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당선작, 부산일보 경남신문 전북일보

2007.06.14 12:49

신춘문예 조회 수:926 추천:50

  - 2006 부산일보 신춘문예 - 수필 당선작]

          굳은살 / 김정임


그는 내 무릎에 발을 올려놓고 잠이 들었다. 남편의 발을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 본 적이 있었던가. 억세게 보이는 발꿈치에는 온통 굳은살이다.

사람을 대할 때 가장 나중에 보게 되는 것이 발이 아닐까. 눈빛만 보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될 때쯤 발은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그의 낯선 뒷모습을 보듯 가만히 그의 굳은살을 살펴본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단단하게 만들었을까.

잠시 낮잠에 빠져든 남편,굳은살은 그의 발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나에게 말하지 못한 어려운 일들이 가슴 한구석에 층층이 굳은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잠든 그의 얼굴에 자리 잡은 굵은 주름이 지난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고 있다.

아침이 되면 남편은 정확한 시계처럼 출근을 한다. 가끔 그의 구두를 닦을 때마다 구두 뒤축이 많이 닳아 있는 걸 보게 된다. 신발을 산 지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남편의 신발 뒤축은 한쪽이 더 닳아서 경사지게 보였다. 그는 세상을 평평하게 딛지 못하고 왜 한쪽으로 기울게 걸어 다닌 것일까.

인생은 아스팔트가 깔린 탄탄대로만 있는 것이 아니듯 때론 자갈길이나 비탈진 길을 만났을 것이다. 그 길을 걷다보니 그의 구두는 고르게 닳지 못하고,때로는 기우뚱거렸을 것 같다. 신발 속의 발인들 마음이 편했을까. 중심을 잡기 위해 발은 내성을 키우듯 단단하고 굳어진 듯하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자신의 몸의 일부처럼 생각했던 바이올린 때문에 목 언저리에 굳은살이 박이고 피부색까지 변했다고 한다. 그 굳은살에는 그녀의 바이올린에 대한 정열이 한 층을 이루고 바이올린을 통해 표현하고 싶던 음악이 또 한 층을 이루며 시간과 함께 여물어 갔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굳은살에서 고독의 그림자를 만난다. 혼자서 걸어야 하는 외로운 길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가장 아름다운 곳도 굳은살이 있는 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이올린을 받쳐주는 굳은살의 꽉 찬 느낌 때문에 그녀는 안정적으로 음악에 몰입하게 되는 것 같다. 나무의 옹이 같은 그녀의 굳은살. 나무에 거친 흔적을 남긴 옹이가 때로는 아름다운 무늬가 되는 것처럼 그녀의 굳은살은 음악의 미려한 선율로 남으리라.

굳은살은 세상을 열심히 살아왔다는 인증서 같은 것이다. 손과 발에 있는 굳은살은 생에 대한 끈질긴 의욕과도 같다. 가끔 손과 발의 모양까지도 바꾸어 놓은 굳은살을 보게 될 때 나는 내 삶의 자세를 다시 한번 가다듬게 된다. 보이지 않는 작은 먼지 알갱이가 어느 날 더께가 되어 쌓여 있는 것처럼,삶에 대한 끝없는 열정을 삭히고 나면 그곳에 굳은살이 생긴다.

나에게는 어떤 굳은살이 있을까. 그러나 이렇다 할 굳은살은 보이지 않는다. 굳은살을 만들 만큼 무언가에 열중하지도 못했고 주어진 생을 사랑하지도 못한 내 모습이 드러날 뿐이다. 내 몸에 굳은살을 만들기보다는 그동안 남편의 굳은살 안에 웅크리고 있었던 나를 알게 되었다.

뒷산을 오르는 등산로는 산이라고 하기가 무색할 만큼 길이 다져져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길은 윤이 나는 것처럼 반들거리고 단단해졌다. 그 단단해진 길은 산이 갖고 있는 굳은살일 것이다. 산은 제 속살을 보호하기 위해 굳은살을 만들고 있었다. 그 굳은살 속에 산은 얼마나 많은 것을 품고 있는가. 부드러운 흙과 나무의 뿌리도 넓게 자리잡고 이름 모를 씨앗도 들어있다.

