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네이션/박귀덕
2009.03.26 07:49
카네이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박귀덕
봄 햇살이 창가에 스며드는 어느 날 오후, 빛바랜 사진첩을 뒤적이다가 시선을 붙잡는 사진 한 장을 손에 들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산수유 나뭇가지가 노랗다. 벌써 봄이 왔나 보다.
1960년대 5월이면 김제시 진봉면 K교회에서는 카네이션 꽃을 접는 손이 분주했었다. 잔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고,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을 담아 정성으로 꽃을 만들었다. 여러 명이 한 방에 모여 종이를 접는 사람, 펴는 사람이 손을 맞춰 즐겁게 작업을 했다. 빨갛고 하얀 꽃에 파란색의 이파리를 달아주면 생화 못지않은 아름다운 꽃이 되었다. 그 때는 생화도 흔치 않았지만 돈도 귀했다. 그래서 정성들여 만든 카네이션은 어느 꽃 못지않게 귀한 대접을 받았다. 설교 시간에 L목사님이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게 된 유래를 말씀하셨다.
"미국에 안나라는 한 소녀가 살았다. 그 소녀는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깊었다. 추도식에 참석하신 친지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려고 왼쪽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렸다. 그 뒤 매년 5월 두 번째 일요일을 어머니의 날로 정하고 카네이션을 달고 그 날을 기념하게 되었다."
어머님이 살아계시면 빨강 꽃을, 어머님이 돌아가신 분은 하얀 꽃을 가슴에 달아드렸다. 자식들 뒷바라지에 거칠어지셨을 부모님은 까칠한 손으로 내 손을 덥석 잡고, 주름진 얼굴에 함박 웃음꽃을 피워 천국을 보여주셨다. 한 송이의 꽃이 정이되어 진한 감동으로 전이되었다. 400여 개의 꽃을 접느라 잠이 좀 부족했던 육신의 피로쯤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남을 즐겁게 해 준 것이 내 마음을 더욱 즐겁게 해 주엇다. 그 때는 부모님의 가슴에 꽃만 달아드려도 효도를 다 한 것처럼 흐뭇했었다.
골목길에서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두 분이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 세상 속으로 빨려든다.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지만, 다 늙어 자식들로부터 얻은 마음고생이 얼마나 크셨을까? 7남매의 탯줄을 묻은 너른 고향집을 등지고, 큰아들 따라 전주 경원동 철길 옆 허름한 집으로 오실 때의 서글픔은 얼마나 깊으셨을까? 발걸음은 얼마나 무거우셨을까? 세간을 들여 놓을 공간조차 없는 좁은 방에 갇혀 외롭게 사시다 가신 부모님이 생각나 눈시울이 붉어진다. 늘그막에는 고향에서 친구들과 정을 나누며 흥겹게 사셨어야 했는데, 자식들이 아버지의 고향을 앗아갔던 것이다.
아버지는 젊었을 땐 퍽 낙천적이셨다. 모든 일에 긍정적이셨고 부지런하셨다. 논이 많을 땐 11배미까지 일궈 놓으셨다. 그 좋은 논들을 자식들에게 다 나누어주시고, 나이 들어 빈손이 되셨다. 물려받은 재산을 지키지 못하고 고생만 하는 자식들을 지켜보면서 한숨만 짓던 아버지, 전주는 아는 친구가 없다며 양로당도 안 가시던 아버지, 할 일 없이 긴긴 하루를 사시며 세월만 보내시던 아버지, 낡은 대문 밖에서 서성이면서 막내딸을 기다리시던 아버지, 당신의 고단한 삶보다도 자식들의 힘든 생활을 걱정하시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속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면 아마도 새까맣게 다 타서 재가 됐을 것이다. 그래도 5월엔 효도를 한답시고 두 분 가슴에 꽃을 달아드리고 사진을 찍어 드렸었다.
시집간 막내는 부모님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걸 모르고 살았다. 효도는 오빠들과 언니들이 하는 것인 줄 알았다. 살아계실 때 좋아하시던 돼지고기를 한 번이라도 더 사다드리지 못하고, 어쩌다 큰맘 먹고 퇴근할 때 잠시 들러 오목이나 장기를 둘 때면 지기 싫어 몇 수를 물려달라고 생떼를 쓰면 허허 웃으시며 물려주셨다. 그렇게 말벗이라도 되어드리는 날은 몇 번이고 고맙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무엇이 고맙다는 말씀이셨을까? 미련하게 살아왔던 불효가 가슴을 아프게 한다.
