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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순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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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신경숙의 빈집

2009.04.23 04:29

난설 조회 수:1056 추천:56

집에 인기척이 끊기면 가장 먼저 부엌이 허물어진다 허물어지기 전에 긴장은 있었겠지 수도꼭지가 누군가 비틀어주길 기다리며 바싹 말라갔을 것이고 차곡차곡 쌓여 있는 크고 작은 접시들은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텅, 하니 깨져버릴 듯 유리문 안에서 바깥을 쏘아 보았겠지 국물이 넘친 자국을 간직한 채 불기가 끊긴 가스레인지는 빈 냄비를 얹어놓은 채고독에 잠겨 있었을 테고 그러다가 양념통에 벌레가 슬기 시작하겠지 간장은 메마른 냄새를 풍기기 시작하고 식초는 자신의 독특한 향을 틈새로 날려보내고 깨소금 통에 갇힌 나방이가 쉬익 소릴 질러댓을 것이다 그 공명음에 수저통 속의 숟가락과 젓가락들이 소란스럽게 바닥에 엎질러졌을 것이고 그래도 부엌은 다른 아침이 오길 참을성 있게 기다렸겠지 빈집의 메마름을 걷어내줄 누군가의 손길을 .. 해가 뜨고 다시 어제와 같은 빈집의 하루가 계속되려 할 때 아마도 그때 저 싱크대 밑판은 더이상의 메마름을 참을 수 없어 허물어졌겠지 빈집은 이렇게 식은땀 나게 해 ..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 있는것이라고 하던 데 그녀는 돌아오는 비행기 안이나 기차 안에서 돌아가야 할 빈집을 생각하면 가슴이 덜컥 내려 앉곤 했다 인기척이 끊긴 집은 또 낡아 있을 테니 침대 위에 벗어던진 셔츠는? 커피가 눌어붙어 있는 찻잔은? 읽다가 엎어놓은 책은? 그들은 그녀 손이 닿지 않으면 얼마든지 그러고 있을 것이었다 하루고 이틀이고 열흘이고 한달이고 그래 천년이라도 여행에서 돌아와 자신의 빈집의 문을 따고 타인처럼 신발장 앞에 서서 삐끗이 열려 있는 방문을 보고 겁을 먹는 존재도 이 세상엔 있는거야 당신이 아무리 나와 가까웠다 해도 여행에서 돌아와 아무도 없는 빈집으로 들어가는 내 마음을 들여다본 적 있어? 그때면 생각하지 누군가 미리 집에 불을 켜놓고 현관문을 열어주고 누더기가 된 나의 가방들을 안으로 들여놓아 주었으면 그저 그날 밤만이라도 누군가 차려준 양이 적고 간이 맞는 국물이 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으면 다정한 인기척을 느끼며 깊은 잠을 잘 수 있었으면 .. 그저 그날 밤만이라도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다가 공허하게 허공을 휘젓고 있는 내 손을 누군가 맞잡아 다시 이불 속에 밀어 넣어 주었으면 하고 시작도 안해봤는데 다 지나버린 마음으로 고백할까? 거실을 향해 한발씩 내디딜 때마다 불빛은 적막한 파도처럼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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