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

2019.09.09 16:16

곽창선 조회 수:8

회상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곽 창 선

 

 

 

 

 태풍 링링은 희망에 부푼 농민들의 가슴에 재를 뿌렸다. 피해 현장을 시시각각 보여주는 TV가 야속했다. 적잖은 피해를 당해 시름에 젖은 허망한 눈빛들 때문이다. 농민들에게서  희망을 앗아가 버린 링링은 또 다른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밤새 비가 내렸다. 하늘빛이 우울하게 보인다. 이제 그만 내렸으면 좋겠다. 다가오는 풍요로운 가을 잔치에 재를 뿌릴 것 같은 염려에서다. 아파트 정원수와 건너편 숲은 여전하다. 다행이다. 역대 5위급이라 해서 혹 지난 매미처럼 산천을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건 기우였다.

 

 추억은 모두 아름다울 수는 없지만 싫건 좋건 떨칠 수 없는 자산이다. 세상사는 녹록치 않아서 사연 사연이 돌고 도는 술래놀이 같다. 참고 견디며 보다 나은 내일을 기다리며 산다. 항상 기대에는 못 미치지만 살아있는 한 시간은 모두 흐르고 찌꺼기는 뇌리에 남아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추억으이 된다.

 

 베란다에서 키우는 고추가 새롭게 보인다. 어깨를 맞대고 의좋게 붉어 가는 고추가 참 아름답다. 풍기는 매콤한 고추 향속에 지난 해 겪은 해프닝이 되살아난다. 오래된 추억은 아니지만 의미가 남다른 사연이다.  

 

 특별히 취미가 별로였던 아내에게 소일거리가 생겼다. 친구로 부터 우연찮게 받은 분재에 빠졌다. 관리가 어렵다는 멋진 소나무 분재를, 기본 상식도 없이 키우려 한 것이 무리였다. 모든 일에는 절차가 있는데 도외시하고 만 것이다. 결과는 실망으로 돌아 왔다. 10월 들어 시름시름하더니 보람도 없이 고사하고 말았다.

 

 낙심하는 아내가 쓸쓸해 보였다. 풀이 죽어 지내는 아내가 어쩐지 측은해 보였다. 위로한답시고 던진 농弄이 화를 부르고 말았다. 도화선이 된 농이 뒤엉켜 수일 마음을 졸여야 했다. 왜 하찮은 농에 저토록 섭섭해 할까? 내 마음도 섭섭하긴 마찬가지였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속 앓이 속에서 옛날 어머니가 말년에 자주 섭섭해 하시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몸은 늙고 병들어 찾아드는 우울함이 분출되곤 했었다. 어머니의 삶을 반추해 가며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기까지는 나의 성찰이 필요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베란다에서 오이와 고추를 재배하며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시큰둥하던 아내가 관심을 보였다. 아내의 정성에 오이와 고추는 잘 자라 이글거리는 복사열을 막아 주었고더위에 밥맛을 돋아 주는 도우미로 풋고추에 보리밥, 물과 된장이 어울리면 여러 반찬이 필요 없었다. 산이나 야외에서는 오이와 고추, 된장에 도시락 하나면 끝이었다. 오순도순 재미있는 여름을 이들과 함께 지냈다. 오이가 9월에 성장을 마치고 흉하게 말라비틀어져 잎과 줄기를 제거하니 빈자리가 허전했다. 고추도 11월 중순 섭섭한 마음으로 윗가지만 자르고 5cm 정도 밑둥지만 화분에 남겼다.

 

  겨우내 무심히 지내다가 3월 초순 베란다를 둘러보았다. 무심코 창가 구석에 놓인 화분에 눈길이 갔다. 둥지에서 봉곳이 파란 싹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지난 고춧대에서 잎이 피어나는 것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지나쳤다. 그런데 월말쯤 5-6cm정도 자란 잎에 고추가 열렸다. 아주 작은 고추라 신기하기도 했지만 기대는 없었다.

1.5cm 정도 크기의 고추를 따서 아내에게 주었다. 입으로 잘근 씹어 보던 아내가 '아!' 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청양고추 맛이라며 물을 찾았다.

 

 밑둥지에서 돋아난 고추나무에 쌀 씻은 물로 2-3일에 한 번씩 정성을 쏟았다. 좋은 조건 풍부한 일조량 속에 무럭무럭 자랐다. 잘 자란 고추는 열매도 크고 튼튼하게 맺혔다. 그렇게 열린 고추는 음식의 매운맛을 낼 때 사용한다. 당도 고추모도 잘 자라고 대를 이어 오며 내 입맛을 돋워주는 도우미다.

 

 찬바람이 일기도 전에 고추, 코스모스, 고추잠자리, 해바라기가 가을 소식을 전해 준다. 그 중 으뜸은 고추다. 7,8월 뙤약볕 담금질로 붉게 다진 몸으로 제일 먼저 우리 곁에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찬바람이 일면 성장을 멈추고 우리 곁을 떠나면 그만인 줄 알았다. 그래서 고추는 매년 새로 파종하는 것으로 지레 짐작했다. 그런데 고추도 관리만 잘하면 새로 파종하지 않아도 일반 과일처럼 지난 고춧대에서 고추를 수확할 수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두 지난해 아내와 아옹다옹하며 얻은 기쁨이다. 아름다운 나의 자산이 되었다. 가화만사성의 지름길은 여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인 성싶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상대를 배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누구나 나이 들면 마음이 여려진다고 한다. 더욱 여성은 심한 편이다. ‘고생했어, 사랑해, 고마워, 당신이 최고야.’ 등이 사랑의 메시지다.  립 서비스로 입에 달고 사는 방법도 하나의 길이라 생각한다. 큰 물질적 선물이 아닌 자상한 말 한 마디가 중요하다.

 

 아파트 따뜻한 야외 공간에 빨간 고추들이 널려 있다. 매콤한 단내가 코를 찌른다. 곧 김장의 주연으로 우리 입안에 다가 올 것이다. 검붉어 지는 가로수 잎에서 짙은 커피 향이 풍긴다. 올해도 고추 밑둥지만 남겨 두고 잘라 내야겠다. 3년차에는 어떤 고추가 열릴까 궁금해서다.

                                                                                (2019.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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