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해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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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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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국립미술관 서울 전시동 앞에서 파인더에 담은 '미혼(美魂)'들 / 소니a7M4 카메라-탐론 28-200mm f2.8~5.6  줌 렌즈 S 1/100  f5.6  Iso 320 28mm / 2025년 10월19일 

 

촉에서 소파라로 향하는 험난한 여정

 

(▲총 거리: 5.200킬로미터 / 총 소요 기간:12개월

▲통과 지역:청두-쿤밍(미얀마와 라오스 접경지)-미얀마-파탈리푸트라(고대 인도 마가다 왕국의 수도)-데칸고원(인도 남,중부에 걸친 장대한 고원지대)-인도-서아시아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세계적인 무역항이자 불교와 브라만의 성지(聖地) 소파라)

 

조갑재가 청두를 떠난 날, ()의 하늘은 맑았고 공기는 아직 봄의 끝자락처럼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부드러움은 출발의 인사일 뿐, 길은 곧 사람의 뼈와 마음을 시험한다는 것을.

 

그는 말 두필을 이끌었다.

한 필은 붉은 갈기와 단단한 다리를 가진 수컷, 이름은 고구려(高句麗)”라 불렀고, 다른 암컷은 부드러운 밤빛이 도는 갈색 말로, 그는 국내성(國內城)이라 이름 지어 불렀다.

고구려는 길을 믿었고, 국내성은 사람을 믿었다.

조갑재는 두 애마(愛馬)의 성정(性情)을 꽤뚫었다.

먼 길에서 말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동료였다.

동료를 잃으면 어찌되겠는가. 여정은 끝나기 마련이었다.

 

조갑재는 소파라까지 14개월을 계산해 두었다.

하지만 길은 계산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길은 사람과 날씨와 전쟁의 소문과 도적의 기분과, 강의 물살과 산의 숨결로 움직인다

청두를 벗어나자 촉의 평야는 차츰 사라지고, 산의 골격이 모습을 드러냈다.

관문마다 한나라 병졸들이 서 있었다.창끝이 햇빛을 받아 번들거렸고, 병졸들은 조갑재의 옷차림을 훑어보며 물었다.

어디로 가는가?”

조갑재는 담담히 말했다.

서쪽으로, 더 서쪽으로.배움과 빛을 찾아.”

그 말은 늘 통했다.

세상은 학문을 핑계로 한 여행자를 의심하면서도, 동시에 존중했다. 그리고 그 존중이 때로는 길을 열어주었다.

 

산길 초입에서 그는 첫 번째 동행을 얻었다.

가죽제품을 파는 젊은 상인이었다.이름은 마건(馬健).그는 남쪽의 소금길을 따라 내려가다, 쿤밍을 거쳐 더 먼 서쪽으로 가려 했다.

 

혼자 가면 위험합니다.”

마건이 말했다.

말이 두필이면 더 눈에 띄죠. 도적들은 말부터 봅니다.”

조갑재는 말고삐를 정리하며 답했다.

눈에 띄는 것을 숨기려다 더 잃을 수도 있다. 다만 대비할 뿐이다.”

마건은 웃었다.

외모는 매우 약해 보이는 데, 말씀은 사내 대장부처럼 하십니다.’

그렇게 그들은 함께 산을 내려갔다.

 

쿤밍

쿤밍에 이르자 하늘이 가까워졌다. 고원은 넓었고 바람은 거칠었다. 낮에는 태양이 가까이 붙어 살을 태우고, 밤에는 기온이 급격히 떨어져 뼛속까지 차가웠다.

 

조갑재는 그곳에서 원난의 말장수들과 술을 마셨다.

말장수들은 말의 다리와 이빨을 보듯 사람의 눈을 보았다.

그대는 어디까지 가시나?”

말장수가 물었다.

소파라.”

그들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마치 한번 더 확인하듯 되물었다.

인도 바다의 소파라?”

