어 보기도 했다. '이 돈 가지고 고향에 갈까?' '아냐! 어떻게 모은 돈인데....' '이 돈 가지고 순임을 찾아 갈까?' '아니지, 나를 배신한 사람인데.....' '아-순임아! 순임아!' 그는 보고 싶었던 순임을 여러차례 불러보았으나 대답은 없었다. 조선에 갔다 온다는 것은 엄두도 안나는 일이었다. 조선에 한번 갔다 오면 그간 모은 돈의 반은 날라가는 셈이기 때문이었다.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잘 살고 있는 순임을 찾아간다는 것은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일뿐, 아무런 실속도 없었기에 결국 김상환은 정순임을 잊기로 했다. 처음에는 괴롭고 서글펐으나 막상 잊고 보니 모든 것이 시원 섭섭했다. 1910년, 조선은 예상한대로 일본에게 합병(合倂)되는 수모를 겪게 됐으며 가련하게도 종살이를 하는 식민지가 됐다. 500년 조선 왕조가 망하면서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조선에서 온 이민자들의 신분은 조선에서 무국적자로 변하고 말았다. 어느새 김상환은 28살이 되어 결혼을 생각하게 됐는데 아무리 눈을 비비고 하와이를 찾아 봐도 한국 여자는 어디고 없었다. 한편 하와이 주법에 의하면 미국여자와 동양 남자는 결혼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백인 여성과의 결혼도 불가능했다. 결국 다른 조선 사람들 처럼 사진 결혼을 선택하게 됐다. 조선으로부터 여자의 사진들이 오고 갔지만 결혼은 쉽지가 않았다. 아직도 배신한 애인 정순임의 얼굴이 저승사자처럼 떠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이 망했다는 소식은 하와이에 사는 많은 이민자들을 울분케 했으며 때를 맞춰 그들은 독립운동가 이승만(李承晩) 박사를 돕게 됐다. 조선, 광복이 그들에게는 지상 최대의 과제였으며 소망이었다. * 1913년, 김상환은 사진 결혼을 통해 하와이로 찾아 온 아내를 만나게 됐다. 6살 아래인 경상도 처녀였는데 생각밖으로 현숙한 여인으로 이정애라고 했다. 그녀 역시 가난한 살림살이에 입을 하나라도 덜기 위해 사진 결혼을 통해 미국으로 찾아 왔는데 늙은 남편이 아닌 제대로 된 젊은 청년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새 색씨, 이정애(李貞愛)는 낮에는 사탕수수밭에서 그리고 밤에는 싹 바느질하여 돈을 모았다. 찢어지게 가난했기에 서로 잘 살아 보자고 두 마음을 모았기에 끈끈한 사랑과 더불어 돈도 조금씩 모아 지고 있었다. 정순임으로 인해 받은 고통 대신에 벅찬 희망과 즐거움이 그들을 이끌어 주었다. 작은 섬, 하와이에서 사느니 차리리 미국 본토로 이주하여 더 큰 미국의 꿈(American Dream)을 갖자고 그들은 계획했다. 마침내 하와이를 떠나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로 이사를 했다.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샌프란시스코 중국 타운에 살면서 힘든 부두 노동자가 됐으며 아내는 중국 식당에 가서 새벽녘까지 허드레 부엌 일을 해 악착같이 돈 귀신이라도 된 듯이 돈을 모았다. 그러나 마음이 순수한 이들 부부는 술이나 마시며 주정을 하는 중국 노동자들과 같이 어울리기에는 버거웠으며 때로는 위험했다. "차라리 조금 남쪽으로 내려가면 살리나스(Salinas)라는 작은 도시가 있는데 그곳에 가서 꽃 농사를 해보게. 돈도 벌고 이민 문제도 해결하고...." 어느 중국 친구가 귀뜸을 해 주었기에 그는 아내를 데리고 살리나스로 내려와 루마니아에서 이민온 어느 백인의 꽃 농장에 취직을 했다. 착실하게 꽃 농장에서 일을 했으며 확실하게 집 청소를 해 주었다. 꽃 농장에서 일하는 것이 즐거웠으며 적성에도 맞았다. 결국 이민자로서 확고하게 설 수가 있었으며 농장 주인의 도움으로 작고 아담한 집도 마련했다. 그리고 1917년, 여름, 아들 김경문을 낳았다. 아들을 볼적마다 악착같이 일을 하여 행복하게 해주리라, 라고 다짐을 하면서 문득 문득 '일본은 우리의 적이다. 일본은 우리의 웬수다'라고 마음깊이에서 소리를 쳤다. 1919년 3.1 만세 사건이 멀리 조국에서 일어 났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음을 알게 됐다. 유관순(柳寬順)과 같은 처녀는 일본 군에 의해 무참하게 처단됐으며 손톱마저 뽑혔다고 하는 잔인한 소식 앞에 몸서리 처침을 느끼기도 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장미와 카네이숀을 팔아서 모은 돈의 일부를 하와이에 있는 독립협회(獨立協會)로 보내기도 했다. "일본 놈들은 우리의 적이다! 그리고 일본 놈들은 살인자들이다!" 그리고 "결코 용서 할 수 없는 놈들이다!" 김상환의 마음속에는 일본을 저주하는 마음이 더 치솟았다. * 그런데,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일본 사람 가정이 살리나스로 이사를 와 큰 장미 농장을 구입하여 꽃 농사를 시작했다. "하필이면, 일본 놈이....