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아오소라 제 7

2012.01.22 07:44

연규호 조회 수:579 추천:21

청공 제 7 제2부:일본에서 이럴 수가 있을까? 15장: 일본으로 간 신혼 여행(新婚 旅行)에서 (뿌리 찾는 여정-旅程) 존. 스타인백, 기념관에서 생각보다 많은 외국인들이 흥미롭게 바라본 한국과 일본의 전통을 반반씩 적용한 우리의 결혼식은 퍽이나 인상적이었는지 지역 신문에도 소개가 됐다. * 신혼 여행으로 우리는 제니퍼의 조상이 살았던 일본에 가서 그녀의 조국을 직접 보고 느껴 보기로 했을 때, 새각씨, 제니퍼는 너무나 기뻐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빌! 신혼여행으로 일본을 가기로 한 것은 내게 더할 수 없는 좋은 선물이여. 빌, 사랑해." "그렇지? 나도 일본을 알고 싶소. 당신의 조상을 보고 싶소. 이시카와, 아니 다카야마의 가문을.....! 그리고 솔직히 나도 일본을 좀더 알고 싶어." 신혼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시카와(石川), 아니 다카야마(高山)의 가문을 어느정도 알아보고자 조사하던 중, 우리는 아주 이상한 내용을 하나 발견하게 됐다. -그것은, 다카야마 노부사가(高山 信孝)의 아버지, 다카야마 가쿠에이(高山 角榮)는 규슈 아리타에서 살다가 동경으로 이주하여 후쿠자와 유키치와 더불어 명치유신에 큰 공헌을 했다-라는 내용이었다. '아니? 후쿠자와 유키치와 더불어 명치유신에 공헌을 했다? 그렇게나 유명한 사람? 그리고 동경사람이 아니고 규슈사람? 규슈라면 거기서 무엇을 했을까?' 꼬리를 무는 질문으로 인해 우리는 다카야마 가문에 더 많은 흥미를 느끼고 있었으며 일본의 유명인사인 후꾸자와 유키치와 더불어 명치유신에 공헌을 했다고 하니 어깨가 으쓱해 지면서 자긍심도 생기고 있었다. "제니퍼? 후꾸자와가 누군지 알지?" "물론이지. 일본 최고의 지성이라고 하지." "그렇다면 당신의 조상도 최고의 지성인군. 제니퍼. 당신네 가문이 그토록 훌륭한지 이제야 알았어. 와! 대단하군!" 막상 규슈로 간다면, 규슈, 어디로? 후쿠오카? 사가현? 구마모토? 아니면 가고시마? 어디를 가야 할지, 막연했다. 그럴바에는 우선 제니퍼의 증조 할아버지가 이민 오기전에 살았던 동경, 신쥬꾸(新宿區)부터 찾아 가서 상황을 알아 보기로 했다. 신쥬꾸에는 아직도 다카야마의 가족들이 어울려 살고 있다는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었고 그들과 연락이 됐기 때문이었다. 신혼 여행이지만 가능한 짐을 작게 꾸렸으며 만일을 위해 작은 선물들을 여러개 준비했다.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비행기가 10시간 이상을 비행한 후 동경 근교에 있는 나리따 공항에 도착을 했을 때, 우리는 비로서 제니퍼의 조국, 아니 나의 처가의 고향에서 풍겨나오는 향수(鄕愁)의 냄새를 맞는 듯했다. 5월 10일, 초 저녁이었기에 우선 예약된 신쥬꾸의 호텔을 가까스레 찾아갔다. 천만이 넘는 인구를 가진 동경의 한 부분, 신쥬꾸에 우리가 찾는 다카야마의 가족들이 살고 있다니.... 문득 눈에 띈 <이세단 백화점>을 바라다 보면서 비로서 내가 일본의 한구석에 서 일본 사람들이 내 뿜은 공기를 마시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호텔 직원이 근처에 와세다 대학병원이 있다고 귀뜸을 해주었으나 너무나 피곤하여 우선 한잠을 잔 후 다음에 할일을 결정하기로 했다. 미국이민 4세인 제니퍼로서도 처음으로 방문한 일본이었지만 그녀의 혈관 속에서 흐르고 있는 일본 사람의 피의 본고장을 찾아 와서 그런지는 모르나 조금도 낫설지가 않다고 말했다. 반대로 조선 사람의 피가 흐르는 나에게는 비록 처가의 고향이기는 하나 낫설기가 그지 없었다. 그뿐인가, 그동안 잊혀졌던 할아버지의 망령이 되살아 났다. - "손자야! 일본 사람을 경계해야 하느니라! 너, 지금 그놈의 일본 땅에 와 있어...조심하거라." "아닙니다. 할아버지? 일본 사람들 아주 좋습니다. 다카야마씨는 할아버지를 배신하지 않았어요. 할아버지? 오해였습니다. 그들은 할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연락을 끊고 살았을 뿐입니다. 오히려 할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모했답니다. " 나는 할아버지에게 오히려 일본을 옹호하고 있었다. - 동경은 도시가 크고 인구도 많지만 미국의 도시와는 달리 모든 것이 밀집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살았던 야심 많은 20세의 젊은 청년, '다카야마 노부사가'가 경제학을 공부하고자 스탠포드로 유학을 온 것이 100년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100년 후..... 그의 증손녀 제니퍼와 조선인 남편인 내가 여기에 찾아왔으니 세월의 빠름은 물론, 지구도 작아져 지구촌이라는 한 울타리가 된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다음날, 몇 차례 물어서 신쥬꾸에 사는 다카야마(高山)라는 성을 가진 친척을 몇 명 만나게 되었는대 그들은 한결같이 친절했으나 한국사람과 결혼 한 것에 대해서는 다소 불만이 있는 듯 흘낏 흘낏 나를 못 볼것이나 되는 듯이 쳐다 보았다. 게다가 우리가 일본 말을 전혀 못하고 영어만 하는 4세인 것을 알고는 조국을 배반한 배신자라도 본 듯이 눈을 흘키기도했다. 