조갑재가 고개를 끄덕이자, 말장수는 혀를 찼다.

그건 길이 아니라 생애 야.”

조갑재는 잔을 내려놓고 답했다.

그렇다면, 내 생애가 그 길을 선택한 것이다.”

 

쿤밍 시장에서는 언어가 뒤섞였다.

한나라의 말, 남방 부족의 말, 인도 상인의 발음, 그리고 미얀마 쪽에서 온 상단(商團)의 거친 억양. 그 속에서 조갑재는 한가지를 배웠다.

어느 고개가 무너졌는지, 어느 강이 불었는지, 어느 촌락이 도적에게 털렸는지, 어느 성문이 통행세를 물렸는지, 그 모든 정보는 시장의 소음속에서 흘러다녔다.

조갑재는 쿤밍에서 잠시 머물며 말 두필의 편자를 새로 박았다.

대장장이가 말했다.

이 편자는 한달을 버틴다오. 그러나 길이 그대를 두 달로 만들면, 그때는 말이 아니라, 그대가 먼저 부서질거요.”

조갑재는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서지지 않도록, 내가 먼저 길을 바꾸겠소.”

 

원난과 미얀마로 넘어 가는 길

원난 남서부로 내려갈수록 숲은 짙어지고 길은 좁아졌다.

안개는 낮에도 걷히지 않았다. 때로는 앞사람의 등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 구간에서 조갑재는 도적을 만났다.

정확히 말하면, 도적이 그를 만났다. 해가 기울 무렵, 협곡의 목을 지날 때였다.

바위 뒤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활을 든 자, 창을 든 자, 칼을 든자. 그들은 말을 먼저 봤다.

말 두필. 짐도 제법 많구만.”

도적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빼어난 미남인 두목이 어설픈 한어(漢語)로 말했다.

이 곳을 지나려 하거든 길세를 내야 한다.”

곁에 선 젊은 가죽장수가 손을 떨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조갑재는 말고삐를 놓지 않은 채, 두목을 바라보았다.

길세는 길을 지키는 자에게 낸다.” 조갑재가 말했다.

너희는 길을 지키지 않는다. 길을 찢을 뿐이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두목이 웃었다.

말이 많으면 목숨이 잛다.”

조갑재는 천천히 자신의 허리끈을 풀었다. 거기에는 날카로운 검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검을 뽑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금화를 두 개 놓았다.

그가 말했다.

이건 길을 찢은 대가다. 더 요구하면 너희는 이 금보다 값싼 목숨이 된다.”

그말이 끝나자 적토마 고구려가 힘차게 울었다.

동시에 앞발을 들어 힘차게 땅을 굴렀다.

도적들은 잠시 멈칫했다.

말의 성정은 사람의 기세를 중폭시키기도 한다. 고구려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두목은 조갑재를 이리저리 뜯어보며 고민하다가 선뜻 금화를 주워 들었다.

오늘은 운이 좋구나.”

두목은 부하들을 향해 턱으로 신호를 보내고 등을 보이며 사라졌다.

이날 밤. 마건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그다지도 침착할 수 있습니까?”

조갑재는 불빛을 바라보며 답했다.

침착한 것이 아니라….두려움을 쓸모 있게 만드는 것이다.”

 

미얀마의 자연과 파고다의 그림자

국경을 넘자, 땅의 냄새가 달라졌다.

비가 잦았고, 강은 넓고 깊었다. 숲은 울창했고,벌레는 끈질겼다. 말들은 피부에 달라붙는 습기 때문에 쉽게 지쳤다.

   

조갑재는 어느 마을에서 티벳 출신의 수행자를 만났다. 그는 북쪽에서 내려오다 길을 잃어 이곳까지 떠밀려왔다.

수행자는 조갑재의 말들을 보고 말했다.

말은 사람을 태우지만, 동시에 사람의 업()을 태운다.”

