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원망하는 여인
2008.03.08 10:21
바다를 원망하는 여인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김병규
큰형님의 일주기에 참석했다. 형님이 떠나신 빈 자리는 조카들 7남매가 채우고 있었다. 추도식을 마친 다음 날, 우리 집안의 관례에 따라 마을 사람들을 초청했다. 사람들은 고인의 유덕(遺德)을 기리며 고인의 지난 날 행적을 이야기하였다.나 역시 형님의 지난날들이 어제련 듯 떠올랐다.
6.25 혼란기에 반동으로 몰려 포승줄로 묶여 가서 고초를 겪었고, 그 뒤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살아나신 형님이었다. 당시에 사람들은 형님이 천명을 타고 나서 생명을 유지했다고 말했다. 수복과 더불어 면서기로 출발하여 면장이 되기까지 지역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셨다. 어렵던 고비를 넘기면서도 건재하던 형님이 한 줌의 재가 되어 하늘로 가시고 일주기를 맞았다. 형님을 기리는 사람들의 애정이 지금도 식지 않아 나는 고맙고 감사했다. 그런데 말문을 닫은 채, 음식도 드는 둥 마는 둥 하며 풀이 죽은 여인이 있었다. 비안도(飛雁島)에서 반 세기 전에 우리 마을로 시집 온 여인이었다.
“여보, 비안도 섬색시! 활달하던 섬 처녀의 기상을 어디다 감추고 그렇게 풀이 죽었소? 고희를 넘긴 할망구가 되더니 늦게야 철이 들었소?”
나와는 동갑내기로 허물 없이 지내던 처지라 농담삼아 물었다. 그녀는 반응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비안도는, 내 고향 마을 뒷 동산과 마주 보는 고군산 군도의 최 남단 섬이다. 기러기가 날개를 펴고 비상할 자세로 앉아 있는 섬이다. 청명한 날이면 사람들의 동태를 확인할 수 있도록 가깝다. 그녀는 온통 바다로 막힌 답답한 섬에서 벗어나고 싶어 바라보이는 육지를 한 없이 동경했을 것이다. 그녀의 간절한 소망이 현실로 되어 우리 마을로 시집을 오게 되었다.
그녀와 나의 만남은, 내가 군 복무를 마치고 귀향한 48년 전이었다. 결혼 1년 된 그녀는, 티없이 곱게 자란 섬 여인의 자연미가 풍겼다. 오월의 단비에 젖은 떡갈나무만큼이나 풋풋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의 5년 연상인 이웃 집 형이 그녀의 남편이고 그녀와 내가 동갑내라는 인연으로 친숙한 사이가 되었다. 때로는 그녀의 남편과 셋이서 어울리기도 하고, 허물 없는 처지가 되어 그녀와 나는 오누이처럼 가깝게 지내는 처지였다.
그녀의 남편이 군산에 있는 중선에 취업이 되었다. 건강하고 심성이 고운 사람이어서 선주의 신임을 받아 숙련된 일등 선원이 되었다. 수입도 넉넉하여 단란한 가정은 날로 살림살이가 불어났다. 연평도 근해로 조업을 나길 때는 집에 들르는 기회가 드물었으나 그들 부부는 3남매의 자녀도 두게 되었다. 나와 처음 만났을 때 청순했던 새댁은, 어느새 남편의 애틋한 사랑을 받고 자식 3남매를 기르는 현모양처가 되어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행복하던 그 가정에 불행의 마수(魔手)가 밀려왔다.
연평도에 조기잡이를 나갔던 그녀의 남편이 납북(拉北)되었다는 비보가 악귀처럼 날아들었다. 행복이 넘쳤던 가정이 한 순간에 무너졌다. 동승했던 선원들이 하나하나 돌아올 때 마다 그녀의 가슴은 숫검댕이가 되었다. 선원들이 모두 돌아왔으나 그녀의 남편을 돌아올 줄 몰랐다. 돌아오기는 커녕 가슴을 후비는 불길한 말만 그녀를 괴롭혔다. 당시 겁에 질려 바다에 뛰어내려 죽었다는 말이 들렸다. 북녘에 포섭되어 간첩으로 활동한다는 소리도 들렸다. 수사기관에서 그 집 주변을 감시한다는 말도 들렸으나, 그가 간첩이 되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불행이란 놈이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자 세 남매를 부등켜 안고 몸부림치며 긴 세월을 눈물로 보냈다.
