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 오늘도 나는 알맞게 떠있다

2012.11.27 23:51

강학희 조회 수:1313 추천:53

창조문학대표시인선·145


오늘도 나는 알맞게 떠있다

강학희 시집



시인의 말

춘모랑 석우랑, 숙이, 영희, 정우언니, 보현언니랑....
"꼭꼭 슘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술래가 소리치면 머리카락 한올
보이지 않게 꽁 꽁 숨었던 숨바꼭질 연습 때문이었을까?,

"화내는 모습 보이지 말고 늘 웃어라" 아버님 말씀이
법이었던 우리시절 버릇 때문이었을까?
내게는 제 속 보이는 일보다 힘든 일이 없었다.

오랜 세월 머리카락조차 내보이지 못한
내 속병의 자가치료가 바로 글과의 만남이었나보다.
내 머리카락 보이기, 일부러 삐쭉 내민 내 심중,
더러 땀내 나는 살점이 묻어나고 얼룩들이 면구스럽기도
참담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찾아지기를 갈망하는
나의 내보이기 인 것이다.

오늘도 머리카락 흩날리는 나의 두근거림,
너 거기 있는 줄 안다. 옷깃을 당기는 내 술래, 너를 기다리는
전율에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아직도
귀에 선한 목소리, '찾았다!' 한 옥타브 올라간
하이 톤 반김이 그리워 멈출 수 없는 나의 글쓰기,
나의 숨바꼭질은 내 발가벗김의 엑스타시이다.

그 간 나의 어눌함에도 기다려주시고 옷깃 잡아주신
등 뒤의 손길들에 감사 올리며 천진한 동심으로
세상의 모든 만남에 나의 노래 불러드리고 싶다.


                2007 7월 7일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에서
                     앞서가는 그리움으로 강학희 배拜














창조문학사
   서문



오늘도 나는 알맞게 떠있다

강학희 시집

차 례


  서문

묶음 1 / 몸의 중심점

섬        9
나를 투시하다 1        10
나를 투시하다 2        11
희망의 뿌리는 어디에도 내린다        12
비상과 낙하, 그 분기점에서        13
미역국을 끓이며        14
붉은 회로回路        16
배꼽        18
소·나·무·        20
머리카락 보일라        22
Sierra산 겨울이야기        24
몽골붉은여우 눈        25
종이와 시인        26
나를 눌러주는 힘        28
문을 나서며        30




오늘도 나는 알맞게 떠있다


묶음 2 / 다림질하다


찔려도 좋은 바늘        33
담쟁이넝쿨        34
꽃눈으로 보면        36
비빔밥이 먹고 싶다        37
나를 다림질하다        38
붉은 와인 Melot        40
종이 새        41
'함께'라는 말은        42
날개를 달아도 추락한다        44
? -물음의 자괴감        45
빛과 그림자의 속살        46
겉살과 속살의 연관성에 대하여        47
작은 것을 통하여        48
Jack London Square의 늑대        50
존의 행복, Good day        52

묶음 3 / 프로그레스


구석기로 날기 위한 프로그레스        55
하루의 소묘        56
킹스캐뇬 목불木佛        58
'분노의 포도'를 따라간 하루        60
노인 치매병동 1.        62
노인 치매병동 2.        63
노인 치매병동 3.        64
정씨 할머니의 싸인        66
합중국 고추장아찌        68
한국산 마늘        70
오늘도 나는 알맞게 떠있다


단추 병 어항의 하오        71
넘어지지 않는 남자        72
먼 그대는 아름답다        73
앞과 뒤        74
꽃 피우기        75

묶음 4 / 옥양목 바다


콜롬비아 빙하에서 그를 만나다        79
천국의 미소微笑공모전        80
하나 더하기 하나        82
밤비        83
무지개        84
비누방울 이야기        85
빗소리 따라간 헨델의 메시아        86
쿼바디스 도미네        88
참 이상하기도 합니다        90
감나무의 세한도歲寒圖        92
유성流星        94
돌아온 고향        95
어머니의 설날        96
엄마의 골무        97
밥통        98
고모님과 동정        100
풀피리 소리        102
아름다운 남자        104
집        105

□ 발문
문인귀·시를·




묶음 1
몸의 중심점



섬*

세상 어느 것
꼭지에서 떨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단절된 한 몸의 두 조각
하나씩 품고
내 안엣 깍짓손 풀지 않으면
섬 아닌 것도 섬으로 남고
그렇지 않은 것도
외로운 고도(孤島)로 남는다.

닿으려, 닿으려 손 내밀면
상처는 아물리듯 사라지고
둘이는 하나 되어
내게서 이는 물결 그곳에 번지고
그곳에 피는 꽃 내게서도 핀다

섬으로부터 돌아와 만나는 우리
그렇게, 다시
만나질 섬은 섬이 아니다.


나를 투시하다 1

몸살 난 아름드리 나목裸木,
두 팔 벌린다. 철컥, 찰칵
X에 바코드가 읽힌다. 내가 투시된다.

오래 된 내실內室 장지문 열린다
뿌연 슬픔, 어둠처럼 앉아 있고
좌우 대칭 12개의 옹글고 가는 문살
화석문양 흑백 구름사이
희끗희끗  얼비친다.

한 때의 통증은 화엄華嚴의 빛깔
사라진 회오리바람의 응고
열꽃 흔적 무늬 심방心房에서
오래된 외로움으로 만난다

X광역 지나
투명한 햇살에 다시 푸르러진 시간
통. 통. 통. 거리를 뛰어 간다
통증은 한 줄 획을 그으며
나이테 속으로 몸을 숨긴다.


나를 투시하다 2


나를 투시하다 2 / 강학희
            -대장내시경


터널 속으로 불이 들어간다.  
캄캄한 동굴 저 아래로
번득 번득 통방울 외눈 희번득이며
굼실굼실 기어 들어간다.

덜컹, 덜컹이는 굴렁쇠
길고 어둡고 음습한 내 허기진 통로
감지된 돌출물 파헤쳐지는가
환청처럼 먼 진동, 굉음 울린다
터널을 휩쓴다.
스스로 배설할 수 없던
내 안에 섭생한 미움욕망분노오만의
변종세포, 폴립* 뿌리 채 도려진다

태초의 동굴처럼 가물가물 멀어있던 터널
마침내 울 엄마 하얀 옥양목 치맛자락 같은 환한 빛,
기다리고 있던 한줄기 시간이 채워진다
펄럭이는 나를 차지한다.



*polyp/용정茸腫: 체강(體腔) 벽에서 튀어나와 자라난 것.


희망의 뿌리는 어디에도 내린다*

새 병원 건물 6층과 7층 사이
매끈한 몸통에 푸른 반점
새파란 풀잎이 돋았다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기계의 판정만 믿는 초현대식 완벽한 몸에도
틈새는 있었던 거다
씨방을 안고 날던 홀씨 하나의 눈에
포착된 그 틈새만큼
과학에도 사람의 냄새 있었던 거다
하루, 86400초 매 순간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날 선 몸에
물구나무로 허공을 살아내는
한 가닥의 뿌리
오늘도 절망의 늪에서 건진 사람 몇이나 될까

이제 내게 나있는 틈새를 부끄러워는 않으리
이 자리 없이 네가 어찌 내게 뿌리내릴 수 있으랴
바로 네가 들어설 틈새, 그 어느 곳인들
푸름이 익을 땅, 녹색의 삶 아니랴.


비상과 낙하, 그 분기점에서*

샌프란시스코 Fell Street 전선줄에
운동화 한 켤레
땅에서는 맞잡을 수 없는 양편 끈 잡아 맨 채
하늘 걸어올라 아스라이 대롱거린다

한세상 헤매다 부르튼 이야기 버려두고
닳은 뒤축으로 나선 탈주脫走의 곡예
빈 몸으로 바람을 밟아 줄을 탄다

꿈은 이루어지는 순간 꿈이 아닌 현실
이제 곧 저 아득한 낙하의 무게로
곤두박질 현실 머지 않았다 해도
아직은 비상飛上,
또 비상을 향해 발돋움하는 저 꿈을 보라

이 길에 들어서면
스멀스멀 발가락이 간지럽다.
날아오르고 싶다. 날아오르고,

* Fell : 떨어지다(fall)의 과거형으로 샌프란시스코 진입로에 있는 길.