조갑재가 반색을 하며 물었다.

업이란 무엇인가?”

수행자가 답했다.

그대가 떠나온 것을 잊지 못하는 마음, 그리고 그대가 도착할 것을 과도하게 믿는 마음. 둘 다 업이다.”

조갑재는 잠시 침묵했다.

그 말은 묘하게도 맞았다.그는 떠나온 고구려의 하늘과 청두의 시장통을 잊지 못했고, 아직 보지 못한 소파라의 풍경을 생각하고 있었다.

 

젊은 가죽장수는 밤마다 작은 파고다 앞에서 기도했고, 조갑재는 불가(佛家)의 언어를 거의 깨우쳤지만, 그 침묵이 주는 안정감을 이해했다.

길 위에서 인간은 종종 언어보다 침묵으로 살아 남는다.

 

미얀마의 큰 강을 건널 때, 조갑재는 하마터면 거의 모든 것을 잃을 뻔했다.

도강(渡江)용 뗏목이 물살에 휩쓸렸다. 순간, 국내성의 앞다리가 미끄러지면서 물속으로 빠졌다.

조갑재와 마건은 동시에 강에 뛰어들었다.

강물은 냉정했다.

사람을 끌어당기고, 발을 묶고, 숨을 빼았았다. 조갑재는 국내성의 고삐를 붙잡고 물살을 거슬러 헤엄쳤다.마건도 곁에서 거들었다.

두 사람이 온 힘을 다하자 말은 결국 뗏목위로 올라왔다.

국내성은 떨고 있었고, 조갑재의 손은 피가 흘렀다.

그러나 살아 있었다.

조갑재는 자신의 생명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필사적 노력을 해 준 마건을 진심으로 위로했다.

 

이날 밤.

조갑재는 국내성의 목을 끌어안고 말했다.

너를 잃었으면나는 길의 절반을 잃었을 것이다.”

암컷 말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그 숨은 마치

살아 있다는 말 같았다.

 

파탈라푸트라

드디어 조갑재는 인도의 고대 역사속으로 들어섰다.

파탈라푸트라에 이르자 도시의 규모는 상상을 넘어섰다.

성벽은 길고,시장은 끝이 없었다. 갠지스강은 단순한 물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믿음이 흐르는 거대한 혈관 같았다.

 

그곳에서 조갑재는 블교 승려, 자이나 수행자, 브라만 학자, 페르시아 상인들을 한꺼번에 만났다.

그들은 서로의 진리를 부딪치며 살았고, 동시에 서로의 밥을 나누며 살아갔다.

키가 조갑재의 어깨에 와닿는 브라만 학자가 그에게 물었다.

동방의 학자여, 그대는 무엇을 찾는가?”

조갑재는 대답했다.

학자가 웃었다.

빛은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식에도 있고, 욕망에도 있다.그대는 어떤 빛을 찾는가?”

조갑재는 잠시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말했다.

사람을 살리는 빛.”

그 말에 곁에서 경청하던 승려가 고개를 끄덕였고, 상인은 웃었으며,브리만은 눈을 가늘게 떴다. 각자의 방식대로 그 대답을 받아들였다.

 

파탈리푸트라에서 조갑재는 상단에 합류했다.

소파라로 가는 길은 혼자서는 너무 길었다. 때마침 페루시아 상인이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합류하라고 권했다.

우리 상단도 소파라까지 가오.”

상단은 안전과 정보, 그리고 생존의 확률을 제공했다. 대신 그는 자신의 속도를 일부 포기해야 했다.

길은 고집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조율로 완주하는 것이었다.

 

신들의 강 갠지스

갠지스 강을 따라 서쪽으로 가는 길은 풍요로웠지만, 그만큼 혼란스러웠다.

이 길을 따라 사람과 물건은 오갔지만, 종교는 그림자만 이동했다.

