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춘기
2007.10.08 16:29
三春期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김세웅
올해의 추석은 색다르게 보냈다. 무슨 이벤트라고까지야 할 수 없겠지만 전에 늘 해오던 추석맞이와는 색다르게 보냈다. 서울과 그리 멀지 않으면서 경관이 그럴싸해 수도권사람들이 자주 찾는다는 경기도 강화도에서 보냈다. 2남 2녀의 자식을 두었기에 난생 처음으로 펜션 두 곳을 빌려 하룻밤은 아들 팀과 묵고 또 하룻밤은 딸 팀과 자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함께 지냈다. 이런 계획은 전적으로 아내가 꾸며낸 것이었는데 서울로부터 이곳까지 내려와야만 하는 자식들의 번잡스러움을 덜어 주자는 게 목적이었다.
새벽부터 쉴 틈도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자식들의 고단함을 부모가 몰라주면 누가 알아줄 것인가. 해마다 명절이면 TV에서 보여주는 고속도로의 ‘주차장화(駐車場化)’현상이 떠올라 아뭇소리없이 따르기로 한 것이다.
우리 내외는 여러 날 전에 성묘를 다녀오긴 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큰 잘못을 저지르는구나 하는 자책감이 목의 가시처럼 따라다녔다. 마땅히 자손들과 더불어 성묘를 하는 것이 추석 본래의 취지에 맞는 것이고 후손된 도리일 뿐 아니라 교육상으로도 올바른 일이건만, 어긋난 짓을 하고 있구나 하는 찜찜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첫날, 아들 팀과 묵었던 펜션은 강화도에서는 제일 높고 고구려 불세출(不世出)의 장수 ‘연개소문’ 이 말을 타고 달렸다는 고려산 가까운 들녘에 있었다. 호수를 끼고 있는 펜션은 아담하면서도 앞마당의 푸른 잔디가 잘 다듬어져 있었고, 초가을의 파란 하늘아래 흰색 분홍 빨간색 코스모스가 손을 흔들 듯 너울거리는 집이었다. 인근에는 서구풍(西歐風)을 흉내 낸 펜션들이 근래에 어찌나 많이 생겼는지 바로 <펜션의 고장>이라 이름하여도 좋을 듯했다. 방 하나에 9만 원, 두 개면 16만 원씩이나 하니 서민들 주머니로는 숙박비가 만만치 않을 건데 수도권 사람들은 뺀질나케 드나드는 모양이다.
호수둘레에는 낚시꾼들이 몰고 온 승용차들이 늘어서 있고, 날아드는 메뚜기며 왕치, 그리고 개구리까지 같이 놀자고 뛰어나와 꼬마들은 신기한 듯 마당을 누비면서 마냥 즐거워했다.
다음날은 추석, 대보름 날이었다. 아들들과 손자들은 처가 어른들을 찾아 뵈라고 서둘러 떠나 보내고 돌아서려니 왠지 무척 마음이 허전하고 서운했다. 같이 왔다가 아이들만 보내니 그랬던 것 같다. 순간, 다음 번 모일 기회에는 자손들 모두가 다같이 한자리에 모이도록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저녁식사는 강화읍에 사시는 맏딸의 시댁어른이신 강화교회 한 장로님이 초청해 주셨다. 외지에서 강화에 손님이 오게 되면 빠뜨릴 수 없는 메뉴인 장어구이로 대접을 받았다. 강화에는 장어구이 가게가 무던히도 많던데 가게마다 성업이어서 예약을 미리 해야 한단다. 내 입맛에는 우리 고장 고창의 풍천장어와 별로 다른 맛은 없는 것 같았다. 일행이 식사를 하려고 자리에 죽 늘어서 앉아 있었다. 그 때 장로님의 둘째 아들네 손자라는 초등학교 2학년짜리가 벌떡 일어나더니 수저통을 들고 어른들의 것을 일일이 챙겨주질 않는가. 