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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작사가들의 신앙과 생애

2010.09.17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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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작사가들의 신앙과 생애 / 작성자 : 황성웅



우리 찬송가의 뒤쪽을 보면 여러 종류의 목차가 있는데, 그 중에 작곡가, 작사인들의 이름이 알파벳순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있다. 이름과 시대, 그리고 해당되는 찬송 번호가 차례대로 적혀 있는 것이다.

그것에 의하면 우리 찬송가에 가장 많은 찬송이 실린 사람은 미국의 Lowell Mason (총 23편)이며 그 다음은 Fanny J. Crosby (총 22편), William H. Doane (총 16편), Isaac Watts (총 16편), Charles Wesley (총 16편)의 순서이다.
Fanny J. Crosby는 역사상 가장 많은 찬송가사를 작사했는데, 8,000편 이상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Watts와 Wesley는 영국의 대표적인 영국 찬송 작사자로 Watts는 650편을 남겼고 Charles Wesley는 6,500편을 작사했다. 그런데 Wesley에게는 역시 찬송가에 대해 관심이 많은 형이 있었는데, 그는 독일 등의 여러 찬송을 많이 번역하였고, 자기 자신의 찬송시도 많이 작사하였다. 아마도 역사적으로 Wesley 형제처럼 같은 거룩한 사업에 형제가 종사하였을 뿐더러 둘 다 존경받은 작사자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여기에 그중 대표적인 인물인 찰스 웨슬리와 크로스비의 생애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보자.


*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1707~1788)

"형제는 용감하였다"
20세기의 마지막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해결해야 할 커다란 문제 중의 하나가 바로 인구 문제이다.
이 부분에 관한 한 사무엘 웨슬리와 그 부인 수산나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들은 19명의 자녀를 낳았기 때문이다. 이 기록은 아마도 기네스 북의 기록에 근접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또 하나 기록적인 사실은 수산나의 신앙과 인내로 양육 받은 자녀들 중 9명이 근대 교회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2명의 인물은 감리교 창시자인 형 요한 웨슬리와 18번째로 태어난 찰스 웨슬리이다.

이들은 종교 개혁에 있어서 매우 커다란 사명을 감당했다. 당시 개혁 운동을 시작했고 그 뒤를 따르던 웨슬리의 형제들과 추종자들은 영국 국교회의 강력한 배경을 가진 자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박해를 받았다. 이때 웨슬리의 찬송은 용기와 위로, 그리고 큰 기쁨과 능력을 줄 수 있었다.

그의 찬송은 이런 곤고할 때에 대단한 활력소가 되었다.
찬송은 어려울 때 큰 힘과 능력이 된다. 루터가 그랬고 웨슬리가 그랬다. 초대 교회의 서머나 감독 폴리캅도 화형을 당할 때 우리 찬송가 2장 "성부 성자 성령께"를 태연하게 불렀다 한다.

로마시대의 대 박해 때에도 성도들은 이 찬송을 부르며 힘을 얻었고 순교를 기쁘게 받아 드렸다 한다. 물론 라틴어로 되기 전의 이 가사는 헬라어였다.
찰스 웨슬리는 81세의 일기로 세상을 뜨기까지 6,500여수의 찬송시를 지었다.
그의 많은 찬송시들은 감리교의 독특한 교리를 잘 드러내어 감리교 신앙 부흥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브리스톨에 근거지를 두고 평생을 목회, 순회전도, 종교개혁과 빈민 구제, 찬송시를 만들면서 보냈다.

영국 국교의 모진 박해 속에서도, "더럽고 지저분한 감리교도"라는 모욕적인 칭호를 받는 가운데서도 웨슬리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좋은 찬송 시를 많이 지어냈다.
그의 찬송 시에 멘델스존을 비롯한 많은 훌륭한 음악가들이 곡을 붙여 오늘도 우리가 기쁘게 부르고 있다. 아쉬운 점은 Charles Wesley의 많은 찬송 중에 16편밖에 찬송가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그의 업적과 중요성을 바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어로 된 영적인 힘과 미를 번역된 상태로는 충분히 감상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주는 살아 계시니", "만 입이 내게 있으면", "만유의 주 앞에", "하나님의 크신 사랑", "비바람이 칠 때와"와 같은 우리가 잘 아는 찬송은 물론이고 그 외에도 많은 시들이 있다.


* 크로스비 (F. J. Crosby)

우리 찬송가에는 아멘을 제외하고 550곡의 찬송이 수록되어 있다. 한 곡 한 곡이 시대를 거쳐오면서 검증되고 엄선된 곡들이다.

그 가운데서 크리스쳔들의 가슴을 울리며 굳건한 믿음을 지키게 한 찬송가 「나의 갈 길 다 가도록」(434장)의 작사자 프랜시스 제인 (화니) 크로스비(Frances Jane "Fanny" Crosby, 1820-1915)는 1820년 3월 24일 미국 뉴욕주 푸트남(Putnam County)의 사우드 이스트에서 태어났으며, 1915년 2월 12일 아침에 코네티컷주 브릿지포트(Bridgeport)에서 95세로 일생을 마감하기까지 무려 9,000여 편에 이르는 불멸의 찬송시를 남겼다.

