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12 18:24
어우렁 더우렁 / 민유자
나는 둔하고 투박한 나의 저울과 잣대로 사람의 두가지 성향을 자주 궁리하며 분별해 본다. 이를테면 누리기보다는 이루기위해 애쓰는 저축형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루기보다는 우선 누리고 보자는 소비형 사람도 있다.
사람을 대할 때에 선입견을 가지지 말고 사심없이 대하라고 하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가만히 보면 누구나 나름의 저울과 잣대를 가지고 있고 우선 그것으로 가늠을 하고 차차 파악되는 부분을 가감해 나간다.
이 저울과 잣대는 신생아 때부터 보호본능의 방어기제로 경험 따라 저절로 형성되고 키워지는 것인 만큼 매우 독특하고 개인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이 분별이 객관에 가까울 지언정 꼭 바르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성향을 무지개의 일곱색으로 가늠해 본다. 사랑이 많고 열정적이고 충동적이며 진취적인 빨강형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활기차고 에너지가 많고 창의력이 좋은 주홍형의 사람도 있다. 항상 긍정적이고 밝은 표정의 기쁜 마음가짐을 견지하는 노랑형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매우 자연스럽고 안정적이며 조화로운 초록형의 사람이 있고, 늘 평온하고 신뢰할 수 있는 진실된 파랑형의 사람도 있다. 들어내지 않아도 권위와 신비함을 간직하고 냉정하고 과묵한 남색형의 사람도 있는가 하면 독창성과 영감이 많고 정신적 높은 경지를 지향하는 보라형의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지만 빨갛기만 한 사람도 없고 파랗기만 한 사람도 없어서 그 중간 어디쯤이거나 혼색이 되어 어느정도 붉기도하고 어느정도 푸르기도 하다. 허나 붉은 색조가 많은 사람은 일단 마음 가는대로 누리고 보자는 소비형의 누리형일 가능성이 많고 푸른 색조가 짙은 사람은 충동을 억제하고 정해진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이루형일 가능성이 짙다고 보여진다. 이를테면 그 중간 형이 초록형이다.
아득한 옛날 어린 시절 일이다. 육이오 사변에 불타버린 집에서 였으니 아마도 너댓살 쯤이었나 보다. 가을에 누가 홍시 감을 가져왔다. 색은 붉어도 아직은 덜 익어 먹을 수는 없었다. 다섯살 위의 오빠와 나는 다섯개씩 분배를 받았다. 오빠는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나는 작은 바구니에 담아 마루에 있던 뒤주 옆에 놓아두었다. 며칠은 군침을 삼키면서도 잘 참았다. 들며 날며 붉은 감을 보고 유혹을 이기기에는 나의 인내는 너무 여렸다. 무료한 한낮 결국 난 그걸 집어들어 한입 깨물었다. 달콤한 물이 혀를 돌았지만 곧 입안은 떫은 맛으로 가득해졌다.
홍시가 다 익었을 때에 오빠의 홍시를 조금 얻어먹기는 했지만 나는 이미 모든 감을 다 조금씩 먹다가 버린 후였다. 오빠는 엄마에게 후한 칭찬을 들었고 나는 지금까지 기억되는 교훈을 얻었다. 오빠는 이루형인데 비해 나는 누리형 이었나보다.
가까운 친척 중에 일상사를 얘기하면서 집안을 홀까닥 뒤집었다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이 있다. 그녀는 평소에는 정돈을 하지 않고 편한대로 지낸다. 어쩌다 그의 처소를 방문하면 으악! 소리가 날 정도로 어지럽다. 그러다가 몰아서 청소를 하게 되니 집안을 홀까닥 뒤집었다는 말이 나온다. 그 말이 내게는 생소하다. 환절기에 맘먹고 대청소를 할 때면 몰라도 난 평소에 손이 닿는 곳만 청소를 하고 늘 조금씩 정돈을 하니 구석에는 먼지가 쌓여간다. 이건 누가 더 부지런하고 깨끗한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현관에 신발을 벗을 때에 들어가기 바쁜 나머지 자기의 신발 상태가 어떤 지 돌아보지 않는다. 함께 들어갈 때면 내가 나중 들어가면서 그녀의 신발까지 정돈하곤 한다. 여기서는 그녀가 누리형인데 비해 나는 이루형인 셈이다.
옛말에 ‘버는 사람 따로 쓰는 사람 따로’라는 말이 있고 ‘만석꾼이 삼대를 넘기기 힘들다’는 말도 있다. 지독한 이루형인 사람이 애써 모아놓은 많은 재산을 허랑방탕한 누리형의 사람이 다 탕진하는 경우를 이름이다.
이에 비해 특별하고 자랑스런 실례가 있기는 하다. 엄격한 가훈을 세우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경주 최부자댁은 12대에 걸쳐 삼백년동안이나 이어왔다. 국운이 다하면서 쇄락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이어져오면서 큰 업적을 세우고 한국의 명문가로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아쉬운 마음으로 가늠해본다.
이런 성향은 타고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후천적인 환경과 교육으로 연마되는 부분도 있다.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쁘다고 이분법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어보인다. 또 그 중간 형태인 초록형이라고 해서 꼭 이상형이라는 말도 아니다. 어차피 초록 일색일 수는 없는 일이고 그런 단순 논리로는 성립될 수 없는 문제다. 제각각 장점과 단점을 다 보유하고 있으면서 그 다양함 속에서 특징적으로 서로 다를 뿐이다.
사람들은 이런 다양함 속에 적절히 섞여 살면서 호기심이 발생하고 서로 다른 매력에 끌리기도 한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함께 협력할 때 상호 보완이 되어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큰 폭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묘미도 생긴다. 나만도 아니고 너만도 아닌 ‘상생, 윈윈’ 같은 싱싱한 단어들이 빛이 나는 이유다.
서로 다름이 내 저울과 잣대로 가늠이 될지라도 내 기준으로 못박아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다분히 껄끄럽고 감정적으로 불편해도 대승적 차원에서 ‘함께’라는 아름다운 단어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때로는 후퇴하고 멀리 돌아가는 경우가 분명 생길지라도 그렇다. 경주 최부자네서 철저히 지켜온 가훈이 그 좋은 본보기로 증명된 셈이다.
때때로, 아니 수시로 내 속에서조차 이루형과 누리형은 힘겨루기를 한다. 자동차에는 엑셀레터와 브레이크가 꼭 함께 있어야 주행이 가능하다. 누리형이 엘셀레터가 되고 이루형이 브레이크가 되기도 하지만 그 반대인 경우도 또 많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엑셀레터가 성능이 좋을수록 브레이크의 상태도 좋아야 한다.
이루형과 누리형이 으르렁 드르렁 하다가도 웃으며 한 손 내밀고 눈 감고 다른 손 내주며 접점을 찾으려 노력하다 보면 어우렁 더우렁 살아지지 않을까.
2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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