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미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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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내 인생에 변곡점을 만든 인물

2025.08.18 22:41

hyangmi 조회 수:4410

                                                                                                                                     

                        내 인생에 변곡점을 만든 인물                             김향미

  금요일부터 시작한 글쓰기 단기 공부가 내일로 끝난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자정이 가까운 시간,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마지막 숙제를 시작한다. 오늘 받은 주제를 잡아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이 참 막막하다. ‘내 인생에 변곡점을 만들어 준 인물’이 누구인지 단 한 명도 선명하게 끄집어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출렁이는 파도같이 수많은 오목과 볼록이 연결된, 내 인생 속의 상승 곡선과 하강 곡선이 그려지는, 잠시 멈칫하는 순간마다 과연 누가 내 옆에 서 있었을까. 

  “글을 쓴다는 것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타이틀로 공부를 시작하기 직전에 나는 오래 미루었던 수술을 했다. 오랫동안 고생했던 몸의 불편함을 더는 미룰 수 없어 큰 결심을 해야만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급하게 수술 날짜가 잡히고 수술을 위한 피검사도 서둘러 마쳤다. 수술 전후에 주의할 여러 장의 안내서와 복용할 약들을 처방받아 집에 온 날부터 가슴이 어둡게 가라앉아 갔다. 주의 사항과 수술 후의 관리가 뭐 그리 복잡한지 귀찮은 마음이 먼저 앞섰다. 게다가 처방받아 온 수많은 약물 중에 마약성 진통제인 오피오이드와 일주일을 복용해야 하는 스테로이드가 주는 중압감은 엄청났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간호사의 지시대로 모두 탈의하고 눕자, 내 손등에 정맥주사 바늘이 꽂혔다. 그때부터 나는 늘 그랬듯이 눈을 감아 버렸다. 누운 채 수술실로 옮겨질 때 눈에 들어오는 병원의 천장과 수술실의 광경은 정말 보기가 싫었다. 코에 산소마스크가 씌워지고 정맥주사 바늘을 통해 마취 약물이 혈관을 통해 들어 오자 타는듯한 아픔을 느꼈다. 처음 느끼는 통증에 조금 두려워지다가 나는 의식을 잃었다.

  정말 수다스러운 남자 간호사의 목소리가 짜증스럽게 들렸다. 순간 ‘아 천국이 아니구나. 사람과 부대끼며 다시 살아가야 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아직도 감고 있는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물은 멈추지를 않았다. 천국이 아니어서 슬픔을 느낀 내가 당황스러웠고 그런 뜬금없는 감정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 기가 막혔다. 이렇게 울면 수술 결과가 좋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에 후유증이 겁나 또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취에서 깬 기척을 느꼈는지 아니면 이제는 깨워야 할 시간이어서 그랬는지 간호사가 다가와 큰소리로 나를 불렀다. 자기 얼굴이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제발 눈을 떠서 자기의 얼굴을 봐 달라고 사정할 때 그제야 마지못해 눈을 떴다.

  수술 후 첫날의 통증은 정말 처음 겪는 격렬한 것이었다. 목구멍부터 정수리까지 얼굴에 돌출된 모든 기관이 불에 타듯 욱신거렸다. 하지만 오피오이드만큼은 복용하고 싶지 않았다. 마약성 진통제로 통증을 진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개복 수술 후에도 모르핀을 거부하고 통증을 참아냈던 오기가 또 발동했다. 제정신으로 참아내고 싶은 용기였을까, 아니면 쓸데없는 객기였을까.

  수술 후 11일 만에 단국대 미주 문학아카데미 강좌가 시작됐다. 강의 시작 이틀 전에 코안에 삽입한 관을 순조롭게 제거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눈가의 피멍 때문에 사람들 앞에 나서기가 망설여졌지만, 이번 강의는 한 시간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컸다. 내 내면의 공허함 때문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간절함이 컸을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강의 도중 코피가 흘러내릴까 봐 마스크와 거즈도 준비해 갔다. 어지러움과 통증 때문에 발생할 일을 대비해 미리 뒤쪽 구석으로 자리를 잡아 앉았다. 강의는 순조롭게 시작됐다. 진통제도 듣지 않던 두통이 선생님 강의에 빠져드는 데 방해가 되지 못했다.

