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아보세

2007.10.02 20:38

임두환 조회 수:41 추천:7

잘 살아보세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임두환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농촌 어디에서나 경쾌한 음악소리에 맞추어 새마을 깃발은 펄럭였다. 새마을운동은 한마디로 잘 살기 운동이었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이 영남지역 잘 가꾸어진 어느 농촌마을에서 감동을 받아 새마을운동을 추진하였다고 한다.

“우리도 노력하면 잘살 수 있다!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
라는 기치를 내걸고‘자조, 자립, 협동정신을 바탕으로 주택개량사업, 마을 길 넓히기, 교량가설사업, 농한기부업권장, 마을창고설립 등이 새마을 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차츰 도시새마을운동, 학교새마을운동, 직장새마을운동으로 확산되어 범국민적 지역사회개발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던 것이다.

내가 군복무를 마치고 고향마을로 돌아 왔을 때가 1969년 10월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농촌생활은 무척이나 어려워서 너나 할 것 없이 가난을 대물림하며 살고 있었다. 내가 살던 고향마을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와집 한 채 없는 초가지붕으로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두메산골이었다. 버스가 다니는 도로에서 우리 마을까지는 2Km가 조금 넘는 길인데 꼬불꼬불하고 또 비좁았다. 새마을사업이 끝날 무렵에 경운기가 나왔지만, 그전에는 장날이면 우마차로 짐을 실어 날라 했었다. 그나마도 부락에는 우마차가 2대밖에 없었으니 장날아침 일찍 예약을 하지 않으면 낭패였다. 하늘밑 첫 동네였던 우리 마을에서 7km나 되던 중‧고등학교를 6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내리나 날마다 걸어 다녔지만 불평할 줄도 몰랐다.  

1970년 가을이었다. 우리 마을에도 새마을 깃발은 나부끼고 스피커를 통하여 새마을노래가 울려 퍼졌다. 제일 먼저 부락에서는 새마을지도자와 부녀회장을 뽑게 되었다. 이들은 우선적으로 덕망 높고 솔선수범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이들에게는 정부에서 직간접적으로 예우를 해주었고, 힘도 실어주었다. 우리 마을에는 300포대의 시멘트를 지원받아 주민들 스스로가 낡은 마을을 새마을로 가꾸어 나가야 했다. 처음에는 주택개량사업으로 초가지붕을 기와나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었고, 그다음에는 환경미화사업으로 마을길을 넓히고 담장개량에 치중하였다. 마을진입로를 개설하고 새마을회관이나 마을창고를 건립하는데 들어간 땅은 토지소유주가 마을을 위해서 희사하도록 하였다. 마을주민들은 새마을사업에 필요한 노동력을 무상으로 제공해야 했고, 부녀자들은 두 팔 걷어 부치고 새마을공동구판장을 운영하며 마을기금조성에 앞장섰다.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금수나 강산 어여쁜 나라 한마음으로 가꿔가며 알뜰살림 재미도 절로 부귀영화 우리 것이다/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이 노랫말은 새마을사업을 하는 동안 새마을노래와 함께 널리 불리어졌다.  얼마나 배고픔에 한이 맺혔으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까지 잘 살아보자고 목청을 높였을까? 이들에게는 오직,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굳센 의지가 있었을 뿐이었다.  
  
새마을사업이 이루어진지 불과 10여 년 안팎이었다. 두메산골이었던 우리 마을에도 초가지붕은 사라지고, 등잔불이 전등불로 바뀌었으며, 마을 앞까지 자동차가 드나들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집집마다 재봉틀과 냉장고가 들어왔고 TV와 전화도 설치되었다. 대낮같은 전등불에 환호성을 질렀고, TV에서는 바깥세상을, 전화기에서는 고향 떠난 아들딸의 안부가 전해졌다. 피땀 흘려 일궈냈던 새마을사업은 어둠을 밝혀주었고, 배고픔도 우리 곁을 떠나게 했다.

금년 추석이었다. 성묘를 마치고 고향마을 6촌 형님과 외숙 댁에서 하루를 머물다 돌아왔다. 해마다 추석명절이면 고향마을을 찾았지만 이번에는 좀 유별났다. 연휴가 길어서였는지, 형편이 잘 풀려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낯  익은 젊은이들이 많이들 내려와 있었다. 마을 어귀부터 시작하여 광장까지 길 닿는 곳에는 승용차가 즐비하였다. 불과 얼마 전만해도 헐벗고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던 그들이 아니었던가. 쟁기로 밭 갈고, 지게로 볏단을 나르고, 홀태로 보리나 벼를 훑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모든 일을 기계가 해치운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동네 이 집 저 집을 둘러보아도 농촌살림은 윤택해 보였고, TV에서부터 전화기, 세탁기, 냉장고, 싱크대, 목욕탕의 샤워시설까지 잘 갖추어져 있어 도시생활과 다를 바 없었다. 너무도 잘 살고 있는 우리농촌의 모습에서 흐뭇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전 아프리카를 방문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아프리카에서도 새마을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한국이 짧은 기간에 경제적 근대화를 이룩하게 된 것은 새마을운동 덕분이다. 새마을운동정신이 개발도상국의 발전모델로 주목되어 외국유학생이 우리나라로 계속 몰려온다니 가슴이 더욱 뿌듯해진다.
                                            ( 2007. 10.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