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빈자리

2008.03.11 18:39

윤상기 조회 수:715 추천:2

친구의 빈자리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윤상기


겨울에 부는 골목바람은 모질고 사납다. 매서운 칼바람에 나뭇잎이 파르르 몸을 떨며 길 위에 떨어지고 있다. 우리의 인생도 저 몰아치는 바람과 같은 굴곡의 여정을 지난 삶이다. 여기저기로 날리는 나뭇잎을 보고 인생의 허무와 우수를 느낀다. 돌아보니 우리의 인생은 서커스단원이 외줄에 올라서서 아슬아슬한 묘기를 부리는 곡예사처럼 산 삶이다.

일 년 전 일이다. 평소에 건장한 체격에 호탕한 성격으로 말술을 즐기던 친구의 병문안을 갔다. 친구는 대학병원 창가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간호하는 사람도 없는 병원 특실이 썰렁하게 느껴졌다. 친구는 위암으로 서울 종합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병이 재발하여 입원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몹시도 반가워했다.
“친구, 찾아주어서 고맙네, 얼마동안 치료 받으면 다 나아서 친구와 같이 산에 갈 수 있을 거야!”
그는 아직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병에 대해서 심각성을 잘 모르고 있었다. 이미 암세포가 전신에 번져 죽음에 직면해 있다는 현실을…….

그는 첩첩산중 두메산골에서 태어나서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었다. 나는 그 친구를 볼 때마다 깊은 산중에 있는 소나무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만고풍상萬古風霜을 견디며 우뚝 선 소나무처럼 말이다. 그는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 속에서 어렵게 공부하여 공무원으로 자수성가한 우리 친구들의 우상이었다. 친구는 오로지 승진을 위하여 자기 자신과 싸우며 암벽에 매달린 소나무처럼 살았다. 돌 한 조각만 떨어져 나가면 뿌리째 뽑혀 수십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나무처럼 말이다. 모두들 관운이 좋아 출세했다고 말했지만 그는 곡마단에서 줄을 타는 곡예사만큼이나 고단한 삶을 살았으리라.

절벽의 소나무는 바위틈에다 뿌리를 박고 목숨을 이어간다. 심술 사나운 바람이 계곡을 휘 몰아쳐 오다가 나무를 흔드는 것은 바람의 장난일지 모르지만 소나무에게는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절대 절명의 순간이다. 그러나 사무관과 서기관 승진을 거치면서 엄청난 스트레스와 일에 대한 중압감으로 건강이 상하는지도 모르고 살았다고 했다. 모진 풍파에 시달리다 지친 친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솔방울 같은 처와 아이들을 남겨두고 하늘나라로 갔다. 그의 삶은 묵직한 소나무처럼 살아왔건만, 서있던 빈자리에는 떨어진 솔가루만 수북이 쌓여 있었다. 우직하게 한길만 걸어간 그 길에 쌓아 놓은 노적가리도 화려한 명예도 보이질 않았다.

행운유수行雲流水처럼 훌쩍 지나가버린 세월들이 한숨으로 변하여 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느낌이다. 그동안 나의 삶은 무엇을 위해 살아왔고 무엇을 이루었는가? 내 인생도 친구의 생과 다르지 않았다. 맨손으로 출발하여 유를 창조하려는 나의 도전은 너무 거세고 거친 세상과 싸워야 했다. 숨 막히는 경쟁과 어두움의 질곡에서 경주마처럼 한없이 달려왔다. 때로는 좌절과 상처의 아픔으로 방황하며 쓴 소주잔을 기울이고 슬피 울었던 적도 얼마나 많았던가? 봄을 맞이하려고 차가운 얼음장 밑에서 새순을 내미는 인동초처럼 끈질긴 생명력으로 생을 이어 왔다. 인생의 모든 아픔과 상처를 치유해 주는 약은 흐르는 세월이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를 생각하며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사무실 한구석에서 어정거리고 있다. 지나간 추억 속의 삶의 여정들이 활동사진처럼 스크린에 비춰지다가 사라지곤 한다.

이제까지 쌓아놓은 내 삶의 모래성들이 슬그머니 주저앉아 버리고 머지않아 내 발자국도 이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단지 내가 뿌려놓은 씨앗들이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열매들을 주렁주렁 달게 될 것이다. 치열한 나의 삶들도 차츰 내 기억에서 하나둘씩 지워지리라. 한 시간 전에 썼던 물건을 허둥지둥 찾기 일쑤고, 방금 읽었던 양서의 내용도 뒤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이러한 자아自我의 상실은 허탈감으로 내 자신을 무너뜨린다. 이는 거절할 수 없는 우리 삶의 이치이며 순리이다. 산자와 죽은 자의 삶이 백지 한 장으로 가린 것처럼 느껴지는 오늘 하루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는 평생을 외줄에 올라서서 춤추는 곡예사처럼 살다가 빈자리만 남겨 두고 갔다. 인생이란 여름날 밤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처럼 세상 속에서 슬그머니 사라지는 존재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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