미역국을 끓이며*

마른 미역 한줌 물에 담근다
미역은 불어도 검은 물이 우러나지 않는다
미역은 검은 것일까?

씻은 미역을 끓인다
뽀얗게 우러나는 국물
비릿한 엄마의 젖 맛이 난다  미역은 검어도
보이지 않는 속살은 젖살처럼 뽀얄 것이다
끓이면 진국이 되는
미역 같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탯줄은 잘렸어도 나는 아직도
미완의 존재, 보이는 몸과 보이지 않는
생각으로 태어나 평생토록 하는 일이란
생겨나는 눈의 물을 닦아내고
보이는 것 속의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헤매는 일
더러 벅찬 일에 마음이 달아나도 속을 끓이는 건
미처 보지 못한 불투명한 무엇인가를
투명하게 보고 싶은 때문인지도 모른다

미역을 끓인다
미역은 검어도 흰 물이 우러난다.


붉은 회로回路

John Muir Park
수령 수백 년 삼나무 하늘 길
걸어 나오는데 한 무리사람들
비실한 실개천을 들여다보고 있다

등허리 마른 자갈 발 사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보이느냐고?

엎드리다시피
생애 가장 낮은 포즈에
까막까막 수면 흔드는 것이
보인다.
물결무늬 작고도 작은 몸부림
감히 개천開天 따라가는
연어의 붉은 회로에 얹혀있는 생生

하늘 길을 내는,
모천을 마시며 마음 길을 내는
나무연어사람살점 속
제각각 유전인자 지도에는

길길이 굽지 않은 길은 없다
길길이 붉지 않은 길은 없다

천길 만길 굽이돌아 붉기도 붉은
길들아! 첩, 첩 하나하나
어느 길 눈물겹지 않은가
어느 길 아름답지 않은가.


배꼽*

뱃심 없는 날
뿌리와의 은밀한 통로
배꼽을 꾸-욱 꾹, 눌러 보라

꼬리-이- 달달
묵은 젖내 꼭지 끝에서 번져나는
젖빛 감 꽃
푸른 잎새 도닥거림에
휘청하던 등줄기 물이 차오르고
자존심이 빳빳이 서는
몸의 중심점은 배꼽이다

배꼽과 배꼽이 만나
생명의 불꽃 이어지고 내가 존재된다
젖먹인 힘과 젖 먹는 힘이 뭉친
배꼽은 몸의 생장점이다

뱃심 없는 날
뿌리와의 은밀한 통로
배꼽을 꾸-욱 꾹, 눌러 보라

늘 거기 있는 모태, 회귀의 길이 보인다
모천으로 회귀하는
모든 비밀센서는 바로 배꼽 아래 숨겨져 있다
연어의 배꼽을 보라
생生의 중점은 분명 배꼽이다.


소 나 무 *

소나무,
누가 이름 붙였을까
소 +나무 = 소나무

소와 나무,
소처럼 서있는 나무의 진득함이
나무처럼 서있는 소의 우직함이
땅 밖에 모르는 시골 노부老父 같은
소나무,
뜯어내도, 뜯어내도 키우는 것 밖에 모르는
어미의 푸른 살이 촘촘 돋아있는
소의 나무,
두둑한 등줄기에 기대면
박토를 가는 숨소리 들리는
사시사철 흙 속 아비의 몸

소. 나무.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냥 나를 지긋 바라보는 눈길로
부엌에서 뼈를 끓이고

마을 어귀에서 장승처럼 기다리는
고향의 품속
닿으면 진득이 묻어나는 그리움
늘 푸르른 나무.

사람 같은 나무, 나무 같은 사람
그 속가슴에 내가 있다.


머리카락 보일라


숨바꼭질은 어두움이다
두려운 등판이다 젖무덤이다

  세상이 온통 숨은 얼굴 찾기에 신명내던 시절, 사람들은 밤낮으로 숨바꼭질에 미쳐 있었다 집집마다 술래가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보일라 주문을 외면 사랑하는 사람들, 아버지도 삼촌도 철이 아저씨도 모두모두 숨는다 머리칼 한 올 뵈지 않게 어둠의 장벽 속으로 사라졌다 포대기 속에서 처음 배우던 숨바꼭질은 지금도 눈에 선한 아니,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는 놀이다.

숨바꼭질은 기다림이다
남겨진 등판이다 젖무덤이다

  지친 술래 먼 눈으로 보일라, 보일라 주문 외우다 못 찾겠다 꾀꼬리 불러도 이젠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다 슬픈 술래는 돌아가고 꽁꽁 숨은 아이는 어른이 된다 찾아지지 않는다 혹, 깨어나지 않은 꿈일까? 아는 얼굴 사라진 거리에서 그 때의 동안童顔을 찾아서 놀자! 그리운 소리하나 찾아서 현실과 추억빗금사이를 숨바꼭질한다 나를 찾아 달라 한 움큼씩 머리칼 문자 날린다.

숨바꼭질은 설레임이다
그리운 등판이다 젖무덤이다

   보일락, 보일락 머리카락 내보이기는 달빛에 내 글 쓰기, 오늘도 밤새 구름에 가리운 달처럼 들락날락 나의 술래를 찾아다닌다 술래, 너는 나의 구름이다 달빛엄마다 아니, 술래는 잃어버린 순수純粹를 찾아다니는 내 안의 나다. 내 젖어미,



Sierra산 겨울이야기

울창하던 한 때는
모두가 함께 무리 지어 있었습니다.
이제 숲은 사라지고 제각각 삭발한 민둥산
천둥벌거숭이 자신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꺼풀만 남은 몸으로 아린 삭풍에
갈등과 고뇌를 지우고 있습니다.
몸을 목탁 삼아 심지를 모으고 있습니다.
덩덩 산을 울리는 독경소리
어찌 저리 막힘 없이 자유로운지
겨울 산처럼 108마리 사족蛇足의 족쇄 모두 끊어버린
비어 아름다운 소리가 되고 싶습니다.
만 권의 책도 들려주지 못한 겨울이야기를
빈 산은 하늘에 걸린 목어木魚가 되어
들려주고 있습니다.


몽골붉은여우 눈

삐-이-, 삐-이-, 새벽 두시
알람소리 막다른 도시를 베고 누워도
서걱서걱 휘도는 모래알
건천乾川을 열고 거울을 본다
눈 앞 부스스 붉은여우 한 마리
너는 누구냐 묻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 본 것이다
저 것은 불기 사라진 동공, 저 깊은 블랙홀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몽골 여우 붉은 눈으로 써놓은 시다
몽골붉은여우는 몽골에 살지 않아도
붉은 몽골여우다
붉게 핏발 선 시詩를 쓴다
행간사이 날아다니는 털은 붉은 꿈이다
시나브로 스러지는 붉은여우의 시다
밤마다 털갈이하는 몽골여우의 울음,
몽골붉은여우 눈은 붉은 시다.


종이와 시인

자판에서 끝낸 시詩를 프린트한다
소리 내어 읽다 울컥, 마치
종이의 잘못인양 쫙 찢다 손끝을 베었다
피가 솟는 검지 급히 엄지로 꽉 누른다
남은 세손가락 부챗살처럼 펴진다
아니, 이 건? 예각은 간 곳 없고 갑자기
처처處處가 다 불상佛像이다
허투루 찢은 종이, 종이 한 장만한 것인가
물음 던진다

그래, 누구에게나 찢김은 예리다
절단된 면은 모두가 각角, 상처 깊을수록 더 모질다
반면半面이나 쭉 뜯겨나간 종이면상,
너 또한 충분하고도 완벽한 예각이다

수만 개의 닢. 닢 재생再生의 삶
하찮게 생각하다 단칼에 베이고
당분간 섣불리 손가락질도 못 할 내 검지
차마 아프다 할까 치부만 후후 불어
무위無爲화두 입 속에 넣는다

뜨끔따끔 아리게 솟아나는 침엽들,
나의 전생前生 살아난다
글발로 죽고 사는 너와 나는 한 몸이다
수천의 가시를 달고 늘 푸르러야하는,


나를 눌러주는 힘*


하늘과 땅 사이 지금 막
떠오르는 풍선과 내려앉는 풍선

풍선이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은
부풀어오르는,
가슴을 조여 오는 바깥세상의 압박 때문이다
꿈이 부풀수록
더욱 더 거세게 누르는 힘
팽팽히 맞서는 풍선
밖에서 미는 힘과 안에서 버텨내는 힘,
나를 과시하려는 힘과
나를 누르려는 힘으로 서있다

우주 속
하늘과 땅 사이 멀리서 가까이서
흔들리고 있는 너와 나
우리의 부유浮遊를 보라
가라앉기도
뜨기도 하는 신묘한 존재
기쁨과 슬픔의 화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오늘도 나를 눌러주는 어떤 힘으로
나는 알맞게 떠 있는 것이다.


