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호/이신구
2009.03.30 04:01
아호(雅號)
전주안골복지회관 수필창작반 이신구
"어이 월곡선생, 어찌 주량이 시원찮아?”
"응, 엊그제 연일 좀 과했나 봐.”
오늘은 신사회 모임을 갖는 날이다. 나이가 드니 주량이나 식사량도, 만남 횟수까지도 줄어드는 게 아쉽다. 이젠 가는 세월을 막을 수 없는 게 현실이고 장사가 따로 없다는 말을 실감한다.
우리는 전주남초등학교에 재직할 때부터 띠동갑 네 명이 만나 술을 자주 마시곤 했었다. 그중 윤 주사가 먼저 정년을 맞아 송별식을 마치고, 자리를 옮긴 좌석에서 내가 먼저 안을 내놓았다.
“우리 모두 곧 정년인데 이렇게 헤어지면 어쩌나? 모임을 하나 갖는 것이 어떨까?”
그러나 모두 대답을 서로 미루고 말이 없었다. 한 직장에서 위계가 분명한데 교장과 교감, 교사, 기능직이 모임을 갖자니 망설이는 것이다. 한참 주저하던 교감이 입을 열었다.
“교장선생님 제안은 참 고맙습니다만, 윤 주사의 뜻에 따름이 좋을 것 같아요.”
이제 시선은 윤 주사에게 쏠렸다. 말없이 술잔만 기울이다가 게면쩍은 표정으로
“저야 감사할 따름 이죠.”
이렇게 해서 신사생(辛巳生)끼리 모여 신사회(紳士會)라는 명칭을 달았다. 벌써 10여 년이 지났지만 만날 때마다 ‘새롭게 사는 이야기, 세상이야기, 건강이야기’등 즐거운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담소를 즐기다 헤어지곤 한다.
그러나 만날 때마다‘교장 선생님’ ‘윤 주사’하는 호칭이 마음에 걸렸다.
“우리 나이도 60이 넘었으니 아호를 지어 부르도록 하는 게 어떨까요?”
“그거 좋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를 포함한 회원의 아호(雅號)를 지어와 불러보고 가장 좋은 호를 합동으로 정합시다.”
그래서 아호를 정하기로 한 날에는 장장 3시간이나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적정한 아호를 갖기로 했다.
아호는 원래 중국에서 전래되어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다고 하며 문인이나 예술가들이 서로의 이름 대신 댁호(宅號), 당호(堂號), 별호(別號) 등 칭호로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데서 연유했다지 않은가.
우리는 먼저 자신이 지어온 아호들을 설명하고 그 의미와 근거, 과정과 의도를 듣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K선생은 원래 많은 교직원들의 어두운 곳을 구석구석 보살펴 주는 달과 같은 존재였으니, 어두운 골짜기를 비추는 은은한 달빛 같은 넓고 밝은 성품을 기리는 뜻에서 월곡(月谷)이라 하고, S선생은 매사에 긍정적이며 남을 돕는 포시(布施)의 성격과 그릇이 크며 고향의 이름과 부합되기 때문에 두곡(斗谷)이라 정하면 좋겠고, W선생은 대나무 같이 굳은 지조와 올곧은 마음씨 그리고 항상 근면 성실한 모습에 일치되는 죽전(竹田)으로 정하는 게 제격이요. L선생은 고향이 보석리(寶石)요, 늙을 줄 모르고 변함없는 건강과 젊음을 지키며, 굳센 의지와 번득이는 지혜에 알맞은 석화(石花)가 알맞다는데 의견일치를 보아 아호를 확정하고 나서 서로 축배를 들었다.
그날부터 신사회는 회원 이름 대신 '아호'를 불렀다.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 할 이야기나 만담을 한둘씩 준비해 와서 회원을 제일 많이 웃기는 사람에게 술값을 면제해 주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로 정이 흠뻑 넘쳤다. 신사회는 만남의 횟수가 갈수록 더욱 돈독해지고 가끔 이 모임에 대해 궁금해 하는 후배들의 관심을 끌게도 되었다. 어떤 후배는 참석하여 술이라도 한 잔 같이하고 싶다는 청탁을 하면서 은근슬쩍 부러움을 나타냈다.
“어이 석화, 자넨 늙을 줄도 모르네. 점점 더 젊어지는 것 같아!”
“그런 소리 마소, 두곡은 이젠 됫술이 점점 말술이 되어가니 그 비법이 무엇인가?”
“월곡선생, 요사이 산행이 잦다며? 어지간히 올라 다녀. 밤낮으로 등산한다더니, 지난밤 꿈엔 월곡의 함성이 K2봉에서 들리데 그려.”
“죽전선생, 요사이 보약 먹는다는 소식이 들리던데, 좀 나눠먹고 같이 오래오래 살더라고."
띠동갑으로 만난 신사회는
"정말 신사답게 살자. 그리고 건강하며, 항상 웃음을 잃지 말자. 보다 젊게 살자. 오래오래 즐거움을 같이 나누자."
모두가 한 목소리로 우리의 모임이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마지막 술잔을 나눈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 아호를 한 번 더 소리 높이 부른다.
“월곡! 두곡! 죽전! 석화!”
