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 석정희

2006.01.10 02:53

석정희 조회 수:99 추천:3

기다림 / 석정희


   비가 내린다.  가을비다.  추석이 지나고 구월도 하순에 접어들었다.  나무의 이파리들은 아직도 파란 색을 간직하고 있지만 살갗을 스치는 바람은 서늘하다.  이런 때 누군가가 찾아와 주었으면 좋을 것 같다.  여럿이 모여 수다를 떠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누구이든 간에 단둘이 마주 앉아 한 잔의 따끈한 차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여학교 때 친구여도 좋고 글 모임에 나오는 문우여도 좋겠고 교우여도 좋을 것 같다.  많은 대화는 없더라도 그냥 바라다보고만 있어도 좋을 것 같다.
   삶을 살아오면서 혼자였던 것이 싫었는지 좋았는지도 분간하지 못한 채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   무엇을 위해, 무엇을 바라다보며 걸어왔는지 생각을 해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다.  앞으로의 가야할 길에 대한 비전도 보이는 것 같지가 않다.  어찌 보면 완전히 나 자신의 의지에 의하여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그저 어쩌다 세상이라는 데에 달랑 떨어져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그나마 존재라는 의미를 느끼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마음은 왜 이렇게 조여지고 있는 것일까.  아무도 와줄 것 같지도 않은 이 밤.  나는 불 꺼진 창밖만을 내다보고 있다.  달빛에 비치는 나무 그림자에 눈을 고정시킨다.  가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여보기도 한다.  찾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리번거리고 귀를 기울이고 있다니…….  행여나 누군가가 나를 찾아온 것은 아닐까 해서일까.  그런데 나는 지금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찾아와 주겠다는 누군가와의 약속이라도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텅 빈 가슴을 무엇으로든 간에 채워보겠다는 안간힘일까.
   혼자인 것이 허전하다거나 외로운지조차도 모른 채 걸어온 지난 시간들.  세상물정, 차라리 그런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을 때가 좋았던 것 같다.  철이 없던 때였다고나 할까.  지금이라고 해서 철이 들어 그런 걸 완전히 알게 되었고 충분히 적응할 줄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부딪히는 모든 일들이 힘겹기만 한 현실 앞에 맥이 풀리고 있는 자신이 답답하기만 하다.  철없이 헤매던 때는 외로움 같은 것을 느낄 틈도 없었다.  고민 같은 것으로 시달림을 받지도 않았던 것 같다.  필요를 채워주고 보호막을 쳐주던 부모님 슬하에 있을 때는 책임이라는 짐 같은 것을 지지 않아도 됐었다.  외로울 때면 말벗을 찾아 나설 수도 있었고 고민거리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 걸까.
   세월은 많이도 흘렀다.  빠르기도 하다.  단발머리에 하얀 옷깃을 세우던 시절엔 조잘대는 즐거움만으로도 외로움 같은걸 느끼지 못했었다.  캠퍼스의 나무그늘 아래서 오일 컬러로 캔버스의 하얀 여백을 메워 나갈 때는 꿈이라는 것도 있었던 것 같다.  꿈이라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반복과 시간이 흐르다가 어느 시점에 다다르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 정도로만 생각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캔버스에 컬러를 입혀나가다 보면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고 바탕의 흰색 공백이 없어지는 것처럼 꿈이라는 것도 그렇게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나는 내가 혼자라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주위의 머릿수만으로 내가 혼자라거나 외로운 존재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일로 ‘인간은 나면서부터 독립된 인격을 가지고 있다’라거나, 이러한 개체가 모여 조직이나 집단이 형성되고 사회나 국가도 이루어진다는 것, 아니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 운운하는 식의 골치 아픈 논리를 펼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석가모니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을 나의 ‘혼자’라는 입장에 대입해 볼 생각은 더더구나 없다.  그러나 나는 혼자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니 외로울 수밖에.  그것도 먹을 만큼 먹은 이 나이에도 허전함과 외로움에 밤을 설치고 있으니.
   아침이 밝아오면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지금의 이 ‘고독이라는 병’은 흔적도 없이 지워지겠지.  시간이라는 것은 병도 되고 약도 되는가보다.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에는 고독이라는 병에 시달리다가 아침이 되어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면 삶이라는 전쟁을 대비해야할 임전태세를 갖추어놓아야 하니…….
그런데 왜 이렇게도 허전한 마음이 들고 있는 걸까.  누군가가 꼭 와 줘야만 할 것 같은데 아직 아무런 기척도 없고.  어느 누구 하나 찾아줄 것 같지가 않은 이 시간,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차라리 누군가를 찾아나서야 할라나 보다.  허탕을 치고 되돌아오게 될지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