우리가 조사한 대로 '다카야마 노부사가'의 아버지, '다카야마 카쿠에이'는 동경으로 오기전에 규슈의 사가(佐駕)라는 작은 도시에서 살다가 후쿠자와의 영향을 받고 동경으로 이사를 한 것이 사실이었다. "다카야마(카쿠에이)씨는 여기 신쥬꾸에서 회사를 경영하다가 자결을 했는데, 규슈에서는 무엇을 했을 까요?" "어, 규슈에서, 다카야마가 한 일이야...." 뜻밖에도 친척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의 꼬리를 얼버무렸다. "무슨 일을 했나요?" "아, 거기서도 장사를 했겠지. 가서 직접 물어 보라구. 우리는 그 이상은 더 몰라." "장사를?" "가서 물어 보라니까...." ".........." 왜, 가르쳐 주질 않고 오히려 화를 내는지 우리는 아주 의아했으며 민망했다. 다음날, 우리는 동경 관광을 생략하고 다소 아깝기는 해도 사가(佐駕)로 가기 위해 국내선 비행기를 하네다 공항에서 타고 후꾸오카로 갔다. 친척은 비행기 보다 신간선 기차를 타라고 권했으나 웬지 비행기가 빠를 것 같았는데 막상 비행기를 타고 보니 오히려 더 늦었으며 일본열도를 구경도 못했다. 후쿠오카도 큰 도시였으나 역시 오물조물 아기자기한 도시였다.일본은 기차의 나라였다. 어디를 가든 기차를 이용했으며 편리했다. 꼬불꼬불 지하도를 타고 겨우겨우 하카다(후쿠오카) 역에서 사가로 가는 국철을 기다리다보니 피곤이 엄습하였다. 기차를 타고 약 40분 달려간 곳이 사가(Saga)였다. 기차로 가는 길이 아주 평온했는데 전형적인 전원도시와 농촌을 가로 질러 가기 때문이었다. 사가란 도시는 언뜻 보기에는 아주 조용해 보였으나 도시 속의 생활은 역시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문득 동경에서 다카야마 가족이 일러 준 말이 생각났다. "사가에 가면 택시를 타고 아리타(有田)로 가서 다카야마 가문이 사는 마을로 찾아 가세요. 아리타요, 아리타!" 그의 말대로 사가역에서 택시 기사에게 '아리타'로 가자고 하니 일본말이 서툰 우리를 한차례 훌터 보았다. "아, 아리타, 아리타 야키(아리타 도자기)를 사시려고요?" "아뇨, 사람을 만나려고요." "도자기 전시회는 이미 끝났습니다. 손님." "뭐요? 도자기?" 나는 도자기란 말에 깜짝 놀랐다. 혹시 아리타는 도자기 굽는 곳인데 도자기 사업을 하나..... 문득 전광석화처럼 내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제발 아내의 조상들이 도자기 공이 아니기를 은근히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도자기 공이 아니겠지? 아닐거야.' 아마도 나는 도자기 공들을 비하(卑下)하고 있었나보다. '도자기 공은 아니고 도자기를 수집하여 동경에 내다 파는 사업가겠지.' 나는 제니퍼의 조상들이 도자기 사업을 하는 가문이기를 바랐음은 도공을 깔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후 우리는 아리타에 도착했으나 택시 기사는 다카야마 가문이 사는 동네를 못찾게 되니 엉뚱하게 현대 도자기 전시관이 있는 아리타 칸(有田館)에 내려 놓으면서 거기에 있는 직원에게 물어보라고 하며 몹시 미안해 하고 있었다. 택시가 떠난 후 아리타 칸 직원에게 다카야마 가문을 찾는다고 하니 "아! '가나가에' 가문중에 다카야마라는 식구가 있답니다. 도자기 굽는 일은 이젠 그만두고 다른 사업을 하고 있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뭐라고 했습니까? 도자기 굽는 것?" "그렇습니다. 다카야마 가문은 가나가에 가문과 더불어 여기 아리타에서 성공한 도자기 공들이지요." "가나가에라고 했나요?" "아- 잘 모르시는가 보군요. 가나가에란 도조(陶祖) 이삼평(李參平)공을 말하지요." "도조, 이삼평공(李參平 公)?" "그렇습니다. 이삼평(가나가에)공은 이곳 아리타에서 일본 최초로 백자를 구어 일본 최고의 도자기 공이 된 사람이지요. 원래는 조선 사람이었습니다." "예? 조선 사람이라고요?" "왜, 그리 놀라슈? 어디서 왔길래, 이삼평을 모르다니?" "예. 미국에서 왔습니다." "아- 미국? 그렇다면 몰라도....." 나는 물론 아내 제니퍼의 놀라움은 더 컸다. "그렇다면 이삼평의 친척이라는 다카야마씨도 조선 사람입니까?" "물론이지. 이삼평의 사촌이니까...." "................." 우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서로를 쳐다 보면서 어이가 없어했다. 그렇다면 내 아내, 제니퍼는 일본 사람이 아닌 조선 사람의 피가 흐르는 한국사람이란 말인가? 나처럼? 나는 마음속에서 "와! 제니퍼도 나와 같은 한국 사람이구나"라는 탄성이 나왔다. 나는 다시 아내, 제니퍼를 바라다 보니 아내도 역시 놀란 듯이 입을 씰쭉 거렸다. 내 아내, 제니퍼가 한국 사람이라니? 직원은 친절하게 도자기 굽던 곳과 도산 신사(陶山 神祠)를 가르쳐 주면서 도산 신사 옆에 있는 몇 가정 집이 다카야마씨 마을이라고 덧부쳤다. 잠시 나는 아내의 얼굴을 바라다 보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당신? 한국사람이군. 나처럼, 한국 사람!" "그러게, 나도 당신처럼 한국사람의 피가 흐르고 있었네. " 제니퍼는 기쁜 듯이 말을 이었다. "어쩐지 당신과 나는 서로 통하는 것이 많았어. 같은 핏줄이니까..." "정말, 우리는 한국사람이네. 같은 피가 흐르는...." * 일본 도예의 3대 산맥으로 가쓰라, 아리타 그리고 사쓰마 도예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조선에서 잡혀온 도공들에 의해 이루어 졌다. 일찍이 도자기는 중국에서 시작하여 고려때는 상감청자와 같은 푸른 색의 자기를 생산하였다. 조선의 세종때부터 본격적으로 백자를 만들어 냈다. 