어머니는 우리 집에서 손자들을 돌봐주고 계셨고, 아버지 혼자 외롭게 사셨다. 부모님의 생이별이 어떤 고통인 줄 그땐 철이 없어 몰랐다. 고향 친구들은 자식들에게 빼앗기고, 아내까지도 막내딸에게 빼앗기신 아버지는 외롭다는 말씀을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봄이 오는 소리에 삼천천의 얼음도 녹아 물이 되어 흐르는데, 내 가슴에 켜켜이 쌓인 불효의 덩어리는 서러움이 되어 저 세상에 가신지 28년이 지나도록 다 흘려보내지 못하고 가슴 가득 품고 있다.
자식 셋을 낳아 키우면서 원하는 걸 해 줄 수 없을 때 부모심정을 경험하고, 어머니로부터 받은 맹목적인 사랑을 딸에게 되돌려 주며 내가 저지른 불효를 확인한다. 늙어서 나를 낳아 놓고 돈 없어 가르치지 못할 때 미안해 하시던 어머니, 힘없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갖고 싶은 것, 해보고 싶은 일을 다 접고, 속을 태우면서도 부모님께 표현조차 하지 못하고 속울음을 우는 막내딸의 눈치를 살피시던 어머니,
"내가 널 예우고 죽어야 하는디……."
하시며 말끝을 맺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히시던 어머니가 막둥이 손자까지 다 키워주시고, 먼저 세상을 떠난 큰오빠를 뒤쫓아 가려고, 머리에 금비녀와 손가락의 금반지를 빼내어 내 손에 꼭 쥐어 주시며, 말씀 한마디 없이 길을 재촉하신 어머니, 황망 중에 병원에 모시지도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시게 한 큰 불효는 늘 바위덩이가 되어 내 가슴을 짓누른다.
카네이션 꽃이 만발하면 한 아름 안고 부모님 산소를 찾아가야겠다.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지난날의 불효를 빌고, 용서를 받고 싶다. 미련한 자식의 불효는 다 잊으시고, 평생 소망하시던 천국에서 두 분이 오순도순 영생 복락을 누리시도록 기도를 드려야겠다.
(2009. 3. 22.)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박귀덕
봄 햇살이 창가에 스며드는 어느 날 오후, 빛바랜 사진첩을 뒤적이다가 시선을 붙잡는 사진 한 장을 손에 들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산수유 나뭇가지가 노랗다. 벌써 봄이 왔나 보다.
1960년대 5월이면 김제시 진봉면 K교회에서는 카네이션 꽃을 접는 손이 분주했었다. 잔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고,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을 담아 정성으로 꽃을 만들었다. 여러 명이 한 방에 모여 종이를 접는 사람, 펴는 사람이 손을 맞춰 즐겁게 작업을 했다. 빨갛고 하얀 꽃에 파란색의 이파리를 달아주면 생화 못지않은 아름다운 꽃이 되었다. 그 때는 생화도 흔치 않았지만 돈도 귀했다. 그래서 정성들여 만든 카네이션은 어느 꽃 못지않게 귀한 대접을 받았다. 설교 시간에 L목사님이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게 된 유래를 말씀하셨다.
"미국에 안나라는 한 소녀가 살았다. 그 소녀는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깊었다. 추도식에 참석하신 친지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려고 왼쪽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렸다. 그 뒤 매년 5월 두 번째 일요일을 어머니의 날로 정하고 카네이션을 달고 그 날을 기념하게 되었다."
어머님이 살아계시면 빨강 꽃을, 어머님이 돌아가신 분은 하얀 꽃을 가슴에 달아드렸다. 자식들 뒷바라지에 거칠어지셨을 부모님은 까칠한 손으로 내 손을 덥석 잡고, 주름진 얼굴에 함박 웃음꽃을 피워 천국을 보여주셨다. 한 송이의 꽃이 정이되어 진한 감동으로 전이되었다. 400여 개의 꽃을 접느라 잠이 좀 부족했던 육신의 피로쯤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남을 즐겁게 해 준 것이 내 마음을 더욱 즐겁게 해 주엇다. 그 때는 부모님의 가슴에 꽃만 달아드려도 효도를 다 한 것처럼 흐뭇했었다.
