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2020.03.29 02:24

한일신 조회 수:21

때 그 시절

안골은빛수필문학회 한일신 

 

 

  오래전 일이다. 전주시 완산구 태평동에서 서신동 전룡리로 이사를 했었다. 이곳은 도심 변두리로 들판을 가로질러 논밭 길을 가다 보면 나지막한 집 4가구에 6세대가 사는 작은마을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등잔불을 켜고 살았지만 널따랗게 펼쳐진 들판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큰 동네에서 뚝 떨어진 이 마을은 집들이 모두 남향이었다. 대문을 꼭꼭 닫고 살던 태평동과는 달리 담장도 허술하고, 싸리문도 아무나 밀면 열어지지만 따스한 정이 흐르는 마음이었다. 도로 양쪽으로 2가구씩 나누어져 있었는데 한 쪽엔 인심이 후한 순덕이네 집과 두 손자와 사는 할머니네 집이 있었다. 다른 쪽엔 우리 집과 금순네 집이 있었는데, 그녀는 가수가 되려는지 우물가에 가면 담을 넘어 들려오는 맑고 청아한 노랫소리가 내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당시 10대 후반인 나는 왜 그리도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부러운 것도 많았는지 모른다. 그런 가운데 미나리철이 되면 미나리를 다듬으러 다니는 사람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부모님은 농사일로 바쁘시기에 집안일은 온통 내 몫이었다. 집에 혼자 있자니 답답해서 뭔가 새로운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도 어떻게 해야 미나리를 다듬어 돈을 벌 수 있을까(?) 궁리를 하다 마침 기회가 왔다.

 

 어렵게 길은 텄지만 남의 일이라고는 해본 경험이 없는지라 막상 나서려니 걱정이 되었다. 새벽밥을 먹고 용기를 내어 옆집 아줌마를 따라나섰다. 이제부터는 홀로 서야 했다. 마음을 굳게 먹고 일하러 나온 아줌마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옆 사람 하는 걸 눈여겨보면서, 다듬어놓은 미나리 한 다발을 손에 쥐고 두어 번 쥐었다 폈다 하면서 양을 가늠해보았다. 그런 다음 미나리꽝에서 얼음을 깨고 갓 올라온 푸른 미나리를 한 움큼 집어 들고 일을 시작해 보았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손발이 어는 듯한 영하의 날씨에 곱은 손을 펴가며 어렵사리 다듬어놓은 미나리를 거두어가면 누런 잎을 덜 땄다고 야단치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했다. 다들 아무말 없이 자기 할 일만 하지만 그게 누구 솜씨인지 나는 안다. 깜냥에 아무리 한다고 해도 초보가 무슨 수로 선수들처럼 해낼 수 있겠는가? 마음이 무겁고 몸도 고달팠지만, 하루 일이 끝나면 바로 품삯을 주는데 얼마나 기쁘고 뿌듯했는지 모른다.

 

 그 시절 잊히지 않는 게 또 있다. 동네는 작지만 인심이 넉넉해서 초가지붕이 새옷으로 갈아입는다거나, 제사 때, 김장 때 등 무슨 일만 생기면 어김없이 오라고 불러댔다. 그중 김장하는 날이 제일 반가웠다. 그날은 부르기가 바쁘게 한걸음에 달려갔다. 쌀밥 먹기가 소원이었는데 따뜻한 쌀밥에 호호거리며 걸쳐 먹던 김장김치 맛이 어쩜 그리도 맛이 있던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 맛이 입안에 감돈다. 지금이야 TV와 인터넷을 활용하기도 하고, 직접 요리강사에게 배워 갖은 양념을 넣어보기도 하지만 그때 그 맛은 나지 않는다. 아무리 김치 냉장고가 좋다지만 땅속에 묻혀 자연 숙성된 그 맛에 어찌 비할까?

 

 인생은 배우면서 사는 건가 보다. 누구라도 무슨 일을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나름대로 경험을 쌓아야 조금씩 발전해갈 수 있지 않을까? 가진 것이 없던 내가 남의 돈을 좀 벌겠다고 나섰다가 돈 벌기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뭐든 자기가 겪어보고 당해봐야 안다는 말이 새삼 떠오르며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하찮아 보이는 ‘작은 씨앗 하나에도 많은 것을 품고 있듯’ 나도 이곳에서 3년남짓 지내면서 고통을 참는 것과 삶의 지혜를 배웠다. 이는 분명 내 삶의 소중한 자양분이 되어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으며 큰 동네로 이사를 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못 잊는 그 작은마을은 언제부터인가 아파트에 자리를 내어주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코로나19 때문에 사회적 거리를 두라는 요즈음 온 가족과 이웃이 한데 모여 정을 나누며 살던 그때 그 시절이 한없이 그립다.

                                                   (2020.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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