문을 나서며*


불을 끄고 사무실을 나서다
문득 다시 들어올 수 있을까? 돌아서서
이렇게 콰-앙 닫힐 눈 앞
어둠을 들여다본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세 번다 꿈이로다..." 세 번 중얼거린 옛 땡초의
염불처럼 단지 한 떼의 빛 무리인 지금
나는 어느 꿈속에 있는지

전생이생내생의 모두가
깨어 한발자국 걷는 어떤 한 순간일 뿐
어떤 것도 다 나일 것도, 나 아닐 것도 같은
흩어지고 모아지고
다시 한 점으로 돌아가는 한 순간 일
어제오늘내일의
보일까 말까 한 땅과돌과하늘 속
은빛 거미집 암영暗影 같은 나
지금 어느 문을 나서는가 들어서는가




묶음 2
다림질하다



찔려도 좋은 바늘

소망이 깊어지면
몸은 가늘어 가는가
가늘한 제 몸 뚫어
남의 뚫린 몸 이을까 기울까

찢기고 헤진 올이랴
막히고 질린 골이랴
잉걸불에 달구어
살과 혈을 뚫고 풀어
맥 잇는 가늘한 몸

간병看病 간 어미
빈자리 헤질까 찢길까
가슴 깃 올올히 꿰매어주시느라
묶어도, 묶어도 흘러내리던
할머니의 가는 허리

턱없이 멀고멀어
그 시절만 풀어놓던 나는
찔려도 좋다
오늘은 피가 나도록 잡는다.


담쟁이넝쿨


나를
꽃이라 하신 아버지
나는 무성한 닢. 닢뿐
꽃이 아닙니다
꽃이 아닙니다

오로지
꽃이라 하신 말씀에
매달려 세상을 헤어도
나는 꽃이 아닙니다
나는 꽃이 아닙니다

꽃이라
믿기만 하면 꽃이라니
때론 꿈에 분노하여도
꽃이 아닙니다
나는 꽃이 아닙니다

벽인들
담인들 길인들 틈. 틈새

찔리고 데이고 쓸리다
잎새마저도 떨굴 시간
아-아 꿈일까

"저-기 저 높은 담벼락
꽃보다 예쁜 담쟁이 좀 봐요!"
세상이 내 피멍든 등판을
꽃보다 아름답다합니다

아-아,
이제야 압니다. 꽃이란
아름다운 상처라는 것을
나는 꽃보다
더 붉은 꽃이라는 것을.


꽃눈으로 보면*


꽃눈으로 보면
세상은 꽃 마당

꽃눈 깜빡
뜨고 감는 찰나
이 꽃에도
저 꽃에도

하르르 닢, 닢마다
가슴 활짝 열리는
우주.


비빔밥이 먹고 싶다


끼니 생각도 없어
그냥 누웠는데 점점 발이 시려온다
이불깃을 당겨도 숭숭 바람이 든다
속이 비어 그런가
찬밥덩이 물 말아 한 술 뜨는데
투 둑, 눈물방울이 서럽다
알. 알. 흩어진
밥알이 서럽다
늦은 밤, 혼자 밥그릇에 수그린 삶이 서럽다
낱, 낱 떠돌다 발 시린 날은
차라리 밥이라도 비벼볼 일이다
알. 알. 흩어진
마음이라도 뻑뻑 비벼볼 일이다
벌겋게 비빈 양푼 속은 매워도
비빌 때가 좋았다
비비기만해도 배부른 비빔밥이 그립다.


나를 다림질하다*

느슨히 담겨져
손을 기다리는 빨래 감들
한 바스켓 빨아서
가슴 저 밑 이글거리는 불덩이로
기를 쓰며 문지른다

가는 목둘레에 아직도 눌려 있는
긴장된 하루
올 풀린 소매 끝에 매달린 고단한 일상을
뜨거운 다리미로 밀어 버린다

구겨진 나대신
너라도 반듯이 펴져라 힘껏 누르며
뻣뻣하게 달려드는 삶
너보다도 더 빳빳하게 다려
가지런히 건다

빨래 다리다 말고
나를 다리느라
애꿎은 남편 바지 하나 태워 먹었다

벌겋게 데인 얼굴로
처연히 웃는 너
차마 버리지는 못하겠지.


붉은 와인 Melot*

밟히고 또 밟혀도
한잔의 붉은 즙이기 위해
몸 안의 모든 진액 뽑아
너만의 명품이기 위해
불망 소망 하나이기 위해
어둠 속으로 칩거한다

젖무덤 스치던 나파(Napa)의 미풍도
이슬의 속삭임도
먹구름 속 넉살까지도
모든 기억은 너의 꿈으로 환치된다

삭이고 삭힌
알알이 붉은 핏빛 목마름
나는 그대 앞에 놓인
한잔의 사랑
순간의 입맞춤을 위한 운명이다.

* Napa: 샌프란시스코 근교의 와인 산지.


종이 새


바람 이는 날 언덕에 앉아
지친 너를 접어
푸른 하늘로 날려 보라

접힌 나래 떠는 퍼덕임
허공으로 흐르는
울음가락 따라
잠자던 파란 젊음 나래 펴고
피안으로 날아가리

꿈결엔 물음 없는
자유의 춤사위로
훠-어-이 훠-어이 한 풀어내는
천千의 학들과 춤추게 되리

바람 이는 날 언덕에 나가
눈을 감고
하늘을 향해 가슴을 펴라
금今세상 팔락이는
종이 새 보게 되리


'함께'라는 말은*

'함께'라는 말은
서로 길을 내주는 일이다
나는 너에
너는 나에
오고 가고
가고 오는
길을 내주는 일이다

'함께'라는 말은
길을 만들어 가는 일이다
같은 생각
같은 소망
오고 가고
가고 오는
길을 만들어 가는 일이다

무리무리 지어
오고 가고
가고 오는
저 새들도
지금 허공에
함께 가는
길을 내고 있는 것이다.


날개를 달아도 추락한다

광안리 "해인 글방" 앞 삼거리
한 줄 획을 그으며 털썩! 떨어진 물체
어이없게도
날개 달린 작은 새 한 마리다.

무릇 뼈 속마저 비우고
바람의 길을 간다던 날짐승을
아스팔트 날바닥으로
곤두박질시킨 건 무엇이었을까

털썩! 철퇴 소리
오늘도 먹이 무는 소리 추 되어
최소한과 최대한의 잣대 위에
그 한 점 놓아보란다
심보의 무게를 묻는다

좀더 높이였든지, 좀더 빠르게였든지
혹은 한 점 더 삼킨 비축이나 쾌락이었든지
마지막 수위를 넘긴
그 한 점, 욕심의 중량重量 추락을 부른다
천의 날개도 부순다.


? -물음의 자괴감

갈고리 같이 웅크린 채
왜 묻기만 했었나?
힐끔 두리번
왜 보이기만 바랬나?

어차피 끝간데 모르는 길
응! 긍정이나 하지

마음은 공공空空 중에 걸어두고
뉘에 들킬세라 깨금발로
숫자 세기만 하다
제법 묵직하리

뒤춤에 손 넣어보니
허공만 한줌

그래! 이젠 더듬이는 떼고
눈감고 가보자
빛이나 어둠이나
어차피 마음이 길인 것을.


빛과 그림자의 속살*

빛은 희고
어둠은 검다했나요?

대명천지大明天地
눈뜨고도 깜깜한,
눈감고도 환한
불혹의 세월 헤쳐 보니
밝고 어둠은
마음의 빛살일 뿐.

세상 고정관념이란 것,
고정固定된 걸까요?