아이들이라면 흔히 떠들거나 장난질이 고작이련만 그 얘는 사뭇 달랐다. 정말 기특해 보였고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딸 팀과 묵은 곳 역시 꽤 널찍한 호수를 낀 펜션이었다. 황토재료를 많이 써서 오밀조밀하게 지은 아담한 건물이었다. 한복을 차려 입은 50십대의 주인이 해맑은 웃음으로 반가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잔잔한 호수에는 낚시꾼들을 위한 여러 가지 번듯한 시설물들이 마련돼 있어 전날 묵었던 집 가까이의 호수가 재래시장이라면 이 곳은 대형 마-트에 비견할 정도로 운치가 있어 보였다. 적막하기가 그지 없는 곳이었다. 빨간 고추잠자리만이 날갯짓을 하며 가을을 노래하는 듯했다. 해질녘에 호수가에 나가 한참 동안이나 홀로 거닐어 보았다. 늙어서 그런지 감상이 일기는 커녕 잔잔한 호수처럼 그저 무덤덤할 뿐이었다. 펜션 주인집 아이인지 중학생인 듯한 아이가 책 읽기에 푹 빠져있었다. 한참 동안이나 서서 지켜보아도 날 돌아 보지도 않았다. 그래 무슨 책을 그리 열심히 읽고 있는지 물어 보려다 방해하는 것 같아 그만 두었다. 책 읽기의 맛에 흠뻑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전날 펜션에서 묵으면서 있었던 일이다. 날이 어둑해지니 군데군데 모기향을 피워놓았는데도 모기들이 덤벼드는 바람에 아이들이 조심스러웠다. 일본 뇌염병원균을 지녔다는 모기라서 조심해야 한다는데 초등학교 4학년짜리 손자녀석들은 아무리 방으로 들어가라고 채근해도 들은 둥 마는 둥 놀기에만 신이 났다.
“너희들은 벌써 사춘기가 되었니? 그렇게 말을 안 듣게.”
꾸짖는 조로 한 마디 하니까 대뜸 한다는 소리가,
“아직 사춘기는 아니고 삼춘기에요.”
웃으면서 넉살을 부리는 것이었다.
“그런 말도 있니? 그러면 이춘기도 있겠구나?”
하며 웃어 넘겼지만, 요지음 아이들의 말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훨씬 영특해져서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너무 일찍부터 제멋대로 하려고만 해서 골치다. 삼춘기란 말이 실제로 있기나 한지 모르나 하도 요상한 낱말들이 많이 떠돌아다니는 세상이라 재치가 번득이는 말일 듯도 하다는 생각이들었다. 삼춘기란 아직 사춘기 얘들만치 삐딱하게 굴지는 않지만 어떻든 어른들의 말을 어긋거리는 사춘기 전 단계(前 段階)의 아이들을 이르는 말일 성싶다.
자라나는 아이들이야 삼춘기든 사춘기든 파국(破局)으로 치닫지만 않고 고비를 넘긴다면 저절로 먹구름이 흘러가듯 지나가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삼춘기나 사춘기 아이들처럼 무책임하고 탈선을 물 마시듯 하는 자들이 구석구석에 얼마나 많이 득실거리는가? 아직까지도 제정신을 못 찾고 삼춘기의 아이처럼 그리고 사춘기의 소년소녀들처럼 방황하고 허우적대는 어른 아닌 어른이라면, 저 대낮처럼 밝은 대보름 달을 쳐다보며
“제발 저 달빛처럼 밝고 의젓하게 살아가는 후손이 되어다오!”
울먹이며 눈물로 간절히 애원하는 조상님들의 음성을 듣는 귀가 뚫렸으면 싶었다. 모두들 후손들이 존경하는 조상이 되어야 하질 않겠는가.
이틀 밤을 지나고 보니 전주에 내려올 일로 마음만 바빴다. 이제 보니 나도 영락 없는 전주사람이 다 된 모양이었다.