성지에는 순례자들이 넘쳤고, 떠돌이들이 넘쳤고, 사기꾼들도 넘쳤다.

 

두필의 말을 이끌고 앞으로 나가는 사이 한 늙은 여인이 조갑재의 앞을 막았다.

여행자여, 물 한모금만.”

그녀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상단 가운데 누군가가 말했다.

이런 사람들 중엔 거짓이 많소.”

하지만 조갑재는 가죽 물주머니에 담긴 물을 선뜻 내주었다.

거짓이 있어도, 목마름이 사라지는 것은 참()이다.”

 

그날 밤, 상단의 우두머리인 페르시아인이 말했다.

그대는 위험한 친절을 갖고 있소.”

조갑재가 대답했다.

친절이 위험한 길이라면, 나는 위험을 감수하겠다.”

페르시아인은 잠시 조갑재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사람은 오래 살거나, 빨리 죽는다.”

조갑재는 웃지 않았다.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고통의 정원(庭園)데칸 고원   

갠지스 유역을 벗어나 남서쪽으로 내려가는 순간, 땅은 다시 바뀌었다.
데칸 고원은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리기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평탄해 보이지만 끝이 없고, 높아 보이지 않지만 숨이 가빠졌다. 바람은 뜨겁고, 물은 귀했다.

말들은 지쳤다.
국내성은 특히 더 힘들어했다. 강을 건너며 몸이 상했기 때문이다.

조갑재는 말의 먹이를 먼저 챙겼다.
자신은 마른 곡물 한 줌으로 버티면서도, 말에게는 콩과 풀을 구해 먹였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혀를 찼다.

짐승에게 너무 정을 주면, 사람이 먼저 죽는다.”

조갑재는 대답했다.

짐승이 아니라, 내 발이다. 내 심장이다.”

고원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도적이 아니라물의 착각이었다. 멀리서 반짝이는 것은 물이 아니라 햇빛이었고, 사람들은 그 착각 때문에 방향을 잃었다.

그들은 한 번 길을 잘못 들어, 이틀을 허비했다.
그 이틀 동안 조갑재는 처음으로 마음이 흔들렸다.

내가 너무 멀리 온 것이 아닌가.”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소파라의 회랑은 정말 존재하는가.”

그때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말했다.

길이 너를 속이는 게 아니다. 너의 마음이 너를 속이는 것이다. 마음은 늘지금을 견디지 못해을 묻는다.”

조갑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잔인했지만 정확했다.

데칸 고원의 마지막 구간에서 폭우가 쏟아졌다.
땅이 진창이 되었고, 말발굽이 빠졌다. 고구려는 버텼지만 국내성이 넘어졌다. 조갑재는 국내성의 옆구리에 어깨를 대고 밀었다. 국내성의 눈에 공포가 가득했다.

괜찮다.”
조갑재가 말했다.
넘어져도 된다. 그러나 일어나야 한다.”

말이 일어섰다.
그 순간 조갑재는 깨달았다.

그는 이 말을 말에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하고 있었다.

 

소파라 말하는 자들의 도시

마침내 바람이 바뀌었다.
염분이 섞인 공기가 코끝에 닿았다. 바다가 가까웠다.

항구에는 돛대들이 숲처럼 서 있었고, 시장에서는 언어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향료와 직물, 금속과 곡물, 그리고 사람의 사연이 뒤섞여 있었다.

소파라 항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였다. 바다는 푸르고 잔잔했으나, 항구의 공기는 끓고 있었다.

향료(香料)와 젖은 밧줄, 생선 비린내와 뜨거운 차 향이 뒤섞여, 사람의 숨결과 함께 부딪혔다.

부두에는 페르시아 상인의 검은 천막이 펼쳐져 있었고, 로마인의 짧은 명령이 여기저기서 튀어 나왔다.