혹, 이것과 저것 사이
레디메이드ready made
블라인드 다 거두어내면
확실히 보이지 않을까요?
혹, 삶이 고달픈 건
내 안에 고정된
행복관념 때문 아닐까요?



겉살과 속살의 연관성에 대하여


나는 호색한,
아침마다 풋풋한 내 연인을 찾아간다
나의 터치를 기다리는
희고붉은노랗고검은두툴맨들야들뽀송까칠한 열매
어르고 만지면 겉살에 묻어나는 속내
발그레함, 풋풋함, 수굿함, 뻣뻣함,
저마다 드러내는 맨살을 탐닉한다

오늘 눈이 맞은 그녀,
언뜻 겉으론 뻣뻣하고 툴툴거려도 눈길 따스한
우리 미스 리처럼 아린 상처 하나 보듬고 있나
뻣센 듯 도톰한 살결에 신열이 만져진다
옴폭한 배꼽에 고여 있는 단내
달고도 쌉쌀한 첫사랑의 향
겉살로 드러나는 속살거림
서로 닿아 느끼는 전율보다 아름다운 소통은 없다

나는 호색한,
아침마다 허락 된 하루의 바구니 속
스킨 쉽, 맨살의 기쁨을 찾아 나선다.


작은 것을 통하여


누군가 잔디밭을 뭉개버렸다
발 밑 한 자락 세상을 확 뒤집어 놓았다
움푹 움푹 파인 흔적마다
터져 나온 흙의 내장, 잔디의 살점 뒤엉켜있다

뭉그러진 달팽이, 납작 갈린 굼벵이
토막 난 지네, 지렁이, 노래기,
배터진 집게벌레에 엉킨 실 뿌리까지
아수라 난장 조문행렬 개미들이 줄을 섰다
놀라워라, 한 줌 흙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감싸고 있었는지...
땅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 알겠다

뉴욕의, 바그다드의 그 징한 참상
여린 이 생명들을 짓밟은 무심無心
과욕이거나 실수이거나
혼령들은 저마다
작은 우주의 말살을 맞고 있다
땅이 무너지는 이유 고시告示되고 있다

아주 작은 혼돈에서 시작하는
무심에 중독된 족적足跡
미물의 소멸, 땅의 함몰陷沒,
지구의 가슴앓이 열꽃에
별들의 푸른 눈이 자꾸만 붉어진다
멀어진다.

Jack London Square의 늑대


오클랜드 중심가 브로드웨이
거리 끝, 항만에 서면
늙지 않는 늑대 한 마리 만난다

청동의 늑대 옷을 입은 잭 런던
그는 도시 심장 속
인간의 탈을 쓴 늑대를 찾고 있다
부둣가 뜨내기의 비린 눈빛,
배부른 방황과 타버린 순수의
폐허까지 꿰뚫는 시퍼런 인광燐光으로
도시를 순찰하고 있다

마음과 마음 사이 행간이 보이지 않을 때
글과 글 사이 문자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
그를 만나면 거침없이
아침마다 1000개의 단어를 삼켜라, 삭혀라!
마음의 눈을 달아라! 허술한 가슴 깃을
물어뜯는 날카로운 White Fang*의 송곳니

"흙먼지보다는 차라리 재가 되고 싶다"
그의 불씨 받아 잭 런던스퀘어를 돌아 나오면
도시의 사막에는 아직
끓는 피에 연연하는 굶주린 뼈들이 떠돌고
늑대의 눈은 그들을 좇아 달리고 있다.

*White Fang: 늑대의 눈으로 바라본 인간 사회의 허구를 묘사한 잭 런던의 대표작, 정규교육도 마치지 못한 그는 독학으로 매일 천 개의 단어를 익히며 문학에 매진했다.


존의 행복, Good day


늘 벙글벙글 Good day! Good day! 굳데이가 별명인 John Doe, 새벽인력시장에서 뽑히지 않은 날은 치렁치렁 색실을 목에 걸고 옵니다 병원 뒤 공터는 햇빛 쏟아지는 조선소가 되지요. 먼 옛날 그의 선조들 카누를 만들듯 오색실로 크고 작은 배를 직조해서 초록 잎 물결치는 바다에 띄웁니다 오늘은 다섯 척의 쪽배 마리오족의 제어濟語, 거센 파도 헤쳐 가는 기원으로 떠납니다. 이 음률행상의 노래는 난해해도 상관없지요 그냥 아련히 끄덕이게 하는 현대시詩처럼 지금의 느낌을 사랑하게 하는 주문呪文이니까요. 누구보다도 밝은 인디오 존은 우리의 한낮 햇살, 우리 누구도 굳데이 없이는 행복하지 않지요 굳데이의 배를 타지 않고는 굳라이프라는 항구에 닿을 수 없지요.




묶음 3
프로그레스


구석기로 날기 위한 프로그레스
1.
마야 문명으로 가는 12번 게이트 출구 하품하다
맞은편 잡지표지 속 비무장 유방 지대 넘겨보다
정신 전신 혼란스런 18번 게이트 탈구 바라보다
흑발금발 금발흑발 서로 바뀐 동서양입맞춤보다
껴안은 귀걸이목걸이 사이 배꼽걸이도 훔쳐보다

2.
출렁대는 한 무리의 레게 머리 걷는지 춤추는지
갈가리 울긋불긋 구슬 끼운 머리 감는지 닦는지
팔목 발목에까지 고리 낀 건 모양인지 회한인지
찬란한 금붙이로 누구를 끌려는지 끌려가고픈지
둥, 둥, 검은 대륙 봉고 소리 들리는지 환청인지

3.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이든 유별나려는 욕망이든
그것이 너를 향한 것이든 나를 무시한 것이든
지금을 읽을 코드 없든 다빈치 코드 끼고 있든
나의 코드 유용 되지 않던 유용하고 싶지 않던
잠시 세상 엿보다 넋 놓다 구석기로 날아가다


하루의 소묘

알레그로Allegro
좀체 끌러지지 않는 일상日常의 실타래
그냥 싹둑 자른다
수신불가 일과日課는 유기 되고
안개 덮인 골든게이트 숲 속 다실茶室
뽀얀 아침을 담아 느긋이 마시면
꼭 꼭 잠겼던 단추들이 툭 툭 터지며
겉옷은 날아가고
가슴속으로 쏴-아 바람이 들이친다.


안단테Andante
서두르지 않고 과거에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박물관 개표소 할머니의 굿모닝인사가
굿모닝으로 들리는 평심平心이다
죽어서도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끌려나온 미이라,
아주 특별했을 그의 삶이
오늘의 평범한 삶에 농락되어
의미와 의미 사이에 길게 누워있다
어제의 혼魂들이 잡아끄는 밀실을 닫고
천천히 아주 느리게 살아있는 공간으로 나온다.

아다지오Adagio
햇살이 쏟아지는 우리들의 거리
스케이트보드, 롤러블레이드, 랩뮤직에
흔들리는 오색의 머리칼들
오늘의 진열장에서 풀려나 생생하다
아주 서서히 흐르던 하루의 리듬도
전광판 네온의 강약에 따라 악장을 바꾸며
빠른 템포로 돌아서기 시작한다
열정의 연주 서서히 막을 내리고
앞서가는 그리움이 그렇게 사라지고 있다.

*Allegro: 쾌속하게 / Andante: 느리게 / Adagio: 조금 빠르게


킹스캐뇬 목불木佛


*
이젠 육정의 끈마저 놓으라는 가
무너지는 엄마
세상의 손으로 아무리 짜 맞추어도
어그러지는 육신의 틀
끝내 쉰 살배기 아버지, 언니와 합류하신다
문득, 숲은 사라지고 황량한 벌판이다

*
산도 물도 깊다는 킹스캐뇬 세코이아,
수천 년 한 곳만 우러르는 삼나무 붉은 침묵
발등마다 늦둥이로 돋아나고,
무심한 사람의 걸음에 뭉개어진 풀꽃무리
눈물만 축축한 묵음의 숲,
분별 없는 번개에 누운 고목은
말없이 길 없는 길로 몸을 내어주고
허망, 그 것은 어느 숲에서나
다 깔고 앉아야 할 깔개였다.