일본은 1598년 정유재란이 끝나면서 조선의 도공들을 일본으로 납치해 갔다. * 1598년, 일본의 최강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은 정유재란에서 패퇴하면서 엉뚱하게도 김해(金海)에 살고 있던 도공 이삼평과 그 휘하의 보조 도공들을 납치해 규슈, 사가현의 아리타에 정착시켜 그곳에서 일본식의 도자기를 개발하도록 해 오늘날의 '아리타 도자기'를 생산케 했다. 그뿐인가 전라도 남원에 살던 도공 심당길(沈當吉)과 그 휘하 도공들을 납치해 규슈 남단에 있는 가고시마로 끌고 가서 역시 도자기를 만들게 했는데 현재의 사쓰마 야끼(陶藝)라고 불리운다. 결국 아리타, 사쓰마 야끼는 조선사람들이 시조가 된 셈이다. 한편 이삼평과 같이 끌려온 도공중에 이진구라는 도공이 있었는데 그는 이삼평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친척이었다. 이삼평과 더불어 16대에 걸쳐 도자기를 구우며 아리타 야끼를 완성시킨 사람이다.(주: 이부분은 실제가 아닌 작가가 설정한 가상의 인물임) * 아리타라는 작은 도시에는 이삼평의 묘소, 기념비, 동상 그리고 그가 발견한 백질의 흙이 전시되어 있었으며 놀랍게도 온통 이 도시는 이삼평을 위한 도시 같았다. 그 뿐인가 우리를 더 놀라게 한 것은규슈 지방에는 뜻박에도 옛 백제(百濟), 고구려(高句麗), 신라(新羅) 그리고 고려(高麗), 심지어는 조선(朝鮮)시대의 흔적이 너무나 많았으며 한국(韓國)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가 있었다. * 결국 내 아내, 제니퍼는 일본 사람이지만 알고 보니 조선 사람의 후예였다. 다카야마는 이삼평의 사촌으로 그를 도운 사람이기에 다카야마를 알려면 차라리 이삼평(가나가에)에 대한 역사를 고증하는 편이 더 수월해 보였다. 아리타 역에서 시내로 들어오면서 유명한 아리타칸(有田館) 관광을 생략하고 도산 신사(陶山 神社)를 가게 됐다. 도산 신사란 이삼평을 모시는 곳을 말하는데 그 경관이 퍽이나 아름다웠다. 참으로 내가 이해 못할 것은 일본 사람들은 조선 사람들을 가볍게 본다고 했는데 어째서 납치돼 간 조선인 도공 이삼평(가나가에)을 이토록 칭찬하고 동상까지 만들어 놓았을까? 일본사람들은 장인을 존경하기 때문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도산 신사에서 내 눈에 띄는 비석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1918년, 니시마츠우라(西松浦)군수가 더럽고 냄새 난다는 조선사람을 위해 손수 시를 지어 비석을 만들어 놓은 도산시비(陶山詩碑)였다. "눈 아래 집들이 즐비하게 보이고 도자기 굽는 연기가 발아래서 올라온다. 솔바람이 그것을 떨어뜨리듯이 이삼평 도조가 도산을 평정했다." 비문과 시비 옆으로 꽃들이 즐비하게 피어 있었다. 5월의 여왕, 장미와 모란이 활짝 피었으며 자세히 보니 매화가 피었던 흔적도 있었다. 5월의 향기가 무척 감미로웠다. 도산을 평정한 도조 이삼평의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400여년전 그와 함께 납치되어 와 이름도 없이 죽어간 도공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보고 싶고 가고 싶었던 조국 조선의 고향을 그리워하다가 죽은 혼들이 여기저기에서 떠 다니고 있는 듯 했다. 아니, 수 많은 조선 사람들의 구슬픈 울음 소리를 듣고 있는 듯 했다. 아니, 임진 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때 납치돼온 이삼평과 심당길, 그리고 또 다른 도공들의 절규라고 생각했다. 5월의 여왕, 장미도 모란도 고개를떨군채 울고 있는 듯 했다. 멍하니 서서 울음소리를 듣고 있는 나에게 제니퍼가 갑자기 나의 품에 안기면서 말했다. "빌! 우리는 조선 사람이었어요. 조선 사람? 그렇죠?" "그래, 우리는 조선 사람이었어. 조선....동족(同族)이었어." 제니퍼! 그녀는 조선에서 납치돼 온 도공의 후손이라니.... 제니퍼가 받은 마음의 충격이 너무나 커 결국 우리의 신혼 여행은 여기 아리타에서 멈추고 말았다. 한발작도 더 나갈 수가 없었다. "코보레테타 아오소라노 나미다. 내일은 분명 맑을 테니까. 후리시키루 아오소라노 나미다, 언젠가는 웃는 얼굴로 바뀔거야." 제 16장: 도공(陶工) 이삼평(李參平)과 심당길(沈當吉) 이삼평(가나가에, 金江 衡), 이진구(다카야마, 高山), 심당길, 심수관- (눈물로 구워낸 백자.) 일본 사람인줄 알았던 나의 아내, 제니퍼는 뜻밖에도 그녀가 조선인(朝鮮人)의 후예(後裔)임을 알고 난 후 심한 충격으로 인해 그날 저녁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지냈으나, 조선사람의 후예인 나는 그 사실이 너무나 반가워서 오히려 도공 이삼평과 심당길에 대해 밤새 연구를 하여 진정한 뿌리를 찾아 보게 됐다. -많은 도공들이 일본으로 납치되어 왔지만 그중에서 이삼평과 심당길의 가문은 크게 성공하여 일본 3대 도공에 속하지만 이들 뒤에 묻혀 이름도 없이 죽은 도공들이 더 많았다. 그중 하나가 김해에서 이삼평을 따라 규슈로 잡혀온 이진구였다. 그는 이름을 다카야마로 개명했으며 그의 12대 후손중의 하나인 다카야마 카구에는 동경으로 옮겨 신문명을 받아 들였으며 그의 아들, 다카야마 노부사가는 스탠포드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으나 여의치 않아 살리나스에서 꽃 농장을 운영하였다.- * 1590년,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을 통일하여 명실공히 전 일본의 맹주가 됐다. 