헬라어는 물결처럼 흘렀고, 산스크리스트(인도의 브라만 학자와 승려들이 사용한 고급 문어文語 / 일반 백성은 따로 프라크리트어를 사용)의 억양은 바람을 타고 길게 늘어졌다.  

그는 고구려와 국내성을 이끌고 천천히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적토마 고구려는 마지막까지 당당했고, 국내성은 지쳤지만 눈빛이 살아 있었다.

말들 사이로 걷고 있는 조갑재는 먼 길의 피로를 몸에 묻혔으나, 걸음은 여전히 반듯했다.

국내성에서 출발한 날의 결심이, 소파라에 이르러도 닳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그는  지쳤다. 지식이 아니라 육체가 지쳤다. 사람의 몸은 사유(思惟)만으로 버틸 수 없으니까.

조갑재는 항구 주변에 위치한 객사(客舍)에 여정(旅程)을 풀었다.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3층 규모의 객사는 웅장했다.

수백명을 한꺼번에 수용하는 시설이었다.

객사는 헬라와 로마, 페르시아, 에굽, 중국(고구려 상인이 이곳에 머물렀다)출신의 무역상과 팔레스타인에서 건너 온 유학생, 여행자, 유학자, 승려가 뒤섞여 숨을 고르고 있었다.

밤이면 각자의 언어로 기도하는 소리가 벽을 타고 흘렀고, 낮이면 말발굽 소리와 짐꾼들의 고함이 마당을 채웠다.

조갑재는 이곳에서 사흘을 쉬었다.

물로 먼지를 씻고, 말들에게 콩과 밀을 섞은 사료를 먹이고, 상처 난 곳을 살폈다.

그는 그제서야 자신의 몸이 얼마나 멀리 왔는지 실감했다.

그리고 셋째 날 아침.

그는 고구려 복장의 옷깃을 여미고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소파라 브라만 대학.

서해안 아라비아 해()일대에서 유명세를 떨친 브라만 대학은 항구의 소란과는 다른 감각으로 숨 쉬었다.

장년(壯年)의 허리둘레 만한 회색의 돌기둥과 회랑(回廊),마치 산수화(山水畵)를 풀어놓은 듯한 아름다운 정원과 연못이 질서 있게 배치돼 있었다.

바람이 들어오되 거칠지 않았고, 햇빛이 비치돼 눈을 찌르지 않았다.

학문은 이곳에서 물처럼 흘렀다.

조갑재는 회랑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청두의 학당도 훌륭했으나, 여기는 더 오래된 숨결이 있다.

 

비슈바나타

조갑재가 문 앞에 섰을 때, 문지기는 동방인의 얼굴을 잠시 살폈다.

낯선 복식, 어눌한 산스크리스트 문어 발음, 그러나 조갑재의 눈빛만은 낯설지 않았다. 신뢰의 눈빛이었다.

조갑재는 품에서 조심스럽게 봉투를 꺼냈다.

붉은 끈으로 묶인 추천장.

청두의 대사부 곽인이 써 준 것이었다.

비슈바나타 대학자께 전해주시오.”

어떨 결에 봉투를 받아 든 문지기가 안으로 들어갔다.

조갑재는 회랑 아래에서 기다렸다.

기다림은 길 위의 사람에게 익숙했으나, 오늘의 기다림은 달랐다.

잠시 후, 발소리가 들렸다.

흰 옷자락이 조용히 흔들리며 한 노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슈바나타였다.

움푹 패인 그의 눈빛은 깊고 고요했다.

사람을 꿰뚫어보되, 찌르지 않는 눈.

조갑재는 본능적으로 예를 갖추어 고개를 숙였다.

비슈바나타의 빛나는 눈빛이 조갑재의 전신을 비췄다.

그의 외모를 관찰하는 순간이었다.

눈이 부실정도로 준수하다.샤카무니(세존世尊 붓다)의 환생 같구나.’

그렇다.

