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트럼펫의 의미는

2020.07.03 17:38

구연식 조회 수:33

나에게 트럼펫의 의미는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구연식

 

 

 현대 문화인은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악기를 하나도 다룰 줄 모르니, 현대인에서 제외된 느낌이 든다. 예능은 타고난 끼를 탓하기 전에 본인에게 주어진 예술적 감각을 최선을 다해 발휘할 때 오히려 순수예술이라고 본다. 일생 동안 어느 사례를 통하여 가슴 깊었던 예술적 체험사례가 여러 번 있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바로 실천에 옮기지 못하면, 의욕만 앞세우고 허황한 자기 예술성을 과시하는 자화자찬 격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

 

 금마초등학교에 입학하니 음악 시간이 그리도 좋았다. 음악 시간에는 교무실에서 당번이나 힘센 남학생들이 풍금을 교실로 운반하거나 학교 용인 아저씨가 옮겨주셨다. 하얀 건반을 담임선생님이 손가락으로 누르면 풍금은 음악책 악보를 언제 다 외웠는지 동요를 잘도 부른다. 음악 시간이 끝나고 잽싸게 풍금 쪽으로 달려나가 아무리 만져보고 훑어보아도 딱딱한 나무상자인데 신비할 뿐이었다. 음악 시간이 끝나면 그리도 아쉬웠다. 어쩌다가 다른 반 음악 시간이면 복도에서 서성거리면서 풍금 소리에 매료되어 쉽게 교실로 들어오지 못하여 여러 번 담임선생님한테 꾸지람도 들었다. 지금도 낡은 풍금을 보거나 풍금 소리를 들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풍금을 어루만져보거나 풍금 연주가 끝날 때까지 들으면서 초등학교 음악 시간의 추억에 사로잡히곤 한다. 내가 풍금을 칠 줄은 몰라도 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어느 날 시골집에 갔더니 셋째 매제가 헌 풍금 하나를 시골집 허청에 갖다 놓았다. 나는 하도 반가워서 뚜껑을 열고 건반을 눌러보니 여러 가지 기능이 약화되어 둔탁한 소리를 내는데도 좋았다. 풍금 하면 즐거운 학교 그리운 친구들이 떠오른다.

 

 중학교 때 초겨울 무렵이었다. 금마시장 장터에 서커스 공연단이 들어왔다. 밖에는 공연할 서커스 종목과 연극 내용을 소개한 대형 포스터가 여러 장 걸려있었다. 발동기 전원으로 켜 놓은 백열전구에 떨어지는 하얀 눈이 고즈넉하게 보였다. 피에로 아저씨는 원숭이 목줄을 잡고 재롱을 보여주고 또 다른 아저씨는 트럼펫을 불면서 서커스 공연이 곧 임박했으니, 입장하여 구경하라는 분위기를 띄웠다. 나는 어머니를 졸라서 얻은 돈으로 공연장에 들어가니, 멍석 같은 곳에 사람들이 앞에서부터 옹기종기 앉아있었다. 처음 본 원숭이가 줄을 잡고 시키는 아저씨의 눈치를 보면서 재주를 부렸다. 얼굴은 사람 같고 크기는 어린애 같아 집에 있는 동생이 생각나서 불쌍하기만 했다. 천막 꼭대기에서 줄을 타는 곡예사 누나와 형이 처량한 트럼펫 소리에 묘기를 보여 재미있다기보다는 애처롭다는 느낌이 꽤 오래 가슴에 머물렀다. 그래서 트럼펫 소리는 무서운 회초리로 어느 약자를 억압하고 강요하는 채찍으로 남아있다.

 

 고등학교 때는 전주시내 공보관 사거리(우체국, 상업은행, 육서점, 공보관)가 가장 번화가였다. 그 당시 공보관에서는 토요일 오후에는 외화(外畵)를 무료로 상영해 주어서 나와 같은 학생들에겐 유일한 문화 혜택의 장소였다. 공보관 사거리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거리의 악기점에서 캐럴이 나오는 것처럼 일 년 내내 음악이 그치지 않았다. 그중에서 영화음악 생과 사의 주제곡 방랑의 마취는 시원한 트럼펫 연주로 공보관 사거리를 압도했다. 풋풋한 연인처럼 가슴에 다가와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용서할 수 있는 용기와 너그러움을 주었던 청순한 에너지의 트럼펫 연주였다. 그때부터 트럼펫 연주는 공포의 채찍에서 기쁨과 사랑의 천사로 무엇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나의 혼을 빼가는 친구가 되었다.

 

 대학 다닐 때 친구 중에는 전축과 고전 레코드판이 집에 있는 친구가 있었다. 휴일이면 염치 불고하고 꾸역꾸역 찾아가서 전축 음악 중에서 미국 흑인 재즈 가수로 산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며 트럼펫 연주의 독보적인 존재, 루이 암스트롱의 성자의 행진에 빠졌었다. 내가 가면 친구 어머니는 으레 전축 있는 방을 열어주실 정도로 익숙해졌다.

 

 그 시절 하숙집 뒤에는 작은 호수가 있었는데 여름밤이면 주민들은 피서지 호숫가에 모여드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그런데 조금 늦은 밤이면 어느 음대생의 트럼펫 연주가 가슴을 설레게 했다. 언제나 서곡(序曲)으로는 그 당시 유명했던 라디오 연속방송극 열두 냥짜리 인생주제곡을 시작으로 밤하늘의 트럼펫등 영화 주제가, 팝송 그리고 클래식까지 연주하여 처량한 트럼펫 소리는 호수의 물결을 튕겨서 은하수까지 솟아오르면 주민들은 뒷창문을 살며시 열어 놓고 세레나데로, 어머니의 자장가로, 병사들의 취침 나팔로 각자 취향에 젖어 잠을 청했다. 나는 그때부터 시간과 재정적 여유가 생기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트럼펫을 사고 배워서 열두 냥짜리 인생을 연주해보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트럼펫은 지금까지 만져보지도 못했다. 지금도 청량한 트럼펫 연주 소리는 나의 심신의 노폐물을 쓸어내어 신천지로 나르는 기분이다.

 

 인간 처음의 감정은 충격적이고 오래가지만, 그 감정이 여러 번 거치면 느슨해지고 무뎌져서 그 감정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도 게을러지는가 보다. 이처럼 그렇게 좋아하면서 불기는커녕 만져보지도 못한 트럼펫의 연주는 나의 삶 속에 때로는 우울한 숲을 걷어 내고 쨍쨍한 햇빛과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어 주어 삶의 낭만을 되살려 준다. 그런데 동생은 체신관서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나서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색소폰 학원에 등록하여 제법 연주도 잘하고 있다. 소심한 내가 밉고 동생이 한없이 부러웠다. 아파트 옆 라인에 사는 손자는 시간 있을 때마다 우리 집에 와서 피아노 건반을 할아버지 가슴이 뻥 뚫리도록 두드려 주어 트럼펫의 앙금을 씻어주고 있다. 언제 시간이 흐르면 동생의 색소폰과 손자의 피아노 합주로 열두 냥짜리 인생방랑의 마취를 듣고 싶다. 그렇지만, 이제라도 나도 트럼펫을 사서 도레미파라도 연주해 보고 싶다.



                                                                          (202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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