예전의 나는,굳어지는 것은 사물에 대해 익숙해지고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고지식함으로 받아들였다. 물결의 흐름이 보이지 않는 강물과 금방이라도 갈라질 것만 같은 굳은 땅,흐린 구름이 잔뜩 낀 하늘. 이 모든 것들이 이런저런 감정표현을 하지 않는 굳은살처럼 여겨졌다. 변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고집하는 사람들도 그의 일상에 굳은살이 박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굳은살을 두껍게 만드는 것일수록 그 속은 여리다는 것을 알 것 같다. 딱딱한 게 껍데기를 벗기면 부드러운 게살이 들어있다. 속살이 너무 연약해서 게는 껍데기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바다 물결과의 부대낌에서 살아남기 위한 본능과도 같을 것이다. 남편도 세상이라는 바다를 헤쳐 나가기 위해 굳은살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야 했으리라.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남편이 무심코 던진 말에 상처를 받은 적이 있었다. 내 여린 속살에 입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속살은 서서히 굳은살이 되었다. 예전에 내가 아팠던 말들은 이제 아무런 감각도 없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은 것은 차츰 마음에 굳은살이 생기는 것이다. 그건 중년의 뻔뻔함이나 안이함과는 다르다. 작은 상처나 가는 속울음을 삼켜낼 수 있는 보호막과도 같다. 그 굳은살은 사람과 사람사이를 아프지 않게 한다.

부부가 서로 편한 것은 상대편의 어디쯤 상처가 있는지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걸 쓰다듬고 치유하는 길에 굳은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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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경남신문 신춘문예 - 수필 당선작]


            피아노와 플루트/ 이 주리

딸의 방엔 정확히 36년 전 우리집에 실려왔던 검은색 피아노가 지금도 있다.
2년 전. 마지막 조율을 했을 때 조율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젠 이 피아노에 돈 들이지 마세요. 더 이상 조율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누더기처럼 입혀진 검은색 칠이 여기저기 벗겨져 낡을대로 낡았고 쇠로 되어 있는 피아노판은 군데군데 선이 끊어진 탓인지 소리 나지 않는 건반이 꽤 있었다. 이렇듯 쭈글쭈글 늙은 피아노는 나와 지금껏 오래된 가족처럼 함께 지내고 있다.
가끔.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난 피아노 만큼이나 늙은 악보를 내놓고 찬송가를 치거나 가곡 반주를 하곤 한다. 그 때마다 온통 검은 피아노는 아직도 하얀 가슴을 열어 건반 위에 손을 올려놓은 나를 유년의 뜰로 안내한다. 내 푸른 나무였던 엄마의 기억으로.

“주리야. 소녀의 기도 한번 쳐 봐라.” 푸른 리본에 갈래머리를 땋은 약간 새침한 내게 손님이 오거나. 기분이 울적한 날 엄마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어떤 날은 은파. 어떤날은 스와니 강. 로렐라이언덕…. 그녀의 주문으로 난 그때그때 엄마의 기분을 추측하곤 했다. 그럴 때 그녀의 눈은 아련했다. 그리곤 잠자리 날갯짓 같은 가늘고 떨리는 음성으로 조용히 노래를 부르던 엄마였다.