조갑재의 얼굴은 조각처럼 정제된 선을 가지고 있었다. 이마는 단정했고, 눈매는 맑고 깊었다. 콧날은 곧게 뻗었으며 입술은 과하지 않게 다물려 있었다.무엇보다 그의 표정에는 오만이 없었다. 그 아름다움이 사람을 밀어내는 대신, 이상하게도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는 잘생긴 남자였고, 누군가가 오래 그려온 이상(理想)이 현실에 내려앉은 듯한 인상이었다.조갑재의 얼굴은 헬라의 대리석 조각들이 가진 아름다움과 부드럽고 완전한 균형이 기이하게 살아 있었다.’

조갑재의 이목구비를 살핀 대학자의 눈빛이 체구에 실렸다.

그의 몸은 단단했다.
학자라기엔 어깨가 넓었고, 걸음은 가볍되 흔들림이 없었다. 팔뚝에는 쓸모 없는 힘이 아니라, 긴 여정을 버틸 수 있는 근육이 붙어 있었다. 마치 전사 핵토르가 갑옷을 벗고 서 있는 모습처럼, 강인함이 자연스러웠다.

그렇기에 그를 마주한 사람들은 쉽게 무례해지지 못했다.
그의 몸은나는 쉽게 꺾이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었고, 그의 얼굴은그럼에도 나는 너를 해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비슈바나타는 손에 든 추천장을 한번 더 내려다보았다.

이미 읽었지만, 다시 읽는 눈이었다.

그는 추천서의 마지막 문장을 천천히 따라 읽듯 입술을 움직였다.

동방의 젊은이는 천재요, 그의 나라에서 고위 관료였으며,학자로 명성을 떨친 인재입니다. 저에게 산스크리스트(간단한)문어를 사흘만에 깨우친 그를 부디 대학자가 손님으로 맞아 주시길 청합니다.“ 

비슈바나타가 고개를 들었다.

곽인이라…”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조갑재는 그 이름이 이곳 에서도 무게를 가진다는 것을 느꼈다.

비슈바나타는 조용히 말했다.

그는 누구인가, 묻지 않아도 되겠군.”

그리고 덧붙였다. “내가 젊었을 때, 촉의 학자들이 말하길…..곽인은 제갈량의 지혜를 문장으로 옮긴 자라 했소. 그가 추천한 사람이라면, 단순한 길손은 아닐 것이오.”

그 말은 곧, 문이 열린다는 뜻이었다.

비슈바나타는 조갑에게 손짓했다.

따라오시오. 회랑으로.”

회랑 안쪽은 바깥보다 더 조용했다.
돌바닥 위로 학자들의 발걸음이 낮게 울렸고, 차 향이 가늘게 퍼져 있었다.
비슈바나타는 하연을 데리고 넓은 회랑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이미 여러 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비슈바나타가 먼저 한 사람을 가리켰다.

페르시아에서 온 대학승, 아타르바드.”

아타르바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은 불처럼 날카로웠으나, 예의는 차분했다.

그 옆에는 헬라 출신의 소피스트가 앉아 있었다.
긴 손가락과 빠른 눈동자, 말이 입술 끝에서 항상 준비된 사람.

아테네의 능변가(能辯家), 레온티오스.”

레온티오스는 웃으며 말했다.

동방에서 온 젊은 학자라이 회랑이 점점 세계가 되는군요.”

그 다음으로, 로마에서 온 학자가 자리했다.
그는 옷차림이 단정했고, 시선이 계산적이었다. 마치 모든 장면을 기록하려는 사람처럼.

로마의 역사학자, 티투키스.”

티투키스는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눈은 조갑재의 복식과 태도를 빠르게 훑고, 이미 머릿속에 문장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온 학자.
피부는 햇빛에 그을렸고, 눈빛은 오래된 무덤의 문자를 읽는 자처럼 깊었다.

애굽의 문헌학자, 파네프.”