크로스비는 영국의 해버갈(F.R.Havergal)과 더불어 찬송가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업적을 남긴 대표적인 여성 작사가다. 해버갈은 불과 42세라는 짧은 생애를 사는 동안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나의 생명 드리니(348장)를 비롯한 100여 편의 찬송시를 썼다.

크로스비도 정상인이 아니었다. 맹인이었다. 그녀의 눈이 멀게 된 것은 무책임한 약사의 처방 때문이었다. 그녀가 생후 6주 되던 갓난아기 시절, 감기로 인해 눈언저리가 붉게 부어오른 것을 약사는 겨자를 갈아서 눈에다 바르라고 처방한 것이다. 그 집 식모는 겨자를 뜨겁게 하여 눈에 발라주었으며, 이로 인해 크로스비는 영원히 앞을 보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결국 크로스비는 일생동안 세상의 광명을 본 기억조차 없다. 그런데도 그의 실명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중의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실명했기에 세상 것을 생각하지 않고 시를 쓰는데 지장을 초래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요, 그녀의 영의 눈이 더욱 밝아졌다는 것이다.

앞 못 보는 크로스비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한 분은 그녀의 할머니였다. 신비한 자연의 변화를 알게 하였으며,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닫게 해 주었다. 별을 사랑하는 마음이 싹트게 하였으며, 새의 아름다운 모습과 그 소리를 구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어머니의 사랑도 지극했다. 아름다운 꽃의 냄새를 맡게 하고, 그 자태를 마음속에 그릴 수 있게 해 주었다. 크로스비의 마음속에 영원히 시들지 않을 그 꽃을 심어준 것이다.

크로스비에게 두 번째 닥친 불행은 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찾아왔다. 그녀 나이 12세 되던 때였다. 뉴욕의 맹인학교에 다니던 그녀 마음을 짓눌러온 슬픔도 컸지만,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생활의 궁핍은 그녀에게 모든 일을 힘들게만 했다.

그러나 가시덤불에서 피어난 장미꽃이 더욱 아름답듯이 시련과 역경에 처해있던 크로스비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묻어 나오는 시(詩)들은 한결같이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그녀를 가르치던 선생님들을 비롯하여 주변 사람들 모두가 놀랐다. 그리고 폭포수가 쏟아지듯 그녀는 거침없이 수많은 시들을 써내기 시작하였다.
한때 뉴욕에 무서운 콜레라가 만연되었었다.

사람들은 죽어 나갔지만 특별한 예방이나 치료법이 개발되어 있지 않은 때라 모두들 환자 곁에 가기를 꺼려하는 등 전 시가가 공포에 떨고 있었다. 이때에도 크로스비는 "남을 위해 선한 일을 행하다 죽은들 무엇이 한이 되랴" 하고 간호원으로 지원을 하였다.

눈먼 간호의 용기 있는 사랑과 선한 뜻이 알려지자 미국의 종교계에서는 회개하고 선한 일을 위해 희생하자는 사랑의 운동이 벌어지게 된다. 헬렌켈러의 뒤에 좋은 선생님이 있었듯이 크로스비에게도 캠프 (Theodore Camp)라는 훌륭한 선생님이 계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은 주지 않으셨어도 영원한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그녀에게 주셔서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을 이루게 하셨다.

크로스비는 1847년 맹인학교를 마친 후 그 학교의 교사가 되어 11년간 영문법과 수사학, 로마어, 미국 역사 등을 가르쳤으며, 그녀의 나이 38세이던 1858년 맹인 음악가이며 그곳 교사이던 알스타인(A.V.Alstyne)과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크로스비는 늘 가방에 작은 성경과 미국기를 가지고 다니며 특별히 누군가와 이야기를 할 때에는 반드시 성경을 들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크로스비에게 힘을 주고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874년 어느 날 크로스비는 자신의 시집 출판회 기념식에 가야 했는데 5달러가 부족하였다. 그래서 크로스비는 기도하였다. 기도를 마치고 난 크로스비는 찬송사를 쓰려고 분위기를 조성하며 방안을 거닐고 있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크로스비는 문을 열고 손님에게 "사랑하는 당신의 영혼에 축복이 임하시기를 빕니다."라고 인사를 하였다.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헤어지면서 악수를 하는데, 그 사람이 손에 쥐어준 돈이 있었다. 그 돈이 바로 5달러였다. 크로스비는 너무 신기하고 감사해서 찬송가 335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라는 찬송시를 쓰게 되었다. 화니 제인 크로스비는 당대의 유명한 부흥사들로부터 화니 아주머니로 불리워졌다.

한 사람의 실명, 이는 매우 끔찍한 일이기도 하고, 회복할 수 없는 절망을 가져다 주기도 하는 사건이다. 그래서 실명을 한 직후, 아니 실명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직후 어느 기간 정도는 심각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육의 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눈,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영의 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리고 이 눈이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인생은 180도 바뀌어지게 된다.

이것이 복음의 위력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다 준 최대의 선물이기도 하다.
우리 찬송가에 23편의 찬송가가 실려있다. 43, 46, 163, 187, 204, 219, 231, 275, 295, 300, 321, 323, 337, 385, 424, 434, 446, 476, 480, 492, 496, 501, 508장 등이 바로 그녀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