*
그래도 꺼억꺼억
마음 끝자락 요동치며 버티는 삶
먼 듯 가까운 듯 쩌억- 쩍.
가슴 빠개는 숲의 소리 사이사이
여전히 싸라기같이 쏟아지는 햇살로 걸음을 낸다
징 하게 질긴 푸른 숨,
애오라지 못 떠나는 해오라기 날개를 일으킨다.


'분노의 포도'를 따라간 하루

꿈을진열한다진열장을지킨다
갇혀꿈만팔다보면내가꿈을파는지꿈이나를파는지
눈앞이하얘진다분노에갇힌다
진열장잠긴다일상을폐기하고잃은나를찾아떠난다

살리나스*하얀소금꽃늪지대
양상추딸기커리훌라워아리촉수십만개새파란얼굴들보다
태평양모래바람에등이휜나같은소나무에기대
얼굴없는분노를씻기고씻기다
존스타인백생가그의체취물씬한방에서분노의씨앗맛본다

오늘도국경너머실려오가는
21세기이동노동자아린눈동자보면존의분노어떤빛깔일까
허허실실하다분노의눈망울보다더붉은노을저편
해너미에는정말에덴의동산있을까정말로나의고향일까

다시차머리동쪽으로돌린다
그래,누구도고향가는길을노동이라부르지는않는다
일상은시간의그물을이어고향부모님께드릴옷한벌짓는일
더촘촘히따스하게지어서만나는날내어드리리
나른한부르조아적노동혐호증은밟고달린다.

*분노의 포도: John Ernst Steinbeck의 20세기 불황기 이동농장노동자들의 실상을 고발한 대표작.
그의 생가는 레스토랑이 되었음.


노인 치매병동 1.

단정히 넥타이를 매고
정기검진 오던 C 할아버지, 머리 속
프로그램이 엉키기 시작한다
하루는 미국에서 살고
하루는 한국에서 살며
자꾸만 길을 잃어버린다

제멋대로 빽 워드, 훠 워드
과거와 현재의 리모트컨트롤이 되지 않는
70평생 한편의 드라마 테이프,
엉켜버린 기계 속에 방치된다

수십만 번 왔다갔다, 왔다갔다 모두 지워진
말도 동작도 없는 테이프 안에
단 하나 지워지지 않은 센서가 있다
"여보, 나 왔어요. 눈 깜빡해보셔요"
7년을 하루같이 오가는 할머니의 말 한마디
인지된다. 깜빡인다.

C 드라마 끝내 폐기되지 않는다.


노인 치매병동 2.

사력을 다해 함께 달리던 애마
그렁 그르렁하더니 숨을 멈춘다
버거운 몸을 눕힌 노마老馬
견인차에 실려간다

나를 대신 할 사람 없는
세상 길에서 비바람 막으며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데려오고 데려가던
방패였던 노구
이제 그만 놓아 주라 한다

닳아버린 발굽,
깨어진 상처자국마다
듬성듬성 저승꽃이 번진
더는 스스로 기동할 수 없는 몸
폐차장으로 보내진 노모
나는 치매병동을 찾고 있는 것이다.


노인 치매병동 3.

5피트4인치 125파운드, 6기통
떠돌이 경주마馬, 나는 월말이면 언덕 너머
마장馬場으로 달려갑니다
입력된 달리기프로그램이 지워진,
혹은 지워지고 있는 노마老馬들의 마장입니다

이미 바통을 넘긴 주자走者들
그리움의 발굽은 보이는지
마장 입구를 향해있습니다
삶과 주검은 한 길 사이
동강난 시간 이편과 저편 사잇길에서
어제의 시간을 삭히는 다다른 형태의 고통이
디스플레이 된 조형물들입니다

투덜투덜 헛돌기만 하던 나, 여기에 오면
1.4kg 무게 1,400cc부피의 엔진
13억 개도 넘는 기억장치 다 해체하고
퇴마退馬들의 얼룩을 닦습니다
혈통꼴통밥통숨통변통에 덧달린 심통까지
6기통 내 몸통 속 덩달아 닦아냅니다

통통하던 길도 상처도 어둠의 손끝에
다 뜯겨나간 라구나 치매병동
한낮 코 속을 파고들던 욱한 말갈기 녹내마저
바람으로 흩어지면 그제야 히포클레네, 말의
샘물 마신 시인처럼 허공을 떠돌던 말馬의
말語조각이 이해됩니다  
한 덩이 부토腐土 냄새 내게서 납니다

언덕 아래서 돌아본 치매병동 먼 하늘로
지금 막 어느 철마 도착했는지 페가수스,
천마天馬 왼쪽날개가 유난히 반짝입니다.


정씨 할머니의 싸인

사무 일을 보는 나는 늘 사인을 요청해야 한다.
영한사전 찾아보니 사인sign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서명하는 일, 또는 그 서명, a printed symbol이다
설명 후 X표 있는 곳에 사인해주셔요
서류를 내민다.

남 할머니 꼬불꼬불 알파벳으로 미국 할머니가 된다
신 할머니 삐뚤삐뚤 국문으로 떳떳한 한국 할머니다
김 할머니 간단하게 金씨 가문의 여인으로 나타난다
박 할머니 투표처럼 X 가위표 기호로 왔음 표시한다
민 할머니 수전증에 반듯하던 민씨가 인씨로 바뀐다.

정 할머니 위아래 땡. 땡. 점만 두 개 찍어 놓으시며 사인이 뭐여, 기냥 손도장 치라면 좀 좋아, 손도장이 제일인겨 암만, 수수 천천 세상 열 손 다 찍어봐 하나같은 감? 암만, 천하없어도 못 바꾸는 게 손도장이여! 국문한문영문 전부 깜깜한 점 땡. 땡. 할머니 20년 미국 살이에 점만 치시다 세상 이치까지 훤해지셨다.

아무리 봐도 골마다 제각각 돌아오라 하신 세상 길 같은 지문도형 다 꿰뚫으시고 하늘가는 지름길, 하나 남은 육신마저 기부하는 사인을 했다 점. 땡. 땡. 마침표에 손도장까지 콱 찍어 마감했다.



합중국 고추장아찌

매운 기 땡땡한 헐러피뇨
멕시코 작은 고추, 갸름 날씬한 한국 고추와
몸통은 커도 심심한 미국 벨 페퍼,
귀여운 하바네로 칠리 까지

한 땀씩 숨통 틔워 새큼달콤 끓인 간장
목이 차도록 부어주었더니
어둑한 공간 속에서 무슨 일인지
날마다 합중국회의가 열린다
서로 다른 입김으로 제 속을 풀어놓은
이젠 집으로 돌아 갈 수 없는 사연들,
아리고 쓰린 눈물들
푸-욱, 쁘륵, 뿌르륵, 푸석이더니
얼추 화합되어 가는지 잠잠해진다.

이민단지 새큼달콤 새 맛에
마음 바꾸고 살다가
나 아닌 내나라 어떻더라 돌려차기 당하면
풋고추 때보다
훠얼 쫀득해진 장아찌도 쩌르르 성질을 낸다
마음은 누그러졌어도 남은 성깔로 속이 끓는다

제대로 익으려면 가슴에 고여 드는
짠맛에 익혀야 진미라는 말 잊고
빳빳한 자존심이 또 요동친다 -->삼십 년
이민 삼십 년 짠물에도 나는 아직 설익은 장아찌
가슴의 물기를 한 번 더 꽉- 짜낸다.



한국산 마늘

내가 살던 땅줄기에서 떨어져 나와
더욱 단단하게 잘린 중심 움켜쥐고
더욱 옹골차게 마른 껍질 움켜쥐고
더욱 알알하게 아린 속내 움켜쥐고
가닥가닥 제 뿌리를 익히고 익히다

겹겹 겉꺼풀 한 겹 한 겹 벗겨내면
아리디 아린 쪽 쪽 노란 얼굴 나는
한국미국중국이집트이태리멕시코産
다 모아 합중국세계 시장에 내놓은
올곧은 한국산 육 쪽 순종마늘이다

쓸린내 눌린내 비린내 버무려 역한
듯해도 딱 그 자리에 내가 없으면
무언가 그리운 향신香身의 몸이다
동쪽바다 건너온 웅녀熊女의 뿌리
누가 뭐래도 여여如如한 그 맛이다.