이웃으로 이사오다니. 그것도 농장 주인으로...나는 아직도 노동자인데..." 김상환은 새로 이사온 다카야마 노부사가(高山 信孝)라는 사람이 야속했다. 다카야마 노부사가라는 일본 사람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수준 높은 사업을 하다가 살리나스로 이사를 와 장미. 카네이숀 농장을 현금으로 구입한 재력가라는 소문이 쫙 퍼졌다. "와, 현찰을 주고 농장을 사다니, 부자로군. 그러나 그 돈? 내 조국,조선, 그래 조선에서 뺏어 온 돈이겠지. 조선인들의 피와 살이겠지....." 그는 노부사가라는 일본 사람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김상환은 하와이에서 노동을 하다가 이곳에 와 아직도 노동자로 일을 하고 있을 뿐, 노부사가의 적수가 되질 못했다. "나도 꽃 농장을 소유하련다. 일본놈이 갖는데 나라고 못할까?" 그는 오히려 주먹을 불끈 쥐었다. 더 열심히 일을 했으며 더 저축을 했다. 그해, 그의 아들 김경문은 13살 소년이었으며 일본인 다카야마에게도 12살 된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은제임스(James Takayama)라고 했으며 살리나스 고등학교에 같이 다니고 있었다. 이상이 조선인 김상환의 이민을 설명한 나의 아버지 김병국의 진술이었다. * 반대로 제니퍼의 아버지, 일본사람 알렉스 이시카와(1949년 생)가 진술한, 제니퍼의 가문의 이민역사는 이러했다. -제니퍼의 증조 할아버지가 되는 다카야마 노부사가( 高山信孝.1884년 출생.)는 동경에서 학교를 다닌 신문명을 대표하는 일본의 엘리트였다. 명치유신의 변화를 이끌어 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를 특히 존경해 그가 세운 경응의숙(慶應義塾)에서 공부를 한 후 공교롭게도 조선 사람 김상환과 같은 나이였던 21세에 더 많은 공부를 하여 일본에 기여하고자 샌프란시스코로 유학차 왔다. 영어에 능통하려고 특별 과외수업을 받은 후 1907년부터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공부를 하게됐다. 그의 꿈은 졸업후 동경으로 돌아가 일본 금융계의 대부가 되는 것이었다. 스탠포드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후 경험을 쌓고자 샌프란시스코에서 은행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1915년 일본으로 잠시 귀국하여 부모님이 마련해 준 규수(閨秀), <준꼬 하야시>와 결혼을 했으며 신혼생활도 샌프란시스코에서 순조롭게 지냈기에 모든 것이 행복하여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계획같아서는 내년에 일본으로 돌아가 동경에서 은행일을 통해 그의 포부를 펼쳐 보려고 하였는데 아주 뜻밖의 사건이 일어 날줄이야..... 아버지가 경영하던 동경의 회사가 갑작스레 부도를 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빗쟁이들의 독촉과 협박으로 아버지는 세상에 대해 부끄럽다는 말을 남기고 사무라이처럼 할복 자살로 그의 결백을 주장했으며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자 엉뚱하게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아들에게도 빗독촉과 협박이 들어왔으며 그가 사는 동네에서 집을 사려고 했는데 백인들로부터 혹독한 인종 차별을 받기 시작했다. "이것봐, 당신은 동양 사람이니까여기와서 집을 살 수가 없소. 알겠소?" "동양사람이라고 차별을 합니까?" "차별이라면 차별이고, 어쨌든 여기에는 동양 사람이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이지...단 일본 사람은 괜찮소. 일본 사람은...." "예? 일본사람은 괜찮다고요, 왜요?" "어, 일본 사람은 다른 동양 사람과는 달리 백인으로 간주하고 있으니까." "그래요? 나는 일본 사람입니다. 동경에서 살다가 여기에 온...." "아! 그래요? 일본 사람이라구요, 참 다행이군요.. 일본 사람은 괜찮습니다." 비록 일본 사람은 우대를 받는다고는 하나 역시 인종 차별을 받고 있었기에 그는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조금 남쪽에 있는 작은 도시 살리나스로 이주해 은둔해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 1917년, 그는 장미-카네이숀 농장을 구입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19년, 그는 첫 아들, 제임스를 보게 됐다. 동경으로 돌아가 유명한 금융인이 되겠다고 했던 그 원대한 꿈을 포기하고 조용히 꽃을 가꾸는 원예인이 됐다. 농사꾼이 되었다는 말이다. 다카야마가 경영하는 장미-카네이숀 농장은 꽤 큰 규모였으며 아주 건실하게 운영이 되었기에 매년 성장하고 있었다. 결국, 살리나스의 꽃 농장중에서 '다카야마 농장'하면 '아! 최고의 농장!'이라고 인식할 정도로 유명해 졌다. 