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미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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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분, 인 그리고 그 놈놈놈

2012.06.23 15:42

최향미 조회 수:953 추천:34



               분, 인 그리고 그 놈놈놈


      나는 과일을 별로 즐겨 먹지는 않지만 대나무 광주리에 색색이 담긴 과일을 보면 늘 마음이 싱그러워진다. 마켙에서 과일 세일이라도 할라치면 욕심을 부려 과일을 사온다. 과일 대장인 남편을 위한 것이다. 한 이주 전 주말에 동네 마켙에서 망고 세일을 했다. 집에는 우리부부 단둘이라 먹을 입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싼 가격에 눈이 멀어 아주 많은 양의 망고를 샀다. 오래 두고 익혀 먹을 생각으로 아직 익지 않은, 그래도 싱싱해 보이는 것들을 이리저리 만져 보며 공들여 골라서 사 왔다. 오렌지, 키위, 덜 익은 망고까지 보기 좋게 큼직한 광주리에 담아 부엌 한 켠에 올려놓고 보니 부자가 된 듯 마음까지 든든하다. 하루하루 익어가는 과일향도 즐기고 잘 익은 놈을 골라가며 과일을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제 광주리에는 세 개의 잘 익은 망고만 남았다. 싼 가격에 사온 과일을 즐길만큼 즐겼는데도, 그때 좀 더 사 올 걸하는 미련도 들었다. 조만간에 또 마켙으로 장을 보러 가야하는 귀챦은 생각도 든다. 예쁜 과일 접시부터 내놓고 망고를 하나 꺼내 반으로 잘랐다. 잘 익은 망고향이 훅 풍긴다. 흠...역시 잘 익었군...하는데 웬걸, 이건 잘 익은게 아니라 너무 익어 곯아버린 것 같다. 아무래도 남편에게 내놓았다가는 인상만 쓸게 뻔하다. 다시 두 번째 남은 망고의 반을 가르는데 첫 번 것과 같은 상태다. 속이 부글거린다. 혹시 나라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한입 베어 물었다가 퉤하고 뱉어 버렸다. 이제 마지막 남은 망고를 집어 들고 도마위에서 살금살금 반으로 갈랐다. 하지만 세 번째 망고는 한술 더 떠 속이 거뭇해 보이기까지 한다. 아! 이제 내 입에서는 탄식이 나오고, 이 망고놈들이...하는 욕까지 나온다. 겉이 너무 멀쩡해서 이삼일은 더 있다 먹어도 되겠다고 생각했었다. 아깝다는 마음보다는 우습게도 속았다는 생각에 은근히 분한 마음이 든다.

      오래전 어느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두고두고 기억이 난다. 미국 생활을 경험한 어느 한국인 작가가 쓴 ‘ 미국분, 미국인, 미국놈 ’ 이라는 책 제목을 언급하셨다. 그리고는 ‘ 목사님, 목사, 목사놈 ’ 이란 표현을 하며 현 기독교인들의 실상을 개탄하셨다. 책의 내용이나 그 목사님의 설교 내용과는 별개로 그 표현들이 나에게는 아주 강렬하게 마음에 새겨져 버렸다. 그리고는 문득 문득 나 스스로에게 들이미는 줄자가 되곤 한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 선생님인지, 선생인지 아니면 선생 놈이었는지...  내가 소속된 곳에서 그들이 나에게 붙여준 또는 나 스스로 붙인 명찰 뒷 끝에 붙여질 호칭이 이 셋 중에 무엇일까 생각하곤 한다. 지금 내안에 담긴 내 실체가 이름 값 만큼은 되는지. 내가 아무리 그럴싸하게 포장을 해도 결국 어딘 가에서는 새어져 나와 버릴 냄새나는 본색을 숨기려고 무던히 애쓰며 살고 있는 나를 들여다보기도 한다. 호칭이 가진 무게가 깊고 높을수록 ‘ 놈 ’ 으로 불리며 나락으로 빠질 확률이 더 클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광주리에 세 개 남은 망고가 차라리 겉으로 보기에도 상한 듯이 보였다면 속았다는 약 오름은 덜 했을 것이다. 미리 미리 챙겨서 먹어치우지 못한 아쉬움만 남았을 것 같다. 그날 저녁 후식은 과일 대신에 녹차 한잔씩으로 끝냈다. 하지만 혹시나 싶어 한입 베어 물은 곯은 망고의 들척지근하고 불쾌한 맛은 뜨거운 녹차로도 금방 지워지지 않았다. 망할 놈의 망고놈들.
                                                            04-25-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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