그 피아노가 집에 처음 들어오던 날 나는 여덟 살이었다.
여섯 살 때 처음 피아노를 시작했는데 키가 작아 건반이 가슴 높이까지 오자 피아노 의자에 방석 두개를 깔고 연습을 시작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 열이 나거나 놀고 싶을 때 어지간히 집에 있는 도우미 언니를 괴롭히며 연습을 했었다. 도우미 언니와 함께 피아노 레슨 받으러 가는 길은 너무 멀었고. 다른 애들 모두 고무줄놀이나 공기치기 사방치기 등 너무도 재미있게 놀이에 열중한 시간에 나만 레슨 받으러 가는 일은 내게 있어서 순간순간의 놀고싶은 욕구가 부인되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엄마는 공놀이라든가 오재미라는 일종의 콩주머니를 만들어 놀았던 놀이는 하지 못하게 했다. 손을 다치면 피아노를 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내가 꽤 명곡이나 소품들을 쳐내고 있었을 때 엄마의 입버릇은  “우리 주리 피아노를 사줘야 할텐데”였다.

그러나 넝쿨장미가 있는 집을 장만하느라 두 사람 월급의 반이 대출금으로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엄마의 소망은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때마다 아빠께서는
“서정희가 맘먹은 일이 어디 안된 때가 있었나?”
하며 반은 위로로 반은 안타까움으로 대답하곤 하셨다.
그러던 어느날 엄마와 아빠가 큰소리로 싸우셨다.
아빠는 원래 목소리가 크시지만 엄마는 좀처럼 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었다.
“늬 아빠는 이름 자체가 울리는 종(鐘鳴)이라서 목소리가 큰가 봐” 하며 양반의 자손은 입 밖으로 쇳소리가 나면 안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던 엄마였다. 그 때문에 그 당시 사건은 참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이유인즉 엄마가 결혼 때 아빠가 해주신 백금반지를 비롯. 그 후에 생일날에 선물한 보석목걸이. 외국에서 외삼촌들이 사다준 것 등 패물들을 아빠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몽땅 팔아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 돈을 어디에 쓰려고 한 거야?”
여전히 화가 난 음성으로 아빠는 엄마를 다그쳤지만 엄마는 완강히 입을 다물었다.
“나쁜짓에 쓰려한 건 아니니 걱정 말아요” 하고 조용히 말했을 뿐.

그리고 며칠 후 그 검은 피아노가 내 방에 놓여졌다.
나는 그녀가 피아노를 어떻게 마련했는지 지금도 모른다. 다만 추측할 뿐이다.
유난히 보석 욕심이 많은 엄마였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서 어렵게 마련한. 그리도 아끼던 자기 소유의 모든 것을 팔고 남편으로부터 많은 의혹과 다그침을 받아도 좋을 만큼 그녀는 내게 피아노를 사주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었을까.
엄마는 내게 푸른 나무였다. 제게 딸린 잎과 줄기를 다 내어주고. 열매를 맺으면 과실을 내어주고. 마지막 수액조차 나눠주고. 훗날 가지가 잘린 빈 그루터기만 남아도 기억에 기대어 앉아 쉴 수 있게 하는 아낌없이 주는 그런 나무였다.

