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된 펠러 서방
                                        조옥동/시인
보스턴에 사는 큰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늘 그렇듯 씩씩하고 밝은 목소리였다. 전화를 제 남편에게 건네는가 싶더니 갑자기 “마미, 마미가 할모니가 되었어요.” 사위의 서툰 한국말이 들려왔다. 할머니든 할모니든 기쁘기만 하다. 처음 할미가 되는 일이 이렇게 기분이 좋다니 내 상상 밖이다.

마켓에서 할머니라 부르면 속상하여 물건도 안사고 뒤돌아섰던 내가 냉장고에 붙여 놓은 손자 사진 앞에서 시시로 ‘이 녀석아 내가 할머니야. 네 할미.’하고 확인이라도 받을 듯 말을 건다. 외손자의 사진 앞에 서서 남편은 한 술 더 뜬다. “여보, 내가 원일이 발가락을 간지럼 피니 이 녀석이 웃어. 이리 와 봐요.” 실제로 외손자의 맑은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날이 손꼽아 기다려진다.

35세 전에는 결혼하겠다던 큰 딸은 부모와의 약속을 지키려는 듯 그해 이른 봄 남자 친구를 인사시킨다며 동부에서 날라 왔다. 딸의 남자 친구는 우리를 앉으라 하더니 무릎을 꿇고 방바닥에 닿도록 ‘안뇽 하세요?’ 하며 한국식 큰절을 한 후 파란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여자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조차 절을 한다더니 그는 수시로  쪽지를 꺼내 들고 한국말을 연습하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두 사람의 사랑을 확인하고 여름엔 L. A에서 약혼식을 갖고, 그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고풍스런 보스턴의 유적지를 빌려 결혼식을 올렸다.

특별히 한국 전통혼례를 고집한 그들을 위해 한복과 사모관대는 물론 폐백음식 등 보따리 여럿을 비행기에 실었다. 911 테러가 발생하고 2년이 지난 후인데도 공항의 안전검색이 심한 때라 진땀을 빼야 했다. 자손만대로 번영과 윤택한 생활을 누리라는 의미로 폐백음식엔 열매가 풍성한 대추와 밤, 은행 그리고 육포 등을 쓰고 있다. 시댁어른들로부터 넓게 펼친 치마에 대추를 그득 받은 딸은 물론 신랑도 벙글거리며 좋아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의 하나가 자식의 일이라 했던가. 아이들이 늦기 전에 결혼만하면 걱정이 없을 줄 알았다. 결혼하고 만 삼 년 만에 삼남매를 거듭 출산한 이 어미는 손자손녀를 보는 일은 걱정도 안했었다. 딸 내외도 아기를 여럿 날 줄 믿었다가  유산을 거듭하고 초조해졌다. 5년이 지나고 시험관 아기를 몇 번 시도하다 생각을 바꾸어 입양을 추진하고 있었다.
  
양부모가 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2년여 만에 결연기관을 통해 지정된 아기의 사진 한 장을 올 초에 받게 되었다. 파란 눈의 예비아빠는 아내를 닮은 한국아이를 원하고 소원대로 7월4일에 첫돌이 되는 사내아이를 입양하게 되었다. 저들은 사진을 받자마자 흥분이 되어 전화를 했던 것이다. 핸드폰에 사내아기의 사진도 보내왔다. 핏줄이 당기 듯 단 번에 사랑이 왈칵 쏟아졌다. 예비엄마아빠의 요청으로 남편이 지은 첫 손자 이름은 원일 펠러 이다. 원일이가 외로울 테니 동생 둘을 더 입양 하려는 딸 내외의 희망이 성취되기를 빌어본다.  

어머니날 무렵 뉴욕에서 잠시 다니러 온 작은 딸이 물었다. 제 고모부들을 ‘이 서방’ ‘최 서방’이라 부르는 아빠에게 형부를 ‘펠러 서방’이라 부르면 안 되느냐고. 그래, 진즉 그 생각을 못했을까.  파란 눈의 사위, 펠러 서방이 이제 아빠가 되고 처음 아버지날을 맞는다. 우리 내외도 고대하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되었고.

미주중앙일보'이 아침에' 2010년 6월10일(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