何日 斷想

2007.05.09 04:28

최민자 조회 수:297 추천:13


     何日 斷想
                                          
                                   최민자

                   +* 계란

  마트에서 계란을 샀다. 텃밭에서 방사한 유정란이라 한다.
바쁜 아침, 간단히 프라이를 하거나 라면에 깨뜨려 넣기도 하고 저녁반찬이 허술하다 싶을 때면 뚝배기에 깨 넣어 뭉근하게 찜을 하기도 하는 계란은 냉장고 속 비상식량이요 빠뜨릴 수 없는 부식거리다.

  그런 계란이 실은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나는 자주 잊고 산다. 살아있음이 분명한 생물이건만 살아있음의 기미도, 증거도 없다. 눈도 코도 없고, 털도 비늘도 없다. 꿈틀거리지도 않고 시끄럽게 짖지도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고 깨트려도 반항하지 않는다. 둥글리면 둥글리는 대로, 깨트리면 깨트리는 대로, 프라이팬 위에서건, 끓는 물 속에서건 한 점 먹거리로 저항 없이 순교한다.

  신문 시단에 금아 선생의 시 ‘생명’이 실렸다.

         나는 보았다
         사흘 동안 품겼던 달걀 속에서
         티끌 같은 심장이 뛰고 있는 것을

  살아있음에도 살아있음의 증거를 찾을 수 없는 그것도 따스하게 ‘품기면’ 살아있음의 증거를 내 보인다는 것이다. 심장이 뛰고 날갯죽지가 생기고 삐약삐약 소리도 할 것이다. 오직 자애롭고 따스하게 품어주는 행위만이 살아있는 것들을 진정 살아있게 한다는 것을, 이 조용한 생명체는 침묵으로 시위하고 있다고 할까. 기실 우리 삶을 관통하는 사랑이라는 성정도 그것을 품어준 최초의 온기로부터 전이된 속성일는지 모른다.


                  ** 시간

  지난달에 쓴 카드대금이 나왔다. 예상 밖의 수입이 생길 것 같아 미리 ‘질러’ 그어댄 액수가 평상시의 곱절을 넘겨 버렸다. 기분 낼 때는 좋아도 현실은 가혹한 법. ‘예상 밖’의 수입이 예상 외로 펑크가 나는 바람에 한동안은 내핍을 감수해야 할 것 같다.

  우울할 때마다 충동구매를 하고는 적자난 통장을 메우느라 허덕거리며 산다는 친구가 생각난다. 그래도 시간만큼은 미리 꾸어와 낭비할 수 없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그 친구는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시간을 당겨 쓸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만고의 불행처럼 여겨진다. 노경을 빌려 와 청춘을 연장할 수 있다면 이자에 이자를 내라 하여도 마다하지 않을 것 아닌가.


                    ** 머리 박기

  소설가 성석제는 몰두(沒頭)라는 말의 정의를 진드기가 개의 살갗에 머리를 쳐박고 피를 빠는 행위로 정의한다. 문자 그대로 머리박기란 이야기다. 한번 살갗에 박힌 진드기의 머리는 잘려나갈지언정 쉬 빠져나오지 않고 죽어도 안으로 파고들다 죽는다. 목이 잘리고 생명이 끊어지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집착하는 무아지경의 도취. 올인(All in)이다. 그 행태는 ‘한 가지 일에 온갖 정신을 기울임’이라는, ‘몰두’의 사전적 의미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설득력을 갖는다. 약하고 열등한 미물에게 있어 머리를 박는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행위인 동시에 생존자체를 위협하는 모험이기도 한 셈이다. 인간도 그러한가.

  프랑스의 축구영웅 지단이 2006 월드컵 결승경기에서 이탈리아 선수 마테라치의 가슴에 머리를 박은 일이 매스컴마다 화제다. 그는 이번이 영광스런 축구인생의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경기라는 사실을 잊고 자존심을 건드리는 상대선수의 비난에 격분한 나머지 야만스런 머리박기로 레드카드를 받아 퇴장당하고 말았다. 하등동물은 생존을 위해 머리를 박고, 고등인간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머리를 박는 건가.

  그러나 지단의 머리박기는 그의 자존심을 지켜내지 못하고 축구영웅의 명예에 흠집을 내는 불명예스러운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대미문의 머리박기를 촉발시킨 문제의 발언을 찾아내려는 기자양반들이 이 더운 날씨에도 비디오 영상을 돌려보며 두 선수의 입술 움직임을 분석하느라 경쟁적으로 머리를 박고 있다고 하던가.

  더위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피서법 중 최고의 피서법도 다름 아닌 몰두다. 무엇엔가 머리를 박고 집중하고 있는 동안에는 더위 아니라 더위 할아버지도 범접할 수가 없다. 여자들이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순간도 진지하게 자기 일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일 때가 많다. 하니 세상의 애인 없는 남자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존심을 버리고 이 여름 차라리 한 마리 진드기가 되어봄이 어떨까. 머리를 박을 만한 때와 장소를 잘 선별해내기만 하면 일과 사랑, 그리고 피서까지, 일석삼조의 행운을 만끽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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