몇 년 전 딸이 플루트 배우기를 원했다.
딸의 음악성은 칭찬에 인색한 나도 감탄할 때가 많다. 아이는 제 친구가 학원에서 플루트를 배우는데 옆에서 지켜보다가 운지법 등 나름대로 플루트 연주법을 터득해 버린 것이다. 또한 음악을 들으면 바로 피아노로 옮기고 플루트로도 옮긴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음악학원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머니. 예원인 뛰어난 음악성을 가지고 있어요. 피아노도 그렇지만 피아노보다 플루트에 어쩌면 더 소질이 있는 것 같아요. 소질은 노력한다고 다 가질 수는 없는 거에요. 예원이의 재능이 아까워서요. 플루트도 정식으로 배우게 해주세요 일주일에 두 번 플루트 선생님이 저희 학원에 오신답니다.”
하지만 암담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이 오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난 서른여덟이 될 때까지도 돈이란 그냥 존재하는 건지 알았다.
어릴 적엔 그런 열성을 가진 엄마와 성실한 아빠 덕에 돈 걱정이란 것을 대학 졸업할 때까지 해보지 못했고. 시골 고등학교 교사 시절 내 월급은 옷을 사거나 예쁜 목걸이나 구두를 사거나 읽고 싶은 책을 사는 것으로 소비되곤 했다. 결혼 후 유학시절 가난이 재미있었을 만큼 철부지 아내. 그동안 제손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의식조차 하지 못할 만큼의 아내를 먹여살리느라 애 아빠도 어지간히 애썼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러나 그 후 완전히 맨몸으로 가족의 생계를 떠받쳐야 할 상황이 내게 소리없이 다가왔고. 딸이 플루트를 갖기 원했을 때는 그 가난의 복판에 있었던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 딸이 다니는 피아노 학원에서 나오는 생전 처음 듣는 소리를 들었다. 가느다란 풀피리 소리 같은 것이 때론 흐느끼기도 하고 때론 머리를 풀고 통곡을 하기도 했다. 한참 소리에 취해 가만히 듣고 있는데 계단에서 한 떼의 아이들이 몰려나왔다. 딸은 오른손에 검은 케이스의 플루트를 들고 있었다.
“유미야. 나 오늘만 우리 집에 갖고 가서 이거 한 번 해보면 안돼? 내일 갖다줄게.” 그러자 “안돼!” 하며 채가듯 가져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고고 있는 딸의 어깨를 보았다.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결심했다. 딸에게 플루트를 사 주자. 하지만 어떻게?

엄마도 그랬을까? 아빠에게 그렇게도 다그침을 받고 빠듯한 월급생활을 하면서 달리 사 줄 방도가 없었을 때 내게 피아노를 사주고 싶었던 엄마의 마음이 꼭 그랬을까?
그날부터 나는 내게 값나가는 것이 있나 생각해 보았다. 야마하 플루트를 사주려면 육십만원이 필요했고. 레슨비가 한달에 십오만원….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리 간단히 지출할 것 같진 않은 액수였지만 그래도 카드 할부 등 다른 방법들이 얼마든지 있으므로 그때만큼 많은 갈등을 했을 것 같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그때 내겐 도저히 불가능한 큰 돈이었다.
죽고 싶었다. 생각 끝에 내게 남아있는 패물들을 팔기로 했다. 전에 내게 있던 값나가는 패물들은 새로운 교회를 지으며 헌금함에 모두 넣었었다. 비교적 돈에 후했던 애 아빠였지만 교회 짓는데 헌금한다고 하면 도저히 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미련없이 헌금함에 내가 가졌던 값나가는 패물들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남아있는 것이라곤 애들 돌이나 백일 때 받았던 금반지와 애아빠에게 선물로 받았던 목걸이. 팔찌 이런 것들 뿐이었다. 보석가게에 전화로 가격을 알아보며 평소에 내가 아끼던 예쁜 목걸이들은 18k였기 때문에 별로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마 내게 금이빨이 있었다면 그것도 보탰을 것이다.

문제는 내게 남아있던 패물들을 파는 방법이었다. 가난하지만 자존심을 벗어던지지 못한 탓에 근처에 있는 보석가게 앞에서 몇 번이나 발길을 돌리곤 했다. 아파트 상가에서도 다 내 얼굴을 알고 있는데 보석가게 주인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101동 1414호 말이에요. 그 집 참 잘살더니 요즘 형편이 말이 아닌가 봐. 그 집 금 팔러 왔더라구요” 하며 다른 여자들에게 말할 것도 같고
“왜 이렇게 예쁜 패물들을 팔려고 하세요?” 하고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나 많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물어 금과 패물들을 팔려고 가게 앞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것이 몇 번이었던가.
드디어 버스를 타고 멀리 가서 생면부지의 보석가게에 그것들을 팔고 돌아오는 내 등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그래도 십오만원이 부족했다.
이걸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생각에만 골몰했다. 옛날 같으면 하룻밤 외식비만도 못한 돈이었다. 친척이 우리 집에 오면 생각 없이도 차비라며 호주머니에 찔러주던 돈이었다. 그런데 그 십오만원을 구하지 못해 플루트를 살 수 없다니 나는 입술을 깨물며 죽고 싶었다.
갑자기 상황이 나빠졌어도 친정식구들에게 단 한 번 손을 벌려본 일이 없었다. 다만 가끔 아빠께서 어둡고 안타까운 얼굴로 찾아와서는 용돈이라며 몇십만원씩 주고 가시곤 했다.