(2007.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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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김세웅
올해의 추석은 색다르게 보냈다. 무슨 이벤트라고까지야 할 수 없겠지만 전에 늘 해오던 추석맞이와는 색다르게 보냈다. 서울과 그리 멀지 않으면서 경관이 그럴싸해 수도권사람들이 자주 찾는다는 경기도 강화도에서 보냈다. 2남 2녀의 자식을 두었기에 난생 처음으로 펜션 두 곳을 빌려 하룻밤은 아들 팀과 묵고 또 하룻밤은 딸 팀과 자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함께 지냈다. 이런 계획은 전적으로 아내가 꾸며낸 것이었는데 서울로부터 이곳까지 내려와야만 하는 자식들의 번잡스러움을 덜어 주자는 게 목적이었다.
새벽부터 쉴 틈도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자식들의 고단함을 부모가 몰라주면 누가 알아줄 것인가. 해마다 명절이면 TV에서 보여주는 고속도로의 ‘주차장화(駐車場化)’현상이 떠올라 아뭇소리없이 따르기로 한 것이다.
우리 내외는 여러 날 전에 성묘를 다녀오긴 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큰 잘못을 저지르는구나 하는 자책감이 목의 가시처럼 따라다녔다. 마땅히 자손들과 더불어 성묘를 하는 것이 추석 본래의 취지에 맞는 것이고 후손된 도리일 뿐 아니라 교육상으로도 올바른 일이건만, 어긋난 짓을 하고 있구나 하는 찜찜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첫날, 아들 팀과 묵었던 펜션은 강화도에서는 제일 높고 고구려 불세출(不世出)의 장수 ‘연개소문’ 이 말을 타고 달렸다는 고려산 가까운 들녘에 있었다. 호수를 끼고 있는 펜션은 아담하면서도 앞마당의 푸른 잔디가 잘 다듬어져 있었고, 초가을의 파란 하늘아래 흰색 분홍 빨간색 코스모스가 손을 흔들 듯 너울거리는 집이었다. 인근에는 서구풍(西歐風)을 흉내 낸 펜션들이 근래에 어찌나 많이 생겼는지 바로 <펜션의 고장>이라 이름하여도 좋을 듯했다. 방 하나에 9만 원, 두 개면 16만 원씩이나 하니 서민들 주머니로는 숙박비가 만만치 않을 건데 수도권 사람들은 뺀질나케 드나드는 모양이다.
호수둘레에는 낚시꾼들이 몰고 온 승용차들이 늘어서 있고, 날아드는 메뚜기며 왕치, 그리고 개구리까지 같이 놀자고 뛰어나와 꼬마들은 신기한 듯 마당을 누비면서 마냥 즐거워했다.
다음날은 추석, 대보름 날이었다. 아들들과 손자들은 처가 어른들을 찾아 뵈라고 서둘러 떠나 보내고 돌아서려니 왠지 무척 마음이 허전하고 서운했다. 같이 왔다가 아이들만 보내니 그랬던 것 같다. 순간, 다음 번 모일 기회에는 자손들 모두가 다같이 한자리에 모이도록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저녁식사는 강화읍에 사시는 맏딸의 시댁어른이신 강화교회 한 장로님이 초청해 주셨다. 외지에서 강화에 손님이 오게 되면 빠뜨릴 수 없는 메뉴인 장어구이로 대접을 받았다. 강화에는 장어구이 가게가 무던히도 많던데 가게마다 성업이어서 예약을 미리 해야 한단다. 내 입맛에는 우리 고장 고창의 풍천장어와 별로 다른 맛은 없는 것 같았다. 일행이 식사를 하려고 자리에 죽 늘어서 앉아 있었다. 그 때 장로님의 둘째 아들네 손자라는 초등학교 2학년짜리가 벌떡 일어나더니 수저통을 들고 어른들의 것을 일일이 챙겨주질 않는가. 