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만에 본 추억의 흑백사진

2007.10.07 17:11

김학 조회 수:142 추천:3

35년 만에 본 추억의 흑백사진
                                                                    김 학



  지난 4월 어느 날, 서재에 모은 책 일부를 고향도서관에 보내려고 정리하고 있었다. 책장을 정리하는데 책 속에서 사진 한 장이 툭 떨어졌다. 35년 전에 찍은 흑백 단체사진이었다. 사진에는 '박종열 편성국장 송별기념 72. 3. 6'이라 씌어져 있었다. 이 사진을 왜 앨범에 끼워두지 않고 책 속에 넣어두었을까?
그 사진에는 남자 23명과 여자 4명 등 27명의 얼굴이 33년 전 모습 그대로 정지되어 있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군산 서해방송 사옥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돋보기를 끼고 얼굴 하나하나를 살펴보았다. 벌써 다섯 분이나 이승을 떠났다. 33년이란 세월은 참으로 긴 시간. 지금까지 방송사에 머물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들은 벌써 이승과 저승으로 갈렸다. 이승의 동료들도 사방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이 사진의 주인공인 박종열 국장은 대전문화방송에서 퇴직하고 지금은 전주에서 여생을 즐기고 있고, 일찍이 이민 가서 미국 LA에 터를 잡은 R프로듀서, 광주문화방송으로 옮겨 그곳에서 정년을 맞은 S아나운서, 남의 유부녀와 눈이 맞아 대전으로 사랑의 도피를 했던 미남 G국장, 야간 근무 중 사장실에 들어가 양담배를 훔쳐 피우다 쫓겨나 강원도 삼척문화방송까지 진출했던 K아나운서, 곱슬머리에 옥니, 검은 피부를 자랑하던 C국장은 국회의원을 3선까지 지냈고 만학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아 지금은 대학강단에 선다. 이 사진에 나오는 J양과 결혼하고 국회의원 비서관을 지낸 성우 L군, 서해방송 창립 초기 몇 달간 기자생활을 하다가  사표를 던지고 서울로 가서 생선장사를 한 J기자, 정년퇴직 뒤 서울에 사는 자녀들과 가까이 살고싶어 안양으로 떠난 C엔지니어, 방송을 떠난 뒤 일간신문사와 시사월간지 만들기를 즐기던 O기자, 동아일보 기자로 갔다가 말년에 지방신문 편집국장으로 컴백했던 L프로듀서,  부인과 사랑의 싸움중이라는 정력의 사나이 대전의 P아나운서, 연상의 아내를 잃고 외롭게 홀아비로 사는 서울의 K기자, 아직도 고향 군산을 지키는 P기자, 전주MBC로 옮겼다가 지금은 광고회사 부사장으로 일하는 G프로듀서, 방송 일선에서 물러나 수필과 깊은 사랑에 빠진 나 그리고 앞자리에 나란히 서 있는 세 명의 여자 아나운서의 얼굴에 눈길이 머문다. 안동문화방송에서 방송하다 만난 총각과 결혼하여 산다는 M양, 전주문화방송으로 옮겼던 C양, 목포문화방송에서 왔다가 광주전일방송으로 옮겨갔고 은행원과 결혼한 뒤 서울에 사는 L양 등이 추억의 보따리를 풀자 아름다운 이야깃거리들이 쏟아진다. 남자성우 한 사람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세월이 그의 이름을 내 뇌리에서 지워버렸나 보다. 인터넷으로도 그의 이름을 검색할 수 없으니 어이할꼬.
이승을 떠난 분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체신부 차관을 역임하셨던 L사장. 그 분은 개각이 있을 때마다 행여나 입각이 되지 않을까 늘 기다렸던 분이다. 그러나 끝내 장관자리가 그분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한 때 방송국의 실세로서 전권을 휘둘렀던 J상무, 나중에 부사장까지 승진했지만 물러난 뒤 젊은 나이에 이승을 떠났다. 한 때 한강 이남에서는 가장 악명 높다던 음악PD P부장과 글씨 잘 쓰고 노래 잘 불렀던 인정 많은 K국장도 정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에서 수술 뒤 바로 세상을 떴다. 술을 무척 즐겼던 B엔지니어도 정년퇴직 이후 슬며시 세상을 하직했다. 이들과 어울려 생활하던 시절에 쌓인 고운 정과 미운 정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내 시선은 긴 머릿결과 원피스차림으로 두 손을 앞에 모은 채 단정하게 서있는 L아나운서의 얼굴에 머물고 있다. 그녀는 나로 하여금 여성에 대한 눈을 뜨게 해주었고, 사랑의 맛이 어떤지를 깨닫게 해준 여인이었다. 심야 프로그램인 '사랑의 메아리'를 맡게 되었을 때 L아나운서는 그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1시간 동안 연애하는 기분으로 방송을 하자고 제의했었다. 청취자의 엽서와 희망가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기에 우리는 말 그대로 연인처럼 열심히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프로듀서인 나는 아나운서인 그녀에게 사랑의 연서를 쓰듯 직접 엽서를 썼고, 그녀 역시 연인의 편지를 읽듯 감정을 실어서 낭독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청취자들의 호응이 무척 좋았었다. 그 방송이 끝난 뒤 자정이 넘어서 나는 그 아나운서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하숙집으로 가야 했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지만 즐거운 심야의 데이트였다고나 할까. 35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추억의 흑백사진 한 장에서 피어오르는 사랑의 안개가 이순의 나를 환상에 젖게 하니, 이 얼마나 좋은가.



*김학 약력
1980 월간문학으로 등단/아름다운 도전 등 수필집 9권/펜문학상, 동포문학상 본상, 영호남수필문학상 본상, 전주시예술상 등 다수 수상/전북수필문학회 회장, 임실문인협회 회장, 전북문인협회 회장, 전북펜클럽회장 역임/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전담교수, 국제펜클럽한국본부 부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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