히데요시는 그의 상관이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長全)가 교토, 혼노지(京都 本能寺)에서 불타 죽은 후 그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8년후 전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그는 오다노부나가의 신발을 가슴에 품고 다녔을 만큼 오다노부나가의 충직한 심복이었다. 그는 오사카를 근거지로 대명들을 하나하나 굴복시켰다. 마침내 일본천하를 통일한 히데요시는 과대망상적인 생각을 갖고 조선 반도를 침략하게 됐다. '조선과 중국을 정벌하여 천하를 도모한다.' 과대망상병자인 히데요시의 집념은 1592년 4월 12일, 마침내 고니시와 소 요시토모,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등 20만명을 파병하여 현해탄을 넘어 조선 반도의 부산성(釜山城)을 공략함으로 임진왜란을 이르켰다.그러나 일본 측에서 본 히데요시는 일본의 영웅이요, 대륙을 정벌할 장군이었기에 일본군의 위세와 사기도 만만치 않았다. 처음으로 부딪친 부산성의 첨사(僉使) 정발(鄭撥) 장군, 그리고 동래성을 지키던 송상현(宋尙賢)의 장렬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수도 한양은 불과 20일만에 함락되고 말았다. 조선 국왕, 선조(宣祖)는 황망하게 의주로 몽진(蒙塵.피난)을 하여 겨우 목숨을 유지했다. 한양을 함락시킨 후 일본군, 제 1군의 고니시(小西)가 평양을 제 2군, 가토(嘉藤)는 함흥을 거쳐 회령까지 함락시켰으나 이순신 장군이 버틴 호남은 함락 시키지 못했다. 의병, 명나라 군대, 이순신 장군등의 항전으로 일본 군은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일차로 일본으로 철군하여 임진왜란이 끝나는 듯 했는데, 1597년 히데요시는 일본군대를 다시 파병하여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본 군은 명나라의 재 출병, 의병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히데요시가 갑자기 죽자 전군이 급히 철군함으로 7년간의 전쟁은 끝이 났다. 그결과 조선 반도의 산천과 유적지, 사찰등이 불타 버렸으며 미망인과 고아가 속출했다. 그러나 본국으로 도망을 가면서도 일본 사람들은 중국과 조선의 도자기가 탐이났다 일본은 1598년 정유재란으로 패퇴 할 때까지 도자기 생산을 못하고 나무그릇을 사용했으니 그들에게는 청자와 백자가 몹시도 부러운 물건이었다. 섬세하리만큼 순결해 뵈는 하얀 백자에 푸른 차를 끓여 조금씩 마시며 평안한 시간을 갖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었다. 특히 다이묘(大名)들이나 번주들은 더더욱 그러했다. 몇 명의 번주들은 후퇴를 하면서도 조선의 도공들을 납치해 가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 소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불리운 1598년의 도자기공 납치는 경상도 김해에사는 이삼평과 그의 사촌 이진구의 비극이었으며 전라도 남원에 살던 심당길의 슬픔이었다. 이삼평-가나에가, 이진구-다카야마, 심당길-심수관으로 불리우는 이들 도공들의 비극은 조선의 비극이었다. * 먼저, 이삼평과 제니퍼의 선조가 되는 이진구의 비극을 설명하는 것이 순서일게다. -경상도 김해에 살던 이삼평은 규슈 사가번의 시조인 나베시마 나오시게(金渦島直茂)장군에 의해 납치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삼평은 교활하기에 조선을 배반하고 자진해서 일본으로 갔다고도 한다. 조선시대의 도공들은 중인이하로 천박한 직업으로 돈도 못벌고 사회적으로도 멸시를 받는 직종이었으나 일본에서는 장인들을 우대하였기에 김해에 주둔하고 있던 사가현의 번주(다이묘) 나베시마의 유혹에 이삼평은 솔깃했다.- 도공 이삼평은 눈섶이 위로 바짝 쳐진 나베시마 장군에게 불려갔다. 큰 칼을 차고 욱박지르는 목소리로 나베시마는 이삼평에게 몇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이 삼평! 너의 모가지는 내 손에 달려 있다. 네가 나를 따라 일본으로 오면 너를 우대할 것은 물론 너를 무사의 계급으로 올려주마. 네가 할 일은 우수한 도자기를 만들어 내게 주는 것 뿐이다. 너뿐만 아니라 너를 따르르는 자는 다 받아 주마. 만일 네가 내 조건을 받아 주지 않는 다면 강제로 납치해 갈 것이며 우대 하지 않을 것이다. 알겠느냐?" ".............." "어허! 고얀 것! 왜 대답을 못하는가? 죽고 싶나?" "아닙니다. 장군님!" "그렇다면 삼일 후에 와서 대답을 하라, 조센징!" 집으로 돌아 온 도공 이삼평은 밤새 고민을 했다. 아내에게 말도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옆에서 잠을 자는 아내도 아내지만 늙은 어머니를 두고 간다니, 불효였다. '내가 조국 조선을 배반하고 일본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도망을 갈 것인가?' 그는 이틀을 두고 생각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막상 도망을 가려고 해도 일본군의 감시가 생각보다 심했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기회를 보고 있었다. 이삼평은 김해지방에서 가장 유수한 도공이었으며 그가 만든 도자기는 왕실로 상납되는 최고의 품질이었기에 그에게는 많은 문하생들이 있었다. * 그의 문하생중에 그와 사촌지간인 이진구(李眞九)라는 도공이 있었는데 그보다 7살이 아래였으며 마치 수족같이 그를 따르는 사이였다. 이삼평은 그의 사촌 동생인 이진구를 만나 그간에 일어난 일을 얘기해 주었다. "그렇다면 형님은 물론 우리 도공들도 같이 끌려 간단 말입니까?" "그렇다네. 