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미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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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속 깊은 아이

2008.07.15 13:09

최향미 조회 수:1105 추천:135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나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아무리 바빠도 오늘은 꼭 연락해 봐야지 하며 낮부터 벼른 일이다. 같은 교회 구역원인 A집사와 연락이 끊긴 지가 일 년이 다 돼간다. 작년까지는 구역 예배에 늘 참석했었는데 올 들어 그 집 작은아이가 아프다는 이유로 한 번도 오지를 않았다. 전화 연락도 잘 되지 않더니 오늘은 다행히 집에 있었다.

        이년 전에 구역 예배에서 A집사를 처음 만났다. 요즘 유행하는 ‘ 기러기 ’ 아빠를 한국에 두고, 자식들 유학 뒷바라지 하러 아이들에 묻혀온 엄마가 A집사이다. 그녀의 첫 인상은 꽤나 차갑고 도도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생김생김으로는 한국에서 꽤나 배우고 아주 여유있게 생활했으리라 짐작이 되지만 그녀의 언행에서는 겸손함과 소박함이 시간이 흐를수록 묻어 나왔다. 조기 유학을 시키는 한국인 부모들에 대해 막연하게 부정적이던 나의 생각을 조금씩 바꿔 놓을 정도였다.

        대학생인 큰딸과는 달리 고등학생인 작은 딸은 구역 예배는 물론 새벽 예배까지 제 엄마와 참석하는 정말 참한 아이였다. 영어권인 제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우리 어른들의 모임 뒤에서 조용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아이의 다소곳함이 정말 예뻐 보였다. 큰 눈망울과  갸녀린 몸집으로 눈이 마주 치면 살짝 미소를 지어주던 아이 모습 속에서 그 엄마의 지혜도 보이는 듯 했다. 잘 키우고, 잘 자라주는 유학생 가족이 참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턴가 구역 예배에 참석하는 횟수가 줄어들더니 주일 예배 때도 잘 볼 수가 없었다. 가끔씩 안부 전화를 하면 작은 아이가 아파서 갈수가 없었다며 미안해했다. 다음에는 꼭 참석하겠노라며 밝게 약속하는 그녀에게서 더 깊은 이야기는 들을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안부 전화까지 뜸해지기 시작했다. 사실은 그동안 아이가 아파서 구역 예배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를 나는 크게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작은 핑계 일뿐, 혹시 마음 상한 일이 있거나 가정에 말 못할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며 막연한 짐작만 하고 자세히 물어 볼 수도 없었다. 가끔씩 이른 아침 예배를 마치고 황급히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혼자 그렇게 짐작만 하고 있었다. 오늘도 이런 저런 상상을 하며 조심스레 안부를 묻다가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렇게 해맑은 인상의 작은 아이가 ‘폭식증’이라는 병에 걸려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 폭식증이 일종의 정신병이래요. 이곳에서 유학생 신분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지속적인 치료비도 엄청나고 또 이곳 보다는 나을 것 같아 한국에 갔다가, 제 고모가 있는 일본에도 갔었어요. 그런데 일본에서 치료받으면서 토하는 걸 또 배웠더라구요. 같이 있던 아이들한테서 더 나쁜걸 배운 거죠. 지금은 제 아빠가 근무하고 있는 러시아에서 아빠랑 치료 겸 요양하고 있는데 이제는 상태가 많이 호전되고 있어요. 좀 더 안정이 되면 미국으로 돌아 올 거예요. 그나저나 이렇게 전화 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기가 막힌 그녀의 지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가슴이 메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그녀는 늘 그렇듯이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한다. 언제나 다소곳하고 눈빛이 맑아 늘 웃고 있는 것 같던 그 아이의 모습이 아른거리며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지만 차마 내색할 수도 없었다. 그저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하며 위로의 말을 속으로 찿고만 있었다.

        “늘 착하고 얌전하게 아이들이 커줘서, 이런 일로 가슴이 아프게 될 줄 상상도 못한 일이예요.” 이렇게 말을 이어가는 그녀에게 “ 그래요. 집사님, 작은아이가 이제 부모님과 여러 사람들한테서 더 큰 기도와 사랑을 받으려고 병이 났으리라 생각 되요. 그동안 새로운 미국 생활에 적응하느라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았겠어요. 그래도 어른들 걱정할까봐 제 딴에는 힘든 내색을 안 했겠지요 ” 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그녀는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 정말 미국생활하면서 그동안 어렵다는 내색이 없었어요. 늘 잘 견뎌내고 있는 줄로만 알았죠.” 그녀의 자조 섞인 목소리에 나 역시 근 일 년 동안 잘 챙겨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이 켜져 가고 있었다. 아이한테 사과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애써 고통을 안으로 삭이려는 A집사를 보듬어 안아 위로해주고 싶은데 딱히 어울릴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 집사님, 작은아이가 정말 속이 깊은가 봐요. 그래서 제가 감당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속으로 삭히다가 병이 났나 싶네요. 하지만 그렇게 하나님을 사모하는 아이니까 분명히 털고 일어나서 크게 쓰임 받을 거라고 믿어요. 힘내세요.”

        결국 이런 말로 A집사를 위로하고 긴 통화를 마쳤다.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고도 한참을 멍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그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무심했던 일들이 부끄럽다. 구역 합창때 싫은 내색 한번 안하고 피아노 반주를 해주느라 애쓴 아이였다. 고맙고 기특해서 맛있는 밥 사준다고 약속을 했었는데 아직까지 지키지 못한 일도 이제야 생각이 난다. 미안한 마음이 자꾸 커진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내가 그 아이에게 붙인 ‘속 깊은 아이’ 란 말이 얹힌 가슴처럼 마음이 답답해진다. 내 입에서 불쑥 나온 ‘속 깊은 아이’란 수식어가  어쩌면 새장처럼 또는 덫이 되어 그동안 아이의 입을 막아 버린 건 아닐까. 어른들의 칭찬이 결국 아이가 소리 내 말하는 것을 막은 건 아니었을까. 아파도 아프다는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무거워도 내려놓을 수 없었던 아이의 여린 마음이 자꾸 만져진다. 소리 내 끄집어 내지 못하고 속으로 깊숙이 숨어 버린 병 난 아이가 이제는 내 가슴으로 파고드는 것 만 같다. 

        내일 저녁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 한 접시 쪄서 그녀 집으로 마실 이라도 가야겠다. 그래서 딸처럼 속 깊은 그녀랑 ‘소리 내기’ 가 무언지 같이 이야기 해봐야겠다. 덥석 베어 물은 만두 속이 뜨거워서 눈물이 찔끔 나면 그 참에 어깨를 껴안고 같이 펑펑 울어나 봐야지. 내 미안한 마음이랑 꼭 꼭 참아왔을 그녀의 아픔까지 모두 흘려버리게. 그러면 속 깊어서 병난 어여쁜 그 아이를 환한 웃음으로 다시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미주문학 08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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