아빠께 말씀드려 볼까 생각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며칠 전 아빠께서 내 옷이 맘에 걸리셨던지 극구 괜찮다고 했는데도 코아백화점에서 옷을 사주고 가셨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날부터 나의 자존심과 딸에게 플루트를 사주고 싶은 마음이 줄다리기 하기를 며칠. 난 굳은 마음을 먹고 동생을 찾아갔다.
“내가 꼭 쓸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십오만원만 빌려 줄래?” 하고 말하자 외출하려던 동생은 아주 바쁘다는 듯
“십오만원? 알았어. 근데 언니야. 그런다고 십오만원도 없냐?”
동생에게 십오만원을 받아오는 길에 난 무지하게 울었다. 길거리 가는 사람들이 날 혹시 미친 여자가 아닌지 유심히 쳐다보며 지나갔다.

딸은 그 플루트를 그 후 약 1년 정도 열심히 하더니 중학교에 가서부턴 시들해졌는지 구석에 쳐박아두고 있다. 그래도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진 가끔 엄마가 내게 곡을 주문했듯 나도 딸에게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의 애절한 선율과. 대중가요인 <마법의 성> 같은 것을 주문하곤 하면 두말 않고 엄마의 주문을 행복한 얼굴로 연주해 주더니 고등학교에 들어가고부턴 밤 12시나 귀가하는 평일엔 물론 휴일에도 “귀찮아!” 하며 노골적으로 말하며 잠을 자버리곤 했다. 공부하느라 늘 잠이 부족한 딸을 이해는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너무 섭섭해서 가슴이 저리곤 했다.

오늘도 나는 검은색 피아노와 은빛 플루트를 바라본다.
엄마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었던 나. 내게 있어서 생의 모든 것이었던 딸. 딸의 딸. 그 딸의 딸…. 그렇게 세월이 흘러서도 내 엄마의 삶과 나의 삶이 증표로 남아있는 피아노와 플루트는 다른 형태로 존재할 것이고. 세대가 거듭되어도 마음 속에 여전히 엄마의 생은 그 딸의 가슴 속에 푸른 나무로 기억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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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전북일보 신춘문예 - 수필 당선작]


         장승/ 김재희

여행을 하다보면 장승촌에 들리는 때가 있다. 수많은 장승들의 이름과 표정이 참으로 기이하고 익살스럽다. 갖가지 이름만큼이나 서로 다른 특징이 들어 있는 장승들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모든 희로애락을 한 곳에서 전부 보는 느낌이 든다.

조금은 숙연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올려다 보이는 장승에서부터 아이들 장난 같은 웃음을 짓게 만드는 장승들. 현 시대에 발 맞추려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괴이한 장승이 있는가 하면 살짝 눈을 돌리며 배시시 웃음을 깔게 만드는 짓궂은 장승이 있고 밤길에서 뒷덜미를 잡아 챌 것 같은 으스스한 장승도 있다. 어떤 모습일지라도 그것들은 우리들의 끈끈한 삶의 흔적이 묻어있는 형상들이다.

그것들의 모습은 결코 매끄럽거나 곱지가 않다. 어딘가에 별 쓸모 없이 서 있거나 쓰러져 있는 나무들을 모아 많은 힘 들이지 않고 만들어 낸 하찮은 나무조각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그저 스쳐 지나가듯이 가볍게 감상하고 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그 장승들의 표정들에서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설화 속의 주인공들을 떠올리곤 한다.