우린 꼼짝없이, 끌려가는거야." "형님?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조국을 배반할 수야 없지요, 조선을! 차라리 오늘밤에 도망을 칩십다. 제가 다른 도공들을 이끌고 도망을 치도록 마련하겠습니다." "도망을?" "그렇습니다. 형님!" "아냐, 차라리, 우리, 도공을 우대한다는 일본으로 가서 마음놓고 도자기를 만들어 보고 싶네." "예? 형님? 조선을 배반하려고요? 안됩니다. 나는 못합니다." "조선에서 백날 있어봐야, 우리는 상놈보다 조금 낳을 뿐, 대접을 못받네." "그래도 저는 못합니다." "못한다고? 너는 나와 같이 가야 할 운명이다. 어디까지나..." "못합니다. 형님!" "그렇다면 나는 너를 일본군에게 밀고하겠다. 강제로라도 끌고 가라고." "형님?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겠습니다. 나는 못가오." "너는 가는 거다. 너는 나하고 같이 가는 거다." "안되오." 도공 이진구는 사촌형 이삼평의 의도를 알아 채리고는 몹시 놀랐으며 당황했다. 조국을 배반하겠다는 그의 마음을 안 이상 이젠 그의 수하 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이진구는 몇명의 도공들과 같이 김해를 빠져나와 섬으로 도망을 치려고 시도하다가 매복되어 있던 일본군에게 오히려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 놈들을 꽁꽁 묶어 장군님에게 데리고 가라!" 다음날, 나베시마는 이삼평이 보는 앞에서 사촌 동생 이진구를 죽이겠다고 예리한 일본 칼을 목에 대고 위협을 하며 같이 규슈로 가든지 아니면 죽든지 하라고 협박을 했다. "나는 조선을 배반 못하오!" 이진구는 소리를 쳤으나 이삼평은 나베시마의 조건을 따르기로 하였으며 일본으로 후퇴를 하면서 80여명의 도공들을 묶어 배에 태웠다. 부모와 처자를 김해에 놔 둔채 이들은 파도치는 현해탄을 넘어 규슈 북단 사가로 끌려갔다. 청년 이진구는 배 안에서 사촌형, 이삼평을 원망도 했으며 저주도 했으나 모든 것이 허사였다. "진구야? 이젠 우린 같이 사는거다. 우리는 한배에 탄 신세다. 알겠느냐? 생각해 보라. 조선은 우리 도공들을 마치 노예처럼 부려 먹었지만 우리를 위해 해 준 것은 전혀 없어. 아무것도 없어. 우리는 상놈보다는 낳겠지만 천한 것은 마찬가지여. 우리는 일본에 가서 마음'�우리의 기술을 뽐내 보세." "형님! 나는 조선을 배반했습니다. 차라리, 현해탄에 빠져 죽으렵니다." "쓸데 없는 소리를......" 그순간, 일본군의 가죽 혁대가 이진구의 등판을 세차게 강타했으며 이진구는 "억"소리를 내며 마루 바닥에 꼬꾸라졌다. 그가 다시 눈을 떳을 때는 이미 현해탄을 넘어 후쿠오카 항구에 도착한 후였다. 얼굴에는 온통 피 범벅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포박에서 풀려 이삼평과 같이 사가현으로 끌려 갔다. "아! 내가 조국을 배반하다니....조국을....." 이진구는 목놓아 울었다. * 이삼평 일행은 사가현으로 잡혀와 잔인하기로 소문난 야스즈미라 장군의 감시하에 오기군 다크 마을에 같혀 살며 붉은 화산 흙으로 옹기를 구었으나 양질의 백토(白土)를 구할 길이 없었다. 백자를 만들 약품은 조선에서 올 때 가지고 왔지만 백토는 일본에서 구해야 했는데 규슈에서 백토를 구할 수가 없었다. '백토를 구하여야 하는데....백토를.......' 이삼평의 소원은 오로지 백토를 구하는 것이었다. 나베시마 장군은 처음에는 제법 도공들을 우대했으나 화산 흙으로 옹기나 구웠으니 참다못해 마침내 이삼평을 불렀다. "네가 이곳에 온지도 어느듯 5년이됐는데, 아직도 옹기 그릇을 굽는다니, 언제까지냐?" "장군님? 백토를 구하지 못해서, 백토만 구한다면 곧 백자기를 구울 수가 있습니다." "아직도 백토를 못 발견했는가?" "예." "네가 나를 속이려고 일부러 그러는거지? 조선놈!" "아닙니다. 백방으로 구하고 있습니다마는..." "알았다. 일년의 기한을 더 주마. 그 때도 못 구하면 너는 죽으리라." 나베시마 장군의 칼날이 시퍼랬으며 언제고 목을 자를 듯했다. 일년 동안 이삼평은 규슈일대를 개처럼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누비고 다녔으나 백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일년! 그러나 일년도 훌쩍 지나고 말았다. 약속한 일년동안에 백토를 구할 수가 없었으니 나베시마에게 죽을 일 밖에 없었다. "거짓말 쟁이 조센진! 예잇! 차라리 쌀을 낭비하느니 네 목을 쳐 주마. 거짓말 쟁이!" 찡그린 얼굴로 나베시마는 사무라이 검을 높이 들고 이삼평의 목을 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장군님? 한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꼭 찾겠습니다." 사실, 규슈지방에 백토가 있는지 없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나베시마는 이삼평을 죽이려기 보다 겁을 주려고 하였을 뿐이었다. 이삼평은 죽기가 싫었기에 간청을 했다. "한번더라? 언제까지 한번더냐?" "장군님? 아시다시피 남원에서 온 심당길 도공도 아직 백토를 못 찾았습니다." "심당길?" "예. 그도...." "너와 심당길, 누가 더 자기를 잘 만드는가?" "장군님, 똑 같습니다마는 백토를 먼저 구하는 자가 더 우수합니다." "백토를 먼저 구하는자가? 그렇다면 더 기회를 주마. 심당길보다 먼저 백토를 찾으라! 아니면 죽으리라!" "알겠습니다. 번주님!" 백토를 못 구한다면 양질의 백자를 만들 수가 없으며 결국 비참한 꼴로 죽어야 했기 때문에 이삼평은 죽기를 각오하고 규슈 일대를 또 다시 탐색하기 시작했다. 