  2004년에 스승이시던 고원 선생님의 추천으로 『문학세계』 수필 신인상으로 등단하며 시작한 나의 문학인으로서의 행보는 보잘것없이 참 초라했다. 간간이 신문에 칼럼이 실리기도 하고 동인지에 내 글이 얹히기도 했지만, 언제나 글을 세상에 내놓기까지는 엄청난 망설임과 용기가 필요했다. 글을 쓰는 기쁨 이전에 글을 세상에 내놓을 때 마주칠 평가를 대면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글쓰기에 소극적이고 늘 부담감에 눌려 있었다. 활발하게 글을 발표하고 글을 모아 책을 출판하는 문인들을 보면 그들의 자신감과 용기가 늘 부러웠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받은 상처로 인해 내 영혼이 너덜너덜 해져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믿고 애쓴 만큼 돌아온 배신감과 억울함은 깊은 흉터로 남았고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고달프고 아픈 인생 과제라고 쓰디쓴 마침표를 찍어 버리게 됐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나는 과연 자연을 노래하고 사랑을 이야기하며 자기 성찰을 추구하는 문학인인가 묻고 또 묻게 되었다. 글을 쓴다는 행위가, 지성인이라 자처하는 문학인들과 함께 어울리는 그간의 일상들이 무슨 의미가 있나 회의가 들었다. 어쩌면 단단하게 나를 지키며 세상 속에서 상처받지 않을 용기에 자신이 없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오래전 어느 새벽에 뜬금없는 기도가 간절하게 튀어나온 적이 있었다. “하나님, 단 한 명에게라도 제가 쓴 글이 위로가 되고 살아갈 힘이 되는 그런 글을 쓰고 싶어요”라고. 어쩌면 그때 나 자신이 누군가의 글을 읽고 살아갈 힘을 얻고, 위로가 필요한 때였던가 보다. 내 입으로 말하고 그 말을 내 귀가 들은 새벽이었다. 그 순간 난데없이 튀어나온 기도는 어쩌면 내가 글쓰기를 놓지 않을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았나 싶다.

  5일간의 글쓰기 공부가 끝났다. 마지막 숙제를 준비하면서 깊숙한 나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내 인생의 변곡점을 만든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을까를 생각해 본다. 할머니, 아버지, 그 남자, 그 여자. 가슴에 떠 오르는 수많은 그립고, 고맙고, 그리고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 그 사람들까지 심장 속 피가 펌프질하듯 솟구쳐 올라오고 다시 가라앉는다. 그리고 한 사람 불쑥, 그러니까…, 그럼에도 글을 쓰라고 불씨를 던진 사람이 떠 오른다.

  자식에게 먹일 영양가 있는 음식을, 자식의 소화 능력에 맞춰 죽으로, 스테이크로 지지고 볶고 삶아서 먹이는 것이 어미의 심정이다. 좋은 선생님은 자신의 지식과 지혜를 요리조리 정리해서 학생들에게 먹이려 애쓴다. 내 인생 후반기에 변곡점을 만들어 준 선생님, 다시 한번 글쓰기에 불씨를 던져 준 선생님, 인생 하강 곡선의 잠시 쉼표에서 만난 해이수 선생님의 문학인으로서 나눔의 열정은 내 인생의 변곡점이 될 것 같다. 문학의 무게 앞에서 그가 흘렸던 눈물과 기쁨의 환호성은 나에게 뜨거운 불씨가 되어 던져졌다. 이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타오를지 모를 곡선을 올곧게 뻗어 올리는 수고가 나에게 마지막 숙제로 남았다. 

  숙제는 이제 장기전이다. 비록 이타카에 돌아가지 못할지라도 이타카로 돌아가는 여정은 시작됐다.

 

       이제 나도 이타카로 가는 길을 나서는/ 모험과 배움으로 가득한 

       포세이돈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기도하며 떠나는/ 오랜 여정이 되리니

       현자들에게 배우고 또 배우며/ 마침내 이타카의 가르침을 이해하리라

        -콘스탄티노스 카바피스의 「이타카」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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