운명의 장난이랄까, 여기에서 조선 사람, 김상환과 일본 사람, 다카야마가 만나 이웃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 사람은 노동자로서, 일본 사람은 농장 소유자인 지주로서 만났으니 조선 사람은 자격지심에서 일본 사람을 철저히 외면하고 말았다. "일본놈! 조선을 빼앗아 간 놈들....우리의 원수!" 김상환은 다카야마를 볼 때마다 이렇게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사람, 다카야마의 입장에서본 조선 사람은 조금도 마음에 걸리지 않는 하잘 것 없는 존재였을 뿐이었다. '조선 사람? 어, 식민지 사람. 일본을 위해 존재하는 민족...' 그러기에 다카야마는 비록 살리나스에 사는 이웃이라고는 해도 김상환과는 교류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1930년--- 봄. 김상환도 마침내 20년간 저축한 돈으로 작은 규모의 장미-카네이숀 농장을 구입하여 당당한 농장 주인이며 지주가 됐다. 1929년 10월 29일 미국 증시(證市)가 폭락하면서 불어닥친 경제 대 공황중에 아주 헐값으로 나온 농장을 구입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규모가 작다고 해도 주인이 되고 보니 감격스러웠으며 행복했다. 그리고 남들 특별히 다카야마를 볼 때 마다 당당했으며 이젠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살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꽃을 내다 팔다보니 자연 다카야마와 경쟁을 해야 했으며 한편으로는 상호의 공동 이익을 위해 협조해야 하는 동료 원예인으로 만나는 기회가 가끔 있었는데 김상환은 의도적으로 그를 피했다. '조국, 조선을 망친 일본 놈...원수같은 일본놈....' 그뿐인가 살리나스는 작은 도시이기에 자식들도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12살 먹은 다카야마의 아들, 제임스는 13살 먹은 김상환의 아들보다 더 똑똑했으며 많은 상을 받곤 했기에 제임스란 이름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아! 웬수같은 일본놈들!' 김상환은 일본에 대한 감정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김상환의 농장도 커졌지만 다카야마의 농장은 더 더욱 커졌다.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다카야마의 아들, 제임스는 버클리 대학으로 김상환의 아들은 겨우 살리나스 초급대학으로 진학을 했다. '일본 놈들! 조선을 집어 삼킨것도억울한데 자식 놈들도 일본 놈에게 뒤지다니...' '조선 사람은 일본 놈들의 뒷 꽁무니나 보고 살아야 하다니..... 제길할! ' 1932년으로 들어서면서도 경제 대 공항은 좀체로 좋아 질 기미가 없었으며 1935년 김경문이 살리나스 초급대학에, 1936년 제임스가 버클리(Berkely)대학에 입학을 했을 때는 독일마저 호전적이 되고 있었다. 4년후, 1940년, 코스모스에 꽃망울이 생기기 시작하던 초가을, 제임스는 콜로라도(Colorado) 의과대학(醫科大學)으로 진학했다. 당시에 동양 사람으로 의과대학에 입학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는대 일본사람의 아들, 제임스는 그것을 해 내었다. "와! 살리나스에서 의과대학에 입학한 일본 학생, 수재! 수재!" 살리나스에 사는 사람들, 백인, 동양인 아니 히스페닉, 누구나 다 알게 되었다. "제임스 다카야마!" * 일본 제국주의가 점점 미국에서 위험 수위를 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규탄되고 있었다. 실제로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미명(美名)하에 조선, 만주 그리고 중국을 넘보기 시작했으며 독일과 이태리와 군사동맹을 맺고 있었다. 미국 본토에서는 일본과 일본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이 팽배하고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본국의 스파이다. 특히 이민 1세대는 100% 스파이다.'라는 루머가 돌고 있었다. 1868년, 하와이로 첫 이민을 간 일본인들이 더 큰 마음을 품고 미국 본토로 들어가기 시작한 1880년대에는 이미미국 본토에는 더 먼저 이미으로 온 중국인들을 상징으로 하는 아시안 차별분위기(Antiorientalism)가 팽배해 있었다. 같은 업무라도 백인 노동자들과의 임금 격차가 컷으며, 백인들은 아시안 사람들이 이주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노골적이어서 '잽스 그냥 지나가라! 이곳은 백인 지역이다.' '잽스진입금지! 