화산 연기가 오르는 아소산은 물론 오이타 해안까지 가서 백토를 발견하려고 안간 힘을 다 쓰고 있었다. "백토를 구해야 한다! 백토를 구해야 한다." 이삼평은 백토를 구하려고 미친 사람처럼, 비가 오든 바람이 불던 백토를 구하려고 규슈 일대를 삿삿이 찾아 다녔다. 오늘도, 번주의 부장, 아스즈미라 장군이 이삼평을 찾아와 협박을 했다. "이것봐! 이삼평? 번주님이 주는양식이나 꼬박꼬박 받아 먹으면서 아직도 백자기를 못 구었으니, 이것봐! 밥 값을 해야지?" "예. 곧 백자광을 발견 할겁니다. 시간을 주십시오, 장군님?" "백자광? 그런거 발견해야만 백자를 굽나? " "예, 백자는 백질의 토질이 있어야합니다." "언제 발견하겠다는 건가? 벌써 10년이 지났는데...." "더 시간을 주십시오." "시간을 더 달라? 얼마나 더?" "일년을 주십시오." "안돼, 6개월을 더 주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는 규슈 북부지방을 샅샅이 찾아 다녔다. 그러나 그는 백자광을 발견 할 수가 없었다. 무식한 사무라이의 예리한 칼날 앞에서 근근히 그는 파리같은 목숨을 유지 할 수가 있었으니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기를 1년, 5년, 10년, 15년 그리고 18년..... "아직도 못 찾았나? 아니면 안 찾는건가?" "아닙니다. 번주님의 은공을 생각해서라도 꼭 찾겠습니다." "이것봐! 자네는 목이 세 개는 있어야 되겠어. 알겠나?" "...................." "왜 대답이 없어?" "꼭 찾겠습니다. 장군님!" "에라, 못난놈!" 아스즈미라는 발길로 이삼평을 차버리니 그는 악! 소리를 지르며 나가 떨어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저놈이! 이봐라 물을 부어라!" 졸병이 물을 부으니 이삼평은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그는 갈비뼈가 불어 졌는지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저놈을 감옥에 쳐 넣어라!" 이삼평은 숨을 몰아 쉬며 감옥에 가쳤다. * 1616년, 납치돼 온지 18년되던 해, 마침내 이즈미야에서 백자광(白資鑛)을 발견하였다. -마침 산 속을 지나던 중, 하얀 색의 흙이 눈에 띄였을 때 이삼평은 그의 눈을 의심했다. "흰색? 흰흙? 백자광?" 이삼평의 눈은 번쩍이고 있었다. 손으로 흙을 파 보았다. 하얀 가루같은 흙이 더 보였다. 분명, 흰 색의흙이었다. "백자광이다! 백자광!" 그는 소리를 치면서 춤을 추었다. "살았다, 살았어!" 그는 그의 목숨이 붙어 있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삼평은 마침내, 일본 땅에서 백자광을 발견했으며 순백색의 자기를 가미시리가와에 있는 가마에서 만들어 냈다. "이삼평이 백자를 만들었다고?" 나베시마 번주는 기뻐 했음은 물론 이삼평과 도공을 치하했다. "이삼평? 너는 이제부터 '가나가에'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너를 약속대로 최고무사의 계급으로 승격시켜준다." "예. 가나가에? 그리고 최고무사로?" "그렇다. 약속대로...그리고 너는 세금을 안내도 된다. 주는 급료를 받고 자기(瓷器)만 만들어 내면 되는거다." 사가현 아리타에서 질 좋은 접시가 그리고 백자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생산되는 자기를 만든 이삼평은 도공으로는 최고의 대접을 받았음은 물론 그가 죽은 후 도조(陶祖)이삼평공(李參平公)으로 칭하게 됐다. 무식한 사무라이 나베시마 장군은 그래도 도공과 장인들을 우대하는 아량은 있었다. * 뿐만 아니라 이삼평의 사촌이 되는 이진구, 또한 마음을 고쳐 먹고 도공의 일에만 전력을 다했다. 그 또한 다카야마로 개명을 한 후 이삼평을 도와 아리타 도자기를 만들었다. 이진구(다카야마)는 밤마다 북쪽 하늘을 바라다보며 김해에 있는 부모님들에게 절을 올리며 '어서 조선으로 돌아가게 해 주소서.'라고 천지신명에게 빌고 또 빌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두고 온 젊은 아내였다. -18세때 결혼한 아내는 세 살 아래인 상인의 딸이었다. 상인의 딸과 도공의 결혼이었으나 행복했다. 결혼 후, 일년 반만에 예쁜 딸을 낳았으며 그 다음해에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는 도공의 일에 전념했기에 기술도 좋아 이삼평의 심복이 되었다. 일본군이 패퇴하면서 이삼평을 납치해 갈 때, 같이 끌려가면서 사랑하는 아내와 작별도 못하였기에 그의 마음은 더 더욱 안타까웠기에 밤마다 아내를 생각하며 눈물을 짖고 있었다. 이제나 저제나 고국으로 돌아 가지 않을까 했는데 상황은 그렇지가 않았기에 어느날, 그는 탈출을 기도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무지막지한 나베시마 번주의 군사들의 감시가 만만치 않았으며, 만일에 도망치다 잡힌다면 나머지 80명의 도공들도 무사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반대로 일을 열심히 하면 마음에 감동이 와서 돌려 보내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 보았다. 어느듯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사가의 번주, 나베시마는 이진구에게 다카야마라는 이름을 내려 주면서 강제로 일본 여인과 결혼 하기를 강요했다. 조선에 두고온 아내와 자식이 있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이진구, 아니 다카야마? 