우리의 신화나 전설, 민담 속 주인공들은 친근하고 정겹다. 더러는 괴팍스럽고 밉살스러운 면도 있지만 대부분 부족하고 모자라서 늘 누군가에게 시달림을 받으면서도 자신들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끈질지게 살아 온 평범한 인간상들이다. 그러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 그것이 지금껏 내려온 우리민족의 혼이었지 싶다. 우리가 장승이라고 이름지어 부르는 것들의 표정이 바로 그들의 상징 아닐까. 묵직한 자연의 섭리와 돈독한 가정 윤리에서부터 가벼운 재치와 해학 등 수많은 사연들의 표정이 줄줄이 늘어서서 점점 잊혀져 가는 옛정들을 돌이켜 보게 만든다.

장승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개가 쌍을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다.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나무꾼과 선녀, 양반과 상놈 등이 그렇다. 그런 것들 중에서 특별히 관심이 가는 것은 삼신할멈의 땀 흘리는 표정 옆에는 괴이한 웃음을 웃는 저승할멈이 같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탄생의 기쁨 자리에 왜 하필 죽음의 그늘을 드리우게 한 것일까. 태어나는 순간 세상 모든 것과 대립하는 존재가 되고 그에 따른 희로애락의 고뇌가 시작되는 것, 모든 세상사가 다 이처럼 극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는 점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좋은 일에 기뻐하면서도 궂은 일에 항상 대비하고 살아야 하는 삶의 이치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한 걸음 물러서서 그것들의 표정을 살펴보면 단지 웃음을 짓거나 찡그리게 하는 것은 표면적일 뿐 내면에는 인간이 지키고 실천해야 할 덕목들이 서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들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표정도 그 장승들만큼이나 다양하다. 문득, 어쩌면 장승 쪽에서도 드나드는 사람들의 갖가지 표정을 감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장승의 표정보다도 저들이 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저들은 사람들의 표정에서 어떤 걸 느낄까. 환희와 기쁨에 들뜬 표정을 보기도 할 것이고, 찌들고 어두운 표정을 보기도 할 것이다. 더러는 아집과 탐욕으로 얼룩진 표정에 경악을 할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편해진 세상이다. 반면에 사람들의 마음은 삭막해져 가고 있다. 올라가는 빌딩 층만큼 채워야 하고,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 서로 견주고 밀치며 기를 써야하고, 그래서 서로 미움과 갈등들이 쌓여 간다. 위층 아래층에 누가 사는지 알 수 없는 아파트 생활, 이혼이 늘어가는 가족생활, 그래서 늘어나는 미아와 기아들, 부모를 버리는 자식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표정들을 저 장승들은 보고 있으리라. 그러고 보면 오히려 우리 인간이 장승들의 구경거리인 셈이 아닐까?

한바퀴 휘 돌고 나오려는데 내 눈을 다시 잡는 장승이 하나 있었다. 사람들 눈에 쉽게 뜨일 것 같지 않는 곳에 이름표도 없이 다른 장승들과는 좀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어찌 보면 다른 장승들과는 별로 어울리고 싶지 않다는 거만한 표정인 것 같기도 하고, 같은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소외감으로 인한 자괴감에 빠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한참을 들여다보면서 왠지 알 수 없는 연민이 느껴졌다.

인간에게 감추어져 있는 양면성. 그 장승에게서는, 결코 들추어내고 싶지 않는 내 양면성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애써 배척해 버리고 싶은 마음과 그러면서도 자꾸만 뒤돌아보는 어리석은 마음, 내 작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표면으로 뿜어내면서도 내게로 오는 감정은 부풀려 키워가며 등 돌렸던 마음, 스스로 만들어 논 울타리 안에 그 누구도 들여놓지 않았던 외곬의 침묵, 그렇게 얽힌 마음들과 얼음장 같이 싸늘하게 굳어져 있었던 표정이 저 장승 속에 들어 있는 듯했다. 불현듯, 그 장승이 갖고 싶어졌다. 곁에 두고 타인인 듯한 내 자신을 들여다보며 타산지석(他山之石)을 삼아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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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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