아이들이라면 흔히 떠들거나 장난질이 고작이련만 그 얘는 사뭇 달랐다. 정말 기특해 보였고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딸 팀과 묵은 곳 역시 꽤 널찍한 호수를 낀 펜션이었다. 황토재료를 많이 써서 오밀조밀하게 지은 아담한 건물이었다. 한복을 차려 입은 50십대의 주인이 해맑은 웃음으로 반가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잔잔한 호수에는 낚시꾼들을 위한 여러 가지 번듯한 시설물들이 마련돼 있어 전날 묵었던 집 가까이의 호수가 재래시장이라면 이 곳은 대형 마-트에 비견할 정도로 운치가 있어 보였다. 적막하기가 그지 없는 곳이었다. 빨간 고추잠자리만이 날갯짓을 하며 가을을 노래하는 듯했다. 해질녘에 호수가에 나가 한참 동안이나 홀로 거닐어 보았다. 늙어서 그런지 감상이 일기는 커녕 잔잔한 호수처럼 그저 무덤덤할 뿐이었다. 펜션 주인집 아이인지 중학생인 듯한 아이가 책 읽기에 푹 빠져있었다. 한참 동안이나 서서 지켜보아도 날 돌아 보지도 않았다. 그래 무슨 책을 그리 열심히 읽고 있는지 물어 보려다 방해하는 것 같아 그만 두었다. 책 읽기의 맛에 흠뻑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전날 펜션에서 묵으면서 있었던 일이다. 날이 어둑해지니 군데군데 모기향을 피워놓았는데도 모기들이 덤벼드는 바람에 아이들이 조심스러웠다. 일본 뇌염병원균을 지녔다는 모기라서 조심해야 한다는데 초등학교 4학년짜리 손자녀석들은 아무리 방으로 들어가라고 채근해도 들은 둥 마는 둥 놀기에만 신이 났다.
“너희들은 벌써 사춘기가 되었니? 그렇게 말을 안 듣게.”
꾸짖는 조로 한 마디 하니까 대뜸 한다는 소리가,
“아직 사춘기는 아니고 삼춘기에요.”
웃으면서 넉살을 부리는 것이었다.
“그런 말도 있니? 그러면 이춘기도 있겠구나?”
하며 웃어 넘겼지만, 요지음 아이들의 말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훨씬 영특해져서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너무 일찍부터 제멋대로 하려고만 해서 골치다. 삼춘기란 말이 실제로 있기나 한지 모르나 하도 요상한 낱말들이 많이 떠돌아다니는 세상이라 재치가 번득이는 말일 듯도 하다는 생각이들었다. 삼춘기란 아직 사춘기 얘들만치 삐딱하게 굴지는 않지만 어떻든 어른들의 말을 어긋거리는 사춘기 전 단계(前 段階)의 아이들을 이르는 말일 성싶다.
자라나는 아이들이야 삼춘기든 사춘기든 파국(破局)으로 치닫지만 않고 고비를 넘긴다면 저절로 먹구름이 흘러가듯 지나가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삼춘기나 사춘기 아이들처럼 무책임하고 탈선을 물 마시듯 하는 자들이 구석구석에 얼마나 많이 득실거리는가? 아직까지도 제정신을 못 찾고 삼춘기의 아이처럼 그리고 사춘기의 소년소녀들처럼 방황하고 허우적대는 어른 아닌 어른이라면, 저 대낮처럼 밝은 대보름 달을 쳐다보며
“제발 저 달빛처럼 밝고 의젓하게 살아가는 후손이 되어다오!”
울먹이며 눈물로 간절히 애원하는 조상님들의 음성을 듣는 귀가 뚫렸으면 싶었다. 모두들 후손들이 존경하는 조상이 되어야 하질 않겠는가.
이틀 밤을 지나고 보니 전주에 내려올 일로 마음만 바빴다. 이제 보니 나도 영락 없는 전주사람이 다 된 모양이었다.
(2007.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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