파네프는 조갑잴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동방의 길은 멀지요. 멀다는 것은, 돌아갈 이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비슈바나타는 회랑 한쪽에 앉아 있는 젊은이를 가리켰다.
그는 이들 가운데 가장 젊어 보였고, 얼굴에는 긴장과 자부심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복식은 유대의 학도(學徒) 답게 단정했고, 눈빛은 날이 서 있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유학 온 바리새인 서기관 출신의 젊은 학도.
스왈 야습.”

스왈 야습은 조갑재를 보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 눈빛은 질문을 숨기지 못했다.

고구려? 동방의 이방인?’
그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조갑재는 다시 예를 갖추었다.

고구려에서 온 조갑재라 합니다.”

비슈바나타가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오.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차가 돌았다.
찻잔에서 피어 오르는 김이 회랑의 공기와 섞이며 천천히 흐려졌다.
사람들의 말은 그 흐려짐 속에서 더 또렷해 졌다.

레온티오스가 먼저 화제를 꺼냈다.

조갑재 선생은 동방의 학자라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묻고 싶군요.
동방에서도신과 인간에 대한 논쟁이 있습니까?”

조갑재가 조용히 답했다.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신을 말하기보다, 하늘을 말합니다.
하늘은 도()와 함께 움직이고, 사람은 그 도를 따라야 한다고 배웁니다.”

아타르바드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도라불과 비슷하군요. 보이지 않으나 모든 것을 움직이지.”

파네프는 잔을 돌리며 말했다.

어떤 길을 따라왔습니까? 바다를 건넜습니까?”

육로로 오다, 바다를 건넜습니다.”
조갑재가 답했다.
중국의 촉() 청두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소파라에 닿았습니다.”

티투키스가 그 말을 듣고 낮게 중얼거렸다.

이동 경로가 곧 세계의 지도다…”

그때 비슈바나타가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화제를 바꾸었다.
그가 이 자리를 만든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조갑재 군.”
비슈바나타가 말했다.
우리가 이들에게 오기 전, 그대는빛을 찾아 서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했소. 그 빛인 예슈아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소?”

그 이름이 회랑에 떨어지자, 스왈 야습의 눈빛이 먼저 흔들렸다.
그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몸이 조금 굳었다.

레온티오스는 잔을 들며 말했다.

아테네에서도 들었습니다. 갈릴리 출신의 라바이.
병든 자를 일으키고, 하늘 나라를 말하며, 민중이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소문.”

아타르바드도 덧붙였다.

페르시아의 상인들도 그 이야기를 했소.
그가 신의 아들이라느니, 죽은 자를 깨운다느니.”

파네프는 낮게 말했다.

이집트에서도 신의 아들은 많았지요.
그러나 그들이 사람을 살렸는지는별개의 문제입니다.”

티투키스는 차갑게 정리했다.

소문은 늘 부풀려집니다.
그러나 소문이 넓게 퍼진다는 것은, 그 안에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지요.”

그때, 스왈 야습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젊었지만 단단했다.

예슈아는위험한 자입니다.”
그는 말을 고르듯 천천히 말했다.
그는 율법을 무너뜨리고, 성전의 권위를 흔들며, 자신을 신과 같은 자리에 두었습니다.
그가 민중을 선동한다면, 로마는 피로 응답할 것입니다.”

그 말에는 유대 땅의 공포가 담겨 있었다.
정치와 종교가 얽힌 공포.
성전이 무너지면 민족이 무너진다는 공포.

비슈바나타는 조갑재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그 순간, 조갑재의 얼굴에서 아주 미세한 변화가 지나갔다.

조갑재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손끝이 잠깐 떨렸다.

예슈아…”

그는 그 이름을 한 번 더 되뇌었다.
마치 오래 찾던 문장을 갑자기 발견한 사람처럼.

비슈바나타가 조용히 물었다.

그대는 그를 알고 있소?”

조갑재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그리고 회랑의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모인 것을 느끼며, 천천히 말했다.

