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05 02:21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김효순
얼마만큼 머물다가 때가 되면 제가 알아서 떠날 줄 알았다. 지난겨울 느닷없이 눈을 맞으면서 쳐들어왔던 그들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여태껏 뭉그적거리고 있다.
어느 새 봄꽃 진 자리에서 올라온 잎들이 우거져
푸르디푸른 여름이 왔는데도.
염치없는 손님이 주인 애타는 속도 모르고 그냥
눌러앉기라도 하려는 걸까? ‘코로나19’ 말이다.
올해는 서울에 사는 시누이가 칠순이고 시동생은 회갑인 해다. 이 어려운 시절에 몸을 움직여 서울까지 가는 것이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냥 지나칠 수도 없어서 큰 맘 먹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어쨌든 기차에 오르니 모처럼 떠나는 여행이라서인지 슬그머니 설렘이
피어났다.
차창밖에 펼쳐지는 산하대지에는 온통 초록이 물결치고 있어서 눈이
시원했다. 모내기철이 한참 지난 논에서는 땅 맛을 들인 모들이 제법 짱짱해
보였다. 시골 태생이었는데, 도시사람으로 살아온 세월이 거기서 살았던 날들보다 두 배가 넘었지만
여전히 논밭에 심어진 작물들에게 먼저 눈길이 간다. 그 속에서, 젊은 농부였던 내 부모님을 찾아내고, 기어이 그리움이라는 감정도 소환해
낸다. 그 단어에 기대 눈가가 촉촉해져 보기도 하고. 은근히 또는 느긋하게 이런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가득 찬 기차 안은 사람들의
말소리는커녕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듯했다.
기차가 얼마쯤 달려갔을까. 좀 지루하다 싶은 순간 옆자리에 앉은 젊은 여인이 가방 속에서
화장도구들을 꺼내느라 딸그락거렸다.
그 소리가 꽤나 크게
들렸다.
여자는 몇 가지 기초 화장품을 바르더니 분칠을 시작했다. 썬 크림과 분가루가 혼합된 제품을 얼굴에 쓱 한 번 문지르면 끝나는 나의 화장법과는 달랐다. 우선 세 가지 이상의 분을 발라서 얼굴을 계란껍질처럼 매끄럽게 만드는데 공을 들였다. 분첩으로 여러 번 볼을 두드리니 분가루가 얼굴에 고루 퍼져서 그녀의 싱싱한 피부는 더 곱고 자연스러워졌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신기하고 예뻐 보여서 창밖을 보는 척하면서 연신
훔쳐보았다. 그런데 그 작업이 좀처럼 끝나지 않고 길어지자 슬슬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화장하는데 5분이면 충분한 내 눈에는 이 여자가 하고 있는 것은 화장이 아니라
분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벙어리가 되어 있는데,
마스크를 벗어놓고 그러고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덜컥 염려 섞인 조바심이 일어났다.
문득 이것은 쉽게 끝낼 수 있는 작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참을성 없는 내 입이 말릴 새도 없이 출동하고 말았다. 꽤 힘이 들어간 발음으로, 아마 가시도 돋쳤을 것이다. 말이 입술 밖으로 툭 튀어 나갔다.
"저기요~ 내가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정성껏 눈화장을 하던 여자가 한 쪽에 밀쳐두었던 마스크를 얼른 다시
귀에 걸었다. 그러고도 여자의 분장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나는 서울에 다녀온 지 몇 날이 지난 지금도 그 어린 사람에게 기어이
모진 말을 해 버린 내 입술을 탓하고 있다.
"코로나 19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202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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