너는 조선인이 아냐! 우리 일본 사람이야! 이건 번주의 명령이니라! 내가 네게 베푸는 호의니라!" "아닙니다. 저는 아내가 있습니다." "명령이다. 아니면 죽어라!" "......................." 나베시마의 예리한 칼날이 이진구의 가슴에서 번득이고 있었다. '아니'라고 대답하면 그 칼끝은 가슴속으로 후비고 들어와 목숨을 잘라 버릴 것 같았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장군!" "조센진 주제에. 나를 거역하면 죽으리라." 마침내 혼인의 날이 찾아왔다. 혼인이라야 번주 앞에서 젊은 일본여자와 술을 마시면서 하라는대로 하는 것이 결혼식이었다. 그리고 해가 떨어져 밤이 되어 신혼 첫날밤을 마지했다. 다다미로 된 신혼방에 들어서니 촛불이 은은했으며 살프시 미소를 지으며 일본 여인은 무릎을 꿇고 신랑, 이진구를 맞아들였다. 가만히 보니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왜 그럴까? 사랑하는 남자를 두고 번주의 명령에 의해 마음에도 없는 조선사람을 낭군으로 받아들이기가 싫어서 일까? 신랑 이진구는 다다미 방의 아랫목에 좌정하고 앉으니 신부는 준비해 둔 일본 술을 한 잔 가득히 딸아 새 신랑에게 올렸다.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으며 받으려고 하는 이진구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일본여인이여? 나는 조선 사람이요. 그리고 처자가 있소. 조선과 아내를 배반하고 싶지 않소. 그러니 여인인여? 어디로고 가셔도 좋소. 자유로워도 됩니다." "압니다. 주인님! 우리는 운명입니다. 나를 받아 주소서." 그녀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아니되오, 당신은 자유롭소. 어디를 가도 좋소." "나도 당신의 아내입니다. 번주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번주가 허락한 것이니 내가 당신을 다시 자유롭게 하렵니다.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하소서." 이진구는 진심으로 일본 여인에게 자유롭기를 허락했다. "주인님? 주인님의 마음을 조금만 열어 주소서. 그리고 나를 아내로 맞아 주소서. 주인님이 받아 주지 않으면 갈 곳이 없습니다. 아니, 나는 물에 빠져 죽으렵니다." "......................" 일본 여인은 슬피 울고 있었다. 왜그럴까? 번주의 말을 거역하면 죽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남자도 없다고 했다. 번주의 말을따라 평생을 새 신랑을 쫓아 살아야 한다고 했다. '어찌하나? 어찌하나.' 이진구는일본 여인을 측은하게 바라다보았을 뿐 어디고 다칠 수가 없었다. "주인님! 나도 당신의 아내입니다." "아내?" "예. 주인님, 당신의 계집입니다." 이진구의 머릿속에는 10여년전 조선의 아내를 만나던 그 첫날 밤이 생각났다. -그 때, 조선의 아내도 울고 있었다. 행복해서, 그리고 앞날을 몰라, 불안해서....- '내가 아내를 배반하다니....조선을 배반하다니.......' 이진구는 그날 밤, 일본 여인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멀리 김해를 바라다보면서 한없이 울고 또 울었다. "주인님? 나도 같이 울고 싶습니다." "같이 울고 싶다고?" "아니, 차라리 나를 한 칼로 베어 죽여, 불태워 재로 만들어 풍장(風葬)으로 멀리 조선을 향해 날려 보내소서. 한줌의 재가 되어 주인님을 대신해, 현해탄을 넘어 조선으로 가서 전하리다. 주인님은 여기 일본에 와서 한번도 조선의 아내를 잊지 않고 살았노라고요." "풍장을 해서 멀리 조선으로 날려 보내달라고?" "예. 주인님!" "아- 그대, 그-대. 당신의 이름은 하나꼬(花子)상? 고맙소. 고맙소." "주인님!" 조선인 이진구(다카야마)는 일본 여인, 하나꼬(花子)상을 꼭 안고 더 울고 말았다. 운명(運命), 운명, 모진 운명.......... 하나꼬상은 새 신랑, 이진구의 가슴에 묻혀 울고 있었다. "주인님? 나를 아내로 받아 주는거죠?" "하나꼬......." 다카야마, 이진구가 그녀를 더 강하게 안았을 때, 그의 손은 몹시 떨리고 있었다. 그동안 세월 속에서 슬픔과 떨림만이 존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김해의 하늘에서 보던 별과 여기 아리타에서 보는 별은 같은 별이었으나 서글품과 외로움으로 뒤 범벅이 된 별들이었다. "하나꼬상? 불쌍한지고, 나는 이미 아내가 있소. 자식도 있고...." "압니다. 그래도 나는 당신의 아내입니다. 운명을 거역할 수 없는 아내입니다." "운명을 거역 못한다고? 그게 뭐요?" "번주 나베시마입니다." "나베시마?" "예." 사실이 그러했다. 이진구도 나베시마에게 잡혀 온 몸, 그리고 하나꼬 상도 번주의 명을 거역 못하는 운명... 이진구는 한숨을 쉬었다. 사가의 번주, 나베시마가 우리의 운명이라니.......... * 결혼한지 2년만에 아들을 낳았기에 사가의 번주, 나베시마로부터 축하를 받았으며 역시 준무사의 계급으로 승진됐다. 조선으로 돌아 가는 길은 점점 더 멀어졌으며 백자가 생산되기 시작하자 나베시마 번주 뿐만 아니라 오이타, 구마모토의 가토장군도 탐을 내었기에 이삼평을 따라 멀리 오이타, 구마모토에 가서 몇 개월씩 머물며 자기 굽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했다. 특히 가토기요마사는 욕심이 많아 혹독한 일을 시키곤 했다. 조선에 두고온 아들과 딸들은 어느새 20세 그리고 22세가 되었으리라... 