단추 병 어항의 하오


꼬불꼬불 실밥만 남기고 Y의 셔츠에서 달아난
단추고기 찾으러 단추 어항魚缸으로 갔지요
밑바닥 마고자 호박단추고기 뒤에 숨어있는
네눈박이 낚으려다 숨이 멎는 줄 알았어요
달각달각 사각사각 일제히 나요! 나요! 호소하는
외눈박이 쌍눈박이 세 눈, 네눈박이들
단추 구멍만한 눈썰미로 쌉쌀한 기다림 따먹으며
서로 모서리를 괴이고 받히고 몸을 포갠 채,
저 아니면 아니 되던 찬란한 시절 꿈꾸는 헤설은 눈빛,
그 아릿한 눈동자 저편 침묵의 섬
하나하나 눈 맞추며 꿈을 찾아주기로 했어요
혹 제 집 찾지 못하면 입양이라도 시켜야지요
드리운 손 그림자에 설레는 놈, 몸을 감추는 놈
포기하고 누운 놈, 곁다리로 따라가려 몸을 추스르는 놈
한 때는 죽도록 싫었던 묶임조차도 향수인 이민移民단지
단추고기 어장 너무나 익숙한 세상 같아요
따스한 손길에 달그락 사그락 몸을 뒤집고 구르고
잠시 소란해도 권태 사라진 단추 병 어항의 하오엔
꿈길이 반짝여요 귀향의 기적이 있어요.
혹, 우리도 이런 어항漁港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넘어지지 않는 남자*

추락은 준비가 없다
계산 없는 그 만큼
더 무너지는 허방 짚기, 그 짊어진
무게만큼 상처가 난다

한동안 볼 수 없던 미싱사 김씨
보증 돈 갚느라 삼 년
"그래도 건강엔 딱지 붙지 않아
맘대로 움직였지요...", 허허허.
몸은 단칸방으로 내려앉아도
더 건강해진 얼굴로 선뜻 제 믿음 지고 가는
그는 허방의 끝, 절망의 비탈에서도
끝내 추락하지 않더라

제 마음 부리는 법 익히 알고 있는
미싱사 김씨
부끄러움 없이 흔드는 등터진 고치 손에서
비단결 오색나비들이 풀려난다
자유로운 등판 위로 훨훨 날아간다.


먼 그대는 아름답다

먼 것이 아물아물
원시遠視인 내 눈은 사물을
생각으로 본다

가끔은 헷갈려도
선명하지 않은 물체 안경 없이
줌인zoom in하기를 고집한다

무언가 아른아른
희미한 것에서는 단내가 난다
생각의 조리개 오므렸다 졸였다
실눈으로 보는 동안 나의 사물들
정겹고 따뜻해지기 때문이다

그리움 사물사물
실타래 풀리며 덧눈 없이
마음의 눈으로 만나지는
먼 그대는 늘 아름답다
저 만치서도 단내가 난다.


앞과 뒤*

꽃이 피어 있는 동안은 꽃만 보느라
꽃이 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사람이 있는 동안은 웃음만 보느라
가슴 뒤의 슬픔을 보지 못했다

사람이 가고 향기만 남았을 때
그 미소가 배려인 것을 알았다

수많은 날 돌아선 자리를 본 후에야
겉보다 속에 더 많은 눈길 있는 걸 알았다

때가 되면 돌아서야만 하는 우리
떠나가도 곱게 기억되고 싶은 마음

사무치게 그리운 사람은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꽃 피우기


무는
따스한세상
구경나왔다햇살
따라하늘로하늘
로오르다갈
바람에



벗기고겨우내빈몸으로혼자떨다
떨다아지랑이모락모락피는
어느봄날말랑해진
가슴의진






터뜨린다꽃아기들쏟아진온세상꽃물이든다순해진다




4부
옥양목 바다



콜롬비아 빙하에서 그를 만나다


희끗희끗 오월의 은발 두르고
천지의 빙원, 아득한 설원의 수평 같은
흰 옷자락 펄럭이며 다가서던 그대,
끝날 줄 모르던 내 유랑의 여정, 기억의
빗금들 하나하나 풀리며 저물 녘 눈밭에 기-인
허리 누이듯 스러지는 나를 받아주는 그대
나 오늘 저무는 빙하의 하늘 끝에서
오래 간직만 했던 몇 만 년 늦은 답신을 보낸다.
젖은 날개 퍼덕이던 젊은 날의 푸른 꿈
둥둥 울리며 다시는, 다시는 떠돌 일 없는
천상에 나의 신방을 두고 불면을 거둔다
너무 오래 그리고 멀리 떠돌기만 하던 나
떠돌다 삭아 내린 은빛베일을 덮는다.
비로써 머-언 먼 산맥너머 콜롬비아 아사바사카
나는 마침내 그의 오월 신부가 된다
어떤 것도 다 보여주는
어떤 것도 다 덮어주는
그대 눈雪빛 눈眼빛을 맞추며.


천국의 미소微笑공모전*
- 사라진 미소를 찾습니다


응모를 원하는 사람은
소망이란 버튼을 누르십시오
주어진 공간을 보십시오
공간의 여건은 보이지 않습니다
뾰족하거나 둥글거나 거칠거나
주어진 것은 모두 당신 것입니다
모든 조건은 다르지만
모두 같은 조건이기도 합니다

방법은
소망의 빛으로 문을 찾는 일입니다
당신의 벽은 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둠의 문을 여십시오
하늘이 보일 것입니다

당신의 문에서 그 하늘이 보입니까?
얼굴을 보십시오
사라진 미소가 보입니까?

당신은 천국사이트에 가입 되셨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미소가 천국문의 패스워드입니다
로그인횟수에 따라
당신은 정회원이 될 것입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
- 물방울 1


하나와 하나 만나 둘이 되는 건
책 속의 답입니다
하나와 하나 만나 하나 되는 건
인생 속 답입니다
옹근 하나 깨어져 소수점 되면
과학의 계산 복잡하지만
세상의 계산 쉬워집니다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세상은
내가 없는 우리의 신비입니다.

하나와 하나 만나 둘이 되는 건
상술의 답입니다
하나와 하나 만나 하나 되는 건
사랑의 답입니다
옹근 하나 깨어져 소수점 되면
사랑의 씨앗이 싹틉니다
세상의 계산 무너집니다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세상은
내가 당신으로 채워지는 신비입니다.


밤비
- 물방울 2.

웬 전언 이리 급한가
줄줄이 하늘 길 뛰어내려
외등 혼자 지키는 세상을 간다

처마 끝, 매끄러운 유리벽
폭신한 목련 꽃잎, 뾰쪽한 솔잎,
가리지 않고 물길을 낸다

여기저기 묻어있는 흙먼지
숨어있는 세상 때 벗기며
어디도 모난 곳 없는,
어느 것 하나 감춘 것 없는 제 속 터뜨려
외등 빛 담아
온 세상 밝히는 빛(光) 길을 낸다

마음 찾아 물길 이어지는 밤
외등 빛줄기 하나 가슴에 켠다.



무지개
- 물방울 3

천상의 실오라기에 매달린 채
지상으로 뛰어내린 물방울들
골고루 햇살을 나눕니다

꽃잎파리 면벽面壁에 방울방울 꽃길 내고
깊은 땅속 파고들어
한 올 한 올 실뿌리 엮어
초목을 키웁니다

세상 곳곳 돌고 돌아
삼천 대간 건너는 빛 길 터
큰 빛 향해 가는 소원들을 만납니다

하늘과 땅 사이 찬란한 일곱 빛 길
사랑 없이 볼 수 없는 길
사랑 없이 건너갈 수 없는 길

세상의 좋은 것들
천상의 빛 오라기에 감겨
하늘로 올라갑니다.


비누방울 이야기*
- 물방울 4


나 바삐 세상길 가고 있을 때
맨들 하고도 향긋한 거품에 빠져든 순간
나를 감싸 안는 싸-아-한 오색 빛 무리
형언할 수 없는 감촉  
눈조차 뜰 수 없는 찬란함이여
온몸은 황홀, 하늘 머-얼리 떠올라도
순간의 환상은 덧없는 꺼풀
잠시 후 스러져야 하는 한 방울의 물방울일 뿐
함께 무리 지어 흘러갈 수 없음이여.