우리는 잽스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노골적으로 반대했다. 2차대전이 발발하던 때, 일본인 인구는 미국 본토에 12만 7000명이나 됐다. 1941년 12월 7일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과 일본의 전면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에 있는 일본 사람들은 피눈물 나는 박해를 받아야 했다. 우선 다음날인 12월 8일부터 이듬해 2월 23일까지 특집으로 다룬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를 보면 일본 사람들은 온통 스파이라고 의심을 했으며 심지어 토마토(Tomato)밭에 있는 토마토의 꼭지가 해군기지를 겨눈 총구멍이라고 규탄을 했는가 하면 4월에는 일본이 미국 본토를 무차별하게 공격할 것이라고 추측 기사를 써냈다. 실제로 진주만 공격 이후 일본인 이민 일세(잇세이라고 부름)들은 일본 신문밖에 모르기에 군국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이 된반면 이민 이세(닛세이라고 부름)들은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군국주의 일본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잇세이(일세)들은 본국(일본)의 승전(勝戰)을 기뻐하는 반면 닛세이(이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미국에 우호적인가를 증명하고자 잇세이를 배제한 조직인 JACL(미일시민연합, Japanese American Citizens League)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니세이(이세)들은 여전히 미국사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미국 해군기지에 둑극물을 풀려고 했다든지 미국에 25만명의 일본 병력이 있다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이쯤 되니 41년 여름에는 잇세이(一世)들은 미국은행을 이용하지 못하게 됐으며 니세이(二世)들은 미국 시민권자임을 증명해야만 은행 거래가 가능했다. 1940년 말, JACL(일미시민 연합)은 "나는 열렬하고 적극적으로 어떠한 제한이 있더라도 미국시민으로 살아 갈 것이며 위대한 미국의 더 나은 시민이기 위해 노력할 것 이다."라는 선언문을 발표하였고 가두행진도 했었다. 그러나 미국과 미국시민들은 그들 일본 이민자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판국에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 공격을 했으니 캘리포니아에 사는 일본인들을 격리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정치권, 언론, 민간 단체들을 가리지 않고 거칠게 쏫아져 나왔다. 우익 컬럼니스트 페글러 기자는 신문기고를 통해 "재미 일본 인들을 격리 수용후, 이들 중 100명씩을 골라 총살하는 것으로 보복하자."라고 썻다. 닛세이들은 주유소에서 기름 한방울 살 수 없었으며 주유소와 상점마다 <일본인 출입금지Japs are not wanted.)>라고 비하했으며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캘리포니아는 위험지역>,<미친 개들, Mad Dog>, <황색 쓰레기, yellow vermin>라고 일본인들을 경계했다. 마침내, 캘리포니아에 사는 일본인들은 죽던지 아니면 1942년 4월7일 정오까지 추방 될 것이다라는 공문이 하달됐으며 그후 42년 12월 19일 루즈벨트 대통령이 서명한 9060 명령(Executive Order 9060)으로 법제화 했다. 민간인 격리 명령서를 받은 재미 일본인들은 억울함을 호소할 겨를도 없이 부랴부랴 짐을 싸야했다. 집결 장소에 모여 그릅으로 콜로라도를 비롯한 10군데에 있는 일본인 강제 수용소로 격리 되었는데 소지할 물건은 침구용품, 화장실 용품, 은 그릇류, 그리고 귀중품으로 제한 됐다. 불과 28일만에 10만명을 이송한 이 작전은 신속하게 이뤄졌다.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상점은 모두 폐쇄됐고 문 앞에는 <이상점은 미국 정부 통제하에 있음> 이라고 출입을 금지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계 미국시민이라고 해도 모두 강제 수용이 되었지만 백인과 결혼한 일본인 여성들은 예외였다. 평화롭게 살고 있던 살리나스의 일본인 다카야마(高山)의 집과 꽃 농장의 하늘에도 햇볕을 가리는 검은 구름이 몰려들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천둥이 치기 시작했으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8장. 일본인의 진정한 이웃은 누구인가? (고양이에게 맡기는 생선)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5
어제:
4
전체:
73,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