골목길에서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두 분이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 세상 속으로 빨려든다.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지만, 다 늙어 자식들로부터 얻은 마음고생이 얼마나 크셨을까? 7남매의 탯줄을 묻은 너른 고향집을 등지고, 큰아들 따라 전주 경원동 철길 옆 허름한 집으로 오실 때의 서글픔은 얼마나 깊으셨을까? 발걸음은 얼마나 무거우셨을까? 세간을 들여 놓을 공간조차 없는 좁은 방에 갇혀 외롭게 사시다 가신 부모님이 생각나 눈시울이 붉어진다. 늘그막에는 고향에서 친구들과 정을 나누며 흥겹게 사셨어야 했는데, 자식들이 아버지의 고향을 앗아갔던 것이다.
아버지는 젊었을 땐 퍽 낙천적이셨다. 모든 일에 긍정적이셨고 부지런하셨다. 논이 많을 땐 11배미까지 일궈 놓으셨다. 그 좋은 논들을 자식들에게 다 나누어주시고, 나이 들어 빈손이 되셨다. 물려받은 재산을 지키지 못하고 고생만 하는 자식들을 지켜보면서 한숨만 짓던 아버지, 전주는 아는 친구가 없다며 양로당도 안 가시던 아버지, 할 일 없이 긴긴 하루를 사시며 세월만 보내시던 아버지, 낡은 대문 밖에서 서성이면서 막내딸을 기다리시던 아버지, 당신의 고단한 삶보다도 자식들의 힘든 생활을 걱정하시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속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면 아마도 새까맣게 다 타서 재가 됐을 것이다. 그래도 5월엔 효도를 한답시고 두 분 가슴에 꽃을 달아드리고 사진을 찍어 드렸었다.
시집간 막내는 부모님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걸 모르고 살았다. 효도는 오빠들과 언니들이 하는 것인 줄 알았다. 살아계실 때 좋아하시던 돼지고기를 한 번이라도 더 사다드리지 못하고, 어쩌다 큰맘 먹고 퇴근할 때 잠시 들러 오목이나 장기를 둘 때면 지기 싫어 몇 수를 물려달라고 생떼를 쓰면 허허 웃으시며 물려주셨다. 그렇게 말벗이라도 되어드리는 날은 몇 번이고 고맙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무엇이 고맙다는 말씀이셨을까? 미련하게 살아왔던 불효가 가슴을 아프게 한다.
어머니는 우리 집에서 손자들을 돌봐주고 계셨고, 아버지 혼자 외롭게 사셨다. 부모님의 생이별이 어떤 고통인 줄 그땐 철이 없어 몰랐다. 고향 친구들은 자식들에게 빼앗기고, 아내까지도 막내딸에게 빼앗기신 아버지는 외롭다는 말씀을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봄이 오는 소리에 삼천천의 얼음도 녹아 물이 되어 흐르는데, 내 가슴에 켜켜이 쌓인 불효의 덩어리는 서러움이 되어 저 세상에 가신지 28년이 지나도록 다 흘려보내지 못하고 가슴 가득 품고 있다.
자식 셋을 낳아 키우면서 원하는 걸 해 줄 수 없을 때 부모심정을 경험하고, 어머니로부터 받은 맹목적인 사랑을 딸에게 되돌려 주며 내가 저지른 불효를 확인한다. 늙어서 나를 낳아 놓고 돈 없어 가르치지 못할 때 미안해 하시던 어머니, 힘없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갖고 싶은 것, 해보고 싶은 일을 다 접고, 속을 태우면서도 부모님께 표현조차 하지 못하고 속울음을 우는 막내딸의 눈치를 살피시던 어머니,
"내가 널 예우고 죽어야 하는디……."
하시며 말끝을 맺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히시던 어머니가 막둥이 손자까지 다 키워주시고, 먼저 세상을 떠난 큰오빠를 뒤쫓아 가려고, 머리에 금비녀와 손가락의 금반지를 빼내어 내 손에 꼭 쥐어 주시며, 말씀 한마디 없이 길을 재촉하신 어머니, 황망 중에 병원에 모시지도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시게 한 큰 불효는 늘 바위덩이가 되어 내 가슴을 짓누른다.
카네이션 꽃이 만발하면 한 아름 안고 부모님 산소를 찾아가야겠다.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지난날의 불효를 빌고, 용서를 받고 싶다. 미련한 자식의 불효는 다 잊으시고, 평생 소망하시던 천국에서 두 분이 오순도순 영생 복락을 누리시도록 기도를 드려야겠다.
(2009. 3.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