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유혹 / 석정희

2006.01.10 02:52

석정희 조회 수:143 추천:5

어떤 유혹 / 석정희


나뭇가지가 축 처질정도로 대롱거리는 열매가 탐스럽다.  배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는 열매들이 어느새 황금색을 띄우기 시작하는 걸 보면 가을의 문턱에 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해마다 이맘때면 푸르던 지난여름이 떠오른다.  앞마당 장독대 옆에는 배나무 한그루가 서있었다.  아버지께서 애지중지 하시던 나무였다.  봄에는 하얀 꽃들이 뭉텅이로 피어나고 추석 무렵이면 노랗게 익어가는 열매들이 장관을 이룬다.
  아버지는 열매에 절대로 손을 대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익을 때가 돼야만 당도가 높아져서 맛이 든다며 그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까치나 까마귀가 와서 쪼아 먹는 것을 막기 위해 봉지를 만들어 씌워놓기도 하셨다.  어린 마음은 마냥 기다릴 수가 없었나보다.  색깔은 아직 푸른색을 띄우고 있지만 열매는 벌써 어른의 주먹만큼 크게 자라있었다.  하나를 따서 먹어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 많은 열매 중에 하나쯤 따먹는다고 해서 금방 표시가 날 것 같지도 않았다.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많은 나뭇가지와 잎사귀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부분에 유난히 크게 보이는 열매 하나를 점찍어 두었다.  이제 따느냐 마느냐의 최종 결정만 내리는 일만 남아있는 셈이었다.
   열매에 손을 대려면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고 포기를 하자니 나의 침샘은 마를 것 같지가 않았다.  딸까 말까.  나의 욕망을 자제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당장 하나를 따서 덥석 깨물어 봐야만 해결이 될 것 같았다.  마치 금단의 열매 앞에서 사탄의 꼬임을 받으며 갈등을 하고 있는 격이었다고나 할까.
그 먹음직스러운 노란 열매, 한 입 덥석 깨물게 되면 달디 단 과즙이 줄줄 흘러내릴 것만 같은 유혹.  이를 어떻게 뿌리칠 수가 있을까.  하나님의 피조물로 태어난 아담도 이브도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였는데 수십 개나 되는 열매 중에서 하나쯤 따 먹는 것을 이렇게 망설여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이런 것 하나 때문에 천벌이라는 이름의 엄청난 벌을 받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이딴 열매하나 때문에 하나님도 아닌 아버지로부터 쫓겨날 만큼의 큰 죄가 될 것 같지도 않았다.  참을성의 한계는 나에게 더 이상의 기다림을 허락하지 않았던가보다.
   뚝 하고 꼭지가 떨어지는 소리는 나의 침샘을 더욱 자극시켰다.  한 입 써억 베어 문다.  과즙이 아래턱에까지 흘러내린다.  완전히 익었을 때만큼은 달지 않았고 약간은 비릿하고 떫은맛도 없지 않았지만 나의 욕망을 일부분일망정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충족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한 달만 기다렸다면 그야말로 맛있는 햇과일의 맛을 즐길 수가 있었을 텐데.  아버지는 왜 기다려야 한다며 손도 대지 못하게 하셨는지를 알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금단의 열매를 두고 하나님께서 이르신 말씀과 비유를 해 보기도 한다.  
   어찌 보면 별로 대수롭지도 않은 욕구 같은 것에도 참으며 기다리지 않다가 모습을 망가트리기도 했던 생각이 떠오른다.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저절로 채워지기를 바라지는 않았던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걷다가 다리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피로에도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던 나.  
이런 정도의 보잘 것 없는 인내심으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
   고독이라는 것도, 그리움이라는 것도 속으로 삭이며 기다릴 줄을 알았어야 했다.  벌떡 일어나 서둘러 달려간다 해도 거기에는 나의 그리움이나 고독이라는 것을 완전히 메울 수 있는 아무 것도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우쳤어야 했다.  나 자신이 스스로를 다스리는 방법부터 배워뒀어야 했을 것이다.  잠 못 이루는 이 밤.  그리움을 달랠 수 있는, 고독을 메울 수 있는 또 다른 조그만 공간이라도 찾았으면 좋겠다.  그래도 찾을 수가 없다면 꿈속에서라도 찾아 헤매야 할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