(2009. 04. 04.)
전주안골복지회관 수필창작반 이신구
"어이 월곡선생, 어찌 주량이 시원찮아?”
"응, 엊그제 연일 좀 과했나 봐.”
오늘은 신사회 모임을 갖는 날이다. 나이가 드니 주량이나 식사량도, 만남 횟수까지도 줄어드는 게 아쉽다. 이젠 가는 세월을 막을 수 없는 게 현실이고 장사가 따로 없다는 말을 실감한다.
우리는 전주남초등학교에 재직할 때부터 띠동갑 네 명이 만나 술을 자주 마시곤 했었다. 그중 윤 주사가 먼저 정년을 맞아 송별식을 마치고, 자리를 옮긴 좌석에서 내가 먼저 안을 내놓았다.
“우리 모두 곧 정년인데 이렇게 헤어지면 어쩌나? 모임을 하나 갖는 것이 어떨까?”
그러나 모두 대답을 서로 미루고 말이 없었다. 한 직장에서 위계가 분명한데 교장과 교감, 교사, 기능직이 모임을 갖자니 망설이는 것이다. 한참 주저하던 교감이 입을 열었다.
“교장선생님 제안은 참 고맙습니다만, 윤 주사의 뜻에 따름이 좋을 것 같아요.”
이제 시선은 윤 주사에게 쏠렸다. 말없이 술잔만 기울이다가 게면쩍은 표정으로
“저야 감사할 따름 이죠.”
이렇게 해서 신사생(辛巳生)끼리 모여 신사회(紳士會)라는 명칭을 달았다. 벌써 10여 년이 지났지만 만날 때마다 ‘새롭게 사는 이야기, 세상이야기, 건강이야기’등 즐거운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담소를 즐기다 헤어지곤 한다.
그러나 만날 때마다‘교장 선생님’ ‘윤 주사’하는 호칭이 마음에 걸렸다.
“우리 나이도 60이 넘었으니 아호를 지어 부르도록 하는 게 어떨까요?”
“그거 좋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를 포함한 회원의 아호(雅號)를 지어와 불러보고 가장 좋은 호를 합동으로 정합시다.”
그래서 아호를 정하기로 한 날에는 장장 3시간이나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적정한 아호를 갖기로 했다.
아호는 원래 중국에서 전래되어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다고 하며 문인이나 예술가들이 서로의 이름 대신 댁호(宅號), 당호(堂號), 별호(別號) 등 칭호로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데서 연유했다지 않은가.
우리는 먼저 자신이 지어온 아호들을 설명하고 그 의미와 근거, 과정과 의도를 듣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K선생은 원래 많은 교직원들의 어두운 곳을 구석구석 보살펴 주는 달과 같은 존재였으니, 어두운 골짜기를 비추는 은은한 달빛 같은 넓고 밝은 성품을 기리는 뜻에서 월곡(月谷)이라 하고, S선생은 매사에 긍정적이며 남을 돕는 포시(布施)의 성격과 그릇이 크며 고향의 이름과 부합되기 때문에 두곡(斗谷)이라 정하면 좋겠고, W선생은 대나무 같이 굳은 지조와 올곧은 마음씨 그리고 항상 근면 성실한 모습에 일치되는 죽전(竹田)으로 정하는 게 제격이요. L선생은 고향이 보석리(寶石)요, 늙을 줄 모르고 변함없는 건강과 젊음을 지키며, 굳센 의지와 번득이는 지혜에 알맞은 석화(石花)가 알맞다는데 의견일치를 보아 아호를 확정하고 나서 서로 축배를 들었다.
그날부터 신사회는 회원 이름 대신 '아호'를 불렀다.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 할 이야기나 만담을 한둘씩 준비해 와서 회원을 제일 많이 웃기는 사람에게 술값을 면제해 주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로 정이 흠뻑 넘쳤다. 신사회는 만남의 횟수가 갈수록 더욱 돈독해지고 가끔 이 모임에 대해 궁금해 하는 후배들의 관심을 끌게도 되었다. 어떤 후배는 참석하여 술이라도 한 잔 같이하고 싶다는 청탁을 하면서 은근슬쩍 부러움을 나타냈다.
“어이 석화, 자넨 늙을 줄도 모르네. 점점 더 젊어지는 것 같아!”
“그런 소리 마소, 두곡은 이젠 됫술이 점점 말술이 되어가니 그 비법이 무엇인가?”
“월곡선생, 요사이 산행이 잦다며? 어지간히 올라 다녀. 밤낮으로 등산한다더니, 지난밤 꿈엔 월곡의 함성이 K2봉에서 들리데 그려.”
“죽전선생, 요사이 보약 먹는다는 소식이 들리던데, 좀 나눠먹고 같이 오래오래 살더라고."
띠동갑으로 만난 신사회는
"정말 신사답게 살자. 그리고 건강하며, 항상 웃음을 잃지 말자. 보다 젊게 살자. 오래오래 즐거움을 같이 나누자."
모두가 한 목소리로 우리의 모임이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마지막 술잔을 나눈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 아호를 한 번 더 소리 높이 부른다.
“월곡! 두곡! 죽전! 석화!”
(2009. 04.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