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나무

2007.06.14 13:03

양미경 조회 수:623 추천:48


      아름다운 나무
  
                            양 미 경


어떤 일의 부분에만 집착하여 전체를 보지 못한다는 뜻으로 ‘숲은 보지 않고 나무만 본다,’는 말을 흔히 쓴다. 그러나 산을 오르거나 숲을 산책하다 보면, 전체 숲은 보면서도 나무 하나하나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 가끔 오르는 산에서 소나무 세 그루가 묘한 모습으로 자라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전에는 별 생각 없이 스쳐 지나곤 했었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내 시선을 끌었다. 양쪽의 두 소나무는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 있었다. 그런데 가운데 소나무는 둥치의 중간 부분이 기역자로 심하게 굴곡이 져서 하늘을 향하고 있는 게 아닌가. 살펴보니 왼 쪽 나무의 중간쯤에서 굵은 가지가 뻗어 나와 있었고, 가운데 나무는 그 가지를 피해서 옆으로 한 번 굽어 자랐던 것이다. 두 나무 사이에 끼어 고사할 수도 있었는데 스스로를 양보하며 몸을 굽힘으로써 좁은 공간이나마 자신의 몫으로 누린 것이다.

순간 나는 부끄러워졌다. 우리는 자연을 찬양한다 말은 하면서도,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예전엔 미덕으로 여겼던 양보나 이해, 관용과 연민 등은 이제는 보기 어려워졌다. 자신이 손해 본다고 여겨지는 일은 좀체 참지 못하며, 조금이라도 불편을 주는 행위를 참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내 집 앞에 차를 대면 삿대질이 오가고, 이웃집 시설물이 내 집을 가리게 되면 당장 철거를 요구한다. 이웃과 이웃 간의 정이 사라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해타산이 먼저 들어서는 살벌한 모습을 우리는 자주 본다.

세상에는 여러 유형의 인간들이 살아간다. 숲에도 다양한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섞여 자란다. 사람들은 땅의 일정부분에 담을 치고 그 영역의 침범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만일 나무들에 이기심이 있어 자신의 영역만을 고집하며 영역 안으로 들어온 다른 나무의 뿌리나 가지를 밀어 낸다면 숲은 저 아름다운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었을까? 아마 한정된 땅 안에서 서로 싸우고 상처 입히다가 자멸의 길로 들어설 것이 분명하다.

사람이라고 다를 리 없다. 자본주의 사회가 가져온 이해타산 위주의 대인관계는 결국엔 사람을 상처 입히며 병들게 한다. 화려한 물질문명이 도시를 키워가는 대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며 패륜의 길로 몰아가는 것이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따뜻한 마음의 사람들을 취재하여 보도하는 것은,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사라져 간다는 안타까움 때문이리라.
  
가운데 소나무는 볼수록 아름답다. 분재처럼 귀하게도 보이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또 다른 의미도 깨닫게 한다. 나무가 너무 강하면 꺾어지기 쉽고, 굳고 강한 것이 아래에 들며 오히려 부드럽고 약한 것이 위에 선다고 ‘노자’는 <도덕경>에서 말했지 않은가. 양옆에 곧게 뻗은 소나무는 현실적으로는 쓸모가 많을 것이다. 쓸모가 많은 만큼 어느 날 베어져 누군가의 집에 기둥이나 서까래가 될지 모른다. 그러나 휘어진 소나무를 베어 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좁은 공간에서 몸을 굽혀 하늘을 얻은 소나무. 그 나무는 자신의 몸으로 양보와 관용만이 자연의 섭리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유연하게 휘어진 몸은 우아하기까지 했다. 체취는 향기롭기 그지없다.

살아가면서 휜 나무 같은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자신을 낮추고 겸양으로 상대를 대하는 사람. 자신의 불편함에 앞서 상대의 불편함을 먼저 배려하는 사람을 가끔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산을 내려오면서 내 가슴에 한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매일매일 물을 주고 가꾸다 보면 내 마음 밭의 나무도 그 휜 소나무를 닮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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