주신 완벽에서 택한 미완의 길을 걸으며
다시는 향기나 매끄러움은 탐하지 않을 것을
자신을 향해 그냥 맹물이라 웃지는 않을 것을
아, 한 때의 황홀은 한 생애의 값
다음 생엔 더 멀리 날아가고픈 꿈
아픔으로 터지더라도 말간 눈으로 남고 싶다
물방울 하나가 또 하나 품고 품어
돌아오라 하신 물굽이 굽이돌아
끝내 그 바다에 이르고 싶다.


빗소리 따라간 헨델의 메시아

성탄 전야
데이비스 심포니 홀로 가는 길
후-득 후-득 겨울비가 떨어진다
빗줄기 경쾌한 물방울 연주 시작한다
사거리 신호등 앞
둔탁하고 울려 퍼지지 않는 한소리
유난히 낯설다.

거리의 종이상자 집 하나
빗줄기를 정신 없이 삼키고 있다
지금 마-악 구부러지는 밑 동아리
검은 발이 움칠거린다

못 들었을까, 안 들었을까
푸른 신호등 따라 우르르 지나간다
붉은 신호에 걸린 마음을 끌고
나도 급히 발길을 옮긴다

건드리면 폭삭 주저앉을
종이 집의 빗방울 연주와 헨델의 메시아
힘찬 합창 사이 얼굴 없는 크리스마스의
음표들이 표류한다
물음표와 느낌표들이 역류하는 심포니 홀
수많은 입들이 메시아를 불러대고 있다.



쿼바디스 도미네

사면 똑 같이
하얀 대리석 지붕, 하얀 대리석 기둥,
하늘에서 보면 거대한 십자가 형상의
샌프란시스코 초현대식 웅대한 건물,
세인 메리 성당

지금 막 가을 관광버스
사람들을 쏟는다 모두들 성전 앞으로 간다
그 옆 아직 여름 샌들에 반바지, 반 팔 셔츠
수염 더부룩한 걸인을 피해
둥그렇게 새 길을 만들며 성전으로 들어간다

단 한사람의 손길도 없이
홀로 남겨진 그, 돌아선 눈망울 빛난 건
햇살인지? 눈물인지? 닫힌 저 성전은 누구의 집인지?
아름답고 거대해질수록 가난에서 멀어지는
성전처럼, 그의 발걸음 사람들에게서 멀어져간다
검붉은 그늘지고 가는 등뒤로 길이 지워진다-

어디로 가는 걸까? 허옇게 빛 바랜
Love Jesus 셔츠, 풍요의 도시 맨발로 걸어가는
거리의 예수 같은 그는.

*폴란드의 작가 헨리크 솅키에비치의 장편소설(1896).
Quo Vadis Domine: 라틴어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는 뜻



참 이상하기도 합니다

참 이상하기도 합니다
왜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지
왜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는지
왜 고맙지 않던 것이 고마운지
지금 내딛는 걸음걸음
내 땀방울 힘인 줄 알았는데
이미 준비된 것이었나 봅니다
이제 등뒤 기도소리 들립니다


참 이상하기도 합니다
나는 내가 사는 줄 알았는데
평생 타국을 떠도신 할아버지
평생 그리움으로 사신 아버지
나를 살고 있습니다
돌아가는 표 한 장의 꿈
밤마다 만남을 배웅합니다
타국살이도 대代물림인지요
참 이상하기도 합니다만
먼저 놓으신 디딤돌 따라
아직 조금 더 가야 할 길
차마 서럽다는 않으렵니다.


감나무의 세한도歲寒圖

무서리 지고 나면
어찌 저리 환할까,
달뜬 홍시감만 달고 서있는 나신裸身
어찌 저리 당당하게 서있는 걸까

니들이 내 힘이라는 아버지 말씀
피난시절 서울내기 다마내기 서러움
무등 태워 달리시던 그 어깨처럼
관절마디 단단한 나목裸木엔
까뭇까뭇 납작 붙은 감꼭지, 영락없는 감 배꼽들

요거 누구 꺼? 하시던
검지 끝 흐무러진 내 아버지처럼
감 배꼽 잡고 있는
아, 저것이었나, 감나무의 당당함은...

닥지닥지 붙어있는 감 배꼽들이
동冬장군과 맞설
감나무세한도歲寒圖의 중점표지부호인 것처럼,
아버지 어디 계시든
내 세한도의 중심 포인트인 것처럼,
우리는 이렇게 죽기로 쥐고 있는 불씨 하나로
겨울 강을 건너는 것이다.



유성流星


눈먼 새벽 별 떨어질까
펴놓은 치마폭은
손만 대면 절로 우는 바다
어머니 바다

그리워 그리워
애타게 물결치는 바다여
눈감고 떨어지는
기-인 꼬리별 하나여

저별 뉘별이랴
밤새 출-렁 출-렁 우는
수심 깊어
더 푸르른 옥양목 바다

이 밤도 눈먼 별 하나 떨어질까
펴놓은 치마폭에
못 잊어 떨어지는 기-인 꼬리별
내 별.



돌아온 고향

'저등-, 저등-'
붉은 새 울던 산모롱이
어여 가! 흐린 시야에 꽂힌 손사래
젖어 오그라들던 홑적삼 옷고름,
못 본 체 돌아서던 고향

'저등-, 저등-'
허허한 바람 속
잡초만 삐죽 삐죽 솟은 무덤가
차마 허물지 못했던 등짐에서
쏟아지는 시퍼런 나비 떼 보셨는지

'저등-, 저등-'
울음 업고 건너신
한恨의 바다 다시 건너
시간같이 허망한 나
아직도 믿고 기다려 계시네.



어머니의 설날

섣달그믐
싸락눈으로 빚으시던 엄니의 설 떡
모천으로 회귀한 빙어氷魚의 입김에
포실히 익는다

솥뚜껑 위 떡가래 마냥
누릇누릇 익은 구수한 추억
먼 산의 노송老松, 눈에 겨운 팔 꺾이어도
더는 서럽지 않다 하시던 우리 엄니

넙죽넙죽 햇날 같은 정월 인사에
두둑해진 복주머니 굵은 그리움
어디를 흘러도 만나지는 샛강에 푼다

싸륵싸륵 어미냄새 따라
튀어 오르는 연어의 비늘 치는 소리
늘 거기 계시는 엄니의 웃음소리
검불 같은 세월은 언 듯
엄니의 설날 흉내를 내고 있는 나에게
한 발 다가서고 있다.



엄마의 골무*

반짇고리에서 또록 굴러 떨어진
가죽골무
바짝 마르고 뻣뻣해도
여전히 엄마의 검지

엄마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면
고즈넉한 풍경 속 슬픔은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지고
검지 뒤쪽으로 난 엄마의 길
비밀 부호처럼 희미하게 떠오른다

아이처럼 뒤뚱뒤뚱
한 걸음씩 걸음을 떼다 멈추어 서면
실핏줄처럼 퍼져 가는 섬세한 손놀림,
아직도 늙지 않은 엄마는
새파란 시간의 그물을 곱게 짜
물려 입을 배냇저고리 하나 깁고 있다

엄마의 가죽골무
나의 태궁은 오늘도 따뜻하다.



밥통*

밥은 먹었니?
늘 우리의 밥이셨던 엄마

수저로 먹여주시고
수저를 쥐어주시고
수저를 넣어주시며
늘 먹이시는 것이 삶이셨던 한 생
밥 대신 죽도 못 넘기시는 병실에서도
밥은 먹었니?
밥덩이에 목을 매신다.

밥이 되기까지
물은 얼마나 잦아들어야 하는지
검댕이 밑바닥 보지 못하고
"요즘이 밥 먹는 세상이유?"
정말 푼수 없던 밥통이었다.

제 속 숯덩이 되고서야
뜸이 들어가는지
아이들만 보면
"밥은 먹었니?"
꼭 엄마 같은 밥통이다

퍼주기만 하는
밥통, 사랑에 목을 맨다.



