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그 독한 녀석

2019.05.24 17:33

이진숙 조회 수:3

감기, 그 독한 녀석

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이진숙

 

 

 

 

 요즘처럼 오랫동안 무기력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냈던 적이 없었다. 원인은 반갑지 않은 손님, 감기 탓이다. 벌써 감기가 나에게 온 지 보름쯤 된 것 같은데 이제야 꽁무니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냥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명색이 그림 그리는 사람인데 붓을 잡아 본 지가 언제인지…. 이젤에 올려 있는 미완성 그림은 도대체 언제나 완성이 되어 내려올 수 있을지, 읽다 말고 펴 놓은 채 구석에 팽개쳐진 수필집은 언제나 다 읽고 책꽂이에 꽂혀 질지, 매일 스마트 폰에서 ‘오늘의 목표를 달성했어요’ 하며 나를 격려하던 ‘만보’는 어느 때나 걸어서 채울 수 있을지, 수필가로 등단했다는 어설픈 실력으로 글 한 편 제대로 쓸 날이 언제일까?

 이렇게까지 모든 일에 심드렁해 보기는 처음이다. 병원에서 받은 처방약을 먹으면 시도 때도 없이 눈이 스르르 감기고, 내 생각과 상관없이 어느새 등이 침대와 한 몸이 되기 일쑤였다.

 지난겨울을 건강하게 잘 넘겼다고 여기저기서 얼마나 많은 자랑을 했었는데, 그만 계절의 여왕이라고 모두 호들갑을 떠는 이 5월에 감기에 딱 결려버렸다.

 처음에는 지난겨울 추위도 이겼는데 이까짓 감기쯤이야 하며, 수영장도 다니고 열심히 만보도 넘게 걸으며 호기 있게 버티기 시작했다. 감기라는 녀석도 만만치 않았다. 첫날은 많이 힘들게 하더니 둘째날부터는 슬그머니 나를 봐주는 것 같이 별일이 없어서 그냥 평소처럼 생활을 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평소 감기가 찾아오면 매번 완패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슨 배짱으로 반기를 들었을까?

 ‘밤이 무서워요’라더니 내가 딱 그 모습이었다. 곁에서 같이 자는 남편이 나의 끙끙대며 앓는 소리에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같이 뒤척이다 날을 새곤 했다. 아주 오래 전에 다니던 내과병원에서는 내가 조금 뜸하게 병원에 가면 오랜만이라며 인사를 건네곤 했었다. 그것도 일 년에 두어 번 이상을 감기로 병원을 들락거리며 링거주사를 맞곤 했었다. 그러다가 퇴직하고 이곳에 자리 잡고 생활 한 뒤로는 감기가 뜸했었다. 그렇다고 아주 떠난 것은 아니고 일 년에 한 번 정도만 와 주니 그것도 감지덕지였다. 작년 겨울에는 아무 소식이 없어 아주 영영 떠난 줄 알고 미리 여기저기 자랑을 했더니 괘씸죄에 결린 것일까? 더위가 오기 시작한 이때 감기가 찾아왔다.

 애당초 처음부터 융숭하게 대접을 했어야 했는데, 너무나 소홀하게 대접한 탓에 화가 났을까? 이렇게 오래도록 나를 꼼짝 못하게 하고 있으니, 오늘은 낮 기온이 섭씨 30도에 육박하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목에는 스카프를 두르고 제법 두툼한 조끼를 입고, 창문을 꼭꼭 닫고 지내고 있다. 몸에 닿는 바람이 차게 느껴진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남편은 ‘끌끌’ 혀를 차며 안타까운 듯이 바라본다.

 

 누군가 ‘감기는 병원에 가면 일주일, 그냥 있으면 7일이 지나면 자연히 낫는다’고 했다. 그런 감기가 보름 가까이 나를 잡고 있다가 이제야 서서히 놓아 주려나 보다. 아주 독한 녀석이다. 다시는 오지 않게 잘 대접해서 보내야겠다. 이제부터 정신을 차리고 그간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야겠는데, 욕심 같아서는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며, 책도 읽고, 마당에 나가 풀도 뽑으며 지내고 싶다.

 그간 차일피일 미루었던 ‘치매검사’도 받고, ‘사정연명의료의향서’도 만들려면 남편과 같이 보건소에도 가야겠다. 사람답게 살다가 나중에 인간의 존엄성을 간직한 채 최후를 맞고 싶다. 이제 나이를 먹어 가니 ‘치매’가 가장 무섭고 큰 병이라는 생각이다. 미리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대비하고 또 병들어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사람이 더 살고자 발버둥치는 모습은 사람으로서는 못할 일인 것 같다. 하지만 누구나 생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 역시 그 나이가 되면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일이 없도록 아직 판단력이 뚜렷할 때 미리미리 준비를 하자. 어느 분이 말하기를 ‘발 한 번 더 떼면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는데 열심히 마음을 닦으면서 살아야겠다. 내가 죽은 뒤에라도 내 자식들의 기억 속에 아름다운 엄마의 모습으로 영원히 남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것도 나의 지나친 욕심일까?

                                                      (2019.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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