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편지

2007.07.13 10:06

양미경 조회 수:589 추천:51

              마지막 편지
      
                                        양 미 경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릴 때쯤, 나는 슬프고 아름다운 뉴스 하나를 접했다.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한국계 제임스 김에 관한 기사였다. 추수감사절 휴일을 이용해 자동차 여행을 떠난 제임스 김 일가족의 행방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며칠 후, 차안에 갇힌 지 9일 만에 그의 아내와 두 딸은 극적으로 구조되었지만 도움을 청하러 떠난 제임스 김은 오리건 주 깊은 산속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후 사건의 디테일한 부분들이 알려지면서 세계인들은 제임스 김에게 진심으로 애도를 표했다. 미국의 언론들은 일제히 가족을 살리기 위해 폭설 속을 헤치고 다니다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제임스 김을 '초인이자 진정한 영웅’이라며 그의 지극한 사랑을 보도했다.

일주일동안 폭설에 갇혀 그들은 밤에만 히터를 켰고, 심지어 차 타이어까지 태우며 구조대를 기다렸다고 한다. 기름과 식량도 바닥나자 제임스 김은 평상복 차림으로 구조요청을 위해 길을 나섰다고. 그 길은 급경사의 험준한 길임에도 눈을 헤쳐 가며 그는 무려 20여 킬로미터나 걸었다는 것이다. 가족을 위해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길을 택했던 제임스 김. 초인적인 의지로 전진하다가 자신의 생이 다했다고 느끼자 겹쳐 입었던 바지를 벗어 흔적을 남겼고, 얼어붙고 마비된 손으로 구조요청 메모를 남겼다.

  
대개의 남자들은 원시시대 때부터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으로 길들여져 왔다. 특별한 모계사회를 제외하면 예외 없이 그렇다. 한국 남자들은 가족을 부양하고 책임진다는 의식이 강하다. 조선시대 국교였던 유교는 철저한 가부장제도로 남성들의 권위 아래 여성들을 억눌렀지만 한편으로는 가족에 대한 부양의무를 혼자 지는 결과도 가져왔다. 가부장제의 권위가 여성의 지위를 남존여비 수준으로 낮춰버린 동시에 남성들에게 과도한 책임과 의무를 짊어지게 한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한국 남자들은 가족에 대한 부양의무를 사랑의 신의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제임스 김의 가족에 대한 의지는 분명 사랑의 힘이었다. 그러나 또한 한국인 아버지이자 한국인 남편으로서의 힘이며 세계인들은 일반적 이해의 선을 넘어서는 그런 한국 남자의 의지에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서양인들은 눈에 보이는 표현을 중시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마주 할 때마다‘사랑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서로의 의무와 권리를 따질 때는 한 치의 양보도 없다고 한다. 반면에 한국 남자들은 사랑한다는 표현에는 인색하다. 허나 아내와 자식을 위한 일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과감하게 내던진다. 그것이 한국 남자의 특징일 것이다. 제임스 김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 한국 남자들이 이즈음 많이 위축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199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늘고 여성의 지위와 권리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면서이다. 실제로 나는 여성과 남성이 대립관계를 이루는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남성과 여성이 어느 정도 권리와 의무에 대한 동등한 균형감각을 유지해가고 있는 듯하다. 다만 한국 남자들의 당찬 패기가 사라진 것 같아 씁쓰레하다.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와, 조창인의 소설 <가시고기>가 나왔을 때 나는 밤새워 그 책들을 읽었었다. 비록 통속적인 내용이긴 하지만, 그것은 이 땅에서 점점 작아져가는 아버지와 ‘가장’이라는 짐을 홀로지고 가는 한국남자들의 사랑과 아픔에 공감했었다.

  제임스 김이 가족에게 남긴 사랑과 실천의 의지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 가족들은 영원히 남편과 아빠의 사랑을 가슴에 새기며 살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전해 듣는 사람들 또한 다시 한 번 한국 남자들의 묵직한 사랑과 혼자 침묵으로 극복하는 슬픔에 대해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나는, 제임스 김이 이승에서 쓴 마지막 편지를 떠 올려보았다. 이제 곧 죽음이 찾아오고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스스로가 구원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점점 가물가물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가족의 구원을 요청하는 글을 쓰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두려움과 슬픔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자신의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더는 가족에게 구원이 되지 못한다는 절망에서 오는 두려움과 슬픔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사랑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가족들은 무사히 구조되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에 대한 걱정을 놓지 못했던 제임스 김. 나는 그가 남긴 마지막 구절을 쉽게 잊을 수가 없다.

‘아내와 어린 두 딸이 차에 갇혀있으니 구조대를 보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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