고모님과 동정

빳빳한 깃, 흰 동정을 보면
고모님 생각이 난다
고모님이 보인다

평생 동정녀童貞女로 사신
친정 고모님, 빳빳한 동정처럼 곧은 마음으로
빳빳한 하루를 총,총,총
만나는 길목마다 만나는 손길마다
정갈한 동정처럼 닦아주셨다
하루의 나눔도 구김 없이 반듯하게
하얀 동정처럼 준비하셨다

한번 써보지도 못한
고모님 아기집처럼 정갈한 여든 살 처녀
조금 삐뚤어진 치열 때문에
크게 웃진 않으셨어도
이제 처음 만난 하늘신랑 앞에서
파안대소하실 것이다
틀 없는 자유일 것이다

고모님 그리운 날은
뽀득뽀득 손빨래를 한다
뽀얗게 빨아 나를 넌다
흰 속곳 눈부신 파안대소
고모님을 만난다

빳빳한 깃, 흰 동정을 보면
고모님이 보인다.
고모님을 만난다.



풀피리 소리

외로운 날, 가슴을 문지르면
삐-리-리-리 풀피리 소리가 납니다
숭숭 한숨이 빠져나간 구멍마다
고향집 뒤란 대숲 청 댓잎 울음소리 납니다
시퍼런 강물 흘러가는 소리 들립니다

소리 속 저편,
쪼그라진 젖꼭지 움켜쥔 여덟 살
등 토닥이는
할머니의 떨리는 손길, 큰 댓잎 풀피리 불고
아이는 여린 댓잎 지청이고
밤새 허위허위 바람처럼 흘러
가슴이 망가진 엄마피리 찾아갑니다.

외로운 날, 가슴을 문지르면
삐-리-리-리 풀피리 소리가 납니다
댓잎 자장이는 할머니 피리소리 따라
고향집 뒤란 작은 댓잎 잠이 듭니다

겉만 단단한 대. 나. 무.
늘 속바람에 휘청휘청
외로움이 진동하면 풀피리가 됩니다
한숨 속 길이 보입니다.



아름다운 남자*

토요아침
앞치마를 걸치고 아내의 흉내를 내는
남자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쌀 씻어 앉히고 뚜벅뚜벅 무우 썰어
쌀뜨물에 국 끓이고, 간 맞추느라
후룩 후룩거리는 어설픈 손
서류를 만지는 손보다 더 믿음직하다

아내들이 그리운 건
집에 없는 성공한 남자가 아니다
옆에서 왜냐고 묻는 남자는 더 더욱 아니다
그냥 설익은 선웃음에 말아 온
말 없는 국밥 한 그릇 같은 남자

토요일에,
신열에 울고 싶은 그런 토요아침에
달각달각 설거지 소리로 부엌을 채우는
그런 남자
장미보다 아름다운 남자다.






우리의 집
껍데기 건물(house)이거나
알맹이 가족(family)이거나
화목할 집輯이거나
샘솟을 집潗이거나
계승할 집緝이거나

희로애락喜怒愛樂 다 모인 집集은
마지막까지
놓지 못하는 집執이다

산길을 따라
산등성에 오르면
집執은 사라지고
우리의 집(home),
마음이 있다.





□ 발문


존재적 가치와 ‘알맞게 떠 있음’의 미학
-강학희 시집 「오늘도 나는 알맞게 떠 있다」에 부쳐-

문인귀 시인


  “알맞다”라는 말은 어떤 상항에서든 긍정을 의미한다. 알맞음은 존재(existence)로써 자생에만 의한 것이 아니라 외적영향의 수용에서도 이루어지는 공존적(共存的) 가치를 내포하는 보다 포괄적인 존재론(ontology)적 의미인 것이다. 그것은 그 어떤 곳에서든지 무엇인가가 존재함으로 균형을 이루고 평형을 유지해내는 가치를 말함이다.

  강학희 시집 「오늘도 나는 알맞게 떠 있다」를 살펴보면서 전체 4개의 묶음으로 구분된 시집 여기저기에서 이정표의 푯말처럼 박혀있는‘꼭지’ ‘배꼽’등 몸의 중심점, 물체의 심부(心府)를 만나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것들은 이미 떨어진 꼭지로, 혹은 퇴화된 명(命)의 흔적으로 가치에 앞선 존재 그 자체를 암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시집 전반에 걸쳐 존재에 대한 긍정적 사고(思考)를 펼치는 포석으로 ‘가치에 앞선 존재’의 필연성을 부각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생명의 발원으로부터 시작 된‘삶’또는 ‘있음’에 대한 풀이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강시인의 사물에 대한 관찰력은 시공(時空) 어느 쪽도 거저 넘김이 없는 과학적 분석에 의한 진실의 판별(判別)로 “좋은 관찰이 좋은 시를 낳는다”는 시 창작의 기본 공식에 충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이런 점은 시집 전체의 균형을 잡아나가는 탁월한 능력을 갖게 한 것이며 또한 시 쓰기에 임하는 마땅한 시인의 자세로 강학희 만의 독특한 시 세계의 설정을 이루게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 어느 것
  꼭지에서 떨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단절된 한 몸의 두 조각
  하나씩 품고 앉아
  내 안엣 깍짓손 풀지 않으면
  섬 아닌 것도 섬으로 남고
  -중략-
  
  닿으려, 닿으려 손 내밀면
  상처는 아물리듯 사라지고
  둘이는 하나 되어
  -중략-

  섬으로부터 돌아와 만나는 우리
  그렇게, 다시
  만나질 섬은 섬이 아니다  
                    
                       -<섬> 중에서

  섬은 일반적으로 독존적(獨存的) 사물로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강시인은 이러한 인식에 가려진 존재의 가치관에서 본래의 존재적 생명력을 살피고 있다. 따라서 섬의 존재는 인식의 차이에서 일어나는 착시(錯視) 현상에 의해 고도(孤島)로 처리되고 있는 것이지 ‘꼭지에서 떨어졌다’고 해서 외톨이가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물이 빠지고 나면 다시 육지로 환원되는 땅덩어리라는 것, 나아가 개체(個體)의 고정관념이나 아집을 벗어나 ‘외로운 섬’으로 고집하지 말고 같은 뿌리의 관련성이라는 긍정적 인식으로 보자는 것, 다시 말해 “내 안의 깍짓손 풀고, 닿으려, 닿으려 손을 내밀면 상처는 아물리듯 사라지고 둘이는 하나 되는”그러한 유토피아적 삶을 구가해 가자는 것이다.  

  뱃심 없는 날
  뿌리와의 은밀한 통로
  배꼽을 꾸-욱 꾹, 눌러보라

  꼬리-이- 달달
  묵은 젖내 꼭지 끝에서 번져나는
  젖빛 감 꽃
  푸른 잎새 도닥거림에
  휘청하던 등줄기 물이 차오르고
  자존심이 빳빳이 서는
  몸의 중심점은 배꼽이다
  -중략-

  배꼽과 배꼽이 만나
  생명의 불꽃 이어지고 내가 존재된다
  -중략-
  
  늘 거기 있는 모태, 회귀의 길이 보인다
  모천으로 회귀하는
  모든 비밀센서는 바로 배꼽 아래 숨겨져 있다    

-<배꼽>중에서

  삶은 늘 오름과 내림의 공존 속에서 지속된다. 만약 자신의 삶이 내리막 쪽으로 기운다면 오르막 쪽은 힘을 잃을 것이다. 이럴 때 자신을 어떻게 추스를 것인가. 강시인은 우리더러‘배꼽을 눌러보라’고 말한다. 그러면 늘 거기에 있는 중심의 축인‘근본’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본질로부터 시작되는 것에서 해결을 찾아야 하고 또한 그 본질이란 배꼽이 배꼽을 만난 그 생의 중심점, 즉  배꼽아래 숨겨져 있는 그 ‘점’에 있는 존재 태동의 동기로 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나는 ‘가치적 존재’에서보다 ‘존재적 가치’에 대한 일종의 책임론을 펼치는 그의 주장을 엿보게 된다.

  <담쟁이 넝쿨>에서 강시인은 꽃에 대한 정의를 꽃이라는 일반적 인식에서가 아닌 ‘존재’ 그 자체에서 찾아내고 있음을 본다. 아버지는 화자(話者)에게 “너는 꽃이다”고 한다. 그러나 화자는 자신을 잎이지 꽃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벽과 담과 그 많은 길들과 틈새들, 그리고 찔리고 데이고 쓸리는 그 과정을 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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