영문도 모르고 그녀가 찾아간 곳은,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였다. 꿈에 그리던 남편을 40년 만에 만났다. 목메어 그리던 남편을 만났으니 꿈만 같았을 것이다. 말문이 막혀 ‘여보’라 불러보지도 못했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러 내렸다. 그런데 어쩌랴! 정겹고 다정했던 남편은 옛날의 그 남편이 아니었다. 순박하던 남편은 어디로 떠나고 몰라보게 변해버린 냉혹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북조선에서 하늘같은 000동지의 음덕으로 새 사람을 만나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나를 잊으시오!”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서는 남편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땅도 하늘도 온통 캄캄한 지옥이었다고 했다.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을 느끼며 돌아서는 그녀의 절규 한마디,
“차라리 만나지나 말았으면, 처음 만났던 옛 추억이나 가슴에 담고 그 그리움을 벗하여 평생 살 것을!”
좌절과 고통은 그녀의 가슴에 파고들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사연을 들으며, 냉혹하게 돌아섰던 그녀의 남편을 생각했다. 무엇이 순박하고 정이 많았던 그 사람을 그토록 냉혹하게 바꾸어 놓았을까? 처자식을 사랑하는 인간의 본능마저 망각한 채 그렇게 변했을까? 동료 선원들이 다 돌아온 길을 마다하고 북쪽에 머물러 천륜을 저버린 그 사람의 숨겨진 사연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날마다 뒷동산에 올라 비안도 앞 검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저 바다가 없었다면 내 가슴에 고통과 슬픔이 없었을 것을!”
라며 바다를 원망하는 그녀의 모습이 오늘도 내 눈에 보이는 듯 가물가물 떠오른다.
*중선: 10-15인의 선원이 승선하여 조업할 수 있는 중 대형 어선
(2008. 3. 5.)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김병규
큰형님의 일주기에 참석했다. 형님이 떠나신 빈 자리는 조카들 7남매가 채우고 있었다. 추도식을 마친 다음 날, 우리 집안의 관례에 따라 마을 사람들을 초청했다. 사람들은 고인의 유덕(遺德)을 기리며 고인의 지난 날 행적을 이야기하였다.나 역시 형님의 지난날들이 어제련 듯 떠올랐다.
6.25 혼란기에 반동으로 몰려 포승줄로 묶여 가서 고초를 겪었고, 그 뒤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살아나신 형님이었다. 당시에 사람들은 형님이 천명을 타고 나서 생명을 유지했다고 말했다. 수복과 더불어 면서기로 출발하여 면장이 되기까지 지역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셨다. 어렵던 고비를 넘기면서도 건재하던 형님이 한 줌의 재가 되어 하늘로 가시고 일주기를 맞았다. 형님을 기리는 사람들의 애정이 지금도 식지 않아 나는 고맙고 감사했다. 그런데 말문을 닫은 채, 음식도 드는 둥 마는 둥 하며 풀이 죽은 여인이 있었다. 비안도(飛雁島)에서 반 세기 전에 우리 마을로 시집 온 여인이었다.
“여보, 비안도 섬색시! 활달하던 섬 처녀의 기상을 어디다 감추고 그렇게 풀이 죽었소? 고희를 넘긴 할망구가 되더니 늦게야 철이 들었소?”
나와는 동갑내기로 허물 없이 지내던 처지라 농담삼아 물었다. 그녀는 반응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비안도는, 내 고향 마을 뒷 동산과 마주 보는 고군산 군도의 최 남단 섬이다. 기러기가 날개를 펴고 비상할 자세로 앉아 있는 섬이다. 청명한 날이면 사람들의 동태를 확인할 수 있도록 가깝다. 그녀는 온통 바다로 막힌 답답한 섬에서 벗어나고 싶어 바라보이는 육지를 한 없이 동경했을 것이다. 그녀의 간절한 소망이 현실로 되어 우리 마을로 시집을 오게 되었다.
