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멸치 존경법

2011.02.22 08:34

손광성 조회 수:592 추천: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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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멸치 존경법 / 손광성

가끔 나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멸치를 깐다. 멸치볶음을 좋아하다 보니 그리 된 것이다. 목마른 짐승 샘물 찾는 격이라고나 할까. 멸치를 까는 과정은 매우 단순하다. 한 마리당 세 단계로 작업은 종료된다. 먼저 대가리를 딴 다음 엄지손톱으로 등을 가른다. 그 다음에 내장을 들어낸다. 그래야 깔끔하게 끝난다. 내장이 뱃속에 들어 있다고 해서 그 부분을 뒤적거리다가는 낭패를 본다, 잘 갈라지지도 않지만 제일 맛있는 부분이 부스러지기 때문이다.

멸치를 까다 보면 잠시 마음이 짠할 때가 있다. 어느 한 놈도 내장이 까맣게 타지 않은 것이 없어서이다. 얼마나 속을 끓였으면 저지경이 되었을까 싶다. 짠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편안히 죽은 놈은 한 마리도 없다. 모두 뒤틀려 있다. 끓는 물속에 던져지는 순간을 다시 목격하는 것 같아 또 한 번 짠해진다. ‘악어의 눈물’이라고 해도 변명할 생각은 없다.

초대 대통령 ‘리승만’ 박사께서 대국민 담화를 할 때마다 매번 빠지지 않는 말씀이 있었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네다. 이상한 것은 멸치를 깔 때마다 이 말이 떠오른다는 사실이다. 정확한 이유는 설명할 수 없다. 다만 멸치들이 몰려다니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나 하고 막연히 생각할 뿐이다.

바다 속에서 떼를 지어 다니던 멸치는 잡힐 때도 떼로 잡히고, 팔릴 때도 떼로 팔린다. 삶은 공동체의 영역에서 이루어지지만 죽음은 누구에게나 개별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해 주어도 멸치들에게 먹혀들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살아서도 함께, 죽어서도 함께, 팔려서도 함께”라고 외칠 것만 같다.

멸치 공화국에도 대통령이 계시다면, 그래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다음과 같이 수정하는 것이 어떠냐고 충고하고 싶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습네다”뭉친다고 다 좋은 건 아니라는 사실만 인정했더라면 저처럼 낭패를 보는 일은 없었을 텐데 하는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멸치를 멸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아니, 오히려 존경한다. 은린옥척銀鱗玉尺은 못 되지만 은린옥촌銀鱗玉寸은 된다. 비록 척尺이 못 되고 촌寸밖에 안 되는 작은 체구지만 그 은빛 몸뚱이가 발산하는 빛이 자못 눈부시다. 죽어서도 저 광대무변한 대양을 누비던 왕년의 자유와 영광의 광휘만은 조금도 훼손시키지 않고 있다. 은성무공훈장을 자랑스럽게 번쩍이며 전사한 장군들을 보는 것 같다,

게다가 결기 또한 대단하다. 대가리만 모아놓은 그릇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짐작이 갈 것이다. 눈을 감고 죽은 놈은 단 한 마리도 없다. 하얗게 흘겨보는 수많은 저 눈동자들! 하나하나가 나를 향해 날아오는 총알 같다. 그들의 오기에 찬 시선 앞에서 나는 가끔 부끄럼을 느낀다. 죽은 다음에 나도 나의 적들을 저처럼 백안시白眼視할 수 있을까 싶어서이다. 그래서 나는 대가리를 따지 않은 멸치볶음에는 감히 손을 대지 못한다.

나의 친구 조 형趙兄은 아예 멸치를 입에 대지 않는다. 대가리를 따도 마찬가지다. 이유는 간단하다. “고 작은 것을 불쌍해서 어떻게 먹느냐”는 것이다. 어떤 것을 먹든 아니 먹든 각자의 식성에 달린 문제니 뭐라 말할 것이 못되지만, “고 작은 것을 불쌍해서....” 운운하는 발언만은 삼갔어야 옳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능멸까지는 아니지만 그 같은 발언은 멸치들의 자존심에 손상을 입혔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동정을 받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유쾌한 일이 못된다. 단지 몸집이 좀 작다는 이유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도 이건 약과다. 심하면 “멸치도 생선이냐?”고 한다. 어족의 족보에서 아예 파내 버릴 기세이니, 기도 안 찰 노릇이다. 진정한 가치란 형의 대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의 우열에 있는데 말이다.

옛날에 참새 한 마리가 있었다. 어느 날 소잔등에 올라가서 이렇게 말했다.
“네 고기 열 점이 내 고기 한 점만 하냐?”
소란 놈 눈만 껌벅거릴 뿐 대꾸 한 마디 없더란다. 소에게 달리 무슨 말이 있었겠는가,
“언즉시야言則是也라!”
납작 엎드리는 수밖에.

우리는 멸치 한 줌으로 한 솥의 국 맛을 내고도 남는다. 고급 어종이라는 도미나 민어로는 불가능하다. 멸치만이 가능하다. 게다가 멸치는 아무리 먹어도 물리는 법이 없다.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멸치의 이 불변의 가치! 이것이 내가 멸치를 존경해 마지않는 또 다른 이유이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멸치에 대한 나의 이런 사랑과 존경이 결국 멸치볶음을 즐겨 먹는 식성으로 굴절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영양을 섭취한다는 문제가 아니다. 보다 깊은 주술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그들이 숭배하는 토템인 곰을 경건한 의식을 통해 잡아먹었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곰의 모든 미덕을 소유함은 물론 곰과 일체가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일체감, 먹는 것보다 더 확실한 일체감이 달리 어디 있겠는가. 어떤 상대가 너무 사랑스럽거나 존경스러운 나머지 먹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껴 본 사람이라면 내 말이 과장이 아님을 쉽게 이해하리라 믿는다. 나는 멸치를 존경한다. 그래서 나는 멸치를 먹는다. 이것이 나의 멸치 존경법이다.

오늘도 마루에 앉아 바둑 프로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멸치를 깐다. 대가리를 따고, 등을 가르고, 내장을 꺼낸 다음, 양재기에 담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복이 쌓이는 물 좋은 멸치. 오늘 저녁 멸치볶음 맛이 각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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