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검다리의 삶

2007.10.03 11:20

김세웅 조회 수:41 추천:6

               징검다리의 삶
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김세웅


형제애(兄弟愛)에 관한 전설이 널리 전해져 오고 있다.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곡식이 매우 귀하던 때의 이야기다. 몹시 가난하게 살던 형제가 있었는데 그들은 아끼고 아꼈던 곡식을, 형님은 궁색한 살림의 아우에게, 그리고 아우는 형님에게 주려고 지게에 지고 집을 찾아가가던 중,  길에서 그만 맞닥뜨리고 말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감격한 나머지 서로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누가 꾸며낸 것인지는 아리송하나 놀부나 흥부 형제의 얘기와는 대조적인 교훈이 담겨 있다.

어려서 어머니께서는 우리 형제들과 기도를 드릴 때마다 우애하는 자녀가 되게 해 달라는 간곡한 소원을 빠뜨리지 않으셨다. 어머니로부터 돈독한 형제우애의 귀중함을 누누히 교육 받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우리 형제자매는 3남1녀로 4남매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잔 풍파가
없진 않았으나 그것은 홍로점설(紅爐點雪)에 비유가 될 정도였다. 벌겋게
이글거리는 난로에 눈 몇 방울이 떨어진들 당장 흔적조차 살아져 버리듯 고난의 때가 닥치기도 했었지만 여덟 명 모두가 지금껏 건재하다. 그리고 한 가정에 꼭 같이 네 명씩 도합 열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신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고르게 잘 살고 있다. 생각해 보면 매일 같이 끔찍한 사건 사고가 연이어 터지는 살벌하고 험악하기 그지없는 세상살이에서 그렇듯 평온하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은 흔치 않은 일일 뿐 아니라 능히 자랑 꺼리가 될 수도 있다.

전에, 우리 형제들의 이야기를 가끔 자랑 삼아 얘기하곤 했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열매로서 얻게 된 선물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간증(干證)거리가 되는 것으로 안 탓이다. 하지만 신앙의 열매란 영적인 거듭남을 떠나서 단순히 생활상의 평온 만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훨씬 나중에서야 그것은 전적으로 이른바 ‘하드웨어’ 쪽에만 비중을 두고서 한 말이었음을 후회했다. 건강이나 순탄한 생활뿐 아니라 삶의 질이나 수준에서 얼마나 도덕적으로 가치추구적 삶에 충실했느냐가 보다 중요하다고 할것이다.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여기는 형제간의 <우애>라는 잣대를 들이대고 볼 때에 우리 형제들 사이에는 아직도 아쉬움이 절실한 구석이 있음을 느낀다. 그러던 차 K라는 중학교 때의 친구가 털어놓는 형제간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면서 실로 부끄러움과 부러움이 교차함을 느꼈다.

그들 형제는 6남 3녀인데 지금껏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단다. 형제 가운데 장형은 6.25전란 때 중부전선 칠성부대의 중대장으로서 세운 전공 때문에 군의 최고 훈장인 태극무공훈장(太極 武功勳章)을 받기도 했으며, 친구는 입을 닫고 있으나 국민훈장 석류장 등 많은 수상 경력이 있고, 또 형제 중 막내 누이는 독일 대사관의 공사를 거쳐 유럽의 ‘세르비아’(Serbia) 와 ‘몬테네그로’(Montnegro)의 우리나라 유일의 여자대사(女子大使)로 재직하고 있기도 하단다. 그들의 형제 우애에 얽힌 지난날의 이야기는 송곳처럼 마음에 꽂혔다.

전주시 외곽인 팔복동 근처(지금 은 공업단지) 만여 평에 이르는 농토를부모님께서 남겨 주셨다고 한다. 얼마 뒤에 그 곳이 공업단지로 조성되는 바람에 수용되어 보상금이 나온 것이다. 그 보상금 처리를 위해 형제들의 가족회의가 열렸는데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 돈을 우리 아홉 형제가 분배하게 되면 기껏 얼마씩밖에 안 돌아 가니 몰아서 막내에게 몽땅 사업자금으로 주자.”
이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했고 보상금 전액을 고스란히 막내에게 건네주어 오늘의 어엿한 한 사람의 사업가를 길러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어느 집안에서나 흉내 낼 수 없는 참으로 지혜로운 판단을 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형제들의 돈독한 우애는 사회의 귀감이 되고도 남는 일이려니 싶다. 세간에는 유산문제를 둘러싸고 형제들 사이에 갖가지 추악하고 앙탈 진 법정다툼이 빈번히 벌어지고 심지어 살인사건까지도 서슴지 않는 판에 형제 우애의 높고 높은 금자탑을 우러러 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한 형제들의 마음으로 결집해 있기에 마침내 이웃들의 부러움을 사는 집안으로 발돋움할 수가 있었고 융성 하는 집안을 일으켜 세우게 된 것이 아닐까.

형제우애의 산 증거는 그들 조상들의 산소 관리에서도 여실이 보여 준다. 그들 조상의 산소에는 누이동생이 지어 바쳤다는 40여 평의 집이 있어 후손들이 성묘하러 와서 쉬기도 하고, 산소관리에 필요한 온갖 농기구가 보관되어 있어 무척 편리하다고 한다. 일년에 세 번씩 벌초를 한다는데 후손들이 직접 정성을 들여 벌초를 한다는 놀라운 사실도 들려 주었다.
빛이나 어두움은 유사이래 변함없이 똑 같듯이 아무리 시대가 변한다 해
도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는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결코 달라질 수가 없는
것이다.

시골에서 살 때 요긴한 방편의 하나로 징검다리라는 게 있었다. 개울을 건널 때 신발을 벗지 않고 건널 수 있도록 돌덩이나 흙으로 디딤돌을 쌓아 놓은 것을 일컫는다. 우리 기성세대들은 후손들이 바른 사회윤리나 가족간 화목의 중요성을 가슴 깊이 안고 살아가도록 본을 보여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야 할 게 아닌가 싶다. 우리 자손들이 자랑스럽게 딛고 인생의 강을 건너가도록 아름다운 형제우애의 생활로 든든한 징검다리가 되어야 하려니 싶다
                                                  (2007. 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