그녀와 나의 만남은, 내가 군 복무를 마치고 귀향한 48년 전이었다. 결혼 1년 된 그녀는, 티없이 곱게 자란 섬 여인의 자연미가 풍겼다. 오월의 단비에 젖은 떡갈나무만큼이나 풋풋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의 5년 연상인 이웃 집 형이 그녀의 남편이고 그녀와 내가 동갑내라는 인연으로 친숙한 사이가 되었다. 때로는 그녀의 남편과 셋이서 어울리기도 하고, 허물 없는 처지가 되어 그녀와 나는 오누이처럼 가깝게 지내는 처지였다.
그녀의 남편이 군산에 있는 중선에 취업이 되었다. 건강하고 심성이 고운 사람이어서 선주의 신임을 받아 숙련된 일등 선원이 되었다. 수입도 넉넉하여 단란한 가정은 날로 살림살이가 불어났다. 연평도 근해로 조업을 나길 때는 집에 들르는 기회가 드물었으나 그들 부부는 3남매의 자녀도 두게 되었다. 나와 처음 만났을 때 청순했던 새댁은, 어느새 남편의 애틋한 사랑을 받고 자식 3남매를 기르는 현모양처가 되어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행복하던 그 가정에 불행의 마수(魔手)가 밀려왔다.
연평도에 조기잡이를 나갔던 그녀의 남편이 납북(拉北)되었다는 비보가 악귀처럼 날아들었다. 행복이 넘쳤던 가정이 한 순간에 무너졌다. 동승했던 선원들이 하나하나 돌아올 때 마다 그녀의 가슴은 숫검댕이가 되었다. 선원들이 모두 돌아왔으나 그녀의 남편을 돌아올 줄 몰랐다. 돌아오기는 커녕 가슴을 후비는 불길한 말만 그녀를 괴롭혔다. 당시 겁에 질려 바다에 뛰어내려 죽었다는 말이 들렸다. 북녘에 포섭되어 간첩으로 활동한다는 소리도 들렸다. 수사기관에서 그 집 주변을 감시한다는 말도 들렸으나, 그가 간첩이 되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불행이란 놈이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자 세 남매를 부등켜 안고 몸부림치며 긴 세월을 눈물로 보냈다.
영문도 모르고 그녀가 찾아간 곳은,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였다. 꿈에 그리던 남편을 40년 만에 만났다. 목메어 그리던 남편을 만났으니 꿈만 같았을 것이다. 말문이 막혀 ‘여보’라 불러보지도 못했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러 내렸다. 그런데 어쩌랴! 정겹고 다정했던 남편은 옛날의 그 남편이 아니었다. 순박하던 남편은 어디로 떠나고 몰라보게 변해버린 냉혹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북조선에서 하늘같은 000동지의 음덕으로 새 사람을 만나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나를 잊으시오!”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서는 남편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땅도 하늘도 온통 캄캄한 지옥이었다고 했다.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을 느끼며 돌아서는 그녀의 절규 한마디,
“차라리 만나지나 말았으면, 처음 만났던 옛 추억이나 가슴에 담고 그 그리움을 벗하여 평생 살 것을!”
좌절과 고통은 그녀의 가슴에 파고들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사연을 들으며, 냉혹하게 돌아섰던 그녀의 남편을 생각했다. 무엇이 순박하고 정이 많았던 그 사람을 그토록 냉혹하게 바꾸어 놓았을까? 처자식을 사랑하는 인간의 본능마저 망각한 채 그렇게 변했을까? 동료 선원들이 다 돌아온 길을 마다하고 북쪽에 머물러 천륜을 저버린 그 사람의 숨겨진 사연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날마다 뒷동산에 올라 비안도 앞 검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저 바다가 없었다면 내 가슴에 고통과 슬픔이 없었을 것을!”
라며 바다를 원망하는 그녀의 모습이 오늘도 내 눈에 보이는 듯 가물가물 떠오른다.
*중선: 10-15인의 선원이 승선하여 조업할 수 있는 중 대형 어선
(2008.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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