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 생각
박무일
남수와 나는 전방 00부대에서 같이 근무하던 전우였다.
그는 제대를 몇 달 앞둔 병장이였고 나는 신출나기 ROTC 소위였다. 남수는 나를 무척 좋아해서 둘이만 있을때는 형님이라고 불렀다. 어느 겨울밤 내가 주번사관 근무를 하고 있을 때 남수가 나를 찾아와 외출을 신청했다.
당시는 시국이 어수선하여 야간 외출을 통제시키고 있을 때였지만
남수는 나의 허락을 받고 그날 밤 특별히 부대 밖으로 나갔다.
다음날 아침. 보급부의 서무계가 황급히 뛰어와 보급부 내의 전자계산기가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전자 계산기는 미군 부대에서 어렵게 구한 아주 귀한 것으로 보급부 업무에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결국 상부에 보고 되었고 나는 주번 근무를 철저히 하지못한 것에 대해 심한 질책을 받았었다.
곧 CID출신의 김상사에 의해 수사가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지난 밤 외출을 나간 남수가 불려왔고 혹독한 취조가 오후 늦게 까지 계속되었다
나는 남수가 하필 그날 밤 외출을 나가서 괜한 혐의를 받고 고생하는구나 하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남수는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줄까
하고 망서리기까지 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 김상사는 남수를 지프차에 태우고 부대 밖으로 나갔다가 한참 후에 돌아왔다.
돌아온 차에는 남수와 잃어버린 전자 계산기가 실려 있었다.
그날 밤 남수는 수갑을 차고 고개를 숙인 채 나의 차가운 시선을 느끼며 헌병대로 이송되었다.
며칠 후 눈발이 내리는 추운 밤이었다.
남루한 할머니 한 분이 나를 찾아왔다
전방부대의 인적이 드문 곳인데 내가 묵고 있는 부대 앞 숙소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남수 어머니었다.
추위와 피로에 지쳐있는 그녀를 방으로 모시고 따뜻한 온돌방 아랫목에 앉게 하였다.
자초지종 나를 찾아온 사연을 목이 메인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남수가 얼마전 휴가를 왔었는데 집안의 딱한 사정을 보고 휴가내내 서울역에서 병든 아버지 대신 지게를 지고 쌀 두말을 마련해주고 부대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돈이 없어서 병든 아버지를 입원시킬 엄두도 내지못하고 부대로 돌아가는 것을 몹시 슬퍼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할머니는 버선을 벗기시작했다
양쪽 버선 속에서 반반씩 나누어 꼭꼭 숨겨놓은 돈을 꺼내놓았다.
돈은 발바닥에 눌려 몇 장은 짓뭉게져 있었다.
살고있는 판자집을 잡히고 마련한 돈이라며 남수의 구명운동으로 써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돈을 써서 남수가 감옥에서 금방 나오게 되면 몰라도 좀 빨리 나오는 것이라면 쓰지 말아달라고 했다.
당장 노부부가 살집이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할머니는 자식 면회도 마다하고 쓸쓸히 돌아가셨다.
나의 설득으로 돈은 그대로 가지고 가셨다.
나는 남수 어머니를 버스에 태워 보내고 무거운 마음으로 보급부 사무실로 출근했다.
내 자리에 앉아 쓸쓸하게 비어있는 기록계 남수의 빈 책상을 바라보니 마음이 쓸쓸해지고 슬펐다
오랫 만에 집에 갔을 때 끼니를 걱정하는 집안 형편을 보고 휴가기간 내내 지게를 져 양식을 사주고 부대로 돌아오는 남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아버지의 입원은 꿈도 못꾸는 현실 앞에서 남수가 무엇을 할수 있었겠는가?
감옥에 갇혀있는 자식을 위해 살집을 잡히고 돈을 마련해온 자식에 대한 간절한 부모의 마음과 멀리 여기까지 와서 자식 면회도 마다하고 돌아서는 어머니의 가슴은 얼마나 아팠을까?
그 당시 우리나라는 참으로 못 살았다.서울역이나 창량리역 처럼 사람이 붐비는 곳에서는 많은 지겟꾼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짐을 들고 나오는 손님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가 손님이손짓만하면 십여명이 동시에 달려가서 제일 빠른 사람이 일꺼리를 잡았다. 삼베 저고리가 땀에 흠뻑 젖은 채 목에 두른 수건으로 눈으로 흘러들어오는 땀을 훔치며 달동네 비탈길을 힘겹게 올라가던 지겟꾼 아저씨의 모습들이 떠오른다. 그 모습 속에 남수도 보인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나이가 드는 탓일까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옛날 생각이 난다.
그 동안 남수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남수도 지금 쯤은 할아버지가 되어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