다시 2년후 아들을 또 낳았으며 그 후 딸을 둘 더 낳았다. 그리고 이들 후손들은 한결같이 아리타에서 도자기 굽는 직업을 대 물렸다. 도자기의 달인 이삼평이 죽은 후 그의 아들들이 대를 이어 아리타 야키를 이어 받았듯이 다카야마의 후손들도 대를 물려 도공의 일을 이어갔다. 이진구, 다카야마는 56세에 세상을 떠났으나 한평생, 그는 현해탄을 넘지 못한채 한스러운 눈물도 밖으로 내 보이지도 못하고 죽었다. 죽을 때, 그는 일본인 자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조선을 배반한 배신자요, 아내를 등진 배신자라고....." 그러나, 일본인 자손들은 "아니요, 아버지는 조선을 마음 속깊이 묻고 사셨소. 그리고 아내를 마음에 품고 사셨소."라고 대답을 했다고 한다. 참으로 말 못할, 아련한 인생이었다. 억지로 끌려와 조선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을 가슴 한 구석에 간직한 채 살다가 간 그의 혼은 과연 죽어서라도 현해탄을 넘었을까? 설령 현해탄을 넘어 김해로 갔다 한들 그의 아내와 자손들은 그를 알아 보았을까? 아니 받아 줬을까? 다카야마라는 친척이 친절하게도 설명 해준 이 대목에서 나와 제니퍼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제니퍼? 당신의 조상이 이진구? 그리고 불쌍한 일본 여인?" 제니퍼를 바라보면서 나는 측은한 마음을 품으며 눈물짖던 하나꼬(花子)라는 여인을 생각해 보았다. '하나꼬? 당신이 바로 제니퍼의 먼할머니란 말입니까? 자기 몸을 불에 태워(風葬) 멀리 현해탄을 넘어 김해로 날라 가겠다고 한 그 눈물의 여인? 감사합니다. 당신의 그 숭고한 마음이 나의 아내 제니퍼의 마음 속에도 살아 있겠지요?'' * '욕심이 만들어낸 비극, 그리고 그 후손의 만남.' 이라고 정의를 해 보았다. "다카야마씨? 왜? 12대 손에 해당되는 다카야마 가쿠에이는 동경으로 이주를 했나요?" 나는 설명을 하고 있는 다카야마라는 친척에게 되 물었다. "아! 가쿠에이는 후쿠자와의 영향을 많이 받은 선각자였으니까, 여기 시골보다야 대 도시 동경이 더 좋았겠지. 그리고 거기서 잘나가는 실업가가 됐었지. 그러나 회사가 부도를 내면서 실추된 그의 명예와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택한 것이 바로 할복 자살이었지. 명예를 아끼는 사무라이처럼..." "고조(高祖) 할아버지가 그렇게 죽다니...." 제니퍼는 슬피 울다가 나의 가슴에 머리를 밖고 흐느꼈다. * 신혼 여행으로 온 일본에서 말도 안되는 역사적인 사건 앞에 우리는 충격이 심각했다. '한과 눈물로 얼룩진 조선의 후손, 그리고 자살로 이어진 비극의 가문이었다니...' 가슴에 스며드는 눈물때문에 우리는 이틀을 더 묵으면서 이삼평과 이진구에 대해서 더 알아 보기로 했다. 아리타에 있는 동산, 비문 그리고 사당을 두루 돌아 보았다. 대부분이 도조 이삼평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이었는데 그래도 그늘에 묻혀 있던 이진구의 체취를 같이 느끼고 있었다. 이삼평의 성공뒤에는 이진구의 성공도 같이 존재하고 있었기에 이진구의 성공담이 더 눈물 겹다고 할 수 있었다. 이삼평, 이진구의 그늘에 묻힌 이름없는 도공들이 겪은 고통은 더 할 나위가 없을 것 같았으며 그들의 넋이 하늘에서 맴돌고 있는 듯했다. 도자기를 굽던 가마에서 우리는 조선을 그리워 하며 불을 지피던 조상의 숨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흔들리는 나무 가지에서 우리는 조상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아- 우리의 조상이 되시는 이진구할아버지, 아니 다카야마 할아버지! 제니퍼의 할아버지는 2차대전중에 조선 사람의 큰 은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카야마(高山)라는 이름을 버리고 이시카와(石川)라는 새 이름으로 바꿨습니다. 할아버지가 현해탄을 넘어 끌려가 이진구를 버리고 다카야마가 된 것 처럼, 제니퍼의 가문도 럭키 산을 넘어 콜로라도, 아마체로 끌려 갔었습니다. 우리는 미국에 대해 억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 정부가 미웠습니다. 그런데 오늘보니 이진구 할아버지, 아니 다카야마 할아버지는 더 비참했군요.결국 고향에 가보지도 못하고 거기서 운명하셨군요. 아- 이젠 미국을 더 이상 불평 하지 않으렵니다. 현해탄을 넘어 끌려가던 것에 비교하면 너무나 쉬웠었기 때문이지요. 다카야마(이진구) 할아버지여 고히 잠드소서. 다카야마의 후손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 400년 후에 규슈로 찾아 온 미국 사람 4세인 우리, 빌과 제니퍼는 진심으로 그들의 혼을 위해 빌고 또 빌었다. 제 17장 도공-심당길(沈當吉) 아리타 야키의 도조 이삼평을 말하다 보니 그와 같은 운명의 도공 심당길과 그의 후손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삼평하면 심당길, 심당길하면 이삼평인 것 처럼 같은 시기에 도공으로 조선에서 이름을 날렸는데 뜻밖에도 1598년, 정유재란이 끝날 때, 사쓰마 번주, 시마쓰 요시히로에 의해 규슈 남단 가고시마로 끌려간 사람이 바로 심당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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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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