저는그분을 찾으러 가는 중입니다.”

순간, 회랑이 얼어붙었다.

레온티오스가 먼저 반응했다.

찾으러 간다고요? ?”

아타르바드도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를 직접 만나려는 것이오?”

스왈 야습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얼굴에는 경계가 떠올랐다.

동방의 학자가왜 갈릴리의 라바이를?”

티투키스는 속으로 이미 기록을 시작했다.

동방의 관료가 갈릴리의 라바이를 찾아…’

파네프는 낮게 중얼거렸다.

사람의 길은 때로 신의 길과 교차하는구나…”

조갑재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정직하게 답했다.

저는 청두에서 곽인 대사부를 만났습니다.”
그분은 제게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지식으로 다다를 수 없는 빛이 있다. 그 빛을 찾으려면, 갈릴리로 가라.’”

그 말이 끝나자, 비슈바나타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는 곽인의 문장이 어떤 무게인지 알고 있었다.

조갑재는 이어 말했다.

저는 그 빛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소문이 사실인지, 거짓인지가 아니라…”
그는 잠시 멈추었다.
그가 말하는 하늘 나라가 무엇인지.”

레온티오스가 조용히 웃었다.

하늘 나라라철학자들이 평생 찾던 단어를, 목수가 입에 올렸다니. 세상은 정말 재미있군요.”

그러나 아타르바드는 웃지 않았다.
그는 조갑재를 바라보며 말했다.

재미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소.”
진짜 불은 구경하는 자를 태웁니다.”

스왈 야습은 딱딱하게 말했다.

갈릴리는 피가 흐르는 곳입니다.
그를 찾는 것은위험을 찾는 것입니다.”

조갑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길 위에 있습니다.
돌아가는 길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라, 답을 찾으러 왔습니다.”

비슈바나타는 그제야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는 환영과 경고가 함께 있었다.

곽인의 추천장이 아니어도, 나는 그대를 받아들였을 것이오.”
그가 말했다.
그대의 눈빛이 이미 길을 지나왔고, 길을 더 갈 사람의 눈이니까.”

그는 조갑재의 잔에 차를 다시 채워주며 덧붙였다.

그러나 하나는 기억하시오. 예슈아를 찾는 길은, 한 사람을 만나는 길이 아니오.”

비슈바나타는 회랑 너머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길은그대 자신을 만나는 길이오.”

회랑에 다시 바람이 스쳤다.
대나무 잎이 서로 부딪히며 낮은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마치 먼 곳에서 누군가가 조용히 문을 여는 소리 같았다.

조갑재는 이날, 소파라에서 처음으로 확신했다.

자신이 찾는 것은 단지 소문 속의 라바이가 아니라,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읽게 만드는 한 줄의 빛이라는 것을.

그는 회랑의 시선을 받으며, 자신이 5,200 킬로미터를 넘어 온 이유를 다시 떠 올렸다.

결코 지도를 따라 온 것이 아니었다. 권력이나 금을 따라 온 것도 아니었다.그는 사람을 살리는 빛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 빛은 어쩌면 이 회랑의 논쟁 너머에, 어쩌면 서쪽의 예루살렘 너머에, 혹은 한사람의 침묵과 말 속에 있을 것이다.

 

소파라에 도착한 날, 바다는 밤이 되어도 검게 빛났고, 항구의 등불은 흔들렸다.

조갑재는 그 빛을 보며 마음속으로 말했다. “길은 나를 부쉈다. 그러나 끝내 나를 만들었다.”

그의 14개월 여정은 잠시 휴식속에 묻어 두었다.

그러나 그의 서사(敍事)는 이제 시작이었다.

 

한편 회랑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지자 비슈바나타가 말했다.

귀한 손님이 찾으셨으니, 오늘 저녁만찬은 나의 집에서 하겠소.” (계속)

이산해 / 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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